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체제는 무효화돼야 한다.”

오는 8~9일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제4차 국제회의’ 기획 및 준비 작업에 앞장서 온 김영호 동북아평화센터 이사장의 주장이다. 김 이사장은 “이번 회의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규정해 온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체제 해체를 촉구할 것”이라며, “향후 100년을 좌우할 ‘포스트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한국이 또다시 배제 당하게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경북대 교수, 산업자원부 장관 등을 역임한 김 이사장은 △지금의 한일 갈등의 뿌리인 1965년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체제의 산물이며, △미국이 작성한 그 강화조약 초안에서 한국은 원래 서명국(전승국)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독도도 일본이 한국에 반환(포기)해야 할 영토로 명기돼 있었다고 밝혔다.

일본과 영국의 거부로 막판에 한국이 서명국 명단에서 빠진 강화조약이 원래 초안대로 통과됐다면 한국은 대일 교전국으로 전쟁배상과 사죄를 받아냈을 것이며, 전후 한일관계와 한국 및 한반도 현대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미국과 일본, 중국, 캐나다, 호주 등의 역사・법학(국제법)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이번 회의는 2016년의 컬럼비아대, 2017년의 펜실베이니아대, 지난해의 중국 우한(武漢)대학에서 열린 3차례의 국제회의 성과를 토대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공과를 한층 더 선명하게 부각시킬 것으로 보인다.

김 이사장은 “남북한과 중국 등 주요 당사국들을 배제한 채 패전국이자 전범국 일본을 최대 수혜국으로 만든 미국 주도의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마땅히 무효화돼야 하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개헌작업까지 포함한 최근의 동아시아 정세 변동 속에 이미 무너지고 있다”면서, “정부 등 한국사회가 한반도 분단・대립과 한일갈등의 뿌리이기도 한 이 체제 이후를 위한 작업에 주도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한 시민혁명 차원의 한일 간 연대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며,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한 ‘과감한 돌파’도 주문했다. 인터뷰는 4일 한승동 메디치미디어 기획주간이 진행했다. [편집자]

 

한반도 비극의 출발점, 샌프란시스코조약

회의 준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8~9일 이틀 열리는데, 5개 세션이 준비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차질 없이 준비되고 있나?

“준비가 다 된 것 같다.”

모두 몇 분의 발표자와 토론자가 참석하나?

“외국에서 오신 분이 17명이다. 미국 4명. 일본 4명. 중국 6명. 캐나다 1명, 호주 1명이고, 한국에서 발표자가 4명, 토론자는 한국에서 전부 8명이다.”

김영호 선생님은 첫날 개회사를 하신다.

“개회사 및 환영인사를 하고 마지막에 종합 토론 라운드 테이블(사회자)을 맡기로 했다.”

회의 준비 과정에서 보니, 총지휘 하면서 준비하고 점검도 하시던데. 이 회의가 만들어지는 데는 선생님의 역할이 컸을 것 같다.

“총지휘자가 아니라 총청소부다. 하하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발표・토론자로 나서고 일본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 호주의 개번 매코맥 교수, 미국 코네티컷대학 알렉시스 더든 교수도 온다. 우한대의 후더쿤 교수, 캐나다에서 기미에 하라 워털루대 교수, 하와이대 백태웅 교수도. 원래 오기로 했다는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 지사는 불참하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가장 예외 지역이었다가 오히려 재(再)식민지가 된 곳이 오키나와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지사를 초청했는데 못 오게 됐다. 다만 내년에 오키나와에서 이 회의를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캐나다, 오키나와가 회의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 구도다. 하하하. 4차로 회의가 끝날 줄 알았는데 5차가 열릴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 체제 극복을 위한 국제 컨퍼런스’라는 명칭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이번 회의의 대(大)주제를 뭐라고 할 수 있을까.

“2차 대전 이후 한국의 운명이 결정된 회의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운명이 결정되는 회의에 한국은 참석도 못 했고, 한국 입장이 전혀 반영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전후 한반도 비극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가 지금과 같아지는 출발점이었다. 한미 관계가 규정된 것도 이 조약에 의해서다. 이 조약이 맺어진 것이 1952년(체결은 1951년 9월, 발효는 1952년 4월)이다. 6·25 한국전쟁 과정에 조약의 프로세스가 진행됐다. 그런 중요한 회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너무나 소외됐고, 한국 역시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응이 아주 소극적이었다.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에 관심도 없고 너무 소극적이다 보니 오늘날 같은 한국의 운명을 만들었다. 너무 안타깝다. 그런데 지금도 이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은 것 같다.”

