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FA U20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준우승을 차지했다. 많은 이들이 4강에 올랐던 1983년을 떠올렸다. 당시 '박종환 신드롬'처럼 이번에는 '정정용 리더십'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종성 한양대 교수(스포츠산업학과)가 U20 대회의 성격부터 축구를 통해 우리가 지나온 시대와 지금, 미래의 리더십 변화 맥락까지 짚어봤다. [편집자]

내심 FIFA(국제축구연맹) U20(20세 이하)월드컵 대회 결승에서 한국이 승리하기를 기대했다. 단순히 한국인으로서 한국팀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애국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어떤 무대보다 결과가 잔인한 숫자로 드러나는 스포츠는 U20 한국 축구팀의 정정용 감독의 말처럼 우승을 못하면 연필 한 자루도 얻을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다. 또한 한국 이전 아시아 국가로 U20 대회 결승전에 올랐던 카타르(1981년)와 일본(1999년)이 모두 결승전에서 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 남미에 비해 경기력에서 열세인 아시아 축구가 성장했다는 점을 한국이 분명하게 보여줬으면 했다. 하지만 크게 아쉽지 않았다. 한국 대표팀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서다. 21명의 젊은 축구 선수들 덕분에 우리는 청소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1983년도를 돌이켜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야 할 젊은 세대에 대한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여기에 이번 대회에서도 그러했듯 왜 성인 월드컵에 비해 청소년 월드컵에서는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축구 변방 국가의 역할이 두드러졌는가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제3세계 국가를 위해 출범한 청소년 월드컵

U20 월드컵은 1977년 FIFA 청소년 월드컵이라는 명칭으로 탄생됐다. 이 대회의 역대 개최지를 살펴보면 축구 변방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서 개최된 경우가 전체 22번 가운데 12번이다. 이들의 성적도 준수하다. 우승은 아프리카에서 1번, 준우승은 7번(2019년 한국 포함)이나 차지했다. 여기에다 상대적으로 성인 월드컵 무대에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던 동구권 팀들도 우승 4회, 준우승 2회를 기록했다. 개최지의 대륙별 분포나 성적의 대륙별 평준화만 고려해도 U20 월드컵은 성인 월드컵에 비해 훨씬 더 전지구적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발생했을까? 청소년 월드컵은 1974년 FIFA 회장에 선임된 주앙 아벨란제(브라질)의 작품이다. 아벨란제는 당시 회장 선거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의 성인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늘려주겠다는 공약으로 제3세계로부터 환심을 샀고 결국 회장에 당선됐다. 하지만 FIFA를 장악하고 있던 유럽은 이에 반발했고 당장 아시아, 아프리카의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확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유럽과 남미에 비해 다른 대륙의 축구 실력은 아직 형편없다”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구 변방국가의 지지로 회장이 된 아벨란제는 이들에게 뭔가를 제공해야 하는 부채감이 있었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청소년 월드컵 대회 창설 움직임이 본격화 됐다. 청소년 월드컵 개최의 마지막 관건은 재정적 문제였다. 이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기업이 코카콜라. 중동, 아프리카, 동구권 등 상대적으로 코카콜라 불모지에 자연스레 광고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던 중 청소년 월드컵이 그들의 가시권에 들어왔다. 초기 청소년 월드컵 대회 이름에 코카콜라가 들어가게 된 이유다. 당시 코카콜라의 FIFA 스폰서십 계약은 스포츠 역사상 가장 큰 액수인 500만 달러로 글로벌 기업과 스포츠의 상업적 파트너십이라는 측면에서 신기원을 이룩했다. 이런 시나리오 속에서 시작된 청소년 월드컵 대회는 축구 변방을 위한 대회로 발전했다. 대회 개최지도 1회 대회(튀니지)부터 축구 변방으로 향했다. 더욱이 상대적으로 서유럽의 축구 강국들은 청소년 월드컵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 간극은 축구 변방 국가들의 이변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1983년 4강신화의 재해석

2019년 FIFA U20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오르자 거의 모든 국내 언론은 박종환 사단이 만들어낸 1983년 4강 신화를 소환했다. 미디어는 주로 2019년과 1983년이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해 집중했다. 그런데 아쉬운 부분은 1983년과 2019년을 스파르타 식 축구와 자율 축구로 대비시킨 단순한 이분법적 설정이었다.

물론 이런 분석이 전혀 무리는 아니다. 당시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었던 박종환 감독은 혹독한 훈련으로 정평이 나있는 ‘독사’ 감독이었다. 멕시코 고원지대에서 펼쳐지는 대회에 대비해 산소마스크 훈련을 한 달 넘게 실시했고 선수들에게 콜라를 포함한 청량음료도 먹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박종환 감독은 새로운 신화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정정용 감독과 같이 치밀한 전략가였다. 멕시코 대회에서 성과를 내려면 어떤 게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장신의 유럽과 남미와 대적하려면 한국 선수들이 롱 킥을 줄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심지어 골 킥도 하지 않고 골키퍼는 손으로 패스를 해주는 전략을 썼다. 공중 볼 경쟁에서 불리한 한국 팀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공격적인 수비를 선수들에게 주문했다. 특히 공을 가진 상대 선수에게 얼마나 빨리 한국 선수들이 접근하느냐에 목숨을 걸었다. 대회 전 평가전에서도 아무리 많은 득점을 기록해도 실점을 하면 선수단 전원에게 태릉선수촌 400m 트랙 10바퀴를 돌도록 지시했다. 물론 이와 같은 벌칙은 선수들의 체력적인 준비 차원에서도 필요했지만 실점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였다. 세계 대회에서 실점, 특히 선취점을 내주는 것은 곧 패배라는 점을 선수들에게 각인시킨 셈이다. 실제로 한국 축구는 국제대회에서 중요한 경기마다 선취점을 내주며 힘 한번 못 써보고 패한 경우가 허다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단련된 한국 팀에 대해 멕시코 언론은 ‘붉은 악마’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아벨란제 FIFA 회장도 한국의 빠른 윙 플레이에 감탄했다.

