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65일 중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뜻 깊은 날을 꼽으라면 8월 15일을 꼽을 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날이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날이다. 이에 8월 15일은 대한민국을 이끄는 대통령이 말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가 중요하게 취급돼 왔다. 8.15가 갖는 의미 덕에 주로 남북관계를 비롯한 대외 관계가 주된 메시지였으나, 내부를 향한 메시지도 적잖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2019년 올해는 남북관계, 한일갈등 등 ‘역대급’ 난제가 깔려 있어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내부 메시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성한용 한겨레 기자의 조언을 전한다. [편집자]

“대통령의 권력은 설득하는 힘에 있다. 설득력이란 무엇인가. 바로 말과 글이다. 진심이 담긴 리더의 말 한 마디가 구성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조직이나 국가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민주주의는 말이고 글이다. 말과 글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합의를 이뤄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민주주의 시대 리더는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연설 참모를 지낸 강원국 씨의 <대통령의 글쓰기>(2014)에 나오는 내용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다. 가치와 철학을 담아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9개월을 남기고 김경수 연설기획비서관에게 했던 말이다. 윤태영 부속실장이 <대통령의 말하기>(2016) 서문에서 소개했다.

지난해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수립 70주년’ 경축사의 주제어는 ‘평화’였다. 행사가 열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무대의 배경은 ‘피스’(PEACE)라고 쓴 영어 글자였다. 연단에는 ‘평화’를 의미하는 여러 나라 글자가 새겨졌다. 합창단은 가슴에 ‘평화’라고 쓴 옷을 입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적 통일은 멀었더라도 남북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자유롭게 오가며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광복”이라고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문재인 대통령의 9월 평양 방문이 예정되어 있던 시기였다. 한반도 상공에 감돌던 전운이 물러가고 평화의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6·13 지방선거에서 집권 더불어민주당은 유례가 없을 정도의 압승을 거뒀다. 문재인 대통령의 앞길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돌아오는 8월 15일은 제74주년 광복절이요, 대한민국 정부수립 71주년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에 온 국민과 전 세계의 눈과 귀가 쏠릴 수밖에 없게 됐다. 1년 전과 비교해 너무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첫째, 북미 관계는 중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2019년 2·27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결렬됐지만, 6·30 판문점 북미정상회담으로 협상의 동력은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는 북미관계를 현상유지로 묶는 수준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를 생각인 것 같다. 조급한 북한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다.

둘째, 남북 관계는 소원해졌다.

북미 관계가 장기화되며 유엔의 대북제재로 인한 북한의 경제난도 가중되고 있다. 북한 인민의 고통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다. 북한은 남한의 ‘화끈한’ 지원을 요구하지만, 남한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대열에서 이탈할 수는 없는 일이다.

셋째,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경제 침략이다. 일본은 2018년 10월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을 핑계로 삼았지만 한국의 추월을 저지하려는 전략적 견제가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한일관계는 준전시 상태의 치킨게임 국면으로 접어들며 동북아 질서와 세계 경제를 흔들고 있다.

넷째, 내부 갈등의 격화다.

선거법 패스트 트랙을 계기로 여야 관계는 사실상 파탄 상태다. 국회는 내년 선거까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자유한국당은 황교안 체제가 들어선 뒤 문재인 정부를 ‘좌파 독재’로 몰고 있다. 이념 갈등이 커졌다. 계층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도 점점 더 심각해지는 추세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내부 갈등의 격화다. 지역과 이념과 계층, 세대와 젠더는 우리를 갈래갈래 찢어발기고 있다. 모두가 모두를 미워하는 시대다.

대외관계의 급격한 변화와 내부 갈등의 심화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북미관계, 남북관계, 한일관계의 변화가 이념 갈등과 여야 갈등에 끊임없이 원료를 공급하고 있다.

최근 한일관계가 악화되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일 대열에서 이탈해 북중러 대열로 넘어가려는 것 아니냐고 독설을 퍼부었다. 터무니없는 색깔론이다. 그런데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사실로 믿는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애국이냐 이적이냐”라며 친일파 논란에 불을 질렀다. 자유한국당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조국 전 수석을 비판했다. 조국 전 수석의 이분법적 주장은 비판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한-일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여론은 반일감정이 커지는 쪽으로 급속히 기울고 있다. 자유한국당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 친일파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여권 일각에서는 이런 식의 내부 갈등 격화가 내년 총선에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 같다. 은근히 즐기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국정 지지도와 더불어민주당 정당 지지도 상승은 한일관계 악화로 인한 단기 효과다.

