한미 간 방위비 분담 협상이 조만간 타결될 것으로 보인다. 항간에는 그 타결이 미국의 50억 달러 증액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겠지만 다른 형태로 사실상 미국 측 요구를 상당부분 들어주는 쪽으로 ‘밀약’이 이뤄졌다는 풍문들이 나돈다.

한일 군사비밀보호협정(GSOMIA) 등과의 협상연계 전략이나 미국의 ‘준비태세’ 신설 요구가 그런 관측을 낳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만일 ‘준비태세’ 신설 요구가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여져 한국이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 나아가 세계패권전략을 수행하는 비용까지 분담하는 상황이 된다면 한국은 미국의 대중국 전초기지임을 자인하는 꼴이 될 수 있다.

이럴 경우 중국 측 반발로 인한 엄청난 안보·경제적 부담을 자초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먼저 과도한 증액에 반대하는 국민의 의견수렴절차를 거치고, 필요하면 조기 타결 포기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박기학 평화통일연구소장은 주장한다. 보다 나은 협상을 위해 박 소장의 조언을 들어본다. [편집자]


‘준비태세’ 항목 수용은 졸속 타결

지난해 9월 처음 시작된 제11차 방위비분담 특별협정 협상이 막바지에 다다른 것 같다. 한미 두 나라가 접점을 찾아가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있는 가운데 이르면 2월에 예정된 7차 회의, 늦어도 3월의 8차 회의에서 어떻게든 타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여전히 미국이 ‘준비태세’ 신설이나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 증액 요구를 포기하지 않아 졸속 타결의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와 관련해서는 국방예산 증가율(7.4%)과 비슷한 수준으로 인상될 것으로 언론들은 내다본다. 만약 7.4%(금액으론 769억원) 인상된다면 남북관계가 최악이었던 이명박 정부 때의 2.5%(185억원)나 박근혜 정부 때의 5.8%(505억원)와 비교해도 훨씬 높다. 그렇게 된다면 굴욕적인 협상 결과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미국의 ‘준비태세’(readiness) 항목 신설 요구도 한국이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많다. 이는 철저히 따져봐야 할 중대한 문제다. ‘준비태세’가 부분적으로라도 수용된다면 이제까지의 방위비분담 특별협정의 틀을 무너뜨리는 결과가 돼 앞으로 분담금이 계속 증액될 수 있는 길을 터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준비태세’를 받아들일 경우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과 세계패권전략 수행에 대한 한국 측 비용 분담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고, 결국 미국의 대중국 패권전략에 편입되는 길을 열어 주게 될 것이라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부당한 요구에 강한 결기 보였어야

미국은 처음 협상이 시작된 지난해 924일 훨씬 이전부터 볼턴을 한국에 보내는 등 한국에 50억 달러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처음부터 ‘불가’ 입장을 명확히 천명하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미국이 50억 달러 요구를 계속 고집하면 협상에 응할 수 없다는 ‘레드 카드’까지 꺼낼 결의를 내보일 필요도 있지 않았을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50억 달러는 2019년 방위비 분담금 1조389억원의 거의 6배가 되는 금액이다. 또 주한미군 총주둔비 34억5000만 달러(2019년)를 훨씬 상회하는 금액이다.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명확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시카고 국제문제위원회(CCGA)의 칼 프리드호프 연구원이 이와 관련해 “만약 요청이 받아들여진다고 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과 국방부가 그걸 어떻게 쓸 수 있을지 명확한 방법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월스트리트저널, 2020년 1월 7일자)

트럼프 대통령이 50억 달러 요구를 별다른 근거 없이 제시하는 바람에 국무부와 국방부 관리들이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CNN 보도(CBS노컷뉴스, 2019년 11월 15일자)도 있었다. 미 국무부와 국방부 당국자들조차 50억 달러로의 증액이 무리한 요구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얘기다. 방위비 분담금 50억 달러 요구가 한미 관계와 인도·태평양에서 미국의 위상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 의회와 언론, 연구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임이 분명해 보인다. 통일연구원의 조사(2019년 9~10월 대면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96%가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반대했다.

이처럼 50억 달러 요구가 터무니없다는 게 나라 안팎으로 널리 공감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불가’ 입장을 명확히 천명하고 이를 철회하지 않으면 협상에 임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면 우리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연계전략’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으며, 트럼프 정부에 끌려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들이 많다.