이런 국제회의가 이미 3차례 열렸는데, 1차 회의가 언제 열렸나?

“2010년 ‘한일합방’ 100년 된 해에 한일 지식인 1000명의 공동선언을 기점으로 5년 동안 한일 문제, 특히 1965년 체제 극복에 초점을 모아 논의를 진행해 왔다. 그런데 논의를 하다 보니 문제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이 아니라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이 벽과의 싸움을 시작한 것이 2016년부터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첫 회의를 했고, 두 번째는 펜실베이니아대학, 세 번째는 중국 우한대학에서 했다. 이번 회의는 네 번째이지만 2010년부터 이 문제를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오고 있는 셈이다. 내년이면 10년이 된다.”

이번 4차 회의의 핵심 포인트는 무엇이고, 주목할 만한 발표와 의견은 뭐가 있나.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회의를 거듭할수록 부정적인 측면이 압도적이라는 게 드러나고 있다. 그나마 긍정적인 측면의 효과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체제 덕에) 동아시아의 경제 분야가 빠르게 성장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본래 목적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벌을 주고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화되고 한국에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공산국가와의 전쟁을 위한 태세 완비로 초점이 옮겨가 버렸다. 일본에 대한 전쟁범죄 추궁이 중단됐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 범죄’라는 개념 자체가 대단히 약했다. 미국도 하와이를 지배했고 멕시코로 부터 뉴멕시코 등의 지역을 빼앗았다. 제국주의나 식민지 범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성립 안 돼 있던 시기다. 한반도 식민지배의 비극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미국은 일본을 강하게 추궁하지 못했다. 일본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로비도 철저했지만, 미국 자체도 그런 식민지 범죄에 대한 인식이 약했기 때문에 일본의 로비에 쉽게 당했다. 또 미국은 과거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의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방조했다. 그런 인식의 일관성도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 로비, 영국 반대에 한국 ‘전승국’ 빠져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같은 ‘인도(人道)에 반한 죄’에 대한 추궁도 거의 없었다.

“식민지 범죄의 핵심을 덮었다는 것은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외에도 유엔 창립이 전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뤄졌다. 유엔이 전후 식민지배 체제 붕괴를 전제로 세워졌는데, 강화조약은 식민지배의 책임을 덮어버리는 것이어서 유엔의 설립 취지와 안 맞는 것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추궁하지 않았다면 전쟁 배상 개념도 성립하기 어렵고, 한일 관계의 뿌리도 영향을 받았겠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위안부 문제, 징용공 문제 등에 대해 터치를 못 하게 돼 있다. 미국이 이번 아베 정부의 조치에 대해 은근히 지원하는 것은 그 뿌리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배제됐다고 했는데, 조약 초안에는 한국이 전승국 서명국으로 들어가 있고, 미국 국무부에서도 한국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일본이 반대했고, 특히 영국도 강하게 반대해 초안의 전승국 명단에서 한국이 빠진 걸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는 한국이 배제된 이유는 ‘일본의 로비에 의해 안 됐다’는 것으로 대부분 설명되고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넣으면 일본에 있는 100만 명이 넘는 재일조선인이 공산화의 전초기지가 된다는 논리로 미국 대표인 덜레스를 설득하려 했다. 그런데 덜레스는 설득이 안 됐다. 일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덜레스가 한국을 초청하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답장이 공개됐는데, 편지를 보면 굉장히 과격하다. ‘일본을 벌을 줘야 한다’는 내용이 굉장히 강조돼 있다. 일본을 키워서 공산국가에 대항하는 반공기지로 키우려는 미국의 의도와 안 맞는 것이었다.”

미국이 거부감을 가질 정도로 강경했던 것인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이승만 대통령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덜레스가 한국을 초청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광복군이 중국군과 연대해 일본군과 싸웠기 때문에 연합군의 일원, 즉 교전국이었다는 해석을 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최근에야 알려졌는데, 미국은 한국의 교전국 지위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은 전쟁 중인 한국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의도로 미국은 일본의 로비를 물리치고 한국을 초청하려 애를 썼다. 그런데 1952년 강화조약 체결 직전에 영국에게 설득을 당해버렸다.”

