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식탁은 최근 발간된 책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를 소개한다. (원 제목은 ≪Asia’s Reckoning≫)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가 쓴 해제 전문(全文)을 통해서다.

문정인 교수는 이 책을 어릴 때 밤새 읽었던 <삼국지>에 비유하고 있다.

문 교수는 “미·중·일 3국 간의 주요 사건들, 그를 둘러싼 지도자들 간의 막전막후 대립과 협상, 주요 지도자들의 프로필을 가감 없이 충실하고 객관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문 교수는 ①역사와 현실주의 ②지도자 중심론 ③과거사와 역사전쟁 ④동아시아의 세력 전이와 지정학적 불확실성 ⑤국내정치의 영향력이란 5개의 시각으로 이 책을 읽어 볼 것을 제안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삼국지’의 주역은 미·중·일 3국이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1971년 미중 화해와 소련 포위 구도, 21세기 중국의 패권 도전이라는 산맥을 넘으면서 세 나라는 이제 치열한 패권 다툼을 펼치고 있다.

저자인 리처드 맥그레거는 <파이낸셜 타임스(FT)>의 도쿄·베이징·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한 기자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미·중·일의 동아시아 패권전쟁 70년 역사를 현장중계를 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들 3국의 자국 중심주의와 치킨 게임의 민낯을 파헤치고 있다.

이를테면 1994년 일본 정부는 미국이 일본을 건너뛰어 중국과 손을 잡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당시 관방대신 가토 고이치가 윌리엄 페리에게 건넨 말이다. “당신들이 우리를 버리고 중국에 가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중국은 새로 만난 젊은 애인이고 일본은 늙은 정부(情婦)인데요.”

서양 기자가 자신에게 생소한 동아시아의 난마(亂麻) 같은 역사와 외교 현장을 이렇게 재미있게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한반도에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 당시 불었던 훈풍이 잦아들고 온갖 변수와 악재들이 돌출하는 ‘첩첩산중’ 형국이다. 우리 외교안보의 중심축인 한미동맹을 놓고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연합훈련을 ‘완전한 돈 낭비’라는 독설로 뭉개고 있다. 머지않아 한국에 지상 발사형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추진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럴 경우 중국의 강력한 반발과 보복이 예상되지만 트럼프의 스타일로 봐서 최악의 시나리오에도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눈앞의 현실이 어려울수록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때가 많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판을 어떻게 짜려고 하는가, 일본은 미·중 사이에서 변치 않는 미국의 우군인가, 중국은 한·미·일 협력 구도의 틈새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한국은 어떤 선택지를 갖고 있는가…. 이 책을 읽다 보면 무수한 의문과 고민과 해법을 떠올리게 된다. [편집자]

‘불길한 아시아의 미래론’이 가시화되나

‘아시아의 미래는 유럽의 과거가 될 것이다.’

애론 프리드버그 프린스턴대학 교수가 1994년 한 논문에서 내린 결론이다.

냉전 구도가 해체되고 유럽과 아시아에서 새로운 평화 질서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던 그 무렵에, 아시아의 미래가 유럽의 과거와 같이 대립과 반목, 그리고 전쟁으로 점철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그리 큰 공감을 얻지 못했다. 당시 현실과 거리가 있어서 단순한 예측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나 2017년에 출간된 이 책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원 제목은 ≪Asia’s Reckoning≫)에서 저자 리처드 맥그레거(Richard McGregor)는 프리드버그 교수가 오래 전에 제기했던 ‘불길한 아시아의 미래론’에 탄탄한 경험적 토대를 제공해 주고 있다.

리처드 맥그레거는 호주 시드니대학 출신으로 <파이낸셜 타임스(FT)>의 도쿄·베이징·워싱턴 지국장을 차례로 지낸 명망 있는 언론인이자 저술가이다.

