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 무역 분쟁 '트럼프의 변심'에 세계 시장 출렁.. 일본도 타격
  • 미국을 계속 믿어도 되는가... 동맹국들 의심도 커져
  • 세계는 '달러'의 대안을 찾고 있다
  • 붕괴되는 미국 정통 '리버럴 국제주의'
  • 중-러 동시에 밀어내며 스스로 고립되는 미국
  • 가까워지는 중-러. 일본도 계산기 두드린다
  • 중국의 연구제미(聯歐制美), 연일제미(聯日制美)... 일본도 호응할까
  • 중-일, 청소년 3만 명 상호 교류키로
  • 北 비행체 발사에 조용한 일본
  • 당장은 아니지만... 동아시아 정세, 질적 변화 대비해야
“트럼프 씨 변심(變心) 미·중 암운(暗雲), 대중 관세 25% ‘10일에 제3탄’”.

5월 8일치 <아사히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잘 마무리돼 가는 듯 보였던 미중 무역분쟁 협상이 지난 5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트윗을 통해 날린 한 마디에 일거에 먹구름이 낀 형국으로 돌변했다. 세계 증시도 크게 출렁거렸다. 그가 호언한 대로 이제까지 10%를 부과해 온 2000억 달러 규모의 중국 수출품 관세를 10일부터 25%로 진짜 올릴지는 두고 봐야겠으나, 그가 또 ‘변심’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협상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귀착되든 그 이후에도 그의 마음은 변할 것이고 세계 증시는 그때마다 출렁일 것이다. 출렁이는 것은 증시만이 아니다.

이처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트럼프의 ‘변심’을 지켜보면서, 좀 엉뚱할지 모르지만, 읽고 있던 일본 정치사상 연구자 시라이 사토시의 <국체론>의 다음 구절을 떠올렸다.

“이 일본이라 이름 붙여진 국토에서 사회주의가 창도되고 있는 것은 특별히 해석해야만 할 기괴한 그 무엇이 남는다. 즉 소위 ‘국체론’이라는 것이 ‘사회주의는 국체에 저촉 되는가 아닌가’라는 우려할 만한 문제가 됐다. 이는 딱히 사회주의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떤 신사상이 유입될 때마다 반드시 늘 심문 대상이 되고, 이 ‘국체론’이라는 로마 법왕의 심사를 거스르는 것은 즉시 그 사상을 교살하라는 선고를 받는다. 정론가도 이 때문에 그 자유로운 혀가 묶이고 전제정치하(專政治下)의 노예나 농노 같은 신세가 되며, 이 때문에 신문기자는 지극히 추잡하고 괴이한(醜怪) 아첨(便侫阿諛, 편녕아유)으로 알랑대는 문자를 나열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 때문에 대학교수에서부터 소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윤리학설과 도덕론을 훼손하고 더럽히며(毁傷汚辱), 이 때문에 기독교도 불교도 각기 타락하여 우상(숭배)교가 돼 번갈아가며 타자가 국체에 위험하다며 비방하고 배격한다.”

시라이가 인용한 근대 일본의 ‘우익사회주의자’라는 특이한 이력의 사회사상가요 개혁가 기타 잇키(北一輝, 1883~1937)의 저서 <국체론 및 순정(純正) 사회주의>(1906)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천황제 형성기 ‘일본 문제’의 본질(그것은 오늘날까지 연장되고 있다)을 날카롭게 지적한 글이다. 기타 잇키는 이처럼 ‘국체론=천황제’를 비판하다 1937년 중일전쟁 개시 전해인 1936년의 우익 청년장교들의 쿠데타 ‘2·26사건’ 관여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그야말로 그 자신이 ‘교살’당했지만, 그를 교살한 천황제 국가 일본도 결국 패전으로 교살과 같은 운명을 걸었다.

기타 잇키가 한 위의 얘기 중에서 ‘국체론’을 ‘미국’으로, 그리고 ‘일본’을 ‘한국’ 내지 ‘한반도’로 바꿔 놓고 읽어 보면,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순 없지만, 뭔가 색다르게 다가오는 게 있을 것이다.

