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2일 있을 일본 천황(나루히토)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낙연 총리가 일본을 방문한다. 이를 계기로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갈등 국면의 돌파구가 마련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중요한 이웃나라” 발언이나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의 “일본이 먼저 양보” 발언 등을 자세 변화의 조짐으로 읽는 쪽에선 한일 관계 복원의 기대 섞인 관측을 내놓는다. 어떤 결과든 예단하긴 어렵지만, 그러나 이 총리의 방일만으로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풀리고 갈등 해소 쪽으로 직행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편집자]

‘한국이 불법 자행’ 아베 주장은 여전

아베 총리는 지난 4일 국회 개원 연설에서 2년 만에 한국이 ‘중요한 이웃나라’라는 수식어를 되살렸지만, 바로 뒤이어 “국제법에 기초해서 나라와 나라간의 약속을 준수하기를 촉구”함으로써 게임의 ‘골 포스트’를 움직이는 불법을 자행하는 쪽은 한국이라는 기본인식을 바꾸지 않고 있다. 한국이 이제까지의 대일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일본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겠다는 자세를 재천명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물러설 수 없다고 밝힌 마지노선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지지하며, 사법부의 조치에 행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법원 확정판결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은 법적 절차대로 진행돼야 하며, 다른 해결책이 있다면 일본이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 “한반도 식민지배는 불법”
징용 피해, 청구권협정 포함 안돼

핵심 쟁점인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느냐’ 여부에 대해 우리나라 대법원은 ‘소멸하지 않았으며, 손배 청구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1965년의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체결, 1952년 4월 발효) 제4조에 근거해서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해 해결한 것, 즉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무관계에 관한 것이며, 강화조약 제5항의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라는 문구가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도 아니었다고 밝혔다.

“한일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근거로 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하면, 청구권 협정은 재산권(채권·채무 관계)에 관한 정치적 합의였을 뿐, 일본의 불법 침략과 식민지배에 의한 피해 피해보상 문제를 다룬 것은 아니었다고 못 박았다. 그리고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은 ‘한일합방’ 조약 등의 체결을 통한 식민지배가 불법인지 합법인지도 결정하지 않고 애매하게 처리한 것이어서, 침략과 식민지배의 합법성 여부로 결정되는 배상문제는 다루지도 않았다고 명시한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는 불법이었다고 못 박는다. 따라서 1910년의 ‘한일합방’ 조약을 비롯해 일본이 패전한 1945년 8월 이전에 일본이 한국에 강요해 체결한 모든 협정(조약) 또한 불법이었다고 판정한다.

일본은 ‘체결 당시 합법, 패전 후 불법’
1965년 협정, 한일 각자 해석 여지 줘

이 부분이 중요하다. 아베 총리와 그의 우파 지배세력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한일 갈등의 핵심요소다.

1965년 한일협정 때의 기본조약은 1910년 8월의 ‘한일합방’조약을 비롯해 양국 간에 체결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했다.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말에 대해, 한국은 그런 조약 체결 자체가 모두 불법이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일본은 체결 당시에는 합법이었지만 일본 패전으로 불법이 된 것으로 해석하기로, 협정 체결 당시 양쪽은 정치적으로 타협했다.

따라서 일본 쪽은 한반도 식민지배가 당시 국제법상 합법이었으므로 그에 대해 배상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게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 쪽이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골 포스트를 마음대로 옮긴다’)는 아베 정권 주장의 근거요, 그가 한반도 식민지배를 근대적 발전을 위한 시혜라고 우기고 ‘한일합방’과 러일전쟁, 청일 전쟁을 조선과 아시아의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우기는 근거다. 한국 대법원 판결은 바로 그런 일본의 주장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외교적 수사법으로 땜질 합의 가능성

지금까지 흐름으로 보면, 한국 정부가 이런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수 없고, 예전 군사정권 시절처럼 개입해서 정치적·외교적으로 얼버무릴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랬다가는 여론의 비판으로 정권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 현실이다.