1996년에는 변화하는 일본을 날카로운 각도에서 다룬 ≪일본이 흔들린다(Japan Swing)≫, 2010년에는 중국공산당을 심층적으로 추적한 ≪더 파티(The Party)≫라는 화제작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금년에는 시진핑 주석에 대한 비판적인 평전으로 알려진 ≪시진핑: 반격(Xi Jinping: Backlash)≫을 출판했다.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하고 현지 사정에 밝은 지역 전문가이다.

“지정학적 격변, 개인 간의 갈등, 경제 라이벌 관계, 무역 분쟁, 그리고 끝나지 않는 역사 논란을 짚어가며 전후 중국, 일본, 미국의 삼자 관계가 진화해온 길을 추적한다.” 저자가 밝힌 이 책의 출판 의도이다.

미·중·일 70년사를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구성

모두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전후(戰後)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70년 동안의 미·중·일 3국 관계를 시기별로, 사건별로 잘 정리하고 있다.

전후 기간을 다룬 1부 1장에서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 이후 일중 관계와 미일 관계, 1970년대를 다룬 2부의 2장, 3장에서는 1971년 헨리 키신저의 비밀 방중 이후 미중, 미일, 중일 관계 및 일중 수교, 대만 문제 등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3부 4장에서는 1980년대 초 덩샤오핑의 방일, 방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중일, 중미 관계, 그리고 5장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부상에 따른 미일 무역 분쟁과 일본 내 반미 정서를 상세하게 파헤치고 있다.

1990년대를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4부 6장은 ‘아시아적 가치’ 중심으로 전개되는 중일 마찰과 미일 대립을, 그리고 7장에서는 대만 문제를 둘러싼 미중 갈등과 과거사 문제로 재점화된 중·일 역사 분쟁을 중점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이 책자의 절반을 할애한 5부에서는 21세기 들어와 전개된 중일 역사 분쟁(8장), 역사 문제를 둘러싼 중·일·미의 셈법(9장), 일본의 안보 마피아와 하토야마 내각의 좌절(10장), 중국의 부상과 그에 따른 영토 충돌(11장, 12장), 노다 내각의 센카쿠/댜오위다오 섬 국유화 결정과 그에 대한 중국의 저항과 미국의 개입(13장), 시진핑과 아베의 부상, 그리고 새로운 중일 대립(14장), 중일 대립의 심화와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 전략(15장) 등 광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중국 내 대일 배상금 청구 운동, 트럼프의 등장과 미국의 대(對)아시아 정책의 변화를 분석하면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삼국지≫ 같은 뛰어난 문장력과 스토리텔링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그 방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미·중·일 70년 관계사를 500여 쪽에 걸쳐 아주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구성이 아주 흥미진진하다.

어린 시절 ≪삼국지≫를 읽었을 때처럼 이 책을 밤새 읽어 내려갔다. 박진감이 넘친다. 저자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미·중·일 3국 간의 주요 사건들, 그를 둘러싼 지도자들 간의 막전막후 대립과 협상, 주요 지도자들의 프로필을 가감 없이 충실하고 객관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미국, 중국, 일본의 정부 문건 등 1차 사료, 주요 인사 인터뷰, 그리고 2차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널리스트의 현장 르포 이상이다. 아주 귀중한 동아시아 외교사 문헌이다. 맥그레거 기자는 참으로 부지런히 ‘발로 쓰는’ 작가다. 그 정도로 속속들이 팩트와 사료들을 파헤치고 있다. 구체성의 극치다. 그러면서도 미·중·일 3국의 전략적 상호작용과 이들 3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 맥락이라는 큰 그림을 놓치지 않고 있다.

영어 원문의 문장력 또한 탁월하다. 아마도 지난 70년간의 미-중-일 3각 관계를 이처럼 밀도 있게 파헤친 책자는 드물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문도 그러하지만 번역 또한 출중하다. 이렇게 정확하고 유려한 문체의 번역서를 오랜만에 접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현재까지 시대별, 주요 사건별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엮어낸 이 방대한 책을 요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통해 이 책의 전체 윤곽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현실주의 시각에서 ‘협력은 예외, 갈등이 본질’

첫째, 역사와 현실주의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 저자는 과거 역사에 대한 성찰 없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역사는 냉혹한 현실주의에 의해 작동되어 왔다는 것이다.