세계는 기축통화 ‘달러’의 대안을 찾고 있다

미국의 국제법 및 외교학 전문대학원인 플레처 스쿨(The Fletcher School of Law and Diplomacy)의 교수(국제정치학)인 대니얼 드레즈너(Danel Drezner)가 <포린 어페어즈> 최근판(2019년 5·6월)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 동맹국들이 미국의 일방적인 이란 핵합의 파기 선언 이후 국제거래 결재수단으로 달러를 대체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 작업을 하는 것은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미국 동맹국들뿐만 아니라 이란 핵합의에 동참했던 중국과 러시아의 민간 차원 네트워크. 국제결재 수단으로서의 기축통화 달러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떠받치는 핵심 기둥 가운데 하나다. 이라크와 리비아가 미국이 이끄는 서방의 공격을 받아 무너진 진짜 이유가 바로 석유 부국인 그들 나라가 추진한 결재수단의 교체, 즉 탈 달러 움직임이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동맹체제의 핵심 국가들이 비록 민간 차원이지만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미국이 이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면 예삿일은 아니지 않은가. 드레즈너 교수는 그것이 당장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결국에는 미국 동맹국들과 미국의 라이벌들(중국·러시아 등) 모두 달러 의존체제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란 핵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미국의 외골수에 미국 동맹국들을 비롯한 이란 석유 수입국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장치 가운데 하나가 ‘세컨더리 보이콧’이다. 주로 미국이 주도해 온 국제적인 제재 대상국이나 기업과 거래하는 기업, 국가 등에 대해서도 은행거래 등 금융결재를 할 수 없도록 처벌하는 ‘세컨더리 보이콧(2차 제재)’은 초대국 ‘미국의 질서’를 강제하는 핵심 장치다. 그 장치를 포함한 ‘미국의 질서’ 작동 여부가 미국 대통령의 ‘변심’에 좌우된다면 어느 동맹국인들 대안을 찾지 않으랴. 그 변심은 대상이 동맹국이냐 라이벌(적대·경쟁국)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지금 기아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북의 김정은 체제를 옭죄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그 원인은 따로 따져봐야겠지만) 바로 이 장치다.

드레즈너 교수 기고문은 “이번에는 다르다-왜 미국 외교정책은 다시는 예전 상태를 회복할 수 없을까”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가 말하는 미국 기존 외교정책의 핵심 기조는 ‘리버럴 국제주의’다. 이 미국의 리버럴 국제주의가 무너져가고 있고 트럼프 정권 등장 이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이 확연해지고 있다는 것이 드레즈너 교수의 진단이다. 과거에도 소련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충격에 이어 리처드 닉슨의 브레턴우즈 체제 파기, 요일 쇼크 그리고 미국의 채무와 무역적자 폭증, 9·11사태 등 수많은 경천동지의 사건들과 변화들이 잇따랐지만 그래도 대체로 미국의 리버럴 국제주의라는 대외정책 기조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으나, 트럼프 이후 그것이 더는 불가능한 상태로 가고 있다고 그는 얘기한다.

그렇게 만드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미국 국력의 상대적 저하. 그는 먼저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구매력평가지수(ppp)가 중국에 추월당한 지 이미 몇 년이 됐다는 점을 들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사이트에서 월드팩트북의 국가별로 정리돼 있는 상세 정보에는 2017년 기준 미국의 GDP(ppp기준)는 19.49조 달러이고 중국의 그것은 23.21조 달러로 돼 있다. 공식환율로는 미국이 같은 해 19.49조 달러(ppp기준과 동일)이고 중국은 12.01조 달러. 두 나라 성장률을 토대로 추산하면 ppp기준 GDP가 양국간에 역전된 해는 2014년 전후다. 소비자가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실제 능력(물가 등을 감안한)을 보여주는 ppp기준 1인당 GDP는 같은 해 기준으로 미국은 5만9800달러, 중국은 1만6700달러로 여전히 격차가 크지만, 두 나라 국가생산 총량은 중국이 미국을 추월한 지 이미 5년이 지났고 그 차이는 빠른 속도로 더 벌어지고 있다.(참고로 한국은 2017년 ppp기준 GDP 2.04조 달러, 1인당 GDP는 3만9500달러로, 지난해 1인당 GDP는 4만 달러를 넘어섰을 것으로 추산)

독불장군 트럼프, 중‧러 밀월 관계 형성... 일본도?