한국, ‘합리·공정’ 모호한 원칙만 반복

하지만 정부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담을 한다’는 모호한 원칙만 되뇌고 심지어는 미국이 50억 달러를 요구한다는 사실 자체도 부인하거나 확인하기를 거부하였다. 지난해 7월 24일 존 볼턴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청와대를 방문해 47억 달러의 청구서를 내밀었을 때도 정부는 “볼턴 보좌관이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라는 취지로 언급했다”면서도 “정확한 수치나 액수를 거론했는지는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지난해 9월 26일 1차 방위비분담 협상 결과 브리핑 때는 “동맹으로서의 상호 존중 및 신뢰를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공평한 분담을 위한 협의를 지속하기로 했다”(외교부 브리핑)고만 밝혔다.

정부가 50억 달러 요구에 대해서 분명하게 ‘불가’ 입장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문재인 정부가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주눅 들어 있다는 세간의 평들이 근거 없는 게 아니라는 방증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방위비분담금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남북관계나 북미관계에서 미국의 협조를 얻어 보려는 정부의 의도가 작용한 결과라는 추측들을 낳았다. 볼턴 전 보좌관이 청와대를 다녀간 뒤의 청와대 반응과 관련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나 한일 갈등 국면에서 미국의 역할을 기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 입장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정부 내에 있다”는 언론 보도(연합뉴스 2019년 7월 25일)가 있었다.

청와대는 또 미국의 호르무즈해협 파병 요구를 수용하기로 방침을 정하면서 그 이유로 “북미 비핵화 협상이 조기에 재개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실질적 진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주변국들과 협력을 계속해 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한겨레 2019년 12월 13일)

하지만 북미 간 교착상태는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단계적·동시병행적 이행 원칙을 지키지 않고 북한에 포괄적 합의(사실상의 선 비핵화)를 강요하면서 대북 제재를 고수하는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다. 따라서 교착상태를 풀려면 트럼프 대통령이 단계적·동시병행적 원칙을 지키도록 설득하는 한국의 적극적 역할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미국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미국이 북미관계에서 한국의 입장을 배려해주도록 유도하겠다는 자세는 한국 스스로의 적극적 역할을 포기하고 미국에 기대는 태도라는 점에서 잘못이라는 지적들이 적지 않았다.

미국, 한국을 ‘봉’으로 보며 고압적

한국의 비주체적 태도는 한국을 ‘봉’으로 여기는 미국의 뒤틀린 입장을 강화시켜 줄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터무니없이 50억 달러를 요구하는 등 강압적 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국을 ‘봉’으로, 종속국으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세간의 평들에 힘을 실어 준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압적인 태도는 “(뉴욕) 브루클린의 임대아파트에서 114달러 13센트를 받아내는 것보다 한국에서 (방위비 분담금으로) 10억 달러를 받아내는 게 더 쉬웠다”고 말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방위비분담 협상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폭주를 제어하고 우리 주권과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방위분담금 50억 달러는 불가하다’, ‘이를 철회하지 않으면 협상에 응할 수 없다’고 당당히 얘기하는 좀 더 주체적인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호르무즈, 오염 정화비, 지소미아
이것들을 분담금과 묶다가 자충수

정부는 미국의 50억 달러 요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방위비분담 협상을 미국 무기추가 도입, 미군기지 환경오염 정화의 미국 책임 면제, 호르무즈해협 파병,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 등과 연계하는 전략을 폈다.

그러나 미국의 50억 달러 요구는 그 자체가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전면 거부해야 할 사안이지 다른 부담으로 상쇄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 점에서 연계전략은 우리가 질 필요가 없고 져서도 안 될 부담을 우리 스스로 떠맡은 꼴이 됐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미국의 50억 달러 요구를 정당화시켜 준 셈이 됐다.

한국의 호르무즈해협 파병 결정은 그 명분이 ‘우리 국민의 안전과 선박의 자유항행’이었다. 파병 명분 측면에서 보면 이 결정은 호르무즈해협에서 한국의 석유수송로를 지킨다는 미국의 허구적 주장, 즉 미군의 호르무즈해협 항행자유 작전이 한국 방어에 기여한다는 미국의 허구적 주장을 수용한 꼴이 됐다.

이로써 앞으로 한국은 미국이 남중국해에서도 항행자유 작전을 내세우며 한국의 석유수송로를 보호하고 한국 방어에 기여한다는 허구적 주장을 내세우더라도 그것을 거부할 명분이 없게 되었다.

남중국해 파병안도 수용할 건가?

