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에서 올해 일어난 수많은 사건 중 첫손가락에 꼽힐 사건은 뭘까? 각자의 관점과 경험에 따라 다르겠지만 미중 무역전쟁 또는 홍콩 시위사태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중국의 굴기(崛起)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공세 때문이라면, 홍콩 시위사태는 중국공산당에 맞선 750만 홍콩인들의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 시위 사태는 시진핑(習近平) 체제의 강고함과 ‘미래 중국’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홍콩 시위사태에서 드러난 중국과 국제사회의 민낯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①권위주의 체제 과시 ②애국주의(중화민족주의) 심화 ③지역 패권과 실력 행사 ④국제사회의 침묵과 방관 등이다. 이런 특징들은 향후 한·중 관계를 흔드는 주요 변수가 될 수 있다. 구호와 행동이 다른 명실상이(名實相異) 시대에 디시전 메이커들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편집자] 중국은 2030년께 미국을 제치고 최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중국 지도부가 꿈꾸는 ‘중국몽(中國夢·중국의 꿈)’의 한 자락이 눈앞에 있다. 시진핑은 2013년 국가주석에 오른 뒤 헌법상 규정된 ‘3연임 금지 조항’을 폐지한 바 있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어렵사리 정착시킨 정치개혁 구도를 무너뜨린 것이다. 당·정·군 고위직의 연임 및 나이 제한, 집단지도체제, 후계구도 사전 예고, 당·정·기업 분리 등이 그것이다. 시 주석의 집권 기간은 2028년(3연임)을 넘어 2033년(4연임)까지 연장될 수 있다. 2030년, 중국은 어떤 모습? 2030년은 중국몽과 시진핑의 ‘장기집권 구상’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 무렵 중국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까? 지난 6월부터 치열하게 전개된 홍콩 시위 사태는 이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주었다. 먼저 우리의 대중(對中) 시각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보자. 한국인에게 중국은 변검(變臉)처럼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세대 간에 차이가 있고 이념 성향, 직업·직종, 교육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14억 중국의 진면목을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란 어려운 작업이다. 먼저 60∼70대는 한국전쟁을 겪거나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다. 중국이란 이름보다 ‘중공(중국공산당)’이 익숙하다. 중국은 북한의 혈맹이고 한때 우리와 총칼을 겨누었던 적국이었다. 경계해야 할 위험한 이웃이다. 그보다 젊은 50~60대는 ≪전환시대의 논리≫,≪8억인과의 대화≫를 읽고 마오쩌둥(毛澤東)에 심취한 그룹이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중국식 공산혁명을 대안으로 고민해본 흔적을 갖고 있다. 일종의 ‘이념적 낭만’으로 중국을 바라본다. 20~30대, 中‘근육질 외교’에 반감 나이·세대를 뛰어넘어 몸으로 직접 겪은 사람들도 많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가서 다년간 공부 또는 사업을 해봤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지켜보면서 상당수는 친중 시각을 갖게 됐지만 일부는 반감 내지 적대감을 드러낸다. 중국에서 빛과 어둠을 함께 본다. 최근 한 지인은 중국 보통사람들의 애국주의 정서를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인 며느리에게 ‘한국어를 좀 배우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시댁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말하더라.” 젊은 세대들은 민족·민주 프리즘을 통해 중국을 바라본다. 천안함 사건, 사드(THAAD) 사태를 거치며 중국의 속내를 들여다보게 된 그룹이다. 중국은 2010년께 일본을 제치고 2위 경제대국이 되자 동아시아에서 ‘근육질 외교’를 과시해왔다. 이 그룹은 반중 정서를 감추지 않고, 인터넷에서 한·중 설전을 벌이곤 한다. 중국의 민낯을 거론하기에 앞서 먼저 홍콩 시위사태를 복기해 보자. 홍콩에선 지난 24일 치러진 구의회(區議會) 선거를 고비로 대규모 시위가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구의회 선거 결과가 양측에 휴전(休戰)의 명분을 준 셈이다. 행정장관 직선제, ‘살아있는 불씨’ 홍콩의 범민주파는 4년 전 선거와 비교해 투표율이 47%에서 71%로 뜀박질했고, 전체 의석(452석) 중 85%(385석)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 사실에 고무된 표정이다. 범민주파는 내년 입법회(국회 격) 의원 선거, 2022년 행정장관 선거에서 또 다른 ‘선거혁명’을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친중파 정당, 홍콩 정부, 중국 지도부는 선거 의미를 깎아내린다. 