아베 총리의 발언을 보자면 일본 정부도 기존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다. 다만 앞서 얘기한 ‘중요한 이웃나라’나 ‘양보’ 같은 일본 정치인들의 최근 레토릭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타협할 여지도 있어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아베 정권이 애초 수출규제와 ‘화이트 리스트’ 배제 등을 통해 기대했던 한국 쪽의 변화, 즉 정치적 굴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됐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일본 관광 거부 등을 통해 드러났듯 그런 조치로 오히려 일본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될지도 모를 상황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아베, 한국의 脫일본 의지 과소평가

애초에 무역흑자 수출국(일본)이 무역적자 수입국(한국)을 향해 수출 규제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것이었거니와 일본의 첨단소재 기술 발전 또한 양국 기업의 분업체제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던 만큼 아베 정권의 계산에는 처음부터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일본에 치명타가 될지도 모를 한국 쪽의 ‘탈(脫)일본화’(경제뿐만 아니라 군사·안보적으로도) 움직임을 아베 정권은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금 갈등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할 필요성은 일본 쪽이 더 절박할 수 있다.

또한 일본 외무성 주임분석관 출신 사토 마사루(佐藤優)가 주장하듯 “외교란 국력과 국력의 균형점에서 결정된다”(문예춘추 2019년 10월호)는 ‘원리’에 따른다면, 일본이 바라는 대로 한국이 움직여 줄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한국의 국력은 사토도 지적하듯, 일본이 자국 뜻대로 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하게 커졌다. 따라서 아베 정부가 지금같은 자세를 고수하는 한 한국 정부가 먼저 굽히고 들어갈 가능성 역시 없다고 봐야 한다.

미봉책 땜질하면 언젠가 갈등 재발

한일 갈등의 근본적 해소는 과거사 문제의 올바른 청산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치적·외교적 합의를 통해 적당히 얼버무리고 합의하는 해결방식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체제가 그렇듯이 언젠가는 파탄 나고 문제는 다시 불거질 것이다.

한일 갈등의 근본적인 해법은 한국 대법원 판결이 명시하듯,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합방조약 강제, 식민지배 등이 모두 불법이었음을 인정하고 사죄, 배상하거나 그런 쪽으로 방향을 정해야만 시작될 수 있다. 그런 원천적 해소가 당장 불가능하다면, 짧지 않을 그 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걸음마라도 시작해야 한다. 이낙연 총리의 이번 방일에서 양국이 그 정도의 기대 수준이라도 충족시켜 준다면 실로 다행이겠다.

아베와 우익 세력의 ‘황당한 소신’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아 보인다. 아베 정권과 ‘일본회의’ 등 우파 주류의 역사관, 세계관을 보자면, 그런 비관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최근 뉴스 가운데 가장 황당하게 들린 것 중의 하나는, 아베 신조 일본총리가 10월 4일 임시국회 개원일에 했다는 다음과 같은 ‘소신 표명 연설’의 한 구절이었다.

“(일본이 한) 제안의 진전을 전 미국의 1500만 유색인들이 주목하고 있다.”
100년 전 미국의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n)지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제안에 대해 그렇게 썼습니다. 1천만이나 되는 전사자를 낸 비참한 전쟁을 거쳐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이상, 미래를 염두에 둔 새로운 원칙으로 일본은 “인종 평등”을 제시했습니다.
전 세계에 구미의 식민지가 퍼져가고 있던 당시, 일본의 제안은 각국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습니다. 그러나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각국의 대표단을 앞에 두고 일본 전권대표인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는 의연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곤란한 현상 아래 있는 것은 인식하고 있지만,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내건 커다란 이상은 세기를 넘어 지금 국제 인권규약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기본원칙이 돼 있습니다.
(<아사히신문> 10월 5일, 제5면 통단으로 연설 전문 게재)

마치 부조리극(劇)의 대사를 읽는 것 같다. 국회 개원일에 행정부 수반으로서 대표연설을 하면서 아베 총리가 자랑스레 주장한 것은 지금의 국제사회에서 유색인종의 인권이 이만큼 신장된 것은 일본이 그때 ‘인종 평등’을 주창한 덕이라는 얘기 아닌가.

