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있을 때면 전 세계가 공화·민주 양당의 선거판을 주시한다. 매 4년마다 자국의 외교·안보 상황을 좌우할 수 있는 최대 변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역대 정권이 어떤 정책을 펼치느냐에 따라 한반도 긴장 수위가 오르내리고 남북한 관계, 동아시아 판도가 요동쳤다.

<피렌체의 식탁>은 최근 민주당의 유력 후보로 떠오른 엘리자베스 워런의 정치적 어젠다와 한반도 관련 정책을 살펴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임 여부도 주목되지만, 민주당 경선 구도의 변화와 워싱턴의 풍향계를 읽을 수 있어서다. 미국 대선의 새 강자로 떠오른 워런 후보의 대외정책 구상을 살펴보고 한반도 정세의 풍향을 점검해본다. <편집자>

미 대선은 ‘정책 변화의 인큐베이터’

미국 대선은 새 인물, 새 정책, 새 시대를 창조하는 인큐베이터 같은 공간이다. 대선을 1년 가량 앞두고 미국 정가는 한창 분주하다. 공화·민주 유력 주자들의 외교안보 전략이 태동하는 시기에 우리가 적극적인 스탠스를 취하지 않으면 도널드 트럼프 정권 이후 미국의 대북 정책은 다시 표류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까진 공화·민주 후보들의 외교안보 디테일이 많지 않지만, 선두권이 가시화되면 분명한 어젠다와 정책 목표를 가진 참모들이 줄을 서고, 각 후보들은 과외학습을 하며 자신의 정견과 정책을 굳히게 된다. 이스라엘이나 일본처럼 장기적인 포석 아래 워싱턴을 공략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한반도의 미래가 달린 외교정책이 형성될 시기에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는 시기다.

워싱턴에서는 최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주도로 민주당이 트럼프 탄핵을 위한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이 뉴스가 미국 언론을 뒤덮고 있을 때 일부 언론에서는 현 상황이 민주당 후보 가운데 누구에게 불리하고 누구에게 유리한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온 분석 중 하나가 “트럼프 탄핵이라는 뉴스가 민주당 경선에서 유권자의 관심을 빼앗는 상황에서 당장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후보는 버니 샌더스”라는 것이었다.

바이든·샌더스의 뚜렷한 퇴조

민주당 후보 싸움에선 TV토론 시작과 함께 조 바이든, 버니 샌더스, 엘리자베스 워런, 세 명이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중 이미 대선에 출마해본 경험이 있는 바이든과 샌더스가 좀 더 앞서 있었다. 그런데 세 차례 토론회를 거치면서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우선 첫 번째 토론회에서 카말라 해리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바이든이 토론 실력을 의심 받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지율에는 큰 변동이 없었지만, 미국 언론의 집중적인 검증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 다음에 흔들린 것은 샌더스였다. 바이든처럼 토론회에서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니지만, 2016년 대선에서 보여준 모습과 주장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나쁜 것도 아니고, 사실 샌더스의 오랜 브랜드이기도 하다. 샌더스는 수십 년 동안 줄곧 같은 주장을 해왔고, 거기에서 오는 신뢰를 바탕으로 부동의 지지층을 확보해왔다.

지지율 상승세를 과시한 ‘여성 후보’

태풍의 눈은 워런의 존재였다. 워런은 샌더스와 비슷한 정책적 스탠스를 가지고 있지만, 여성이고, 전국 정치무대에 처음 등장한 신선함을 갖고 있어서 꾸준한 상승세를 보여 왔다. 1년 넘게 달려야 하는 대선 레이스에서 초반기 몇 달의 지지율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지지율 변화의 추세다. 미국 대선주자의 가치는 주식시장에서의 기업 가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승/보합/하락 같은 추세 또는 기세가 중요하다. 유권자들은 ‘상승세 후보’를 선호한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터지기 직전에, 워런은 처음으로 전국 유권자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바이든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내년에 오픈 프라이머리의 첫 격전지가 될 아이오와에서도 워런이 1위를 차지하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워런은 이미 샌더스를 제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샌더스가 반격을 잘 준비하면 재역전이 불가능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두 명만 숨쉴 공간’에 남은 워런

그러던 찰나에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터져나왔고,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탄핵조사 착수를 발표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하필 그날은 샌더스가 경선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중요한 정책 발표를 하기로 한 시점이었다. 트럼프는 미국 언론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처럼 “방 안의 공기를 모두 빨아들였고” 다른 후보들은 주요 뉴스에 등장하지 못하고 질식하는 상태가 벌어졌다.

