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오와 혐오가 정치를 무너뜨리고 있다
  • 두 주먹 불끈 쥔 ‘세심’ 나경원/이해찬 대표는 ‘총기’ 흐려졌나
  • 정무적 판단은 사라지고 즉자적‧감정적 대응만: 리드하지 못하고 끌려 다녀
  • 보스가 사라졌다. 의사결정 구조도 무너졌다
  • 문자폭탄에 18원 후원금: 정치인들 눈치 보기 급급
  • 신문‧방송 몰락: 유투브‧소셜미디어 통한 확증 편향 강화
  • 팩트에 따라 신념 바꾸던 시대에서, 신념에 따라 팩트 버리는 시대로
  •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 트럼프, 브렉시트, 마크롱 등장. 우리는?
  • 정치혐오 심화→극단주의 강화→반정치주의 확산→민주주의 패배
  • 숙의 민주주의 대안 고민해야 할 때
[성한용 / 한겨레 기자]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관상을 보는 이로부터 “귀상(貴相)에 귀성(貴聲)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안검사 출신이지만 성품이 점잖고 신앙심도 깊다. 법무부 장관에 이어 행정부 최고위 임명직인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랬던 그가 자유한국당 대표에 당선된 뒤 내놓은 첫 번째 정치적 메시지는 ‘좌파독재 저지 투쟁’이었다. 이후로도 “문재인 정부는 좌파독재”라거나 “좌파 운동권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독한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독기를 품은 언어는 그의 점잖은 이미지를 심하게 훼손하고 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2010년 <세심>이라는 책을 썼다. “세심함이야말로 나와 세상을 바꾸는 지혜이자 에너지임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여성 정치인이 갖춰야 할 여러 가지 덕목을 두루 갖췄다.

그랬던 그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김정은 수석 대변인’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본회의장을 나오며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지지자들에게 두 주먹을 불끈 쥐어 화답했다. 그 의기양양한 모습은 ‘세심’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기세가 오른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틀 뒤 한 발짝 더 나갔다. “해방 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 인해 국민이 분열했다”고 했다. 주워 담기에는 너무 큰 사고였다. 역사의식의 천박함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법정 구속된 1월 31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사법 농단 세력의 보복성 재판”이라고 비난했다. 과잉 대응이었다. 역풍이 불었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김정은 수석 대변인’ 연설 뒤 열린 긴급 의원총회에서 이해찬 대표는 “국가원수 모독죄”라고 비판했다. 1988년 폐지된 국가모독죄가 살아 있는 것으로 잘못 안 것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성격이 본래 좀 까칠하다. 까칠함은 염결성(廉潔性)의 다른 말이다. 따라서 그렇게 큰 단점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민주당 안에서는 “이해찬 대표의 ‘총기’(聰氣)가 흐려진 것 같다”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국회 본회의장 연설문은 사전에 의원들에게 배포됐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단도 사전에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홍영표 원내대표는 민주당 의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오히려 의원들보다 더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홍영표 원내대표의 섣부른 판단과 행동은 민주당 의원들을 자극했고 민주당 의원들의 집단 고함은 나경원 원내대표를 보수의 새로운 영웅으로 탄생시키는 효과음으로 작용했다.

최근 각 정당 대표나 원내대표들의 정치적 판단과 행동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즉자적이다.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터져 나오는 사건과 정치적 상황에 그때그때 감성적으로 대응한다. 뭔가에 질질 끌려 다니는 인상이 짙다.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국을 이끌어가는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사하고 정치적 현안에 맞닥뜨렸을 때 정무적 판단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온갖 현안에 대처하는 대통령의 말과 표정에서는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는 정의감과 분노가 고스란히 읽힌다.

