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콩회항' 단순 복기 아닌, 트라우마 극복 성장 스토리
  • 방관자에서 피해자로, 다시 일어서기까지
  • 땅콩회항 후 박창진이 만난 사람들
  • '문송합니다'? 우리 사회 기득권 문과 4적
  • 재벌-경영, 입법-행정-사법, 언론 장악
  • 50대, 문과, 남성... 잠재적 가해자 집단
  • 우리들 역시 언제든 갑질 피해자 될 수 있는 방관자들
  • 재난 겪고도 성찰하지 않는 사회
[김하영 / 편집장]

2014년 12월 ‘땅콩회항’ 사건은 국내 뿐 아니라 세계를 뒤흔든 화제였다. 당시 사건의 피해자인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이 당시 사건의 전후 과정을 기록한 책 <플라이백>(메디치)을 출간했다. 상상도 못할 사건을 겪는 동안 박창진 사무장의 주변에서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거울과도 같다. 거울을 들여다봐야 할 사람들을 꼽아 봤다.

1. 조현아 씨를 비롯한 대한항공 오너 일가, 그리고 가신들사람은 본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객관적으로 돌아보기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조현아 부사장을 비롯해 조 씨 일가가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비단 ‘땅콩회항’ 사건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조 씨 일가가 대한항공 항공기에 탑승할 때면 회사는 거의 비상이었다. ‘성깔’을 알기 때문에 오너 일가 서비스를 위한 승무원 특별조를 꾸려 주의사항을 교육했다. 정비 파트는 비행기를 뜯어서 새로 만들다 시피 했고, 청소 파트도 평소보다 몇 배의 인원이 투입돼 기내의 때를 빼고 광을 냈다. 외국인 기장들은 이 풍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한다. 박창진 사무장은 입사 3개월 만에 오너 일가 비행편에 차출된 ‘엘리트’ 승무원이었다. 그가 운명의 땅콩회항 편에 오른 이유도 VIP 서비스 경험이 많아 ‘조현아 부사장’ 탑승편에 차출된 것이었다. 당신들이 비행기를 탈 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비용 절감이라며 이면지 사용을 강요했을 때, 유니폼 바꾼다고 난리법석을 피울 때 얼마나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이 책에 나와 있다.

성찰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조 씨 일가 주변에는 직언을 해주는 충직한 참모도 없는 것 같다. 국민연금과 행동주의 펀드, 외국인 주주들이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을 내쫓았지만 대한항공의 반응은 사실상 “조 씨 일가의 지배에 아무 문제없다”는 것이었다. 대한항공 경영진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인식 수준이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박창진 사무장의 표현에 따르면 대한항공에는 당 태종에게 날선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위징’ 같은 인물이 없다. 이 책은 조 씨 일가와 대한항공 경영진에게 위징이 되어 줄 것이다. 만약 서점에 가서 사거나 비서를 시켜 사오라 부탁하기 부끄러우면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하면 된다.

2. 국회의원들어느 날 미국행 비행편 퍼스트클래스에 한 야당 국회의원이 탑승했다. 당시 퍼스트클래스는 예약이 안 돼 있었지만 비즈니스 클래스를 예약한 국회의원 부부의 좌석이 승급돼 퍼스트클래스에 탑승한 것이다. 퍼스트클래스는 교육을 이수한 승무원만 서비스할 수 있었는데 당시 퍼스트클래스 예약이 없어 승무원 배정이 없었다. 그래서 퍼스트클래스에 다른 객실 승무원이 투입되느라 서비스 제공이 더뎠다. 야당 국회의원은 화가 났다. 그가 했다는 말들이다.