친중파(親中派) 후보들이 유효 투표 가운데 41%의 지지율을 얻은 점을 부각시킨다. 범민주파 후보들의 지지율은 친중파보다 14%포인트 더 높은 55%(2014년엔 47%)였다. 베이징 쪽에선 친중파 정당의 몰락을 ‘폭력분자’와 ‘외부세력’ 때문이라고 매도한다. ‘행정장관 직선제’는 앞으로도 시위를 격발할 이슈다. 행정장관은 선거인단(1200명)의 간선(間選) 방식으로 선출되지만 중국 측이 겹겹이 안전장치를 깔아 놓았다. 선거인단 자체가 대부분 친중파 인사들로 구성되는 데다 출마 후보자는 ‘후보 추천위’에서 50%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여기에 ‘애국인사’라는 주관적 조건, 국무원 총리의 임명 절차 등이 더해진다. 형식만 선거일 뿐 사실상 임명이나 다름없다. 2014년 가을에도 79일간 행정장관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는 50만 시위, 즉 ‘우산혁명’이 격렬하게 전개됐지만 성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①권위주의 체제 과시 6월부터 시작된 홍콩 시위는 규모로나, 시간으로나, 방식으로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치열했다. 인구 750만 명의 도시에서 100만, 200만 인파가 모이고 시위 기간도 160일을 넘겼다. 시위 방식도 공항 점거, 지하철 운행 방해, 정부청사 포위, 화염병 투척, 대학 점거농성 등으로 아주 다양했다. 이에 맞서 홍콩 정부는 복면시위 금지조치를 비롯해 최루탄·실탄 발사, 시위대 무차별 연행, 농성장 포위·봉쇄 등으로 맞섰다. 부상자가 수백 명, 체포된 사람도 3000명을 넘었다. 중국 언론은 시위대를 일찌감치 ‘폭도’라고 규정하고 나섰다. 대화·설득의 상대가 아니라 진압·배제의 상대로 지목한 것이다. 시위 양상도, 진압 양상도 과격하게 변질돼 톈안먼(天安門) 사태와 같은 불행한 사건의 재발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중국 지도부는 시위대가 요구한 5개 항 가운데 ‘범죄인 인도법 철회’만 수용했을 뿐 나머지에 대해선 꿈쩍도 하지 않았다. 특히 이번 사태를 유발한 캐리 람 행정장관의 퇴진 요구를 묵살하듯 시진핑 주석은 지난 5일 상하이에서 그를 만나 힘을 실어줬다. “흔들림 없이 법에 따라 폭력 행위를 진압하고 처벌해야 한다.” 이에 앞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모인 4중전회(4차 중앙위 전체회의)에선 ‘홍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한다’고 결의했다. 홍콩 시위 사태 앞에서 14억 중국인들은 그야말로 일사불란한 대오를 유지했다. 당 지도부는 물론 관영 매체, 인터넷에서는 ‘폭도’, ‘외세’라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다. 중국이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약속한 ‘일국양제(一國兩制), 항인치항(港人治港), 고도자치(高度自治)’를 거론하거나 민주화 요구를 전하는 목소리는 전무했다. 엄격한 정보통제와 검열이 작동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홍콩 시위 현장에선 ‘백색 테러’로 의심되는 사건도 몇 차례나 일어났다. 중국 체제를 건드리는 외신 뉴스도 완벽하게 묵살됐다.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 일종의 ‘직업 훈련소’를 설치해 2017년까지 3년간 약 100만 명을 재교육했다”는 외신 보도는 찻잔 속의 물결이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라는 단체가 소수민족의 인권 탄압을 폭로하자 중국 측은 “중국의 발전을 방해하기 위해 비방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중국 대륙에선 이제 공산당 일당지배 위에 시진핑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 되는 2030년까지 이런 권력체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시 주석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주의 체제, 중국식 정치모델과 함께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서구민주주의 국가들이 고민해야 할 차례다. ②애국주의(중화민족주의) 심화 중국 정부는 홍콩 시위에 맞서서 애국주의를 적극 활용했다. 해외에선 국수주의, 중화(中華)민족주의라고 표현한다. 홍콩의 구의회 선거 뒤 미국 의회가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홍콩인권법안)’을 통과시키자 중국 정부는 강력 반발했다. “홍콩은 중국의 홍콩이며 홍콩 문제는 중국의 내정에 속한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에 이번 시위 사태는 ‘폭도들이 주도하고 외세가 개입해 빚어진 폭란’일 뿐이다. 당·정 지도부가 규정하면 일반 대중은 애국주의 정서로 소화한다. 중국인에게 홍콩은 19세기 아편전쟁, 20세기 서구 열강 침략이란 아픈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 만큼 국수주의의 내러티브가 강력하다. 이 감정은 영국, 일본, 미국을 상대로 할 때 극대화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8일 홍콩인권법안에 서명한 뒤 중국 측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기 위한 역사적 진전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홍콩 시위를 둘러싸고 한국의 대학 캠퍼스에선 충돌이 발생했다. 