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디지털재단의 고한석 이사장이 지난 주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 2020(CES 2020)에 다녀왔다. 서울시는 CES 2020의 스타트업 전문관인 ‘유레카 파크’에서 서울 지역의 스타트업 회사 20개와 함께 ‘서울관’을 개설하였다. 서울디지털재단은 서울시로부터 해당 사업을 위탁받아 기획부터 운영까지 총책임을 지고 진행하였다.

※관련 언론 보도: https://news.joins.com/article/23678216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쇼가 된 CES 2020를 취재·보도하기 위해 전 세계 많은 매체들이 앞 다퉈 현장으로 달려가 행사 전엔 올해의 트렌드, 행사 중간엔 현장 스케치, 행사 후엔 핵심 요약을 우후죽순처럼 보도했다.

이 글의 필자인 고한석 이사장은 “CES 2020에 대해서 비판적 성찰을 하는 것이 시간을 내어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그나마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돼 개인적인 단상을 썼다”고 말한다. CES 2020에 대해 핵심을 요약하는 방식이나 참여 업체들의 뛰어난 기술·제품을 소개하기보다 자신의 인사이트(insight)를 위주로 글을 썼다는 얘기다.  [편집자]

 

항공권 못 구할 만큼 한국인 북적

새해 1월 둘째 주,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하늘 길은 붐볐다. 직항(直航)은 물론 환승 항공권조차 구하기 쉽지 않았고 나보다 먼저 출발한 직원들은 로스앤젤레스(LA)에 내려서 버스를 5시간씩 타고 이동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미국 국내선으로 갈아타려고 입국심사를 하는데 입국심사관은 내가 세관신고서에 미국 내 숙소를 라스베이거스라고 적어놓은 걸 보고 바로 ‘CES?’라고 물을 정도였다.

라스베이거스 행(行) 항공편의 게이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중 한국인으로 보이는 탑승객도 적지 않았다. 카지노 도박으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로 가면서 어떤 이는 플라스틱 칩으로 신세를 고치려고 하고, 어떤 이는 실리콘 칩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시의적절하게도 “커런트 워”(The Current War: 전류 전쟁)이라는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전자제품 쇼를 보기 위해서 라스베이거스 행 비행기를 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이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 영화는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기 위한 선구자들 간의 투쟁을 다루었다. 직류 전기를 옹호하는 에디슨과 교류 전기를 옹호하는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투쟁에 테슬라라는 젊은이가 뛰어든다. 테슬라는 나중에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기공학자가 된다. 결국 승리는 테슬라의 것. 일론 머스크가 자신의 전기자동차 회사를 테슬라로 명명한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가솔린 자동차와 전기 자동차 사이의 투쟁에서 테슬라가 이길 것이라는 계시가 느껴졌다. 결국 전기는 단순히 일부 전기회사의 제품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기계에 힘을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었다.

모든 회사는 곧 테크 회사실감

사람들은 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땅에서 얻은 석유를 태워 발전기를 돌렸다. 데이터의 시대가 도래하였을 때 많은 이들이 “데이터는 21세기의 석유”라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우리는 현실에 퇴적된 데이터를 이용하여 인공지능(AI)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마치 전기가 모든 기계에 쓰이게 된 것처럼, 이제는 모든 기계에 인공지능이 쓰이는 시대가 되었다. 이번 CES에서 인공지능은 더 이상 몇몇 정보기술(IT) 업체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기업들이 자신의 제품 및 서비스에 사용하는 재료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컨설팅 회사인 액센츄어(Accenture) CEO인 줄리 스위트는 최근 포천 지(誌)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회사가 디지털 회사(Every company is digital company)”라며 “더 이상 디지털은 회사 내의 특정한 사업부서가 아니라 모든 사업부서의 일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오랫동안 실리콘 밸리에서 IT업계를 취재해온 손재권 더밀크(The Miilk) 대표는 더 이상 업종의 경계가 의미 없게 되어 “업계의 종말”이 왔다고 표현하였다. 모든 회사가 곧 테크 회사가 됐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디지털 및 인공지능과 더 이상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었다. 침대 회사는 ‘Sleep Tech’라는 주제 하에서 AI를 적용한 스마트 침대를 출품하였다. 화장품 회사 로레알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얼굴을 찍으면 AI를 이용하여 맞춤형 화장품을 만들어주는 휴대용 화장품 포뮬러(제조기)를 내놓았다. 그래서인지 CES를 ‘Consumer Everything Show’라고 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모기 잡는데 최첨단 기술 총동원

농기구 회사인 존디어는 GPS와 레이저, 컴퓨터 비전 등 각종 센서로 무장한 콤바인 농기계로 토양 상태를 측정하는 것부터 곡물을 심고 비료를 주고 수확하기까지 전 과정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사용자에게 제공한다. 머신러닝을 통해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비료나 농약을 투입할 수 있어 농사의 효율성을 높이고 생산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서울관의 스타트업 퍼핏(Perfit)은 작은 박스에 발을 집어넣으면 3D 스캐너로 발 모양을 파악하여 신발 메이커에게 전달하여 자신의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주문생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한 스타트업체는 날아다니는 모기를 적외선 레이저 포인터로 추적해서 모기를 잡기 편하게 해주는 제품을 3년 걸려 개발해서 내놓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무려 인공지능, 이미지 센싱, 적외선 레이저 기술이 총동원되었다.