그리고 이와 맞물린 중국과 러시아의 비대칭적인 힘의 증대. 트럼프 정권 등장 이후 중국의 국력 증대는 위의 지표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폭발적 신장세를 계속하며 ‘일대일로’에서 보듯 그 힘을 지구 전역으로 확장하고 있고, 러시아는 중동과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게다가 대외정책 능력 면에서 미국은 최종정책 결정권이 대통령(그리고 국방부)에 집중되면서 전통의 대외정책 담당기관인 국무부의 힘이 약화되고 유능한 시니어 전문가들의 탈 국무부 현상뿐만 아니라 국제정치나 국제관계를 공부하는 대학 학부 학생들조차 크게 줄고 있다고 한다. 드레즈너는 리버럴 국제주의의 토대인 지적 토양, 아이디어, 고등교육이 무너지고 자유시장과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지향이 퇴락, 붕괴하는 것을 걱정했다..

이런 미국 국내 사정에다 중·러의 확장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조차 탈 달러 움직임을 보이는 데서 보듯 트럼프 이후, 그리고 팍스아메리카나 이후를 염두에 둔 독자적, 집단적 탈 대미의존 방안을 강구하는 외부 사정의 변화가, 미국 외교정책이 다시는 과거의 위상이나 전략을 되찾기가 전혀 불가능하다고 예단할 수는 없지만 사실상 거의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그런 쪽으로 기울었다는 얘기다.

드레즈너는 이런 상태의 미국을 젠가(Jenga) 게임에 비유했다. 젠가 게임은 작은 직육면체 조각들을 3개씩 가로 세로로 쌓아올린 탑의 꼭대기 아랫부분에서 게임 참가자들이 조각을 번갈아 하나씩 빼내어 위에 올리다가 먼저 탑을 쓰러뜨리면 지는 게임이다. 드레즈너가 보기에 트럼프 정권 이후의 미국은 중간 부분 조각들이 빠져나가 구멍이 숭숭 뚫린 위태로운 모습이다.

그런 구멍을 만드는 미국 핵심 동맹국들의 탈 미국 조짐이 심상찮다. 2012년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분쟁으로 외교관계가 단절되다시피 했던 일본과 중국의 최근 접근, 그리고 중국·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기존 헤게모니 전략의 변화를 좀 더 살펴보자. 핑퐁외교와 닉슨의 베이징 방문에 이어 국교정상화로 나아간 1970년대의 미·중 접근은 당시 냉전체제하에서 중·소분쟁이 만들어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중국을 끌어당김으로써 당시 소련을 고립시켰다. 그것이 결국 소련 붕괴와 동서냉전 붕괴로 이어졌지만, 지금 트럼프 정권의 대중국 전략은 결과적으로 중·러를 오히려 결속시키면서 미국 자신의 고립을 재촉하고 있는 꼴이다.

결국 트럼프에게 당한 아베, 중국에 손 내미나

지난 4월 중순 베이징에서 중·일 제5차 경제고위급회담(베이징)이 열렸는데, 이를 전하는 홍콩 발행 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 야저우저우칸)>(4월 28일 발행)의 기사가 흥미롭다. 왕이 외교부장과 고노 다로 외상이 이끄는 양국 대표단은 그때 중일관계의 정상궤도 회복을 선언하고,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체제를 지지하며, 양국간 전면적인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ECP, 한국도 참여) 추진, 중·일·한 자유무역협정의 조속한 추진 등 10개 항에 합의했다. 그리고 양국 청소년교류 촉진년 개막식도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왕이 외교부장이 향후 5년간 3만 명의 양국 청소년들이 두 나라를 상호방문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6월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릴 G20 정상회담에 시진핑 중국 주석이 참석하고 그때에 맞춰 일본을 국빈 방문하는 문제와 관련한 세부사항도 확정했다.