그가 말하는 ‘유색인종’이란 아메리카 흑인을 포함한, 백인이 아닌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런 인종 개념은 딱히 피부 색깔만으로 구분한 것은 아니어서, 구미 열강(백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약자, 소수자, 피억압 민족 등 ‘마이너리티’ 전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얘기하는 모양새로 보건대 아베나 그의 100년 전 선배들은 그 유색인종 범주에 ‘일본인종’ 자신들은 아마 포함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과 싸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 내의 독일 점령지와 이권을 거의 그저 차지하는 등 운 좋게도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이 돼 열강으로 떠오르고 있던 일본의 지배세력은 자신들을 구미 열강과 동등한 ‘백인’이라 여기고 있었을 테니까.

백인엔 열등감, 유색인종엔 우월감

그 ‘유색인종’에는 당시 그들이 강점하고 있던 조선(대한제국) 사람들도 당연히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황당하고 웃기는 일인가. 그때 그들의 강점 아래 불평등과 차별에 신음하던 조선의 3천만 ‘유색인종’의 해방과 평등은 어디로 갔는가. 일본 전권대표 마키노 노부아키가 했다는 ‘인종 평등’ 주장은, 실은 ‘우리 일본인도 당신들 백인과 동등한 인종 그룹에 끼워 달라’는 간청이었다. 서양 백인들, 특히 앵글로 색슨족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종적 열등감은 뿌리 깊은 것이어서, 파리 강화회의에서 그 점을 간파한 존 포스터 덜레스는 2차 대전 뒤 일본 점령정책을 수립할 때 그것을 일본 지배를 위한 효과적인 정책으로 적극 활용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뒤의 파리 강화회의 때 덜레스는 미국 교섭단 위원으로 파견돼 일본의 인종평등 주장의 본질이 뭔지 현장에서 지켜봤다. 2차 대전 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때는 미국 대통령 특사로서 그 강화회의를 지휘하면서 일본의 인종적 열등감을 미국의 일본지배 영구화에 활용했다.

덜레스가 일본의 인종적 열등감을 활용한 포인트는, 주변 아시아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종적 편견을 적극 부추겨 ‘일본인은 러시아나 중국, 조선 등 다른 비(非)백인 인종들보다 우수’하며 ‘앵글로 색슨의 영미권 인종과 동등’하다는 관념을 명시적으로 주입하는 것이었다고 덜레스 자신이 나중에 털어놓은 바 있다. 일본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주장한 인종 평등은 인종 차별주의 자체를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인종 차별주의를 전제로 일본인만은 백인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건 바꿔 말하면 이중적으로 굴절된 지독한 인종차별주의다.

미국, 일본 활용한 ‘이이제이’ 펼쳐

2차 대전 뒤 동서 냉전의 최전선에 서 있던 ‘냉전의 전사’ 덜레스는 그것을 일본인들이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권이 아니라 미국에 호감을 갖고 미국 지배를 쉽게 받아들이게 만들 강력한 무기가 될 것으로 계산했다. 그런 계산은 적중했다. 일본이 지금도 이웃 아시아인들을 은연중 하대하며 근거 없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고, 미국은 그런 일본의 우월감을 부추기고 수용함으로써 동아시아를 분할 지배하는 ‘이이제이’ 정책을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들이 많다.

어쨌든 그해 1월 중순부터 6월까지 열린 파리 강화회의 도중에 조선에선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전 민족적 봉기는 신한청년당의 파리 강화회의 대표 파견 및 그 좌절과도 깊이 연관돼 있었다. 그때 인종 평등을 선도했다는 일본은 무력으로 이를 철저히 진압했다.

그러고도 그들은 패전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26년간 더 강점하고 수탈했으며, 그 기간에 수십만 명이 성노예로 강제동원당하고 수백만 명이 광산 등으로 징용 당했다. 그때 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강제노역을 당한 피해자들 중의 극히 일부가 반 세기가 지난 뒤 한국 민주화 이후에야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 일본이 얘기하는 ‘징용공(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재판’이다.