정부 칸막이가 무슨 소용 있나?

기업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아직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는 그럴 때면 이렇게 답한다. “해당 기업이 IT기술로 사업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IT기업이 해당 사업을 한다고 생각하라. 그냥 당신네 회사 직원 전부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데 자신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각 부서 업무를 한다고 생각하라. 그렇다면 이를 정부조직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적용해보자. IT 조직이 정부를 운영한다고 생각하고, 공무원은 모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출신으로 이들이 편한 방식으로 업무방식을 재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업계의 구분조차 없어지는데 정부 부처 간의 칸막이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국회는 정부조직법을 유연하게 만들어주어서 기존의 부처 구분 대신에 복합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여러 부처 출신들이 모여서 융합형 조직을 필요에 따라 쉽게 만들고 해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현재 18부(部)로 구성된 행정부 조직은 사실 1960년대 이래로 거의 변한 것이 없다. 이름만 조금씩 바뀌었고 일부 기능을 여기에 붙였다 저기에 붙였다 했지만 외교부는 외교부요, 노동부는 노동부요, 산업부는 산업부다.

가전회사인 소니(Sony)가 승용차 내부를 만들고, 자동차 회사인 현대가 ‘Flying Car’를 만들고, 게임용 그래픽 카드 회사인 엔비디아가 자율주행차용 칩을 만드는 시대이다. 농촌에서 일하는 농업 노동자의 산재 예방 문제는 농림축산부 소관인가, 노동부 소관인가, 아니면 보건복지부 소관인가?

CES, 가전 아닌 車電 행사 변화
자기 머리 위 플라잉 카에 찬성?

CES 2020에서 전시된 기술들의 가장 큰 주제를 꼽으라면 크게 봐서 네 가지, ‘AI, mobility, 5G-connected, (TV) display’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모빌리티를 살펴보자. CES가 과거에는 가전 업체에서 시작해서 컴퓨터 관련 하드웨어 업체,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주종을 이루었다면 몇 년 전부터는 자동차 업체들이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CES가 가정용 전자제품 쇼(Consumer Electronics)의 머릿글자가 아니라 차량용 전자제품 쇼(車電: Car Electronic Show)의 머릿글자가 되었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현대차의 Flying Car(도심 항공 모빌리티 UAM: Urban Air Mobility)나 다른 회사들의 자율주행 전기차들은 사실 실제로 작동하는 완제품들이 아니라 개념만을 보여주는 콘셉트 모델들이었다. 과연 항공 모빌리티에 필요한 충분한 전력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최소한 100km를 이동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무겁지 않은 배터리를 개발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기술발전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도로에서든 주택에서든 머리 위로 헬리콥터 크기의 차량이 날아다니는 것을 안심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타고 다니는 사람은 낙하산을 항상 착용하고 타야 하나? 설사 차량에 낙하산을 장착한다고 해도 당신이 고층 아파트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창문으로 고장 난 Flying Car가 들이닥치는 사고가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지금도 소형 경비행기는 매우 많지만 도심 상공에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헬리콥터도 지극히 한정된 장소에서만 이착륙이 가능하다. Flying Car라고 다를까?

3년 전부터 CES를 장악했던 전기차와 자율주행기술은 여전히 현실과 이상 사이의 차이를 그다지 좁히지 못하고 있다. 자율주행기술 레벨은 향후 2년 내에 전체 5단계 중에서 필요시에만 인간이 개입하는 3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이다. 물론 결국에는 인간의 개입이 완전히 불필요한 5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문제일 것이다.

대화형 AI 플랫폼은 아직 미흡

AI 기술을 살펴보면 특정 미션을 수행하는 AI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지만, 알렉사나 구글 어시스턴트와 같은 대화형 AI 플랫폼은 아직도 이상-현실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2년 전에 등장해서 세상을 바꿀 것처럼 보였던 알렉사와 구글 어시스턴트는 사용가능한 명령의 종류가 10만 가지로 늘어났지만, 각각의 명령 자체는 여전히 간단한 지시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조금 복잡한 요구나 질문을 하면 그 맥락과 답안의 인과(因果) 관계에 대해서 전혀 거리가 먼 오류들을 자주 보여준다. 삼성전자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소위 ‘인공 인간’(artificial human) 네온은 표정이 생생하게 표현되었지만 역시 실시간 대화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동문서답을 하기가 일쑤였다.

