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의 '아시아를 향한 창', 블라디보스토크...北루오션
  • 블라디보스토크를 가득 매우는 한국 젊은이들
  • 러시아의 남북한 등거리 외교
  • 遠交近攻아니라 遠交近親해야
  • 북한: 몸은 중국, 마음은 미국, 머리는 러시아?
  • 러시아는 북핵 공여국이자, 관리국이자, 피해국
  • 북한 장막에 가려져 있던 러시아 제대로 봐야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무산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를 살피는 시야를 넓힐 필요성이 높아졌다. 그 중 러시아는 ‘북핵 문제’에 관해서는 중국보다 더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고, 문재인 정부 ‘신북방정책’의 주요 대상이기도 하다. 박종수 전 주러시아 공사는 북한-러시아, 남한-러시아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조망하며, 탈냉전 후 지정학적, 지경학적 환경 변화에 따른 균형외교를 강조하고 있다. [편집자]

[박종수 / 전 주러시아 공사]

러시아 극동항구 블라디보스토크는 최근 ‘블라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행정상으로 강원도 북쪽에 새로 추가된 한국의 광역자치단체를 의미한다. 올 겨울에 공항 이용객의 80%가 한국인이고, 그 중에 80%는 20-30대 청년층이다. 시내 중심부 아르바트 거리는 밤늦게 까지 한국 젊은이들로 북적거린다. 서울의 명동거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밤은 한국인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가게마다 레스토랑마다 한글 메뉴판이 비치되어 있다. 심지어는 상품 구입시에 1+1+1=3개 아니라 4개라는 세일광고도 나붙어 있다. 5년 전만해도 러시아 신흥재벌이나 고위관료들이 이용했던 고급 레스토랑이 한국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지난 3월 3일 필자가 점심식사를 했던 루스키섬의 ‘노비크’ 컨트리클럽은 한국 손님이 95%를 차지했다. 한 팀만 현지인이었다. 도시 외곽에 있어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없는 곳인데도 말이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20-30대 청년들에게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 땅’으로 인식되고 있다. 러시아항공편을 이용하면 2시간, 우리 항공편으로는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우리 항공기는 북한영공을 통과하는 최단항로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왕복 20만 원 수준의 저가 항공권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푸틴 행정부의 동방정책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 일대가 대대적인 개발에 착수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발레극장 분관이 들어섰고 서커스공연장도 1년 전 개관됐다.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 미술관 분관도 가까운 장래에 개관된다고 한다. 유럽에 가지 않더라도 유럽풍의 거리를 산책할 수 있고 유럽식 문화시설을 애용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한러 양국간 체결된 비자 면제협정의 영향도 적지 않다. 비자발급 비용도 절약되고 복잡한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다. 항공권만 있으면 갈 수 있다. 공항의 입출국 절차도 간소화되었다. 일행 중 1명이 호텔 거주 등록증*을 분실했는데, 출국 때 국경수비요원이 ‘분실했소?’ 한마디 던지면서 자신이 직접 작성해 주었다. 몇 년 전만해도 출국이 보류되거나 고액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러시아 여행을 할 때는 ‘거주등록’이 필요하다. 보통 호텔 등 숙박업소에서 거주등록을 해준다.
이렇듯 블라디보스토크는 이미 한국의 ‘블라도’로 자리매김했고, 한국인의 ‘러시아를 바라보는 창’으로 바뀌었다. 이 도시의 상권도 서서히 한국인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러시아의 대(對)한반도 정책

푸틴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0년 6월 ‘러시아연방 대외정책 개념’ 발표에서 대(對)한반도 정책방향을 간결하게 제시했다. 즉 ‘한반도문제 해결에서 러시아의 동등한 참여 보장과 남북한과의 등거리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뒤 러시아(소련포함)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한소 수교로 얼어붙었던 러북관계는 한순간에 해빙기를 맞았다. 김정일은 답방 일환으로 2001년과 2002년 연속 두 차례나 러시아를 방문했고, 2001년에는 거의 1개월간 특별열차로 러시아 전역을 누볐다.