일본과의 치킨게임이 본격화하고 경제난이 가중되면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민심이 악화할 것이다. 아베 정부의 노림수이기도 하다.

황교안 대표의 전략 부재와 무능으로 인한 반사이익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유한국당 지지도가 연말까지 현 수준에 머물면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황교안 대표를 몰아내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총선을 치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내년 총선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설사 총선에서 압승을 한다고 해도 상황은 지금과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개혁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면 먼저 국회 선진화법을 개정해야 한다. 국회 선진화법 개정 즈음이면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말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의 열쇳말은 ‘통합’이어야 한다. 내부에서 힘을 모아야 한-일 치킨게임에서 버틸 수 있다. 내부에서 힘을 모아야 지리한 한반도 평화 대장정을 지치지 않고 밀고 갈 수 있다. 야당과 대화하고 타협해야 점진적으로 개혁을 할 수 있다.

1998~2000년 김대중 정부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임동원 전 외교안보수석을 따로 만나기 위해 휴일인 토요일에 여러 차례 일부러 출근한 일이 있다. 임동원 수석은 의외로 국내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햇볕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안정 과반 의석을 확보해야 하고 야당과의 관계도 원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나라당의 이른바 ‘퍼주기’ 공세가 시작되면서 그 말뜻을 비로소 이해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친일과 분단으로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친일의 역사는 결코 우리 역사의 주류가 아니었다”고 했다. “분단은 안보를 내세운 군부독재의 명분이 되었고, 국민을 편 가르는 이념갈등과 색깔론 정치, 지역주의 정치의 빌미가 되었으며, 특권과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고도 했다.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도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고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우리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잔재”라고 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사설로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비판했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뜬금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런 생각은 뿌리가 꽤나 깊은 것이다. 대통령 선거 직전 2017년 1월에 출간한 <대한민국이 묻는다>에 친일-분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가 최고의 가치인 사람들이죠. 때에 따라 일본이나 외세에 붙고, 독재세력에 붙고, 이런 세력들이 자신의 기득권에 도전해오는 사람들에게 붙이는 딱지가 종북입니다.”

“가짜보수를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국민의 등골을 빼먹은 가짜보수입니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핵심 역할을 한 새누리당 인물들과 지식인들은 다 가짜보수 세력이죠.”

섬뜩할 정도의 적의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배제의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큰 착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같은 책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세계나 신념체계만 고민하면 될지 몰라도, 정치를 통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나라를 새롭게 바꿔보겠다는 각오라면 전체를 다 통합하는 태도와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 1년 뒤 <1219 끝이 시작이다>라는 책을 썼다. 일종의 반성문이다. ‘유연함과 강함의 조화’라는 장에 이런 내용이 있다.

“혹시 우리가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선을 그어 편을 가르거나 우월감을 갖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2017년 5월 10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합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직접 대화하겠습니다. 야당은 국정 운영의 동반자입니다.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습니다”라고 한 말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원내대표가 지난해 11월 5일 청와대에서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를 출범시켰다. 소상공인, 자영업, 저소득층 지원 방안 등 12개 항의 합의문도 발표했다.

안타깝게도 협의체는 지금까지 다시 열리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 체계와 정치 문화에서 대통령과 야당의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당과 야당의 대화가 끊어진 책임은 여야 모두에 있다. 그래도 대통령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짐작컨대 문재인 대통령은 친일과 분단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사명감과 대한민국 정치인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통합의 당위성를 함께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통합 쪽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도왔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2011년 <대통령의 자격>이라는 책을 썼다. 마지막 부분에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언행의 자질 4가지’라는 대목이 있다. 이런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다.

“자기편에 대해서는 ‘선의’라고 하는 관대한 심정윤리를 적용하고, 상대편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 규정을 들이댈 뿐 아니라 심지어 ‘악의’를 갖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사고방식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선악 이분법적 흑백논리다.”

“정치인 중에는 자신은 이념과는 상관없으며 자신의 위상을 ‘상식’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는 그만큼 상식을 넘어서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오늘의 우리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말일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은 거기까지 뿐이다. 만일 국가운영을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정치적 원칙으로서 상식을 내세운다면, 이는 결국 정치적 갈등을 상식 대 비상식(혹은 몰상식)의 대립, 즉 선악의 갈등으로 몰고 가게 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가짜뉴스가 판치고 혐오와 배제가 횡행하는 시대다.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혐오와 배제를 부추겨 성공하는 사례가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와 아베의 성공이 그런 경우다. 어느 나라든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로서는 그런 유혹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는 있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국민통합은 정치의 목적이요, 존재의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성한용 / 한겨레신문 정치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