이는 이미지 인식 기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카메라에 잡힌 사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지(認知)는 상당히 정확한 수준까지 이르렀지만 카메라에 잡힌 특정한 행위의 의도에 대한 파악 능력에서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 있다. 대화형 AI 플랫폼이 보여주는 일부 인간적인 반응으로 인해서 사용자들은 그것을 인간으로 간주하게 되고 인간 수준의 반응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들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대답을 하게 될 경우 사용자들은 오히려 실망감을 키우거나 그저 재미의 대상으로 다시 인식하게 된다.

디스플레이 역시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고(高)해상도 평판 디스플레이” 분야에서의 경쟁은 “高해상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디스플레이 해상도는 HD에서 FullHD로, 다시 UltraHD(=4K)를 거쳐서 8K까지 발전하였다. 디스플레이 패널 크기에 있어서는 삼성전자가 모듈형 마이크로LED 패널을 사용하여 전시장 벽 한쪽을 꽉 채우는 최대 292인치(7.4m)의 “더 월”(The Wall)을 선보이면서 관중들을 압도하였다. 축구 경기 화면에 등장하는 선수의 키는 그것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던 관중의 키와 같았다.

디스플레이 기술 싸움은 과시용?

하지만 여기까지다. 일반적인 가정용 TV의 크기는 집 구조상 65인치(1.6m)를 넘기 힘들다. 이 경우 사실 FHD 정도면 충분하다. UHD와의 차이는 육안으로 구별하기 힘든데 8K는 더더욱 구별하기 힘들다. 화면 대각선 길이가 2배로 늘어나면 면적은 4배로 늘어나고 가격은 8배 이상 높아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상도 경쟁은 기술자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는 사실 별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중국 업체가 결국 이 수준을 따라잡는 것(catch-up)은 시간문제이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어디에 있을까? 대형 마트에서 계산하기 위해 줄을 길게 서는 것을 보고 ‘줄을 길게 서는 것’, 즉 양적인 것이 문제라고 정의하면 POS 스캐너, 자율계산대, 소량품목 계산대 등을 도입하게 된다. 반면에 아마존은 ‘계산하는 것’, 즉 질적인 게 문제라고 정의하였기 때문에 계산이 필요 없는 “아마존GO”라는 대안을 제시하였다.

디스플레이 업계의 돌파구는 바로 고해상도 “비(非)평판” 디스플레이에 있다. LG전자가 물결 모양으로 굽이치는 사이니지(signage), 그리고 화면이 돌돌 말렸다 펴지는 롤업·롤다운 TV를 내놓은 것도 이러한 모색의 일환이라고 보인다. 삼성과 모토롤라의 폴더블 폰은 물론 인텔과 레노보의 폴더블 랩톱 컴퓨터도 등장하였으며 중국의 로욜은 원통형의 OLED 디스플레이가 원통형으로 감싸진 스마트 스피커를 출시하였다. 모두 비평판 디스플레이였다.

또 다른 비평판 디스플레이의 사례인 3D TV는 5년 전 CES에서 미래 유망주로 각광받았지만 별도의 고글을 착용해야 했고 어지럼증을 유발한다고 해서 어느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일본의 소니는 더 이상 해상도 경쟁에 투자하지 않는 대신에 3D 디스플레이에서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 이번 CES 2020에서 보여준 ‘Eye-sensing Light Field Display’는 글라스나 고글을 쓰지 않고도 맨눈으로 자유로운 각도에서 고해상도의 3차원 입체영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AR+5G 성사 땐 경제효과 클 듯

테크 사우스 홀에 자리 잡은 VR 및 AR 업체들은 지난 2년과 비교할 때 참가·체험 규모가 뚜렷하게 대형화되었다고 평가받았다.

증강현실 AR은 최근 들어 혼합현실 MR(Mixed Reality)로 불리고 있으며 VR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실감형 콘텐츠를 통칭해 X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VR 콘텐츠는 엔터테인먼트 위주로 제작되고 있는데 시야를 완전히 덮는 고글을 써야 하고 VR 콘텐츠 내에서 미리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제약 사항이 많은 편이다. 반면에 AR 콘텐츠는 실제 시야를 확보할 수 있고 이동 범위에 지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제약이 적은 편이다. 비즈니스 및 산업용으로 주로 개발되고 발전할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된다.