푸틴의 실용적 신(新) 등거리 노선은 남한 공략의 한계성과 북한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명료한 인식에 기초하고 국익스펙트럼 확대의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출발했다. 러북관계는 1990년대 한러 수교 및 소련 해체 과정에서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남한으로부터 얻은 경제적 이득이 북한홀대로 인한 손실에 비해 별로 크지 않다는 자성이 뒤따랐다. 푸틴 대통령은 러북 신(新)우호조약을 토대로 북한과는 정치·안보적 유대를 더욱 강화하고, 한국과도 다차원적 경제협력을 증진시켜 경제적 실익을 확보해 나간다는 전략적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대(對)남북한정책 기조는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러시아는 북핵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현안에 대해 일관된 해결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즉 남북한 당사자 주도, 포괄적 일괄타결, 한반도 평화문제와 비핵화 프로세스 분리추진, 비핵화 6자회담틀 유지, 그리고 동북아 다자안보협력틀 제도화 등으로 요약된다.

원교근친(遠交近親)의 균형외교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 세력간 지정학적 패권경쟁에서 중간자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는 한반도가 동아시아 긴장과 위기의 중심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만, 한국의 선택과 역할이 동아시아 미래에 갖는 중요성을 내포한다. 중간자 위상이라는 객관적 조건을 균형자 역할로 승화할 수 있는 주관적 의지와 역량이 중요하다.

동맹정치는 강대국에는 패권전략일 수 있지만, 약소국에는 생존전략이다.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할 때 비대칭·불평등 관계라도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동맹이 유지된다. 전후 한미동맹이 그 전형이다. 한미동맹을 이념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도 적절치 않지만, 어떤 절대적·이념적 가치를 앞세워 성역시하는 이데올로기적 집착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인에게 평화의 기본조건은 동아시아 차원의 지역적 평화다. 이를 위해 원교근공(遠交近攻)이 아니라 원교근친(遠交近親)해야 한다. 특히 중국·러시아와 어떻게 평화적 관계를 구축하는가는 중요하다. 한일관계도 이의 연속선상에서 고찰돼야 한다. 동맹관계의 강대국이 패권전략의 일환으로 한국을 장기판의 졸로 동원하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한미동맹체제는 한반도 평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부적 모순과 긴장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두 나라에 주는 함의가 매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식 민주·정의 외교가 약소 동맹국의 목표와 반드시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진보를 방해하고 역행하는 반동 편에 설 수도 있다.

오늘날 한국의 균형외교는 북한의 핵무장 완성이라는 상황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전환할 수 있다. 북한 핵무장은 궁극적인 비핵화와 북미 간 대타협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비로소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러시아에 대해서도 자주외교의 공간을 넓혀 나갈 수 있다. 한국의 균형외교와 북한의 자주외교는 서로 지지하고 촉진하는 상생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아시아 평화를 견인하는 균형자적 역할은 그렇게 해서 초석이 마련될 것이다. 더 나아가 문재인 대통령이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서 천명한 신한반도체제, 즉 대립과 갈등을 끝낸 새로운 평화협력공동체를 구축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북루오션’을 찾아서

푸틴 대통령은 집권3기를 계기로 본격적인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유럽 편중에서 벗어나 아태지역으로 통치영역의 확대를 의미한다.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럽으로 향한 창’으로 삼았듯이, 푸틴 대통령도 블라디보스토크를 ‘아시아로 향한 창’으로 설정하고 국가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 APEC정상회의 후 연례행사인 동방경제포럼을 플랫폼으로 삼고, 선도개발지역,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법, 1헥타르법 등 전례 없는 흡입책을 마련해 두었다.

문재인 정부도 이에 화답하듯 신북방정책을 천명하고 나인 브릿지(9개 다리) 프로젝트를 실천적 과제로 제시했다. 전담창구로서 대통령 직속으로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신설했다. 한러 양국 간 이해가 일치되는 절묘한 상황인데도 아직 가시적 성과가 없다. 오히려 20-30대의 젊은층들이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한 러시행렬을 주도하고 있어 공공외교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물론 남북한 관계가 급진전되면서 북방지역이 북한 땅에 가려서 안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북방정책은 북한 변수에 관계없이 일관성 있게 추진돼야 한다. 행여 남북관계가 경색될 경우에 북방변수는 대안카드로 활용할 수 있고, 북한변수와 북방변수 간 선순환적 시너지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위기 마다 북한을 두둔하는 러시아