현실주의 시각에 보면 협력은 예외이고 갈등이야말로 국제정치의 본질이며 일상이다. 국제관계란 중앙의 통제가 존재하지 않는 아나키(무정부)적 상태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적자생존 논리가 기본 규칙이다.

19세기 중반 영국 총리를 지낸 파머스턴 경은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고 오로지 국익만 있을 뿐”이라는 표현으로 현실주의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바 있다.

이렇듯 저자는 지정학, 경제 경합과 분쟁, 그리고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역사의 망령이 미·중·일 3국 간의 전략적 불안정을 구조화하고, 현실주의적 비관론을 팽배하게 만든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책은 2012년에 출간된 로버트 카플란의 ≪지리의 복수(The Revenge of Geography)≫를 연상케 한다. 대륙과 해양을 둘러싼 미중 간의 세계 패권 경쟁과 중일 간의 지역패권 경합이 아시아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비관론 말이다.

각국 지도자 간의 반목과 갈등을 통해 분석

둘째, ‘지도자 중심론’이 이 책의 핵심 축이다. 국제 구조나 국가 이익이라는 객관적 변수가 아니라 주요 정책 결정자, 특히 정치 지도자들의 신념, 선호, 개인적 배경, 그리고 지도자들 간의 반목과 갈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흐름을 도출해내고 있다. 요시다, 기시, 사토, 다나카, 후쿠다. 나카소네, 하토야마, 고이즈미, 아베 등 전후 일본의 쟁쟁한 지도자들의 프로필, 미중 지도자들과의 인적 연계와 협상 방식, 그리고 이념과 정책 방향등에 대한 분석은 압권이다.

일본 총리(2009년 9월∼2010년 6월)였던 하토야마 유키오의 동아시아 중심주의와 친중 노선이 조부와 부친의 영향이라는 것, 그리고 아베 신조 총리의 역사수정주의와 반중·친미 정책에도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아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일본보다는 비교적 단순하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다섯 명의 중국 지도자들을 심층적으로 분석, 이들의 개인적 배경이 대일·대미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세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클린턴, 조지 W. 부시, 오바마, 그리고 트럼프에 대한 분석도 예리하다. 엄밀히 말해 이 책은 미·중·일 주요 지도자들의 평전과 다를 바 없다.

‘아시아판 장미전쟁’으로 평화의 길은 요원

셋째, 아마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과거사와 역사 전쟁’을 생생하게 부각시킨 데 있다. 저자의 말을 들어 보자.

“아시아판 장미전쟁은 여러 전쟁터에서 벌어졌다. 전쟁은 영유권 분쟁 해역에서, 동맹국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의 악행을 고발하는 국제회의장에서 치러졌다. 때로는 언론을 통해, 때로는 태평양전쟁의 진실과 책임을 놓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신랄하고 독선적인 공방전을 통해 전쟁은 치러졌다.”

그렇다. 불행하게도 역사의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아시아가 반목과 대립을 극복하고 평화의 길로 가는 것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사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근대화와 세계화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사와 민족주의 문제는 모두 청산된 것으로 보았다.

전후 일본은 중국과 한국에 충분히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했다고 믿었고, 중국과 한국도 경제적 지원을 얻으면서 이 사과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일본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를 부각시키면서 ‘피해자 국가’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1894~1895년 청일전쟁과 일본의 타이완 점유, 1931년 만주사변과 일본 군국주의의 잔재, 1937년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 그리고 태평양전쟁 중에 벌어진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 중국의 지도자들과 인민들은 이것들에 대한 집단기억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1954년 마오쩌둥 주석은 일본 대표단을 접견할 당시 이렇게 이야기했다.