“내가 누군지 알지?…내가 아까 출발할 때도 조현아한테 전화 왔었어, 이거저거 부탁한다고, 여행 잘 다녀오라고 말이야.…지금 내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분과 위원장인 거 알지 모르겠군.”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공항에 도착해 내리는 과정에서 승무원 중 한 명이 정신이 없어 퍼스트클래스 비치 고가 헤드폰이 분실된 것으로 착각을 했다. 국회의원 부부에게 이를 확인했고, 그 국회의원은 ‘도둑 취급한다’며 단단히 화가 났다. 조현아 씨에게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엘리트’ 사무장이었던 박창진 사무장은 이 일로 팀장에서 팀원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첫 번째 강등이었다.(두 번 째는 땅콩회항 후)

그런가 하면, 박창진 사무장을 울컥하게 한 국회의원도 있다. ‘조현민 물컵 갑질’ 사건으로 그가 다시 세상에 나와 1인 시위를 벌일 때 따뜻하게 손을 내민 이가 있었다.

“박 사무장님, 인간이 인간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그동안 힘드셨죠. 사무장님이 4년 동안 최선을 다해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깨 펴시고 더 단단해지십시오. 사무장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누군가 비난하더라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고 노회찬 의원이었다. 박창진 사무장은 “그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해졌고, 그날 그가 건넨 위로의 말이 두고두고 마음속에 따뜻한 온기로 남았다”고 했다.

당신은 어떤 국회의원인가.

3. 법조인들예전엔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법정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다. 박창진 사무장도 본인이 법정에 서는 날이 올까 생각이나 했을까. 결국 ‘땅콩회항’ 사건 때문에 대한민국의 사법 세계를 경험하게 됐다.

박창진 사무장은 땅콩회항 직후 회사의 강요에 경위서와 시말서까지 쓰고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지만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가 됐고, 검찰 고발까지 이뤄지며 본의 아니게 검찰 수사관들에게 연행되듯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수사관들 말투는 위압적이고 거칠었으며, ‘반복적인 진술’을 요구했다. 피의자를 다루듯 윽박질러 본인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조현아 씨에 대한 형사 재판. 박 사무장의 증언에 따르면 “거액의 변호인단 십여 명”은 “위압적인 눈빛과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며”, “막다른 골목에 막힌 먹잇감에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야수”처럼 질문을 이어갔다고 한다.

박 사무장은 “한때 법조인들에 대한 나름의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법이라는 도구로 세상의 옳고 그름을 가리고, 누군가의 삶의 궤도를 바꿔놓기도 하는 그들은 마치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날 법정에서 마주한 변호사들로 인해 내 생각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 기술했다.

변호사라면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은 분명하다. 다만 잊고 있었다면 변호사법 제1조 제1항을 상기해 보자.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4. 언론인들평범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법조인 못지않게 굳이 만날 일 없는 게 좋은 직군이 기자들이다. 박창진 사무장이 땅콩회항 사건으로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 있을 때 기자들은 밤낮으로 전화를 걸어왔고, 멋대로 아파트 로비 문을 열고 들어와 우편물 사진을 찍어 가기도 했고, 현관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집을 떠나 모텔에서 지내야 할 지경이었다. 한 방송국의 인터뷰에 응했으나 보도가 되지 않아 물어봤더니 “광고주 생각 좀 하자”는 편집장의 말에 ‘킬’된 적도 있고, 사실 관계도 맞지 않는 오보가 퍼져 나가기도 했다. 박창진 사무장은 얼마 전 출간 기자 간담회에서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인터뷰한 곳은 너덧 곳에 불과한데 수백 개의 언론사에 기사가 나옵니다. 나머지는 다 복사해서 붙이기 수준이더군요. 거기까지는 좋다 칩시다. 그러나 ‘박창진 허걱’, ‘박창진 찌라시’, ‘박창진 또 쓰러짐’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가짜 뉴스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가해를 해온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4년 동안 계속 싸워 왔지만 화제성이 떨어지니 언론은 관심을 거뒀고, 저는 불 꺼진 무대 위에서 혼자 남아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다 어쩌다 만나면 ‘잘 지내셨나봅니다’라고 합니다. 언론의 탓만은 아니겠죠. 그럼에도 언론이라는 곳이 대중들의 생각과 철학을 리딩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주십쇼.”