                                                            <NReal>    

                                                             <Vuzix>

                                                         <Mojo Vision>

AR 글라스는 점차 경량화되어 현재는 일반 안경과 큰 차이가 없는 제품이 중국의 NReal사에서 출시되었고 Vuzix에서도 안경 형태의 글라스를 이번 전시회에 내놓았다. CES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Mojo Vision라는 업체에서는 2년 후 완성을 목표로 AR 콘택트 렌즈를 개발하고 있다. 한국인이 공동창업자인 Spatial이라는 업체는 AR 회의 기술을 선보였다. VR과 AR은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분리되어 다른 경로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5G 이동통신과 결합되면 AR은 매우 큰 경제적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모빌리티·커넥티드는 상극 될까?

마지막으로 5G-connected에 대해서 언급해보자. 5G 이동통신 서비스는 작년부터 17개국에 점진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기에 아직은 휴대폰과 PC용으로만 활용되는 현실이지만 급속도로 성숙되고 발전될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이번 CES보다는 매년 2월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이동통신 기술에 초점을 맞춰 열리는 전시회인 MWC(Mobile World Congress)에서 더 많은 기술과 제품들이 소개되리라 예상된다.

초고속, 초저지연, 초연결을 표방하는 5G는 자율주행자동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빌리티와 커넥티드는 서로에게 상극이 될 수도 있다. 과거에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거리(distance)의 소멸’이 유행어처럼 언급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반대로 오히려 사람들은 대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존까지의 온라인을 통해서 교환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그 전보다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인간의 풍부한 비언어적 정보 교류를 하기에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렇다고 비언어적 정보까지 교환하기 위해서 넓은 대역폭을 always-on으로 사용하기에는 통신비용이 너무 비쌌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자 및 음성 정보는 온라인을 통해서 교환하였지만 좀 더 풍부한 정보교환을 위해서는 직접 만나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빌리티 즉 이동수단이 필요했다.

현재 전 세계 인구 중 55%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데 30년 후에는 70% 이상이 도시에 살게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도시 규모로는 중소 도시가 아니라 각 대륙의 주요한 글로벌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럴 경우 모빌리티 수요도 폭증하게 되는데 결국 어떠한 이동수단을 사용하든, 도로 위든 공중이든 정체현상은 매우 심각해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굳이 조금 더 나은 모빌리티를 모색하기보다는 차라리 이동하지 않고서도 만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기술을 찾게 될 것이다. 이동통신 네트워크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비언어적 정보교류의 양이 실제로 대면접촉하는 것과 비슷해진다면 굳이 직접 만나기 위해서 이동할 필요가 줄어들 것이다. 5G와 AR의 결합이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LGU+가 AR 콘텐츠와 서비스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는 전략은 적절한 판단으로 보인다.

미국 경제학자인 리처드 볼드윈은 그의 저서 <그레이트 컨버전스>에서 물건의 이동비용이 하락하면서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 사이에 무역의 확대를 통한 제1차 세계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정보의 이동비용이 하락하면서 1990년대 이후에 글로벌 가치사슬의 형성을 통한 제2차 세계화가 일어났다고 분석하였다.

5G 발전 땐 서비스 노동시장 격변

이 기간에 자본과 제조업 노동의 국제적 재배치가 발생함에 따라 경제 성장률이 제1차 세계화에서는 서구가, 제2차 세계화에서는 아시아가 높아지게 되었으며 전 세계적 차원에서 제조업 노동이 동일노동-동일임금, 즉 중향 평준화로 수렴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됐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도 선진국 노동자들의 이에 대한 반발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향후 5G 기술의 발전으로 가상회의(Telepresense)와 원격로봇(Telerobotics)이 성숙하게 되면 사람들의 이동비용이 하락하게 되어 그동안 특정 국가 내에 묶여있던 서비스 노동 및 지식노동이 국경을 넘어서 제공될 것이며 이는 또 한 번의 노동시장 대변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제조업을 넘어서 서비스업까지 글로벌 가치사슬에 편입되는 것이다.

컴퓨터에 의한 인공지능이 충분히 성숙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큰 반면, 사람들이 원격에서 스킬을 제공하는 ‘원격지능’(remote intelligence)이 먼저 발전될 것이고 이에 따라 서비스 노동 시장에 큰 충격이 올 것이라는 게 볼드윈의 예측이다. 이는 현재 지방에서 개인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의사들이 원격의료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만 보아도 그 여파를 예상할 수 있다.

이번 CES에는 역대 가장 많은, 1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다녀갔다. 참가업체 수도 미국· 중국 다음으로 많았다. 외국 방문자 중에서는 중국인을 제외하면 아마도 한국인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잔치는 끝났고 막은 내렸다. 영화에서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곱씹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라스베이거스를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 접하게 된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에 대해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한 평가·분석의 시간을 이어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고한석 / 서울디지털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