국제법 들먹이며 ‘피해국 코스프레’

100년 전에 그런 이상한 ‘인종 평등’을 주장했던 바로 그들의 후예가 다시 100년 뒤의 그 소송 결과를 어떻게 대했나? 국제법 위반이니 신뢰 파괴 등을 읊조리면서 자국의 첨단소재 수출 규제에 수출 우대국 리스트 제외 등의 일방적 횡포를 부리며, 오히려 자신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입고 있다고 세계를 향해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 100년이 지났어도 세계는 근본적으로 바뀐 게 없어 보인다.

아베가 웃기는 주장을 한 건 물론 이번 연설만이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줄곧 그랬지만, 압권은 일본 패전 70주년이던 2015년 8월에 그가 발표한 종전(終戰) 70년 총리 담화였다. 그 담화문 초두에서 아베는 이렇게 말했다.

“백년 이상 전의 세계에는 서양 여러 나라를 중심으로 한 나라들의 광대한 식민지가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기술우위를 배경으로, 식민지배의 파도는 19세기 아시아에도 들이닥쳤습니다. 그 위기감이 일본에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입헌정치를 세우고, 독립을 지켰습니다.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세계를 둘러싼 제1차 세계대전을 걸쳐, 민족자결의 움직임이 확대되면서 그 때까지의 식민지화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이 전쟁은 1천만 명의 전사자를 낸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아베는 그 담화에서 조선 침략을 위해 저지른 러일전쟁(최근 한국에서도 번역 간행된 <러일전쟁-그 기원과 개전>의 저자 와다 하루키 교수는 당시 러시아는 애초에 일본과 전쟁을 벌일 뜻이 없었음을 밝혔다)을 일본이 아시아 피억압 식민지 민족해방을 위해 일으킨 의로운 전쟁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번 국회연설에서의 ‘인종 평등’ 주장과 꼭 같은 맥락이다. 조선을 전장 터로 만들어 초토화하고 결국 통감부 설치로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든 그 전쟁을 아시아 민족 해방전쟁이라 우기는 아베는 역사에 무지몽매한 걸까, 알면서도 그러는 것일까.

‘아시아 민족해방전쟁’이란 억지 펼쳐

아베는 1차 대전으로 열강들의 식민화에 제동이 걸렸다고 했으나 일본의 식민지는 더욱 확대됐으며, 1천만 명의 군민(軍民)이 그때 희생당했다고 했지만, 그 뒤 일본은 만주를 침략(만주사변, 1931년)하고 중국 본토를 유린(중일전쟁, 1937)하면서 난징에서 최소 3만 명, 최대 30만 명의 무저항 민간인과 군인들을 학살했다. 그 뒤 이어진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2천만 명의 아시아인들과 3백만 명의 자국민을 희생시켰다. 그 3백만 명의 ‘일본인’ 희생자들 중에 조선인들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 우리는 알 수조차 없다. 일본 조야는 한 번도 그런 문제를 조사해서 밝힌 적이 없다.

자국민의 고난과 희생을 강조한 패전 70주년 총리 담화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일본에서는 전후 태어난 세대가 이제 인구의 8할을 넘고 있습니다. 그 전쟁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리의 자녀나 손자, 그리고 그 뒤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후손들이 이웃 피해국과 세계를 향해 사과를 계속해야 할 운명을 마치 외부로부터 강요당하기나 한 듯 자못 억울하다는 투로 얘기하면서 더 이상 그것을 하게 해선 안 된다고 아베는 주장한다. 이것은 징용 피해자들의 손배 청구소송 원고 승소판결을 최종 확정한 한국 대법원과 한국 정부를 비난하면서 더는 사죄나 배상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아베의 최근 행보와 동일선상에 있다.

일본 우파 수정주의 역사관의 핵심은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대동아전쟁)은 자위를 위한 정의의 전쟁이요, 아시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것이다. 아베 세대의 자녀나 손자, 그리고 그 뒤 세대까지 피해자들에게 계속 사과를 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만든 것은 피해자들이 아니라 그런 역사관을 고집하고 있는 일본 자신이다.

독일처럼 실천해야 악순환 벗어나

아베가 후손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운명을 더는 지우지 않으려면, 그렇게 만든 문제의 근원을 해소하거나, 해소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보여야 한다. 독일처럼 진심으로 사죄하고 피해국들이 수용 가능한 배상과 보상을 최대한의 성의를 갖고 실천해 가는 것이다.