정치, ‘보스’와 함께 사라지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이회창의 ‘보스 정치’에 익숙한 관전자들에게 정치의 이런 모습은 무척 낯설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오랜 독재 시대가 끝나고 1980년대 중반부터 보스 정치의 황금기가 열렸다. 당시 보스들의 경쟁과 타협은 정치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었다.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실패,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소선거구제 합의, 노태우-김대중의 중간평가 유보 합의, 노태우-김영삼-김영삼의 3당 합당, 김대중-김종필의 디제이피 연합은 그 자체가 고스란히 대한민국 정치의 역사였다.

각 정파의 보스들은 바둑을 두듯 정치를 했다. 포석이 있고, 중반 수 싸움이 있고, 마무리가 있었다. 이제는 더는 그런 정치를 보기 어렵다. 바둑이 아니라 ‘알까기’로 전락한 느낌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정당의 리더십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리더십이 무너진 이유는 뭘까? 리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보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각 정당에는 총재라는 직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총재는 공천권과 정치자금 배분권을 한손에 틀어쥔 절대자였다. 대표는 다르다. 대표는 공천권도 없고 정치자금을 나눠주지도 못한다. 집단지도체제에서 대표는 최고위원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대표최고위원이라고 한다.

총재가 사라지면서 정당은 당내 민주화, 상향식 민주주의를 얻었다. 당원들은 공천권을 획득했고, 정치자금의 흐름은 투명해졌다.

잃은 것도 있다. 정치는 낭만을 잃었고 품위를 잃었다. 과거에는 치열하게 싸우던 의원들이 언론사 카메라가 철수하면 같이 술집으로 갔다. 이제는 그런 장면을 보기 어렵다. 싸울 때 시정잡배처럼 욕설을 한다. “너 죽을래?”, “나와!”, “한주먹도 안 되는 게”라는 말이 오간다.

가장 큰 문제는 정당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가 무너진 것이다. 총재 시스템은 독단적이기는 해도 효율성은 높았다. 총재 시스템을 대신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는 아직 정착하지 못했다.

총재가 사라진 뒤 정당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의 이동을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한때는 최고위원들이 정당의 주인 행세를 했다. 한때는 국회의원들이 자영업자 연합체처럼 정당을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정당의 소유권은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넘어갔다. 당원과 지지자들은 당내 경선에서 공천권을 행사한다. 후원회나 펀드를 통해 정치자금도 모아준다.

심지어 국회의원이 당원이나 지지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문자 폭탄’을 보내거나 ‘18원’ ‘4원’등 욕설이나 죽음을 의미하는 액수의 금액을 후원금으로 보내기도 한다.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찍힌 국회의원은 당내 경선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과거 총재가 갖고 있던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이미 당원과 지지자들이 가졌다는 의미다. 정당의 주인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정당에서 권력의 이동, 특히 권력의 분산은 필연적으로 편 가르기와 분열의 심화로 이어진다. 다중을 구성하는 개개인은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동에 쉽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정당의 주인과 의사결정 구조가 바뀜에 따라 정치부 기자들의 취재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정보는 권력에서 나온다. 과거에는 총재나 고위 당직자들을 취재하면 정확한 전망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총재나 고위 당직자들의 말은 곧 정치 현실이 됐다.

이제는 달라졌다. 그 누구도 정당의 앞날을 결정하지 못한다. 대표, 원내대표, 최고위원들의 말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 기자들은 수많은 정치인의 말을 퍼즐처럼 맞추고 여론조사 수치를 참고해서 정치 전망 기사를 쓴다. 부정확할 수밖에 없지만, 현재로써는 최선의 방법이다.

팩트에 신념 바꾸던 시대 끝나고, 신념에 따라 팩트 버리는 시대

기자나 언론이 정당의 당원과 지지자들의 눈치를 심하게 보기 시작한 것도 큰 변화다. 과거 언론은 유권자를 ‘계도’했다. 지금은 유권자가 언론을 가르친다. 정파의 패싸움에 언론도 깊숙이 휘말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론이 오히려 대립과 싸움을 부추기는 경우도 많다.

