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제 몫을 못하면서 현안의 판단을 법에 의지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사법부가, 판사가, 대법관이 정치적 판단을 하게 되는 세상이다. 당연히 폐단이 많다. '사법의 정치화', '정치의 사법화'다. 양승태, 김경수 같은 이름들이 이 논쟁에 기름을 끼얹었다. <피렌체의 식탁> 이번 호 인터뷰이는 현역 사법전문기자다. 경향신문 이범준 기자는 대개의 법조 기자와 달리 비리 수사 추적이 전문이 아니고, 사법부 자체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일을 15년 동안 해왔다. 그러면서도 2019년의 사법개혁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탄희 판사 사건을 2017년 3월 최초로 보도했다. <편집자>

 

제1부: 사법의 정치화독립성만 내세우다 내부 독재가 시작됐다

그동안 ‘사법농단’이라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사법개혁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법개혁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사법부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독재를 추인하는 역할을 하면서 신뢰가 없는 기관이었다. 그래서 신뢰 회복이 우선 과제였고, 다른 권력기관이 간섭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선결 개혁 과제였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독립성 확보였고, 김영삼‧김대중 정부 거치면서 사법부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이 사법부 내부 독재가 일어난 것이다.”

2017년 3월 이범준 기자가 이탄희 판사에 관한 기사(‘판사들 사법개혁 움직임 저지하라’ 대법, 지시 거부한 판사 ‘인사 조치’)를 처음 쓰면서 이른바 ‘사법농단’ 전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있어 이슈가 됐을 만도 한데.

“당시 이 사건에 대해 저 혼자만 기사를 쓸 때였다. 사안이 중대해 대선 주자들이 이 문제를 말해줬으면 싶었는데, 거의 이슈화 되지 않았다. 당시 문재인 후보도 라디오에 나가 아주 소극적으로 말하고 말았다.* 문 대통령도 오랜 법조인 생활을 하면서 ‘설마 법원에서 이런 정도의 일이 벌어졌겠나’ 생각했던 것 같다.”

(*문재인 후보는 2017년 5월 1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해 법원행정처의 과대한 권한‘ 문제에 대해 “사법부의 독립 문제가 있어서. 행정부가 개입해서 함부로 이렇게 만들겠다, 저렇게 만들겠다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라는 정도로 말했다.)

법원 내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 아니었을까?

“내가 처음 이 문제를 알게 돼 기사를 쓸 때 대법원 측의 방어 논리는 ‘인사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획책한 일’이라는 식이었다. 대법원장이 전국 3000여 명의 판사 인사권을 가진 상황에서 인사권을 행사하다 보면 불만 있는 사람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차원의 변명이었다. 기소될 예정인 행정처 판사들도 지시 받은 일을 해야 하니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밀어 붙인 게 아닐까. 나중에 검사의 수사 내용을 객관적으로 보고서야 자기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대법원장, 판례가 아닌 인사로 신념을 관철시키려다가...

사법농단은 ‘블랙리스트 작성’, ‘재판개입’ 두 가지로 압축된다. 목적이 뭐였을까?

“근본적인 이유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우리나라 판례를 끌고 가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장이 본래 어떤 소신이 있다면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대법관들을 설득하고 사건 판례로 남겨 하급심을 끌고 가면 된다. 그런데 과거사 사건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 등 자신의 신념과 다른 진보적 판결들이 하급심에서 밀고 올라오니까 인사권으로 막으려고 했다. 원래 독립된 법관에 대한 인사는 아주 적은 범위에서 형식적으로만 가능한 것인데,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판사를 요직에 배치하는 식으로 아주 잘못된 방식으로 행사했다. 인사권으로 내부 통제가 가능하니,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전국 판사들에게 주입하려 했던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을 업적으로 남기기 위해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상고법원이 반드시 필요한가?

“우리나라가 인구 대비 판사의 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적긴 하다. 사건 대비 판사 수는 더 적다. 그러다 보니 판사들의 사건 부담이 크다. 대법원도 마찬가지다. 최종심을 대법원에서 한다고 정하고 있을 뿐이지 모든 사람들이 대법원 재판까지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하급심에서 충분히 심리를 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기고 지고를 떠나 한 번 더 재판을 받아 보고 싶은 심리가 강하다. 전체 법관 3000여 명 가운데 대법관이 13명인데, 상당수 사건이 상고심 까지 가니까 감당이 안 된다. 문제 해결 방법은 세 가지다. 대법관을 늘리거나 상고법원을 만들거나 상고허가제를 만들어 상고심 자체를 줄이는 거다. 상고허가제는 외국에서도 많이 하고 있다. 법원 외의 민간 영역에서 분쟁을 조정하는 기구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 대법원은 ‘상고허가제는 국민들이 싫어한다’고 전제한 뒤 상고법원이 정답인 것처럼 추진했다. 상고법원을 만들면 법원의 단계가 하나 더 생기고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더욱 강해지면서 그야말로 제왕적 대법원장이 된다. 사실 또 다른 상고심 적체 해소방안이던 대법관 증원도 대법원장의 권한을 늘리는 면이 있다. 대법원장에게 대법관 제청권이 있기 때문이다. 상고법원을 추진한 사실보다 이를 대법원장 업적으로 만들려고 무리하게 밀어붙이면서 문제가 생긴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인가?