유럽이나 독일의 이웃 피해국들이 독일을 지금의 일본처럼 대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관대해서가 아니라, 독일이 일본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를 보이면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아베가 말한 “우리의 자녀나 손자, 그리고 그 뒤 세대의 아이들”이 사과를 계속하는 숙명을 지지 않게 하려면, 조약이나 협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몇 가지 정치적 흥정으로 “모든 것은 다 해결됐다”거나 “확실히,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건 그들 자신도 잘 알 것이다. 진심으로, 그리고 기억이 남아 있는 한 끝까지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

수천만 명의 삶을 망가뜨리고 죽음으로 몰아간 역사적 범죄가 몇 번의 사죄 선언과 협약으로 치유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착각이거나 사기다. 그들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아베 총리와 그를 지지하는 지배세력들은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건 어느 특정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문제다.

강제징용 민사소송에 국가는 제3자

제대로 사죄도 배상도 보상도 하지 않고, 아니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한 정치적 거래를 해 놓고 이웃 피해국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오히려 제재를 가하는 것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게다가 이번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은 가해자인 일본 민간기업과 그 피해자인 당시 노동자들 간의 민사소송이다. 일본이란 국가가 거기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다. 아베의 세계인식이나 판단력이 온전한지 의심할 만한 또 다른 구절이 그의 국회 소신 표명 연설 가운데에 또 들어있다.

“오사카 세계 서미트(summit)에서는 G20의 모든 나라가 세계의 지속적인 성장을 실현하기 위해 협조해 간다는 데에 일치했습니다. 현안인 무역마찰에 대해서도 자유, 공정, 무차별 등 자유무역의 기본원칙을 수뇌들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자유무역의 기수로서 자유롭고 공정한 룰에 기초한 경제권을 세계로 넓혀 가겠습니다.”

아베는 한국과의 ‘분쟁’을 일으킨 지 몇 달이 지난 10월 국회 연설에서도 이런 꼭 같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 연설에서 한국을 명시적으로 지목해서 언급한 것은 다음과 같은 단 두 문장이다.

“한국은 중요한 이웃나라입니다. 국제법에 기초해서 나라와 나라 간의 약속을 준수하기를 촉구하고자 합니다.”

이 단 두 줄을 놓고 일각에선 한국에 대한 유화적 자세 변화의 조짐으로 읽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일본 정부의 자세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한국 내의 반(反)문재인 세력의 분발을 촉구한 내정간섭적인 발언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이웃나라여, ‘좌파 정권’을 몰아내고 과거의 좋았던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다오!’.

한국 내부싸움 불 지르는 우익세력

일본 자위대 제2항공단 사령 및 지토세(홋카이도)기지 사령, 북부항공방면대 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항공자위대 보급본부장을 끝으로 2017년에 퇴역한 오우에 사다마사(尾上定正)는 10월 7일 <마이니치신문>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일본은 ‘징용공 문제’ 등의 기본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한국 여론의 관심이 반일에서 한미 안보문제 등 국내 대립에 초점을 맞추도록 감정적인 태도를 삼가고 냉정하고 일관된 자세로 한국민을 대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국내 대립’이란 무엇이겠는가? 오우에는 이를 “국제 문제를 한국 국내정치 문제로 변환해서 해결을 촉진하는 전략”이라며, 지소미아 부활과 한일 군사관계 재구축을 위해 일본이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아베가 한국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이 전쟁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일 수 있으며, 쉽게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아베와 그 주변의 세계인식 내지 한국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한국 무용론’에 ‘文정권 타도론’까지

아베 정권의 대변지로 자타가 인식하는 극우 <산케이신문(産経新聞)> 온라인판에 실려 있는 오하라 히로시(大原浩)라는 국제투자 애널리스트의 칼럼을 하나 발견했다. 인간경제과학연구소 집행 파트너, 프랑스 크레디 리오네 은행 등과의 금융 협력자요, 석간 <후지>(후지는 산케이와 같은 계열)에 ‘버핏 뒤를 좇아가는 투자술’을 연재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한심하고 천박하지만 또한 매우 위험해 보인다.