사실 이런 변화가 정치 분야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정보화 시대로 공동체 구성원 간의 정보 격차가 사라지면서 권위가 신뢰가 급속히 무너진 탓”이다.

이제 학생은 교수를 존경하지 않는다. 환자는 의사를 존경하지 않는다. 유권자는 정치인을 존경하지 않는다. ‘아는 것’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존경하지 않아도 신뢰는 해야 관계가 유지된다. 그런데 권위가 무너지면서 신뢰도 같이 무너지고 있다. 학생은 교수를 신뢰하지 않는다. 환자는 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유권자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불신의 시대다.

언론에 대한 불신은 신문과 방송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팟캐스트와 유튜브가 대안 언론 구실을 하고 있다.

불신의 시대에는 가짜뉴스가 횡행한다. 인지부조화라는 말이 있다. 신념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으면 부조화를 해소하려고 한다. 과거에는 ‘팩트’에 따라 신념을 바꿨다. 이제는 신념을 유지하고 팩트를 버린다.

확증 편향이 점차 강화되는 시대다. 옥스퍼드 사전이 ‘포스트 트루스’(post-truth)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것이 벌써 3년 전이다. 포스트 트루스는 진실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대중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산물이었다. 영국의 브렉시트,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당선도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정치인은 당선을 위해 영혼이라도 판다. 전 세계 곳곳에서 정치인들이 난민과 동성애자 등 소수자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선동하고 있다. 증오와 혐오가 표가 되고 돈이 되는 시대다. 증오와 혐오의 상품화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 처치 집단 학살 비극의 원인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나라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우리 정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권을 잡으려는 사람들은 이미 무한투쟁에 나서고 있다. 경쟁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증오와 혐오를 부추긴다. 금도는 무너졌다.

자유 한국당은 태극기 부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을 종북, 좌파,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한다. 방어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 열성 지지자들은 자유한국당을 친일파, 극우, 파쇼라고 비난한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와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증오와 혐오의 정치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유권자들은 어느 한 편에 서야 한다는 선택을 강요받거나, 아니면 환멸감을 느끼고 정치를 아예 외면할 위험이 있다. 그렇게 되면 반정치주의가 승리하고 민주주의가 패배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이스턴의 정의에 따르면,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이다. 과거에 정치는 권위와 신뢰로 공동체를 통제했다. 그런데 권위와 신뢰가 무너지면서 통제권을 놓쳤고, 이제는 아예 분열된 다중에게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 조직화한 증오와 혐오는 정치의 존재 목적인 ‘사회 통합’에 연속적인 치명타를 가하고 있다. 정치와 민주주의 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대안으로 ‘숙의 민주주의’ 어떨까

대안은 뭘까? 정치학자들은 다중에 의한 포퓰리즘의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대안일 수 있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기 시작했다.

숙의 민주주의에는 ‘엘리트 숙의 민주주의’와 ‘대중적 숙의 민주주의’가 있다. 두 가지 숙의 민주주의는 꼭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안에 따라 대의제 기구의 엘리트들에게 결정을 맡길 수도 있고, 국민대표 단에 균형 있는 정보를 제공해 가며 공론조사를 할 수도 있다. 한 가지 사안에 대해 두 가지 방식을 병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정당의 리더십이 무너지며 나타나는 무질서와 혼돈에도 비슷한 대안이 가능할 것이다. 정당에는 최고위원회, 의원총회, 당무위원회, 전국위원회, 대의원 대회 등 여러 가지 의결기구가 있다. 이러한 기구에 권한과 책임을 분배해서 적절한 의사결정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복잡할 것이다. 그래도 선동에 취약한 당원 및 지지자들의 감성에 휘둘려 증오와 혐오의 정치가 확산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본다. 민주주의는 본래 좀 어렵고 복잡한 것이다.

성한용 / 한겨레신문 정치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