우크라이나 스캔들 자체는 트럼프가 바이든의 아들을 뒷조사하려다 생겼기 때문에 바이든은 좋든 싫든 뉴스에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순간에 바이든을 막 누르기 시작한 워런은 바이든에 실망한 민주당 지지층에게 딱 좋은 대안으로 비춰지게 된다. 즉, 트럼프가 공기를 다 빨아들인 방 안에는 딱 두 명만 숨 쉴 수 있는 공기만 남게 되었고, 거기에 샌더스는 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4시간 기다려 셀카를 찍은 유권자들

트럼프 탄핵 조사를 결정하던 바로 전날까지, 즉 민주당 경선이 아직 정치 뉴스를 장악하던 시점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끌던 뉴스는 9월 17일에 뉴욕시에서 열린 워런의 유세였다. 민주당 대선 주자들의 소식을 전하는 기자들은 지난 몇 주 동안 “워런의 선거유세 집회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자주해왔다. 워낙 인기 있는 후보여서 유세장에 사람이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지난 몇 주 새 급속도로 청중이 증가하면서 드디어 ‘바람이 불고 있다’는 신호가 잡힌 것이다.

현장 취재 기자들은 특히 워런의 유세장이 ‘도널드 트럼프의 2016년 유세장을 연상시킨다’고 표현한다. 물론 ‘policy wonk(정책에 꼼꼼한 사람)’라는 별명이 붙은 워런을 트럼프와 단순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현장 분위기는 (트럼프 부상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정치인들의 유세장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가령, 후보가 등장하기 전에 사회자가 유세장에 나온 청중들에게 옆 사람과 서로 인사하라고 하는 식으로, 마치 교회에서 열리는 집회처럼 하나의 커뮤니티가 즉석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워런과 유권자들이 함께 하는 ‘셀카’ 시간이다. 여성들의 인기를 많이 모으는 여성 후보라는 점이 어필했는지 모든 유세가 끝난 후에는, 청중들이 워런과 함께 셀카를 찍기 위해 길게 줄을 선다. 그런데 다른 후보와 다른 점은 줄 선 사람들이 전부 사진을 찍을 때까지 워런이 자리를 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뉴욕 유세에서는 집회 후 무려 4시간 동안 셀카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취재 기자가 그렇게 오래 줄을 선 사람에게 이유를 묻자, “오늘은 4시간이지만 다음 번 집회에선 훨씬 더 길어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진보 포퓰리즘? 민주당의 트럼프?

워런의 인기가 2016년의 트럼프를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중도 성향의 온건파가 그들이다. 가령 <뉴욕타임스>의 대표적인 보수 컬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워런의 뉴욕 유세가 열리고 난 후 ‘워런 프레지던시(presidency)의 짧은 역사’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이 글은 30년 후인 2050년의 미래 시점에서 2020년 대선과 그 후를 상상해본 것이다. ‘진보 포퓰리즘’의 상승세를 타고 민주당 후보가 된 워런이 트럼프를 누르고 당선되었을 경우 벌어질 가상 시나리오다.

브룩스는 2020년에 민주당이 백악관은 물론 하원과 상원까지 모두 차지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워런의 프레지던시가 어떻게 펼쳐질지를 예측해본다.

“결론은 대실패.”

의료보험 확대, 대학교 무상교육, 부자 증세 등 워런의 진보적인 공약들이 민주당이 우세한 상원에서조차 통과되지 못한다는 우울한 전망을 깔고 있다. 이유는 공화당 지지 성향인 빨간색 주(red states)에서 당선된 상원의원은 아무리 민주당 소속일망정 자기 주(州) 유권자들을 화나게 하는 법안에 찬성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2030년엔 포퓰리즘 약화 낙관론도

결국 민주당의 온건파와 워런 사이에 큰 갈등이 빚어지지만 이미 약화될 대로 약화된 공화당은 더 이상 힘을 못 쓰게 된다. 이에 따라 2030년이 되면 트럼프를 중심으로 한 우익 포퓰리즘처럼, 워런이 주도하는 진보 포퓰리즘도 힘을 잃게 되고, 온건파 중심의 민주당이 미국을 장악한다는 시나리오가 나온다. 이런 분석은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 워런의 정책 성향에 대한 반신반의가 존재함을 느끼게 만든다.