영국의 주장은 뭐였나?

“일본은 미국을 설득하다 잘 안 되니 영국에게 미국을 설득해 달라고 로비를 한 것 같다. 영국은 역사적으로 러시아 때부터 소련과 ‘그레이트 게임’을 펼치며 대결을 벌여왔기 때문에 일본과 같은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영국은 일본의 로비에 넘어가 철저히 일본을 대변했고, 미국은 영국의 설득에 넘어갔으며, 오늘날 한일 관계의 비극을 낳고 말았다.”

 

친일파 미국 관리가 독도 빼

이번 회의에서 발표될 논문 중에, 1947년 미 국무부가 만든 초안에 ‘일본이 자신의 영토가 아님을 명백히 선포해야 할 섬’에 독도(Liancourt Rocks)가 들어가 있다는 내용을 봤다. 미국은 독도가 한국 땅임을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긴데.

“일본이 반환해야 할 의무가 있는 섬 1~4차 리스트까지 독도가 들어 있었다. 그러다 5차 리스트에 독도를 빼버렸다.”

그렇다고 독도를 일본 영토라는 명기도 하지 않았다. 그냥 돌려줘야 할 영토에서 빼버린 것이다. 일본이 강력하게 로비한 것인가?

“그 문제를 담당하던 사람이 시볼트라는 미국인인데, 부인이 일본인이고 친일파였다. 일본이 그에게 로비를 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오늘날 독도 문제가 거기서 시작된 셈이다.

“한국만이 아니고 중국과 일본 사이의 센카쿠열도(중국은 댜오위다오),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4개 섬 갈등이 그 때 다 생긴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북방 4개 섬’이라고 하면 싫어하고, ‘쿠릴’이라고 하면 일본이 싫어한다. 그래서 ‘러일 간 4개 섬’이라고 한다.”

 

국제연맹, 국제연합 모두 을사늑약 무효 선언

1935년 국제연맹이 인류 역사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대표적인 국제조약 3개를 규정하면서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포함시켰다고 하던데.

“1935년 국제연맹뿐만 아니라 1965년 유엔 총회에서 역사상 효력이 없는 국제조약 2개를 추가해 총 5개를 통과시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여전히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부끄러운 점은, 당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이 지적하면서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됐다.”

식민지로 만든 것이 무효라고 국제기구가 선언을 해버린 것 아닌가. 그러면 1910년의 한일 병탄을 포함한 그 이후 모든 조약들도 원천 무효 아닌가.

“문제는 우리가 유엔의 선언을 몰랐고, 1965년 한일협정을 할 때도 유엔의 선언을 이용하지 못했다. 국제 정세가 돌아가는 데 대한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아베 정부가 우리에게 국제조약을 지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할 때도 일본 정부는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 등의 합법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논의 당시 덜레스가 처음에는 한국을 교전 국가에 넣었다는 것도 나는 최근인 작년 우한대학 심포지엄 무렵 일본 학자가 제출한 논문으로 알게 됐다. 우리는 우리 문제에 너무 무지한 채 살아 왔다. 큰 소리를 치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2010년에 출간된 정병준 교수의 ≪독도 1947≫(돌베개)에서도 자세히 다뤘지만, 이런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한일협정 체결 때 좀 더 유리한 입장이 아니었을까. 박정희 정권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알면서도 그랬을까?

“난 몰랐다고 생각한다.”

만약 국제회의에서 이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발표하면 현재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논리의 취약성이 드러나게 된다. 현재의 한일 외교관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이번에 이낙연 총리가 일본에 가서 일본 아베 총리와 회담하면서 ‘우리는 1965년 한일조약을 지금까지 잘 지켜왔고 앞으로 잘 지킬 것’이라고 했다. 그것에 대해 우리나라 언론이 조용하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우리나라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 내용의 핵심은 ‘식민지배는 불법적이었기 때문에 청구권이 아니라 배상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대법원 판결의 근거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나는 2010년 한일 지식인 1000명 공동선언도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선생님과 와다 하루키 등 한일 지식인 1000명이 선언을 했는데, 그런 역사인식 전환의 계기가 됐다고 보는 것인가?