지난해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전 까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로켓맨' ‘늙다리 미치광이’라고 서로 비난했다. 트럼프-김정은 간 극한 설전이 오가면서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마저 감돌았다. 이러한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은 김정은을 ‘핵(核) 외교전의 승리자, 대화로 해결할 성숙한 정치인’이라고 격찬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푸틴의 미국패권 견제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2003년 북핵 6자회담 출범 직전에 러시아 수석대표인 로슈코프 외무차관은 북한 측의 요구를 반영한 일괄타결안을 제시했다. 미국과 일본이 반대하고 한국과 중국은 침묵했다. 미국이 2005년 9월 동결시킨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김정일 비자금 반환문제가 대두되자, 러시아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자국 은행을 통해 예치금 전액을 북한 측에 넘겨주었다. 2009년 4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때는 6자회담국 중 유일하게 유엔의 대북 제재에 반대했다.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때는 유엔의 대북 규탄성명서 채택에 불참했다. 오히려 안보리 긴급회의 소집을 전격 제안해 서해의 한미합동 사격훈련 중단을 요구했다. 2012년 3월 북한의 대러채무 100억 달러를 탕감해 주었다. 반대급부로 러시아제 무기도입 등 군사협력이 강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2월 러시아 정보기관 출신 10여 명이 평양에 파견돼 트럼프의 김정은 참수작전에 대비한 신변경호 교육을 전담했다.

푸틴은 9월 1일 발표한 기고문에서 “평양에 대한 압박만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시킬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전제조건 없이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직접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라브로프 외무장관도 2018년 6월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회담 때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북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몸은 중국, 마음은 미국, 머리는 러시아?

북한 매체들은 2017년 8월 광복 72주년을 맞아 김정은과 푸틴이 축전을 주고받으면서 양국 간 친선 강화를 다짐했다고 보도했다. 반면 중국 측과 축전을 교환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 방송은 각국 지도자의 신년 연하장 접수사실에 대해서도 연속 4년간 러시아를 가장 먼저 호명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올해 2월에도 김정은의 푸틴 앞 연하장 발송 사실을 보도했지만 시진핑에 대해서는 패싱했다. 2017년 9월 3일 북한의 6차 핵실험 때 러시아는 1주일 전에 통보받고 북·러 국경 인근의 하산 마을주민 1500여 명을 대피시켰다. 수소폭탄 실험장소인 풍계리로부터 약 100㎞ 떨어진 중국은 사전에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 시진핑은 BRICs 개최국 수장으로서 개막식 당일에 예고 없이 실시한 북핵 실험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중 관계가 양호했던 시기는 대략 1961~1964년, 1970~1973년 정도였다. 그 이외에는 상호 인식의 편차나 갈등이 노출됐던 시기였다. 북중 간 군사동맹 관계라고 하지만 정례적인 합동훈련조차 없었다. 중국의 엘리트 그룹은 ‘북한에 끌려 다닌 북중관계 60년이요, 허울 좋은 혈맹일 뿐’이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북한의 대중국 무역의존도 90%는 숫자상의 놀음일 뿐이다. 통계 작성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오류가 산견되고 있다. 주펑 남경대 교수는 북한이 먹이를 주는 주인을 물어뜯는 개와 같은 존재라고 혹평했다. 중국의 조야에서는 ‘북한이 전략적 자산이냐 전략적 부담이냐’를 놓고 갑론을박한다. 반면 러시아와는 1990년대 한소수교 및 소련 해체의 혼란기를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지속해 왔다.

북중관계의 시초는 공동 항일투쟁 및 중국공산당의 국공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이 6.25때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북한 구하기’에 나섰던 것은 북한의 지정학적·전략적 가치도 작용했지만, 국공내전 때 북한군의 전폭적인 중국 지지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국공내전 당시 김일성의 도움이 있었기에 중공군이 승리할 수 있었고, 이는 결국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혈맹’으로 한층 격상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김정은은 작년부터 4차례나 집중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지난번 베트남 북미회담 때도 전용열차를 이용해 중국영토를 통과했다. 이렇듯 몸은 비록 중국에 있지만, 마음은 오직 미국을 향하고 있다. 미국은 과거에는 타도대상이었지만 지금은 협력해야할 파트너 1호다. 그렇다고 북미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호전된 것도 아니다. 여전히 북핵문제 해법을 놓고 오월동주(吳越同舟)식 북미동주(北美同舟)하고 있다. 지난 2월말의 하노이 북미회담이 결렬된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일체가 소련에 의해 건설된 북한정권의 태생적 한계는 간과될 수 없다. 러북 간 국경선 39.1km는 머리(러시아)와 몸통(북한)을 연결하는 목 부위에 해당한다. 머리의 지령없이 몸통은 움직이지 않는다. 목을 조이면 몸통은 한순간에 주검으로 변한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지정학적 구도다.