재벌 2세, 3세들은 ‘경영 훈련’이라는 이름의 ‘세습 스펙 쌓기’를 위해 대부분 경영학 등 문과로 진로를 택했다. 최근 몇몇 대기업은 엔지니어 출신들이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오르지만 대부분의 기업 임원진은 문과 출신들이 태반이다. 국회는 어떠한가, 제20대 국회의원 300명 중 248명(83%)이 ‘문과’ 출신이다.(대학 학부 기준) 국회는 물론 청와대, 행정부처 등 입법‧행정은 대표적인 ‘문초’ 집단이다. 판사, 변호가, 검사 등 법조인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인적 구성의 다양화가 이뤄졌다 하지만 여전히 ‘법대’ 출신들이 휘어잡고 있다. 언론도 대표적인 ‘문과’ 집단이다. 현대 사회에서 문과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문송합니다.(문과라 죄송합니다)”라는 말도 나왔지만, 여전히 사회 기득권층은 문과 출신들이 쥐어흔들고 있다. 사회 적폐 3대 키워드가 ‘50대’, ‘문과’, ‘남성’이라는 말도 있다. 그나마 문과라면 남들보다 더 갖췄어야 할 인문학적 소양은 어디에 쳐 박아 뒀을까.

+1. 우리들대학 졸업반 시절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롯데호텔, 한일은행에 합격하고 대한항공을 골라 들어간 박창진 사무장은 ‘잘 나가는’ 승무원이었다. 입사 3개월 만에 오너 일가 탑승 항공편에 차출됐고, 매우 빠르게 승진했으며, 유니폼 교체 때 모델이 될 정도의 간판 승무원이었고, 조현아 씨 주최 오찬 테이블 바로 옆 자리에 간택돼 ‘앉혀 지기’도 했다. 그 사이 오너 일가의 갑질 경영에 항거하는 ‘잘 나가지 못 하는’ 길을 택한 동료들이 힘겹게 싸우다 퇴사하는 걸 보며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박창진 사무장은 “내 일이나 잘 하자”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을 사랑한다”는 변명 뒤에 숨어 있었다.

땅콩회항 이전 박창진 사무장이 그랬듯 사건 이후에는 많은 동료들이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그를 문제아 취급하며 조롱했다. 회사 노무팀은 노골적으로 그를 압박했고, 그를 보호해야 할 노조는 그를 방치했으며, 답답한 현실에 박 사무장이 새 노조 지부장에 나서자 방해하기 까지 하고 있다.

박창진 사무장의 <플라이백>이 우리 사회의 거울이라 평가 받아야 할 이유는, 그가 직장에 나가고 업무에 치이고, 갑질에 분노하지만 꾹 참아야 하고, 사내 정치에 휘둘리는 평범한 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거울은 우리가 가야 할 길까지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창진 사무장이 사건 직후 곧 퇴사할 것이라 여겼지만 퇴사하지 않았고, 홀로 기나긴 싸움을 해왔으며, 이제는 싸우는 방법까지 익혔고, 주변 사람들을 도우고 이끌고 있다. 이 책이 가치 있는 것은 ‘땅콩회항’의 피해자로서의 당시 상황에 대한 단순한 회고나 항변이 아니라, 한 때 방관자이자 암묵적 협력자였던 자신이 피해자가 되면서 세상의 모순을 깨닫고 스스로를 단련해 가는 성장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박창진 사무장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책을 쓰며 제 일생을 되짚어 본다는 것은 기쁨보다 아픔이 많더군요. 특히 처절한 상황에 놓였던 적이 많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울분이 되살아나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책을 쓰는 과정을 통해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책을 쓰는 과정이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평범하고 작은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는 알림판이 되고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투사가 돼 사회를 변혁하고자 외친들 무엇이 바뀌었냐’고 묻습니다. 나는 대답합니다. ‘적어도 나라는 한 사람은 바뀌었다’고.”

당신이 혹 ‘문과 4적’이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걱정된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당신이 혹 ‘비겁한 방관자’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걱정된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당신 주변에 혹 ‘문과 4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거나, ‘비겁한 방관자’가 있다면 몰래 이 책을 선물하자. 우리 사회가 조금 덜 촌스러워질지도 모른다.

김하영 / 피렌체의 식탁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