“당시 한국의 언론 반응은 대단했다. 대법원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외교에서는 이익보다 자긍심이 중요

그러면 이낙연 총리가 ‘1965년 체제를 지키겠다’는 발언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총리의 발언은 대법원의 판결 정신에 위배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총리가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한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합병조약과 을사조약은 이미 무효다’라는 한일기본조약 제2조 규정의 ‘이미’가 언제부터냐 하는 것이다. 일본 측에서는 일본 패전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무효가 됐다는 것이고, 그 조약들을 맺을 당시엔 합법이었고 따라서 과거 식민 통치도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은 그러나 조약 체결 자체부터 무효라고 주장해왔다. 한국과 일본의 해석이 서로 다른 것을 용인해 왔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런 타협을 일부 학자들은 지혜로운 타협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게라도 합의를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일기본조약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 측의 해석이 맞다. 총리는 그래도 한국 측의 해석에 입각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지켰고, 앞으로도 지킬 것이라고 말을 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다. 일본의 해석에 동의한 것이라고 보지 않아도 된다.”

외교적 수사로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비판적으로 본다면, ‘총리가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어야 하지 않을까.

“막스 베버는 ‘외교에서는 이익(interest)보다 자긍심(pride)이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프라이드’ 회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라이드를 너무 버리고 있어서 문제다. 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에 대해 너무 프라이드를 못 찾고 있다. 최근 한국에 온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자긍심을 일으켜서 국민적 단합을 이뤄내야 한다’고 충고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천황이든 총리든 무릎 꿇고 사죄를 해야지, 왜 못하냐’고 일본에 충고도 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부의 일본에 대한 대응이 너무 시원찮다고 생각한다. ‘1965년 체제’가 완벽했다면 그 이후에 나온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고치 공동선언’, ‘김정일-고이즈미 공동선언’, ‘간 나오토 담화’ 등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아베 총리, 당신의 태도는 역대 일본 총리들의 담화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왜 아무도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청와대든 총리든 단호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일본 외무성은 계속 같은 주장이다. ‘1965년 한일협정을 지켜라. 한국이 위반하고 있고 우리는 잘못 없다’는 식으로 들린다. 일본 국민들도 그렇게 인식하는 것 같다.

“군 위안부 문제 때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틀을 다소 벗어나서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됐다. 그것이 일본에 굉장한 압력을 가했다. 이번에 징용공 문제는 똑같은 미국 의회의 결의안이 나왔어야 했는데, 전혀 안 나오면서 오히려 미국이 일본 아베 정부를 도와주는 모양새다.”

트럼프 정권의 특징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를 적당히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소미아(GSOMIA) 문제 등에 안 나서는 것은 결국 일본을 지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조만간 일본을 거쳐서 오는데, 지소미아 복구 압력을 넣으러 오는 것 같다. 보수 언론들은 지소미아를 연장하지 않으면 한국이 망한다는 식의 협박에 가까운 보도를 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을 억지로 끌고 가려는 미국의 의도나 보수 언론의 태도는 옳지 않고 국민 자긍심 측면에서도 심히 속상한 일이다.

“여당은 말할 것도 없고 야당이 왜 강력하게 저항을 못 하는지 답답하다. 여당이 못하는 것은 야당이 점수를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데. 슬프다.”

우리 정부 태도를 보면 지소미아 문제는 적당히 타협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타협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압력에 굴복한 타협은 우리에게 불리하고, ‘프라이드 외교’에도 어긋난다. 이 점을 정부가 어떻게 푸느냐가 중요하다.”

지소미아를 이번 달(23일까지)에 연장하지 않으면 자동 파기된다. 전망으로 봐서는 한국 정부가 밀리는 쪽으로 가는데, 타협을 해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않나.

“압력에 의한 후퇴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압력에 의한 후퇴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 열혈 지지자들이나 야당들이 이럴 때 필요하다. 야당 의원들이 강력하게 반대를 해서 우리 정부에 명분과 힘을 실어줘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 그런데 정치가 실종돼 버렸다. 이런 국제 감각 갖고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와 똑같은 일이 되풀이될 뿐이다.”