지난해 10월 아베 신조 총리의 베이징 방문(일본총리로는 7년만의 방중) 이후 빨라지고 있는 중일의 접근은 트럼프 덕이 크다. 트럼프 정부의 ‘아메리카 퍼스트’의 고립주의와 무역전쟁이 양국 급속 접근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잡지는 지적한다.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가장 친밀한 친구’로 추켜세우지만 일본 수출품에 대한 미국의 관세 인상, 주일 미군기지 분담비용 증액 요구, 북한과의 관계 개선 및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논의에서의 일본 소외에 따른 좌절감, 다시 저성장 기조로 돌아간 아베노믹스의 한계 등 경제적 곤란 등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트럼프 정부가 자국을 제1의 경쟁상대로 삼고 무역전쟁을 비롯해 다방면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과 손잡고 미국을 견제하는 ‘연구제미(聯歐制美)’와 동시에 일본과도 손잡는 ‘연일제미(聯日制美)’ 전략을 구사하면서 동아시아 지역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동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한 미국의 ‘각개격파’ 책략을 분쇄하려 한다. 중일 접근은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며, 특히 대미 전략상 중요하다는 얘기다. 청소년 교류와 관련해 1983년 11월에 후야오방 총서기가 일본을 방문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를 만났을 때 일본 청년 3000명을 초청한 적이 있다. 일본은 그때 중국 유학생 10만 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제안을 했다. 잡지는 그 당시의 ‘중일 10년 밀월’이 복구됐다며, 당시의 10배 규모인 3만 명의 청소년 교류는 그들의 가정 및 사회관계를 감안하면 양국관계 발전의 확실한 민간 차원 기초를 다지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분석은 중국의 대일 접근이 대만 차이잉원 총통의 일본 경사 및 일본과 대만 관계의 심화를 막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또 미국은 1970년대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의 중국 접근 때 닉슨 대통령이 일본을 ‘가장 가치 있는 동반자’라고 했듯이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도 아베 총리를 두고 ‘가장 중요한 친구’라고 하지만 모두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정책 포석의 바둑돌로 일본을 이용할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본은 4월 25~26일 베이징에서 열린 ‘제2차 일대일로 국제협력 포럼’에 2년 전 첫 포럼 때와 마찬가지로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이번에는 그에게 총리 특사라는 계급장을 하나 더 달아서 격을 살짝 높였다. 제2차 포럼에는 2년 전의 1차 포럼 때보다 많은 150여 개국이 참여했고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 등 37개국 수뇌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등이 참석했다. G7 국가요 주요 유럽국인 이탈리아가 미국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대일로에 참여한 건 주목할 만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동아시아 및 글로벌 차원의 전략에서 핵심 교두보요 이익을 공유해 온 주요 파트너인 일본이나 서유럽 국가들이 당장 중국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 일본의 중국 접근은 1970~80년대의 그것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때는 냉전이 지속되고 있었고 서방진영 수장으로서의 미국 리더십이 굳건했으며, 일본의 경제상황도 양호했지만 지금은 그런 요소들이 무너졌거나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대미의존 일변도로는 안보와 경제의 안정과 번영을 더는 보장받기 어려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고, 이에 따라 미국에 대한 ‘식민지적 종속’에서 탈피하는 새로운 생존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내부에서 커지고 있다.

달라진 일본의 대북 태도

최근 북의 비행체 발사에 대해 일본 정부가 별것 아니라는 투의 이례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미국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일본인 납치문제를 조건반사처럼 선결조건으로 내세우던 종전 태도와 달리 김정은 위원장과 조건 없이 만나 식민지배 등 과거사 문제까지 논의할 수 있다고 공언한 아베 총리의 자세 변화도 그런 맥락에서 유추해 볼 여지가 있을까.

중‧러의 접근도 1969년 우수리 강 전바오다오(진보도)에서의 군사충돌로 절정에 도달했던 중소분쟁의 균열을 파고들었던 1970년대 미중 접근 때와 전혀 다른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다. 중소분쟁 이전 17세기의 네르친스크 조약, 19세기의 아이훈 조약 등을 통해 시베리아 극동지역 영토를 획정하면서 양국 사이에 쌓인 역사적 앙금들까지 겹쳐 서로 화합하기 어려운 중‧러 사이를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가 밀착시키고 있다. 중‧러 사이도 중‧일 사이처럼 서로 다가가거나 손을 잡는 것이 유리한 상황이 돼 가고 있고, 주로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미국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하고 김 위원장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것,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난 직후 푸틴 대통령이 일대일로 포럼에 참석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 의미를 읽어낼 수도 있다.

드레즈너 교수가 지적했듯이 당장 무슨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진 않겠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에는 그런 관계들이 질적으로 변하는 결정적인 국면이 찾아올 것이다. 젠가 게임에선 중간이나 아랫부분에 구멍이 숭숭 뚫려도 탑은 여전히 같은 높이로 서 있다. 무너질 때까지는. 구멍이 숭숭 뚫린 탑은 마지막까지 높이를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아주 미세한 충격(접촉)만으로도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그런 때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한승동 / <피렌체의 식탁> 편집인, 전 <한겨레>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