남중국해에 그런 식으로 한국군 파병이 이뤄질 경우 한중 관계는 파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호르무즈해협 파병 결정은 바로 그런 점에서 미국의 패권전략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자 대중국 견제전략인 인도·태평양전략에 한국이 편입될 길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방위비 분담금에 대한 요구를 누그러뜨리는 차원에서 트럼프 정부를 향해 향후 3년간(2020~22년) 12조 원이 넘는 미국 무기 구매를 약속했다. 그러나 “(한국의 미국 무기 구입이) 방위 분담 맥락에서 중요하게 고려할 부분이지만 이는 우리가 고려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2019년 12월 18일 기자간담회)일 뿐이라는 드하트 미국 협상 대표의 말에서 보듯, 미국이 한국의 미국 무기의 추가 구입 약속을 반기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방위비분담금 곧 주한미군 주둔경비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철회하거나 늦추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의 미국 무기 도입은 한미동맹과 그에 의해 정해지는 대북 군사전략에 따라서 결정될 문제이다. 또 한국의 추가 도입은 미국 군산복합체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한미군의 운영유지비가 경감되는 것도 아니다. 방위비분담과 미국 무기 추가 도입을 연계하는 것은 미국 무기는 무기대로 사 주고 주한미군의 주둔경비는 그것대로 증액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는 자충수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12월 11일 원주의 캠프 롱과 캠프 이글, 동두천의 캠프 호비, 부평의 캠프 마켓 4곳의 환수를 결정했다. 정부는 이 4곳의 환경정화비용을 한국이 부담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그것이 미국의 50억 달러 요구를 완화하는데 기여하기를 바란 듯하다.

그러나 드하트 대표는 “환경오염 정화 문제는 방위비분담과 무관한 문제”라고 말함으로써 한국의 미군기지 오염 정화비용 부담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자세를 드러냈다. 미군기지 4곳의 환경오염 정화비용(1100억원)을 한국이 부담하기로 한 것은 반환이 예정된 22곳의 1조원을 훨씬 넘는 환경오염 정화비용에 대한 미국의 책임에 면죄부를 주고 우리가 그 비용을 떠맡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이 또한 자충수다.

우리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지소미아의 종료 결정을 철회하도록 강요하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준 것도 한일 관계에서 한국의 입지를 좁히는 것이자 방위비분담 협상에서 한국의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으로 한·미·일 미사일방어망(MD) 구축이 차질을 빚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미국으로선 그런 우려를 씻을 수 있게 됐고, 그 덕에 방위비분담 협상 테이블에서 한국을 더욱 마음 놓고 압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준비태세’ 요구, 아무 근거도 없다

드하트 미국 대표는 민홍철 의원과의 면담에서 “미군은 호르무즈해협부터 말라카해협까지 광범위한 활동을 하는데 그것이 다 한국의 이익에 부합된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방위비 분담금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계산법, 그리고 창의적인 해법'을 전했다고 한다. (UPI뉴스, 2019년 11월 21일자) 트럼프의 ‘새로운 시각과 계산법’이란 주한미군 경비에 한정돼 온 기존 방위비분담 개념을 배척하고 방위비분담 범위를 미국이 중국이나 이란 등을 상대로 펼치는 군사작전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한국 영역 바깥에서 이뤄지는 미군의 역외활동, 예컨대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자유 작전이나 호르무즈해협에서의 작전도 넓은 의미에서 한국 방어에 기여하기 때문에 이런 역외에서의 미군활동 비용도 한국이 분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방위비분담 특별협정은 주한미군 경비에 한정되고 그 구성항목도 한국인 노동자 인건비,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로 한정되어 있다. 역외에서의 미군활동 비용은 애초에 방위비분담 특별협정에 낄 수 없고 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를 뻔히 알고 있는 미국은 ‘준비태세’란 항목을 별도로 신설하여 주한미군 주둔경비에 포함되지 않는 역외에서의 미군활동 비용을 전부 여기에 포함시키자고 한국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창의적인 해법’이란 곧 ‘준비태세’ 항목의 신설을 가리킨다.

그러나 ‘준비태세’는 주한미군 주둔경비(인건비 제외)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방위비분담 특별협정에 위배되며 그 자체가 불법이다. 이 특별협정은 주한미군 지위협정(SOFA. ‘한미 소파’) 제5조에 근거하고 있고 제5조는 주한미군 경비의 분담원칙을 정하고 있다. 따라서 창의적 해법은 한미 소파가 개정되지 않는 이상 불법일 수밖에 없다.

또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한국 방어의무만을 규정하고 있고 한국의 미국 방어의무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호르무즈해협이나 남중국해에서의 미군의 군사활동 비용 분담을 한국에 요구하는 것은 그 법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우리 헌법에도 위배된다. 단지 비용이 증액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대상지역 국가들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고 우리에게 막대한 전략적 손실을 가져다 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창의적 해법’이라는 트럼프 궤변

트럼프의 ‘창의적 해법’은 한미 소파와 방위비분담 특별협정, 한미 상호방위조약 차원에서 볼 때 한마디로 억지 주장일 수 있고, 수용될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 정부도 방위비분담 특별협정 틀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협상 원칙을 정해 놓고 있다. 미국은 ‘준비태세’를 신설하자는 ‘창의적 해법’을 한국 정부가 수용하지 않자 3차 회의(11월 19일) 도중에 회의장을 나가버리는 강수를 두었다. 그 직후 드하트 대표는 “상호 수용 가능한 합의를 위해 양측이 협력할 수 있는 새 제안을 (한국이) 내놔라”는 일방적 성명을 발표했다. 이거야말로 적반하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준비태세’ 신설 요구가 방위비분담 특별협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먼저 회의 중단을 선언해야 할 쪽은 한국이었다.