현실정치는 이론이 아니고, 전문가의 예상처럼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브룩스는 2015년에 “트럼프는 대통령을 하려고 나온 게 아니라 다른 어젠다를 가진 사람”이라고 전망했었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 지명을 받으면서 예상을 깨기까지에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실현 가능성을 떠나서 아주 흥미롭고 유익한 시나리오인 것은 사실이다. 미국의 정치 지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워런 당선 때 국방예산 삭감은 확실시

대외정책 분야가 강하지 않은 워런이 대통령이 될 경우 어떤 외교노선을 펼치게 될지는 예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현재까지 워런이 발표한 내용과 진보 포퓰리즘의 관점을 고려해보면 전혀 예측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국방예산 삭감이다. 미국은 근래 들어 국방예산을 줄곧 삭감했지만, 트럼프는 2020년 예산안에서 국방예산을 4% 넘게 증액했다. (대신 외교 부문에서 해외원조를 삭감했다). 반면 워런은 샌더스와 함께 국방예산 삭감을 다짐해왔고, 해외에 파병된 미군을 본국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유럽이나 동아시아에 주둔해온 미군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파견한 지역에서의 본국 송환이다. 대신 워런은 외교를 강화하겠다고 다짐한다. 특히 트럼프 집권 이후 우수한 인재가 빠져나가고 있는 국무부를 재구축하겠다(“rebuild”)고 약속하면서, 중국이 시진핑(習近平) 집권 이후에 외교부문 지출을 두 배로 늘린 것을 지적한다.

주한미군 분담금 증액 요구할 듯

그렇다면 한반도 정책은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까. 워런이 주한미군의 방위비 분담 증액을 핑계로 미군 철수와 같은 위협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국방예산 삭감을 본격 추진할 경우 한국에 대한 방위비 증액 요구는 다시 거세질 수 있다.

물론 더 큰 관심사는 트럼프가 추진해온 북미 대화를 통한 비핵화 시도를 이어갈 것이냐다. 워런은 이와 관련해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트럼프가 방법론에서 잘못되었다는 스탠스를 취해왔다.

가령, 미중 무역전쟁에 관해 새로운 조치를 취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관세에 의존한 방법론에는 반대한다. 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신할 무역협정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트럼프가 추진하는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에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대북제재엔 찬성, 군사행동엔 반대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의 북핵 회담 역시 워런은 그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요즘 트럼프가 진행하는 것처럼 아무런 로드맵도 없이, 계약 이행을 확인할 장치도 없이 진행하는 협상에는 반대한다고 말해왔다. 미국인들은 이 때문에 워런을 매파(hawks)라고 분류한다. 실제로 워런은 2018년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더 공격적으로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2017년에는 북한을 포함한 러시아·이란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샌더스는 반대)

트럼프는 북한과의 협상을 시작하기 전인 2017년,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할 수 있다’고 말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 때 미 의회의 전쟁 선포 없이 백악관의 결정만으로 북한을 공격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공동 제안했던 사람이 워런이다. 따라서 워런을 원칙적인 매파로 분류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존 볼턴처럼 군사행동을 불사하려는 강경파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와 같은 적극적인 대화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라 기대하기에는 관심사가 많이 다른 정치인이다.

향후 5년, 북미 대화 마지막 기회

워런은 지난 수십 년간 대북 경제제재와 무관심으로 일관해온 민주·공화당의 주류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후보 중 한 명이다. (워런의 외교 전략의 기초를 닦고 있는 보좌관들은 “민주주의 전파보다 그것을 지키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데이비드 브룩스의 예언처럼 정말로 2024년에 민주당의 온건파가 주도권을 되찾게 된다면 앞으로 남은 5년이란 시간이 미국과 북한 사이에 전향적인 대화가 가능한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른다. 그 조건은 제재를 통한 대화 압박일 것이다.

박상현 / (사)코드 미디어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