도대체 아베 주변은 어떤 생각을 하는 어떤 수준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는가. 그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자료일 수 있어 일부를 소개한다. 미리 말해 두지만, 그들은 노골적으로 한국에서 쿠데타로 문재인 정권을 뒤엎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다.

2019년 8월 26일자로 명기돼 있는 “조약도 상식도 지키지 않는다… 일본·미국에 퍼져가는 ‘한국 무용론’, 文 정권 ‘타도’의 움직임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그의 칼럼(엄밀하게는 그의 말을 인용한 칼럼) 일부를 발췌해 옮긴다.

“일본 정부의 수출관리 강화에 거꾸로 보복조치를 휘두르더니 결국 미국의 요청으로 체결한 일본과의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군사비밀보호협정.GISOMIA)까지 파기해 버린 한국의 문재인 정권. 조약도 국제 사회의 상식도 지키려 하지 않는 분별없는 짓에 일본·미국에서 ‘한국 무용론’이 퍼지고 있다.”
“‘한국의 이상성(異常性)’은 양식 있는 일본인들의 컨센서스가 된 감이 있다. 이제까지 얘기해 왔듯이 ‘한국은 일본의 스토커’다.”
“또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전략적 방치’=‘단한’(断韓, 한국 자르기, 즉 한국과의 외교 내지 국교 단절)이라는 시책이 ‘수출 관리’까지 포함해서 한국을 궁지에 빠뜨리고 있다. 지금까지 정치가나 외무성의 한심한 대응 때문이기도 했지만, 말도 안 되는 (한국의) 트집에 말없이 참아온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제 속이 후련해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文 정권이 단호한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것인가. 한국의 역대 정권은 외부에 일본이라는 적을 만듦으로써 국민을 단결시켜 왔기 때문에, 이제라도 새삼 ‘정말 나쁜 건 한국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라며 국민들에게 (사실을) 전한다면 정권은 전복되지 않을까. 좌파인데다 반일색(反日色)이 강한 文 정권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한국 내의 양식 있는 보수파의 ‘쿠데타’를 기다리고 있다고 봐도 이상할 것 없다.”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는 한국 내의 보수·양식파의 ‘군사(무혈) 쿠데타’를 미국이 몰래 지원하는(첩보활동은 실패하지 않으면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미국이 지원하지 않더라도 양식 있는 한국인은 자국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 테니, 文 정권 타도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을 것이다. (…) 15일 광복절에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반(反) 문 정권’ 데모에도 수만 명 이상이 집결했다고 한다.”
“미국의 충고를 무시하고 지소미아를 파기해 버린 文 정권은 ‘쓸모없다(無用)’고 여겨지고 있을 것이므로 ‘무용’한 것을 교체하는 것은 극히 합리적인 행동이다.”
“그렇다면 ‘무용’한 나라에서 미군과 그 가족을 철수시키고, 일본해(동해)를 반공방위 라인으로 삼는 선택도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쿠데타든 국민 선거를 통해서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文 정권이 아닌 정권으로 바통 터치 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 국민은 불행하게도 진실을 알 수 없다….”

제정신으로 쓴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런 황당한 얘기를 이렇게 길게 옮긴 것은, 그들이 실은 제정신으로 이 따위 얘기를 하고 있다는, 또는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베 정권의 대변지에 버젓이 실려 있는 이런 얘기가 전부는 물론 아니지만, 요즘 일본 정계나 일부 지식층 사이에서 한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회자되고 있는 얘기들, 담론들 수준을 일부나마 민낯으로 보여 준다.

19세기 식민사관으로 한국 맹공격

일본 월간지 중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문예춘추(文藝春秋)>, 나이든 한국 보수 우파 중에서도 많은 구독자를 지닌 이 우익 잡지의 올해 10월 ‘총력 특집’의 제목은 ‘일한(日韓) 단절-분격과 배신의 조선반도’다.