“매일 사죄를 강요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느 국가든 자꾸만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고충을 이해합니다.”

뒤이어 덩샤오핑도 과거사를 잊고 중일 관계의 미래만 생각하자고 일본 측에 일관되게 제안했다.

그러나 두 지도자의 결정만으로 중일 관계의 과거는 청산된 게 아니었다.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장쩌민은 애국주의를 표방하며 과거사 문제에 불을 당겼고 반일 정서 확산의 선봉에 섰다.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으로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후진타오도 결국 일본에 등을 돌렸고, 시진핑 역시 강경 자세를 취해 왔다.

이는 중국의 일방적인 반일 감정이 아니었다. 일본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 그리고 센카쿠/댜오위다오 국유화 논쟁을 통해 중국을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 지도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키신저의 인식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키신저는 일본이 ‘못되고 위험한 자들’이지만, 힘의 균형을 위해서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0년대 후반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키신저로선 중일전쟁 당시 일본의 만행을 직간접으로 목격한 경험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는 섬유제품 수출 문제를 둘러싸고 미일 간에 통상마찰이 일어나고 있던 시점이기도 하다.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경직된 태도는 비단 키신저에 그치지 않는다.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도 대통령 재임 당시 과거사를 사죄하지 않는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 관계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는 점을 누차 지적하는 한편, 야스쿠니 신사 참배, 위안부 문제, 그리고 아베 총리의 역사수정주의 시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저자는 아베에게 역사 문제로 불만을 품은 당사자를 열거하며 “중국, 한국, 미국의 민주당 세력만이 아니라 미일 동맹의 주축이 되어온 공화당 진영까지도 역사문제로 불거진 아시아의 새로운 지정학적 갈등에 경악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이 ‘피해자 국가’로 변신하려 해선 안 돼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공습을 기억하는 미국인들에게, 비록 일본이 미국의 동맹으로 남아 있지만 언제라도 미국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나라라는 인식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소설에 나온 구절처럼 “기억이 진정한 정의인지, 아니면 그것이 새로운 공포를 만들지”는 불분명하다. 장 자크 루소가 이야기했듯이 역사적 진실은 “나의 진실, 너의 진실, 그들이 말하는 진실, 그리고 진실 그 자체”가 혼재되어 경쟁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의 태도다. 저자의 말을 다시 들어 보자.

“유럽 국가들의 경우,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인정함으로써 전후 폐허를 딛고 단결할 수 있었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전쟁과 과거사 갈등이 정치·외교·정서 어느 면에서도 해결되지 못했다. 유럽의 상처를 아물게 해준 자기성찰과 정치적 수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본이 전후 미국이 강요한 ‘승자의 정의’에 불만을 제기하고, 히로시마를 상기시키면서 ‘피해자 국가’로 변신하려고 시도하는 한, 아시아의 평화는 어려울 것이다. 2016년 5월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추모 모임에서 중국 외교부장 왕이가 한 발언은 되새길 만하다.

“물론 히로시마는 중요하다. 하지만 난징은 히로시마보다도 더 잊혀서는 안 될 장소이다. 희생자를 동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가해자가 책임을 내버려서는 안 된다.”

미·중·일 삼각 치킨게임의 시작은 ‘닉슨의 방중’

넷째, 동아시아의 세력 전이와 지정학적 불확실성에 대한 분석이 또 다른 축을 구성하고 있다. 기하학적으로 볼 때 삼각 구도는 아주 불안한데, 국제정치도 그렇다. 언제든 한 축이 다른 한 축과 연합하여 제3의 축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저자는 이 삼각구도의 불안정성을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접목하고 있다. 아래 인용문에서 이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은 중국을 겨냥해 총을 겨누고 있다. 중국은 일본과 미국을 동시에 위협한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본은 미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이 삼각구도를 완성한다. 일본이 미국을 저버리거나 미일 동맹을 격하한다면, 중국과 충돌할 때와 마찬가지로 전후 체제는 뒤집힐 것이다. 이 삼각 치킨게임에서는 누군가 무기를 발사하는 순간 모두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아시아 미래의 열쇠를 중국이 쥐고 있듯이 중국의 열쇠를 일본이, 일본의 열쇠를 미국이 쥐고 있는 셈이다.”

