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가 말하는 모습>

 

용기·균형감·비전 갖고 말해야

연원은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나는 눈치 보기 시작했다. 어지간하면 양보했다. 갖고 싶은 것을 가짐으로써 얻는 행복감보다 그것을 양보함으로써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만족감이 더 컸다. 갖고 싶은 걸 가짐으로써 누군가에게 미움 받는 게 두려웠다. 외할머니가 그러셨다. “왜 너는 됐다고만 하느냐”고. 나는 그게 편했다. ‘착한 아이’로 사는 게 안전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눈치 본다’는 것은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의 생각을 읽으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내 판단과 행동의 기준을 내가 아닌 남에 두는 것이다. 그래야 눈 밖에 나지 않으니까.

‘눈치 보기’는 필연적으로 스스로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해? 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야.’ 그럴 수밖에 없다. ‘착한 아이 코스프레’, 즉 눈치 보기는 자기보호 본능, 자아중심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고, ‘착한 아이’ 연기에 능하다는 것은 자기애 또한 강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착한 아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할수록 반발심은 커진다. 억압당하는 자기 욕구에 비례해서 말이다.

그 때문인지 겉으로 드러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에 저항하고 거스르고자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이력이 난 사람일수록 ‘저 사람이 말은 저렇게 해도 속마음은 이런 것이다’고 간파하는 걸 즐긴다. 나는 거수기, 들러리가 아니다, 나는 속지 않는다, 나는 영민하다는 걸 과시한다.

포용·관용을 불허했던 시대상황

시대상황까지 가세했다. 나의 중·고교, 대학 시절은 불의가 판치던 시대였다. 무조건 반대하고 저항하는 게 정의였다. 온순하고 말 잘 듣는 것 자체가 불의에 영합하는 일이었다. 포용과 관용은 변절을 의미했다. 말 잘 듣고 시키는 것 잘한다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자명한 것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 기존 권위를 긍정하지 않는 것, 모든 일에 의심을 품는 것이 올바른 사고방식이었다.

사람들의 대화에서 사실을 말하면 순진한 사람이 됐다. ‘그걸 너는 믿냐?’는 핀잔을 들었다. 한심한 사람,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받았다. 뒷담화가 좌중을 주도했다. 이면과 배후를 들추는 사람이 인기 있었다. 그런 사람이 지식인이었다. 지성인 대접을 받았다. 대안은 필요 없었다. 반대만 하면 됐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 잘하면 됐다. 그런 세월이 30년 가까이 지속됐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찌들은 의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남의 말의 허점, 약점, 단점을 잘 들춰내는 사람이 선수다.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아야 바보 취급 안 당한다. 불신이 방패다.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본다. 저의와 속셈을 예리하게 후벼 파야 똑똑한 사람이다. 독재는 종언을 고했지만 우리는 여전하다.

바꿀 수 있었다. 번거롭더라도 잘못 꿴 단추를 풀고 다시 꿰면 됐다. 과거사 정리가 그것이다. 지난 시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정리와 청산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도 터덕거리고 있다. 불의한 역사는 정리되지 못했다.

부정편향, 확증편향과 ‘한 몸’

부정편향은 인간 본성이다.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에 귀를 더 쫑긋 세우게 돼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최대한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좋은 정보보다는 나쁜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인다. 그래서 인간은 긍정 신호 보다는 부정 신호를 다섯 배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뉴스도 그렇지 않은가. 안 좋은 일을 우선적으로 보도한다. 상황이 악화될수록 뉴스 가치는 더 높아진다.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먹히기 때문이다. 괴담에 가까울수록 전파 속도는 빠르다.

부정편향은 확증편향으로 발전한다. 아니 이 둘은 한 몸뚱이다. 부정하고 반대하기 위해서는 나의 진지(陣地)와 진영(陣營)이 필요하다. 내 생각과 일치하는 내용으로 진지를 구축해야 하고, 내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과 진영을 짜야 한다. 내게 유리한 근거만 수용하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나와 반대되는 것들은 무시하고 폄하한다. 무시와 폄하가 통렬할수록 진영 사람들이 열광한다. 나도 통쾌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믿지도 않는다. 내 편, 네 편만 있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 있다. 대화와 타협은 변절과 야합이 된다. 내가 잘할 필요 없다. 상대를 잘 깎아내리기만 잘하면 된다. 비난, 야유, 저주만 잘하면 된다.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 결론이 나지 않는다. 건설적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미래가 없다.

진영을 벗어난 ‘모두’의 리더 돼야
막스 베버  ‘균형감=거리 두는 능력’

지금이야말로 리더가 필요하다. 자기 진영의 수장이 아닌 모두의 리더가 절실하다. 그런 리더의 말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

첫째, 진영을 떠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현실에 대한 직시와 솔직한 자기반성을 토대로 자신들이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말하고, 상대방이 잘한 것은 잘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자기 진영과 상대 진영 모두에게 ‘저 사람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공동체를 우선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 리더가 먼저 설득해야 할 대상은 자기 진영이다. 그리고 그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둘째, 개별 사안에 있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이 있어야 한다. 모든 사안은 보수와 진보, 명분과 실리, 현실과 이상 등 양극단이 있다. 어느 한 편에 서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양자택일은 쉽다. 그 사이 어디쯤 서야 할 곳을 찾고, 거기에 서는 게 어렵다.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열정, 책임감과 함께 말한 바로 그 균형감이 필요하다. 베버는 균형감을 ‘내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 즉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라 정의하면서, 이러한 거리감의 상실은 모든 정치가의 가장 큰 죄과 가운데 하나라고 일갈했다.

열정과 책임감을 갖기는 쉽다. 하지만 균형감을 갖추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균형감 없는 열정과 책임감은 맹목적 확신과 독선적 주장을 낳는다. 균형감은 중심을 잡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심의 이쪽과 저쪽을 모두 포섭해 결론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모든 가능성과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가 그 출발점이다. 예단하지 않고 열어놓고 수용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각각의 경우를 비교, 분석해야 한다. 각 경우의 강약점을 따져 장점으로 취할 수 있는 부분을 추출한다. 그런 후 장점과 장점을 연결하고 결합하여 절충안, 즉 균형점을 찾는다. 절충안이 만들어지면 그것으로 인해 손해 보거나 그것에 불만을 갖는 사람을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양보 또는 승복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대화하고 설득하고 타협하고 합의하는 역량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갈등을 조정하고 결론을 낼 수 있다.

셋째, 리더의 말에는 구성원이 희망과 자신감을 갖고 동참할 수 있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리더 자신부터 낙관주의자가 돼야 한다. 된다고 확신해도 될까 말까다.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안 없는 비판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낙관주의자는 ‘한계’가 없고 비관주의자는 ‘한 게’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막연한 낙천주의도 곤란하다. 근거 있는 낙관주의여야 한다. 무턱대고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게 아니라 이유와 근거를 갖고 낙관해야 한다. 희망의 증거를 말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IMF 경제위기 극복 과정에서 고 김대중 대통령이 보여준 리더십이 그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2년 안에 외채를 모두 갚고 IMF를 졸업하자는 그의 계획과 설득력 있는 논리는 국민으로 하여금 스스로 고통을 분담하고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눈치 보기에 능한 사람,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이 세 가지가 없다. 그래서 나는 리더 될 생각이 없다. 문제는 나와 비슷한데 리더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강원국/ 작가


강원국 필자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증권회사 홍보실, 대우그룹 회장비서실 등을 거쳐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로 8년간 일했다. 저서로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