미국이 터무니없이 50억 달러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방위비분담 특별협정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에서 협상을 중단하는 것은 명분도 있고 우리 국민의 지지도 받을 수 있었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도 미국이 방위비분담 특별협정을 부정하고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과 세계패권전략 수행비용의 분담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주권과 국익을 지키는 길은 협상 중단을 선언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며 그것을 촉구한 바 있다. 적어도 미국이 3차 회의 결렬을 선언한 시점에서라도 한국은 더 이상 회의를 계속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은보 한국 대표는 “미국 측의 전체적인 제안과 저희가 임하고자 하는 원칙적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호 간에 수용 가능한 분담이 이뤄질 수 있도록 (……) 노력하겠다”(2019년 11월 19일)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함으로써 사실상 드하트 대표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방위비분담 특별협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미국의 입장과 그 틀을 유지해야 한다는 한국의 입장은 절충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상호 간에 수용 가능한 분담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겠다’는 정은보 대표의 발언은 방위비분담 특별협정 틀을 유지한다는 한국의 협상 원칙을 사실상 저버린 것이다.

이런 협상 원칙의 사실상의 포기가 11차 방위비분담 특별협정 협상에서 한국을 수세적 처지에 빠트렸을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이에 앞서 10차 협상 때도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작전지원’ 항목 신설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막판에 항목 신설은 않되 군수지원비에 전기‧가스‧ 상하수도 공공요금과 저장‧위생‧목욕‧세탁‧폐기물처리 용역을 포함시킨 전례가 있다.

이번 11차 특별협정 협상에서도 ‘준비태세’ 항목을 신설하지는 않더라도 군사건설비나 군수지원비에 소항목으로 ‘준비태세’를 포함시키는 꼼수를 쓸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국민의견 듣고, 필요 땐 협상 중단을

11차 협상에서 졸속적이고 굴욕적인 타결이 예견되는 것은, 이제까지의 우리 정부 자세로 볼 때 우리 국민을 희생양 삼아 자신의 미국 대선 승리를 위한 자료로 삼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을 거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눈치를 보는데 급급하면서 시종일관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이 협상이 그런 식으로 계속되지 않도록 해야 할 문재인 정부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미국 측 강압에 대등한 자세로 당당하게 맞서기보다는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또 굴종 쪽을 택한다면 장기적으로 두고두고 큰 손실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강자와의 협상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때로는 융통성 없는 원칙 고수가 사태를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제까지의 한미 간 방위비분담 협상 역사로 보건대, 당장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졸속적이고 굴욕적인 협상 타결이 언제나 한국의 장기적 손해와 입지 축소로 귀결됐다는 점에서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원칙들은 지켜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2월 중에 예정된 7차 회의를 뒤로 미루고, 한미 간에 타결하려 하는 협상안에 대해서 국회, 시민사회단체, 전문가 등의 국민의견 수렴과정을 거치는 것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울러 지금 타결될 경우 졸속을 면하기 어려워 보이는 협상 중단을 일단 선언하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하지 않을까. 설사 방위비 분담금이 10% 안쪽으로 오른다 해도 그것은 역대 정권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률 및 인상 금액과 비교하면 결코 소폭 인상으로 볼 수 없다.

더구나 ‘준비태세’ 신설 요구가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여져 한국이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 나아가 세계패권전략의 수행비용까지 분담하는 상황이 된다면 한국은 미국의 대중국 전초기지임을 자인하는 꼴이 돼 중국의 반발로 인한 엄청난 안보·경제적 부담을 자초하게 될 공산이 크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그런 협상 결과를 우리 국민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박기학  평화평일연구소 소장


박기학 필자

2014년부터 평화통일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국방예산, 방위비 분담금, 남북 평화군축, 한미동맹, 한반도 비핵화 등에 관한 연구를 해왔다. 저서로 <트럼프 시대 방위비분담금 바로알기>, 공저로 <전쟁과 분단을 끝내는 한반도 평화협정> 등이 있다. ▲한국노총 조사부(1981~1987)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책실장(1994) ▲오마이뉴스 시민기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