이 삼각 치킨게임은 1971∼1972년 키신저와 닉슨의 방중에서부터 비롯됐다 할 수 있다. 당시 키신저는 소련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바랐다. 중국은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소련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카드로 보았다. 그렇지만 미국은 중국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주일 미군이 있어야 일본의 부상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일·중 양국이 서로를 경계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미국 없는 일본이 미국 있는 일본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걸 그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1971년 닉슨이 키신저에게 했던 말이다.

미국이 바란 것은 중일에 대한 이중 외교를 전개하며 이 지역에 ‘분할과 지배 (divide and rule)’ 구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반면 일본은 이러한 미국의 방기(abandonment) 전략을 간파하고 중국과의 비밀 협상을 전개, 1972년 미국보다 더 일찍 중국과 수교하였던 것이다.

‘산 하나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살 수 없다(一山不容二虎).’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속담이다. 동아시아 3각 구도의 불안정성은 이 속담의 변형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은 이 속담을 일본과의 관계에 적용했다. 일본과의 지역패권 경쟁을 제로섬게임으로 인식하는 중국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도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여기에 역점을 두고 있다.

중국은 더 이상 일본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은 이제 더 이상 일본에 신경 쓰지 않는다. 2012년 시진핑이 ‘신형대국 관계론’을 표명하고 나선 이후 세계 패권을 두고 두 호랑이가 겨루고 있는 형국이다. 지는 패권국 미국, 뜨는 도전국 중국 사이에 세력 전이가 일어나고 있고, 이는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가 예고해 온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중국 중심으로 재편된 아시아 질서는 미국이 수용할 수 없다. 그래서 미국은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오바마), 인도태평양 전략(트럼프)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 밀착하면서 지정학적 삼자 구도는 양자 구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동중국해, 남중국해, 대만 해협, 그리고 한반도에서 미중 양자 대결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아시아의 미래가 어두운 이유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지만 일본과 중국 양쪽에 대한 우려가 깊다고 지적한다. 아베 정부가 일본과 미국 사이에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공동 가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불신이 깊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과거사 문제가 타결되지 않는 가운데 아베가 평화헌법 개헌 등 역사수정주의 어젠다를 정치쟁점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더 본질적인 문제가 가치 체계의 상이성에 온다고 본다. 중국과 일본은 아직도 질서와 위계 체제에 방점을 두는 반면, 미국은 대중민주주의를 강조한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지만 일본에 대한 우려가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재무장한 일본이 중국에 도전하는 것이나,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중국이 미국에 대해 도전하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이 삼각관계의 어느 한 축에서라도 충돌이 발생하게 되면 이것이 전체 동아시아의 균형체제를 무너뜨리면서 전쟁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동중국해에 있어서 중일 갈등과 그에 따른 미국의 개입이 하나의 전쟁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국경선에서 멈추지 않는’ 국내정치가 위기 초래

다섯째,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 현실주의 이론의 핵심 명제이다.

국제관계의 기존 단위는 국가이고, 정당 및 시민사회의 이익은 국가에 수렴되어 국가 외교행위를 통해서만 상대국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세력균형이론이든 공세적 현실주의이든 강대국 간 힘의 배분이 주요 분석 단위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지정학적 변수와 강대국 간 힘의 배분도 중요하나 실제로는 국내정치가 외교 관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일본의 보수 정치인들이 왜 중국, 미국, 한국 등 국제 사회가 한 목소리로 반대하는데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매 5년마다 역사 교과서를 수정하려고 하는가?