“대법원이 상고법원 만들고 싶다고 법원 차원에서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상고법원을 발의할 때 160명 넘는 국회의원의 도장을 한 번에 받았다. 이런 저력이 어디서 나왔을까. 국회의원과 판사가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는데.”

최근 문제가 된 ‘재판 청탁’이 떠오른다. 이미 공소장 등에 언급된 국회의원들 외에 더 많은 국회의원들이 연루돼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공공연한 이야기다. 판사들이 국회에 출입하는 이유는 정보를 얻고 법원과 관련된 예산과 법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판사가 국회에 가서 평상시에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의원들이 법원행정처 판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사건 얘기를 한다. 실제 재판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도라기보다는 지역 민원인 앞에서 하는 쇼이거나 지나는 얘기로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행태가 반복되다 보면 실제로 청탁이 갈 수도 있고, 실제 그랬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까지도 국회 사법개혁안은 후퇴하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사법개혁이 지지부진했는데.

“사법의 독립성과 민주성(민주적 통제)은 서로 가치가 부딪히는 제로섬의 영역이다. 항상 독립성이 강조돼 왔는데, 사법농단 사태를 겪은 지금은 민주성이 더 강화돼야 한다고 본다. 국회 개헌특위에서 헌법기구로 사법평의회를 만드는 안을 낸 적이 있다. 이는 유럽 모델인데, 유럽도 독재 시절에 사법부가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적이 있어 어느 정도 통제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건 개헌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회 민주당 의원들이 한 단계 낮춰 ‘사법행정위원회’를 골자로 한 법원조직법 개정안 초안을 내놨다. 이게 법원행정처를 대신하는 기구이고, 외부인사가 다수가 되는 구성이다. 외부의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안이었다. 그런데 대법원이 ‘사법행정회의’라는 자체안을 별도로 내면서 구성을 법원 내부 인사가 더 많게 했다. 어쩐 일인지 대법원이 국회에 의견을 제출한 것인데, 그 사이에 민주당 개정안 최종안도 대법원안과 마찬가지로 외부위원이 다수가 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법원 행정기구에 대한 ‘외부의 견제’를 무력화 하면 이름 외에는 결국 바뀌는 게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외부의 개입에 대한 법원 내부의 저항이 완고하다. 이번 사법농단은 ‘양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외부에 줄을 대려고 시도 하다 내부가 오염된 것’이라는 시각이 강하다. 이번 사태도 내부에서의 고발과 저항으로 바로 잡았다고 판사들은 보고 있다. 그런데 사법평의회든 뭐든 인사와 예산에 대한 외부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면 더 심각한 오염이 생기고 사법부가 ‘정치판’이 될 것이라고 보는 판사들이 대부분이다. 외부의 통제 강화에 찬성하는 판사는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되고, 김경수 도지사 판결에 ‘양승태 키즈’라는 공격이 제기되는 것은 판결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거의 붕괴 수준에 이른 것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상황인 것 같다. 이런 마당에 법관들의 인식이 너무 안이한 것은 아닌가.

“‘사법권’은 존재하지만 ‘사법부’라는 말은 잘못된 번역이라는 지적도 있다. 3000여 명의 판사가 각각 독립된 헌법기구인데 ‘부’(府)로 한 묶음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법관들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잘못은 양승태의 잘못일 뿐,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때문에 멀쩡한 자기만 동네 창피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관련자들만 색출해 처벌하면 되지 왜 사법평의회 같은 걸 만들어 부당한 간섭을 시도하냐는 것이다.”

막힌 하수구, 지금 뚫지 않으면 언젠가는 넘칠 것

김경수 도지사 판결 논란으로 사법개혁 의제가 정치화 되면서 사법개혁은 더 어려운 과제가 된 것 같다. 왜 언제나 사법개혁은 어려운 걸까.

“국민들 사이에서도 사법부를 신뢰하지 않는 분들이 많다. 과거에 법조비리 사건도 있었고, 판사들이 아침저녁으로 변호사들과 어울려 다니며 돈 받고 판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15년 정도 법조 담당 취재를 하면서 판사들이 직업적 소명도 강하고 공정하게 판결하려고 노력한다는 신뢰가 생겼다. 그런데 내가 갖고 있던 신뢰도 일반 대중의 인식 수준으로 다시 내려온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번 사법농단 사태는 충격적이었다. 만약 국회가 돈을 받고 특정 이익단체에 유리하도록 법을 만들다 적발이 됐으면 국민들이 국회를 끌어 내렸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특정인에게 이익을 주다가 탄핵되지 않았나. 입법부나 행정부는 국민들의 이해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사법부는 개인이 송사에 걸리지 않는 이상 딱히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일이 드물어 관심 밖인 것 같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들이 검찰 수사를 받거나 줄줄이 감옥을 가는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대통령제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이번이 처음이지만 대법원장이 구속까지 된 이런 상황에서는 현재의 법원 시스템에도 의문을 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 넘치지 않는다고 막힌 하수구를 방치하면 나중에 큰 비가 왔을 때 오물이 넘치듯이 지금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반드시 국가가 작동하지 않는 단계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인터뷰 / 김하영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