하지만 당시 청소년 대표팀에 대한 지원은 열악했다. 잔디구장에서 연습 한 번 하기 힘든 상황을 차치하고서라도 당시 코칭스태프는 박종환 감독과 원흥재 코치 단 두 명뿐이었다. 피지컬 코치, 골키퍼 코치, 수비 전문 코치를 포함해 5명으로 구성된 2019년 대표팀의 코칭스태프 구성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심지어 1983년 대회에서 선수단의 식사는 코칭스태프가 준비해야 했다. 박종환 감독은 직접 우족(牛足)을 고와 선수들에게 먹어야 할 정도였다. 축구 감독뿐 아니라 요리사 역할까지 한 셈이다. 오직 그들이 받은 특혜는 ‘스포츠 공화국’ 창조에 올인 했던 육사 축구팀 골키퍼 출신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따라 당시에는 매우 이례적으로 대회 개막 15일 전 현지적응을 위해 멕시코로 출국한 것이었다.

국민을 설레게 한 건 정정용의 아이들의 미래

2019 FIFA U20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한국 팀을 지도한 정정용 감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축구 감독이 아니라 어린 선수들에게 마치를 훈수를 두는 축구 좀 아는 삼촌에 가까워 보였다. 중요한 순간 그는 고독한 결정을 내렸겠지만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주변 코칭스태프와 의견을 교환하며 소통하는 여유도 느껴졌다. 선수들을 지휘만 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설득하는 모습도 보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하며 선수들을 다그쳤던 1983년의 박종환 감독과는 180도 달라진 부분이었다.

선수들도 달랐다. 특히 경기장 밖에서 그랬다. 수훈 선수 인터뷰 때마다 판에 박힌 듯한 소감을 늘어놓던 과거와 달리 선수 전원이 개성 있는 말솜씨를 뽐냈다. ‘막내 형’으로 불린 이 대회 최고 스타인 이강인의 인터뷰를 들을 때마다 대표선수로서의 맹목적 사명감보다는 유쾌함과 당돌함이 강하게 느껴졌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겨났을까? 이번 대회에 출전한 21명 선수가운데 19명(K리그15명, 해외리그 4명)은 국·내외 프로 축구 클럽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다. 이들에게는 이 대회가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쇼 케이스 같은 무대라는 점을 1983년 4강 신화를 이룬 선배들보다 훨씬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진가를 극대화하려면 성적이 필요했다. ‘원팀’이라는 기치아래 감독의 지시가 없어도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간파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번 대회에 참여한 어린 선수들이 이 같은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K리그 1, 2부 리그에서 22세 이하 선수들 2명을 무조건 엔트리에 포함시키고 1명 이상을 선발출전 시켜야 한다는 제도가 기여한 바가 컸다.

정정용 감독의 경우도 유소년 축구무대에서 10년 간 있으면서 어떻게 개성 넘치는 어린 선수들과 함께 소통해야 하는지를 터득했을 것이다. 소통의 방식뿐 아니라 동기유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부지불식간에 몸에 배었을 것이다. 팀의 결속력 강화와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윽박지르는 게 아니라 선수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설득해야 한다는 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게 된 셈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정정용 감독은 청소년 선수들을 잘 이끌 수 있는 장인(匠人)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결국 어린 축구 선수들의 경험과 마인드가 바뀐 만큼 이들을 지도하는 방식도 바뀌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1983년과 비교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국민들이 U20 월드컵을 바라보는 시선인 것 같다. 애국심을 기반으로 한국의 선전을 기대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2019년 청소년 축구팀의 준우승 과정을 지켜봤던 한국 축구 팬들은 ‘오늘’의 경기결과만큼 ‘내일’의 성장가능성에 설레어 했다. 이와는 달리 1983년에는 ‘오늘’의 결과를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박종환과 정정용 감독은 모두 쓸쓸하게 선수로서의 인생을 마감한 지도자였다. 실패한 선수가 지도자로 성공하기에는 아직 한국 사회는 다른 분야와 비슷하게 척박하다. 박종환과 정정용 감독은 각각 고등학교 축구부와 유소년 팀 지도에 천착하면서 자신만의 지도 스타일을 구축했고, 주머니 속의 뾰족한 송곳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시대와 세대가 변모하면서 감독의 리더십도 팬들의 인식도 달라졌다. 박종환이나 정정용 감독은 지도방식은 달랐지만 시대에 맞는 리더십을 발휘해 성과를 냈다. 축구 변방 국가를 위해 탄생한 청소년 월드컵에서 일약 스타가 된 두 명의 무명선수 출신 감독이 써 내려간 ‘패자 부활전’의 공통된 성공 방정식이다. 한국 사회에서 멸종되어 가는 ‘패자 부활전’의 가치를 일깨워 준 셈이다.

축구, 시대의 거울이자 나침반

1983년과 2019년의 U20 대회 성공 신화만 두고 보면 한국 축구는 시대의 거울이라 볼 수 있다.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며 국가의 주도 아래 선진국 따라잡기에 몰두했던 1970~80년대처럼, ‘박종환 사단’의 한국 축구는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강력한 리더십 아래 선수들의 절박함으로 똘똘 뭉쳐 큰 성과를 냈다. 2019년 ‘팀 정정용’은 이미 프로에서 활약하는 선수들 개개인의 장점과 개성을 극대화 하며 동기 부여하는 리더십으로 정상급 자리에 올랐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이 어떤 것인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종성 / 교수,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