한반도의 사대주의와 가난은 숙명적이며, 결국 일본 없이는 안 된다는 19세기 식민사관의 21세기 버전을 쓴 작가이자 수학자인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일본과 한국 ‘국가의 품격’”을 시작으로 “군사협정 파기- 文 정권은 외교전에서 패했다”는 제목의 글을 쓴 사토 마사루의 글에다, 익명의 한국 국정원 고관을 빙자한 인터뷰 형식의 글 “문재인으로는 대한민국이 지구에서 소멸된다”는 황당무계한 얘기까지, 일본 우파 주류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다 담았다.

오만방자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한 이런 얘기들이 지금 아베 정권과 그 주변의 세계인식이나 실제 정책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앞서 얘기한 산케이 칼럼 말미의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 국민은 불행하게도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얘기는 정말이지 걸작이다. 요즘 말로 ‘자뻑’, 일종의 과대망상에 가까운 저들의 우물안 내지 갈라파고스적 사고의 극치라고 할 만하다. 그야말로 ‘존 포스터 덜레스의 승리’다.

그러나 사회학자 오사와 마사치는 “이런 유(類)의 지나친 자신과잉과 자화자찬이야말로 그만큼 자신이 없는 자들이 내뱉는 말기적 불안증세일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중앙공론> 2019년 4월호)

中 언론통제를 걱정할 자격 있나

<산케이신문>과는 격이 좀 다르지만,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지키고 있는 <아사히신문>의 10월 6일자 기명 사설 ‘여적(餘滴)’에 실린 국제부문 담당 후루야 고이치(古谷浩一) 논설위원의 글도 관심을 끈다. 후루야 위원은 10월 1일의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70주년 기념식을 바라보며, 장대하고 강고해 보이는 시진핑 체제하의 중국과 참극이 벌어지고 있는 홍콩의 현재 상황을 대비시킨다. 그 제목은 “베이징에서 본 ‘두 개의 세계’”다.

후루야 위원은 젊은이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면서 희생자를 내고 있는 홍콩의 ‘중대 사태’ 관련 소식들이 중국 내부에는 거의 전달되지 않고, 중국의 언론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다시금 깨닫는다. 14억 명의 중국인이 알고 있는 세계와 우리 일본인을 포함한 중국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세계. 사실 인식부터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계가 눈앞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 70년간 공산당 정권은 수도 없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들을 숨겨왔다. 순식간에 정보가 세계로 전파되는 인터넷 시대에 그런 정보통제는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 1960년대의 미국 심리학자 밀그램의 실험에 따르면, 폐쇄적인 환경에서 인간은 권위자의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워진다. 이것이 참으로 중국인이 자랑하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일까. 화려한 축하로 들끓는 이웃나라,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위험성을 걱정한다.”

후루야 위원의 걱정에 필자도 공감하는 바가 많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쓴 글에서 중국을 일본으로 바꿔 놓으면, 전혀 말이 안 되는 얘기가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중국의 언론자유, 언론통제 문제를 일본의 그것과 동일선상에서 얘기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본 역시 일본 안에서 보는 세계와 한국을 포함한 일본 바깥사람들이 보는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아베 정권 등장 이후의 일본 상황은, 국제 언론단체들의 세계 언론자유 지수나 순위 발표에서도 드러나듯, 결코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하다.

일본 예찬, 혐한·혐중이 일상화

아베 총리나 그의 정책들에 대한 반대 목소리들이 사라지고, 일본 예찬, 혐한·혐중이 일상화된 지 오래되지 않았는가. 산케이신문의 그 칼럼을 보노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칼럼의 한 구절,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文 정권이 단호한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것인가. 한국의 역대 정권은 외부에 일본이라는 적을 만듦으로써 국민을 단결시켜 왔기 때문에, 이제라도 새삼 ‘정말 나쁜 건 한국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라며 국민들에게 (진실을) 전한다면 정권은 전복되지 않을까.”라는 얘기는 주어 자체를 아베 정권이나 일본으로 바꿔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일본의 역대 정권이 외부에 조선(한국)이라는 적을 만듦으로써 일본 국민을 단결시켜 온 것은 16세기 임진왜란, 20세기 식민지배 이후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인들이 일본을 잘 모른다지만, 일본인들은 한국을 더 잘 모르는 것 같다.

한승동 / 메디치미디어 기획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