그 답은 국내정치에 있다. 여기에는 물론 본인의 정치적 신념도 있겠지만 국내 보수세력들을 결집하고 선거에서 승리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외교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국내정치의 셈법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2001년 일본 역사 교과서 논란은 중국 내 정치상황이 달랐더라면 무사히 넘어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논란은 중국에서 5년마다 열리는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직전에 터졌다. 역사교과서 문제가 정치 지도자들의 동네북이 되고 만 것이다.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도 외교문제가 국내정치의 쟁점이 되면 외교부의 위상과 노력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2012년 이시하라 신타로 당시 도쿄도지사를 중심으로 한 극우파들이 센카쿠 열도 사유화를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하자 노다 내각은 이 문제가 외교적 쟁점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섬들에 대한 국유화 결정을 내렸다. 중국 지도부는 그 취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강력히 대응했다. 중국 내에서 반일 정서를 고취시키고 그걸 통해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함양시키는 호재로 삼았던 것이다. 중국처럼 공산당 일당지배 체제 하에서도 인민 정서와 국내정치가 외교 정책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트럼프의 고립주의가 ‘팍스 시니카’를 가속화

저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 정책 역시 국내정치 변수와 연동시켜 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아메리카 퍼스트’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의 동맹 체제를 금가게 하고 미국이 누렸던 국제적 지도력을 훼손하는 고립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왜 그럴까? 이는 트럼프가 가진 신념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대선 전략의 일환이다. 국제 사회가 미국의 전략적 신뢰성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는 것은 매 4년마다 열리는 대통령 선거,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미국의 외교정책이 급격히 선회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듯 국내정치 변수는 외교정책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한 국가의 외교정책은 대외적 힘의 배분과 국내정치적 역동성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신고전적 현실주의(neo-classical realism)’ 명제가 더 타당성 있어 보이는 이유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아시아 국가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린 것은 미국의 패권적 지도력 때문이라고 본다. 특히 미 해군이 이 지역의 해상통로 안전을 담보하면서 평화와 번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미래에 대해선 강한 의구심을 제기한다. 중국의 부상에 대한 우려,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 정서의 부활 등이 미국의 패권적 리더십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전개하고 있는 일련의 ‘아메리카 퍼스트’ 식의 고립주의 정책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쇠퇴를 재촉하고 ‘팍스 시니카(Pax Sinica)’라는 중국 중심의 질서 출현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다. 단순히 국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의 자질이 미국 패권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아시아가 직면하고 있는 세력 전이의 전환기적 불확실성에 대한 냉철한 진단이다.

동아시아 패권 향방과 한국 생존 전략을 찾아야

이 책은 흠잡을 데 없을 만큼 탁월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현장 르포이자 외교사 문헌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한반도가 전체적인 맥락에서 경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 핵문제, 남북한 군사 분쟁, 그리고 한국이나 북한 지도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편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반응과 미국의 중재, 그리고 북핵 문제와 관련된 미중 간 협의에 대해 일부분 다루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한반도는 주된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한반도가 미·중·일 3국의 종속변수로 취급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한국의 독자들이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코리아 패싱은 저자가 갖고 있는 ‘사유의 존재론적 한계’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도쿄, 베이징, 워싱턴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남북한 지도자와의 교류나 한반도 관련 문헌에 대한 접근에서 한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뛰어난 업적이다. 미·중·일 지도자들의 사고방식, 신념체계, 협상방식, 그리고 그에 따른 지난 70년간의 미·중·일 3국 관계를 이해하는 데 이처럼 귀중한 지침서는 드물다고 하겠다.

그런 면에서 한반도 주변 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요즘, 외교·안보 전문가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국제 관계와 한반도의 미래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에게 강력히 일독을 권하고 싶다. 독자들은 미·중·일 3국의 패권 전쟁이 전개된 과정과 방식을 파악하는 한편, 동아시아 패권의 향방을 유추하고 한국의 생존 전략에 대한 실마리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