 

북일수교 협상 때 남한 입장도 분명히 해야

그때보다 별로 나아진 게 없는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정부가 새로운 한일 체제를 내놓기 보다는 역대 일본 총리들의 담화를 활용해서 자연스럽게 이 문제를 밀고 나가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나는 이 문제는 앞으로 100년은 간다고 생각한다. 북일이 수교 교섭과 관련해 김정일-고이즈미 평양 코뮤니케에서 ‘한일협정 방식으로 북일 문제를 처리한다’고 합의를 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그렇게 합의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최근 북한의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이 ‘북일 국교정상화는 철저하게 사죄와 배상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이낙연 총리와 아베 총리의 회담을 굴종적인 회담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서를 냈다. 만약 북일 관계 정상화가 진행되면 남한이 중요한 키를 쥐게 된다. 일본은 북한과 협상할 때 남한과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태도로 나올 것이다. 그 때 남한이 일본을 비판하고 북한을 지원하면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현재의 한일 관계는 분단체제를 전제로 만들어진 관계다. 앞으로 남북 통합체제를 염두에 두고 북한을 지원하며 한일 관계도 새로운 한일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1965년 체제에 문제가 많아 답습해선 안 된다는 것은, 북한은 교전국으로 인정을 받고 전쟁배상금을 제대로 받게 한국이 힘을 보태야 한다는 것인가.

“지금 한일 관계의 위기가 그런 것을 준비할 수 있는 찬스다. 이제는 통일된 한국을 염두에 둔 한일 관계를 구상해야 한다. 한국-미국-북한의 3자 관계에서 한국이 열쇠를 쥐었듯이, 북한-일본-한국 3자 관계에서도 한국이 열쇠를 쥐어야 한다.”

미국의 압력에 단호하게 대응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할 텐데.

“그런 큰 외교를 구상해야 한다. 청와대나 외교부, 한국의 지식사회가 준비를 해야 한다. 한일 관계에서 65년 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무효화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당시 조약 핵심 당사국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과 중국(본토와 대만 모두)이 빠진 강화조약은 원천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북한도 빠져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당연히 무너지는 것이다. 사실 아베도 개헌을 추진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축을 무너뜨리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사실상 앞뒤로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 무너진다고 괜찮은 것이 아니다. 종속이론에 따르면 주변부는 종속체제가 무너진 뒤에도 여전히 주변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미중 헤게모니 싸움에 한국과 일본이 다 묶여 버릴 가능성이 있다. ‘포스트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는 (한국이) 소외되지 않고 앞장설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중요한 지적이다.

“이번 회의 개회사에, 1935년에 국제연맹에서 을사늑약을 무효화시켰듯이, 1963년에 유엔총회에서 을사늑약을 무효화시켰듯이, 또 한 번 유엔총회에서, 혹은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무효화를 선언할 수 없느냐는 제안을 넣을 것이다.”

우리가 샌프란시스코 체제 하에서 살면서도 이에 대해 전혀 인식이 없었다. 한국이 향후 100년을 갈 수 있는 체제 변혁기나 과도기를 주체적으로 꾸려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각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정부도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다.

“한일 합방 체제는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무효다. 고종과 순종이 도장을 안 찍었다. 그 바람에 둘 다 독살 당했다.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걸 지켰다. 분발해라.’ 이게 고종과 순종의 유언이었다. 그런데 3·1운동을 계기로 주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왔다. 그래서 국민들이 나서서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3·1운동의 원인이 바로 한일 합방조약을 부정하는 인식 위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김규식이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제출한 것이 한일합방조약 원천 무효라는 문서였다. 그것이 1935년 국제연맹의 조약 원천무효 선언의 근거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대외정책의 제1번이 한일합방조약 원천 무효였다. 이걸 관철시키려는 신념과 의지를 지금의 청와대와 외교부가 품어야 한다.”

우리 헌법 전문에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한일합방조약 등의 원천 무효를 선언한 것 아닌가.

“‘우리 역사에서 그만큼 중요한 문제다. 프라이드의 원천이다.’ 그런 의식이 없는 게 문제다.”

미국의 태도는 바뀔 수 있을까.