북핵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다중적 입장

북한의 핵개발 문제는 러시아 정부로서는 진퇴양난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핵시설과 기술을 공여한 장본국으로서, NPT체제 관리국으로서 북한의 핵무력화를 방임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또한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인접국으로서 한반도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연해주 일대의 핵오염을 우려해야 한다. 그렇지만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북한과 공동보조를 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첫째, 북핵 공여국의 입장이다. 항일 빨치산 대장 출신인 김일성은 일본 본토에 투하된 원폭의 위력에 경악했고 정권출범 때부터 핵개발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핵의 이론적 기초를 다지기 위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46년 김일성대학에 물리수학부를 개설했다. 도상록·리승기·한인석 등 북핵 1세대 3인방에 이어 정근·최학근·서상국 등 2세대 3인방이 소련에서 핵물리학을 공부했다. 1990년 소북 과학협력협정이 종료될 때 까지 소련의 도움으로 배출된 북한의 핵인력은 250여 명에 이른다. 1956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협력협정’ 체결 후 지원이 본격화됐고, 1980년대 영변에만 핵개발관련 직·간접 시설 100개가 건립됐다.

물론 소련은 핵탄두 개발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지원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 해체의 혼란기를 틈타 핵프로그램을 군사적으로 전용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북한이 불법적으로 핵물질뿐만 아니라 기술자까지 평양으로 데려간 정황이 도처에서 발견됐다. 1992년 12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마케예프 설계국 소속 미사일 전문가 20명을 방북시키려다 공항에서 저지당했다. 1994년 6월 러시아 국내방첩부(FSB) 부장은 북한이 핵무기 생산용 부품들을 밀수하려 해서 골치 아프다고 토로했다. 1999년 3월 구소련권으로부터 중고 미그21기 40대를 해체해서 평양으로 불법반입해간 사실도 뒤늦게 포착됐다.

둘째, 북핵 관리국의 입장이다. 소련은 1970년대 미국과 함께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를 출범시켰다. 1990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KGB 보고서에서 “북한의 첫 핵무기가 영변의 핵연구센터에서 완성됐다”고 밝혔다. 이어 1993년 KGB 후신인 해외정보부(SVR) 백서에서는 북한의 핵무장화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렇지만 러시아 측의 이러한 주장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4자회담에서 조차 배제됐다.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대만·한국·일본 등 잠재적 준(準)핵국가의 연쇄 핵무장 촉발을 우려했다. 미국 미사일방어체제(MD)의 한반도 구축과 일본 재무장의 빌미 제공을 경계했다. 러시아가 최다 핵탄두 보유국으로서 세계 평화를 담보하는 핵심적인 국제관계 행위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셋째, 북핵 피해국의 입장이다. 미국의 북핵시설 폭격 때 극동일대는 심각한 방사능 낙진 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북한체제 위기 시에 탈북 난민의 극동지역 유입에 따른 정치적 부담도 적지 않다. 국가발전 대전략으로 추진 중인 신동방정책과 시베리아 극동개발에 중대한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우크라이나·시리아 내전 개입과 함께 동북아에서 또 하나의 전선을 형성하는 전략적 부담도 가중된다. 체첸 전쟁 이후 나 죽고 너 죽자는 자폭테러의 현장을 무수히 경험한 러시아다. 자폭테러는 죽어가면서도 독침을 내뿜는 전갈과 같다. 북한과 같은 소규모 핵무장 국가가 위기상황에서 핵무기를 더 쉽게 사용할 유혹을 느낄 수 있음을 우려한다.

넷째, 러북 양국은 서방의 경제제재 대상국이다. 북한은 첫 핵실험을 실시한 2006년 이후 현재까지 장기간에 걸쳐 강도 높은 경제제재를 감내해 왔다. 러시아도 2014년 크림반도 병합에 따른 서방의 경제제재로 루블화 폭락 등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제 설계자·이행자이면서 제재 대상국이라는 상반된 입장에 처한 셈이다. 제재를 당한 입장에서 푸틴과 김정은은 동병상련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대립과 갈등을 끝낸 새로운 평화협력공동체’를 천명했다. 이를 위해 ‘긴밀한 한미공조’를 강조했다. 그렇지만 탈냉전 후 한반도의 지정학적·지경학적·안보적 환경은 크게 변했다. 이제는 주변국과의 균형외교를 펼쳐야 할 때다. 특히 러시아와의 관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100년은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100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종수 / 서강대 겸임교수, 전 주러 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