몇몇 대학의 학생들이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자보를 부착하자 중국인 유학생들이 이를 찢거나 떼어낸 것이다. 일부 유학생들은 한국 대학생의 이름·사진을 중국 인터넷상에 공개해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 대학생들에게 100원짜리, 500원짜리 동전을 던져 주는 모욕까지 가한 곳도 있다. 중국인들의 애국주의는 헌국뿐만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표출됐다. 화교(華僑)와 유학생, 관광객들이 앞장선다. 일본에선 신사(神祠)에 걸린 ‘홍콩 시위 지지’ 취지의 명패들이 훼손되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외국의 연예계 스타나 글로벌 기업들이 공격을 받은 사례도 수두룩했다. 2016년 사드 사태 당시 한국 기업들은 중국 대륙에서 애국주의라는 명분으로 호된 공격을 받았다. 중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도 과거사·영유권 문제로 인해 숱한 수모를 받아야 했다. 중국의 애국주의 열기는 자발적일 때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지지·지원을 받을 때도 있다. 애국주의·국수주의 물결 때문에 한·중·일 3국은 21세기 들어 곧잘 긴장 모드에 빠진다. 특히 중화민족주의는 거침없이, 빈번하게 분출되는 양상이다. 가까운 장래에 ‘반감-혐오-적대’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③지역패권과 실력 행사 홍콩 시위 막바지인 지난 17일 중국은 첫 번째 국산 항공모함을 대만해협으로 보냈다. 미국이 대만에 첨단무기를 판매하고 미·대만 군사협력을 강화하는데 대한 견제 조치였다. 쉽게 말해 중국의 최대 가상적이 미국·대만이라는 얘기를 한 것이다. 내년 1월 총통선거에서 ‘대만 독립론’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재선되는 걸 막기 위한 군사적 압박도 가미됐다. 중국은 그동안 홍콩·대만을 겨냥해 집요한 공작을 펼쳐왔다. 최근 호주에 망명을 신청한 중국의 첩보요원 왕리창(王立强)은 대만 선거에 대한 개입, 홍콩의 반중 세력 공격, 호주 내 스파이망 구축 등을 벌여왔다고 폭로했다. 또 다른 중국 망명자는 호주에서 활동하는 스파이가 1000명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한국이나 일본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외교관·특파원은 물론 상사 주재원, 유학생, 연구원 등의 다양한 신분으로 암약하고 있다. 한국에 배치된 첩보요원 숫자는 호주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중국 첩보 능력을 경계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중국은 한·일을 겨냥해 전투기·함정을 출격시키거나 군사력 과시를 망설이지 않는다. 중국의 경제력을 활용한 압박·회유도 일상화되고 있다. 미국프로농구(NBA) 총재가 홍콩 시위 지지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중국중앙방송(CCTV)은 NBA 경기 중계를 잠정 중단하고 후원 기업들은 관계를 끊었다. 중국의 영향력은 심지어 미 국무부가 후원하는 ‘미국의 소리(VOA)’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반체제 인사를 인터뷰했다는 이유로 언론인들이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④국제사회의 침묵과 방관 홍콩 시위 사태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중국의 국력과 위세다. 그 때문인지 미국·독일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곤 대다수 국가들이 공식 언급 자체를 피하는 이슈가 됐다. 시위 지지 의사를 밝힌 외국 기업·단체·개인에 대해 중국 측이 즉각적이고 강력하게 제재 의사를 드러낸 것도 작용했다. 국제사회의 침묵·방관은 홍콩 시위의 동력을 크게 떨어뜨린 변수 중 하나다. 이런 현상은 결국 국제사회의 세력 전이(power transition)를 말해준다. 새로운 패권국가로 부상하는 중국에 대해 ‘노(NO)’라고 말하는 나라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미국조차 ‘뜨거운 감자’를 다루듯 조심스럽다. 중국은 ‘세 가지 핵심이익(주권, 안보, 발전이익)’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면서 다른 나라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향후 홍콩의 위상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홍콩이 강점을 갖고 있는 금융·무역·관광·서비스 분야 가운데 일부는 중국의 다른 도시로 넘길 가능성이 크다. 무역 허브 기능은 이미 쇠락됐고 금융은 상하이, 서비스는 선전·광저우로 분산시킬 수 있다. 중국 경제의 뜀박질 때문에 홍콩 GDP(국내총생산)가 중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3%대로 떨어졌다. 1997년에 18%안팎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시진핑 체제가 홍콩을 상대로 보복을 할지, 회유를 할지 지켜볼 일이다.

이양수 /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