“미국 의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냈다. 하와이 점령과 지배에 대해서도 미국 상하원 합동으로 과오를 인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적도 있다. 또한 2차 대전 때 재미일본인을 강제 이주시켜 수용한 데 대한 사과 결의안을 채택하고 대통령 이름으로 사과 편지를 써 개개인에게 2만 달러씩 지급하기도 했다. 중국 노동자들을 미국 철도 건설에 동원한 데 대해서도 대통령이 사과 편지와 배상금을 지급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우리도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 식민 침탈을 가능하게 했던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대한 사과 성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사과를 받으면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2017년 펜실베니아대학에서 열린 회의에서 나는 ‘미국 민주주의의 본산인 필라델피아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정책을 펴면 동아시아의 비극은 해결될 수 있다’고 연설했다. 그런데 지금의 필라델피아 프로세스는 군산복합체 프로세스나 다름없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몇 년 전 미국으로 흘러갔던 대한제국의 국새를 반환했다. 당시 한일 지식인 1000명 공동선언 준비를 위한 회의를 하던 때인데, 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대외 정책으로 인해 한국이 과거 식민지배를 받은 점에 대해 사과했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는데, 내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부터라도 계속 그런 얘기를 했다면 지금의 한일 관계 악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주장을 하면 누군가는 나더러 반미적인 주장이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필라델피아 프로세스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미국이다. 미국적 가치를 배반한 것은 오히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촛불 정신 이어 ‘시빌 아시아 플랫폼’ 만들자

평범한 시민들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한일 관계의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문제를 풀지 않으면 절대 풀리지 않는다. 이를 풀기 위해서는 유엔 정신이 필요하다. 식민지배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테제에 기반한 것이 유엔이다. 유엔은 국가 간 연합체다. 국가는 시민이 투표를 통해 만든 집단이다. 결국 간접적인 대의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3·1운동을 통해, 촛불운동을 통해 직접민주주의를 전 세계에 보여줬다. 이런 운동을 전 세계적으로 퍼뜨려 유엔을 리모델링할 필요도 있다.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가 강화돼야 한다.

나는 한일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시빌 아시아 플랫폼(civil asia platform)’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나는 일본에 가서 일본 시민들에게 ‘아베의 헌법 개정 시도를 막는다면 일본의 시민 혁명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촛불혁명 세력과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키고자 하는 시민세력이 제휴해 ‘시빌 아시아 플랫폼’을 만들어서 홍콩의 우산혁명 같은 것을 뒷받침하고 포용해줘야 한다.

아베 정권의 도발로 한일 분쟁이 일어나자 얼마 전 미국 LA타임스에 ‘아시아에 미래는 없다’는 평가가 실린 적이 있다. 아시아에서 그나마 시민사회가 발달한 한일 양국의 시민연대가 없으면, 결국 아시아는 중국의 패권 아래로 들어갈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한일 시민들이 연대해서 중국 중산층을 끌어당겨야 한다. 아시아에는 중산층 이상으로 디지털 민주주의 가능성을 품은 ‘스마트 피플’이 축적돼 있다.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로 이 가능성을 살려낼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의 촛불혁명 세력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년에 오키나와나 캐나다에서 마지막 5차 회의가 열리는 셈인가?

“열리기를 바란다.”

이 회의가 종료되더라도 동아시아 문제에 관심를 지닌 지식인들의 또 다른 민간 협의체로 존속하면서 새로운 인식과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포스트 샌프란시스코 시스템’을 외부에서 결정하지 않고 동아시아 내부 시민사회에서 결정하는 데 한국 지식인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촛불혁명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금강산‧개성공단 과감히 돌파해야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5·24조치 해제는 현재 유엔의 대북제제 범위 밖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이 문제를 과감하게 풀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고려를 한 고민의 산물이겠지만, 미국의 눈치를 너무 보는 것 같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지난 번 판문점 회담이나 평양공동성명에서 밝힌 정신으로 개성공단 내지 금강산 문제는 책임지고 해결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성공단 문제는 유엔의 대북 제재에서 예외로 인정하는 민생과 관련된 문제다. 5만 명의 북한 노동자를 고용함으로써 가족까지 합하면 약 30만의 삶이 걸려 있는 민생 문제와 직결된 것이다. 금강산 관광은 또 별개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의용 실장의 법률가적, 관료적인 접근법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문제만 해결했어도 남북관계가 전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성공단 문제를 과감하게 돌파하려 했다면 돌파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한승동 기획주간
정리: 김하영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