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과의 긴장 해소와 국교 정상화를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카스트로를 반대하는 미국 내 쿠바 출신 공동체가 훼방을 놓는 등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진절머리가 난 피델 카스트로는 1973년 다음과 같은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아프리카계 대통령을 선출하고, 세계가 남미계 교황을 선출하면 그때 협상하러 와라.”

거의 체념에 가깝게 내뱉은 한 마디가 40년 가까이 지나 기적처럼 실현됐습니다. 피델 카스트로가 은퇴(2006년)한 후인 2009년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고, 2013년 아르헨티나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됐습니다. 그리고 2015년 미국과 쿠바는 국교를 정상화 했습니다.

지정학적, 역사적 배경이 전혀 다른 쿠바와 북한을 동일 선상에 두고 단순 비교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상수가 변함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진전돼 온 국교 정상화 과정을 복기해보면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미국 대통령학 전문가인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최근 저작 <예정된 위기>(모던아카이브 펴냄)를 통해 쿠바 위기를 재조명하면서 한반도 문제 해법의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안 교수를 피렌체의 식탁에 모셨습니다. <편집자>

안병진 경희대 교수. ⓒ피렌체의 식탁

오바마, 트럼프... 연이은 '블랙스완' 그 차이는?

오바마라는 ‘블랙스완’(black swan)이 쿠바 문제를 해결했듯이 트럼프라는 또 다른 ‘블랙스완’이 북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그런데 2017년까지만 해도 북한 위기가 한껏 고조됐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적 행동 의지가 있었을까?

“물론 있었다고 본다. 트럼프의 단점 중 하나는 정치 경험이 없어 국가 안보나 국제 관계에 대한 맥락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사실 트럼프만큼은 아니지만 국제 관계 경험이 적은 주지사 출신이었던 빌 클린턴 조차 1994년 북핵 위기 때도 외과 수술 식 공습을 검토한 바 있는데 합참 브리핑에서 ‘미군 2만 명이 희생될 수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니까 화들짝 놀라 백지화한 적도 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당시 맥나라마 장관이 고백했듯이 미국은 베트남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나중에 미군 관계자들은 북베트남이 파둔 경이로운 수준의 땅굴을 보고 공황을 느낄 정도였는데, 북한은 베트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요새화된 나라다. 미치광이 전략을 좋아하는 트럼프는 처음에는 군사 행동도 고려했을 것이다. 이는 작년 화제가 된 밥 우드워드의 저서(공포) 등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이다.”

사실 트럼프는 우파/좌파, 보수/진보로 분류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대선 전까지만 해도 굳이 분류하자면 ‘우파 포퓰리스트’ 정도로 보여 한국 진보진영에서는 트럼프에 대한 반감과 우려가 더 높았다. 그러다 트럼프가 북한 문제에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오히려 기대감이 높아진 것 같다. 트럼프를 어떻게 봐야할까?

“우리나라 진보 지식인들은 ‘합리성’의 논리에 주로 근거해 상대방을 파악하는 경향이 있는데, 트럼프를 잘 모르는 얘기다. 미군이 절대 철수 안 할 거다? 미국이 끝까지 남한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절대 그런 결정론적 맹신에 빠져서는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할 부분은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불가피하게 자주 국방을 강화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기존 미국이 수십년간 만들어온 자유주의 정치질서를 혼돈으로 빠뜨리는 카오스의 제왕이다. 트럼프와 오늘날 시대를 기존 합리주의적 사고 틀로 바라보면 앞으로도 예기치 않는 당황스러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위기가 고조되다 2018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김정은의 신년사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북한은 남한을 지렛대 삼아 미국에 접근하는 전략을 펼쳤다. 미국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미국 주류 기득권층은 중도(리버럴)이건 보수이건 오늘날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이란, 쿠바, 북한 등 이른바 ‘불량 국가’들을 절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로 크리스토퍼 힐이 영민한 협상주의자이고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했지만 북한과의 협상에서 여러 번 좌절당하다 보니 이제 북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런데 미국 주류 지식인들은 전반적으로 역지사지 입장에서 북한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북한은 ‘언제 갑자기 하늘에서 핵폭탄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수십 년을 살아 왔다.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공포와 포위 심리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런데 미국 주류 기득권층들은 북한이 괴물이 된 역사와 북미간에 협상이 수차례 좌절된 상황의 상호 책임의 맥락에 대해서는 균형감 있게 돌아보려고 하지 않고, ‘사기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만 갖고 있다. 이건 히틀러에게 유화파 체임블렌이 속은 이후 생긴 뮌헨 트라우마인데 우리의 분단 트라우마와 비슷한 면이 있다. 우리의 일상 삶처럼 국제관계에서도 상대에 대한 역지사지의 공감과 단호함의 균형감은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날 미국의 리버럴들도 자신들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카스트로 체제가 존재하는 한 쿠바는 절대 미국과 수교 안 한다고 마치 절대적 진리인양 큰 소리 친 미국의 주류들은 오늘날 반성이 없다.

그런 측면에서 트럼프는 변화 국면에서 탁월한 선택을 했다. 김정은은 라울 카스트로(별명이 ‘무시무시한’ 라울)로가 그러했듯이 ‘무시무시한’ 리더이지만, 실용주의자이기도 하다. 기존 주류들의 경로 의존성에서 자유로웠던 트럼프는 실용주의적인 선택을 한 거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쉬웠을 거다. 주고받는 ‘딜’(deal)은 자기가 최고라는 과도한 자신감을 가진 인물이니까. 물론 그 배경에는 ‘오바마가 못 한 거 내가 하겠다’는 욕망과 계산이 있었을 테고. 오바마의 이란과 쿠바 합의는 다 폐기하고, 오바마가 못한 북한 문제에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정치적 판단이 깔려 있다.”

마초적 외교안보 갈증이 볼턴 다시 불러

그런 실용주의적 태도와 달리 존 볼턴 같은 네오콘을 등용한 배경은 뭘까? 더불어 존 볼턴 같은 네오콘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흔히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레이건 대통령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데 그는 시대감각에서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인사에서도 트럼프 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예를 들어 레이건의 비서실장 제임스 베이커는 역대 비서실장 중에서 군계일학이다. 매우 노회한 인물인데 당시 네오콘들은 소련이 더 크기 전에 핵공격을 해서 붕괴시켜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베이커 같은 실용주의자들을 기용한 레이건은 그들을 적절히 제어하기도 했다. 그 후 네오콘들은 멸종한 공룡들처럼 사람들은 사라진 줄만 잘못 알았는데, 2001년 9.11 테러를 기점으로 전면에 부상했다. 오바마 재임 기간 동안 이들은 다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마초적 외교안보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트럼프의 눈에 띄어 존 볼턴이 다시 등용된 거다. 아마 트럼프가 폭스채널 시청하다 마음에 들어 불러들이지 않았을까? 폭스 채널 시청을 통한 인사는 트럼프 특유의 어이없는 인사 패턴이라 할 수 있다. 폭스 채널에서 트럼프 눈에 들기 위한 일부 극우 출연자의 필사적 메시지를 볼 때마다 측은한 생각이 든다 ”

이란과 쿠바 등 이른바 ‘불량국가’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었던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에 관해서는 ‘전략적 인내’를 고수하며 뒤로 미룬 이유는 뭘까?

“미국은 북한을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완전 오판이었다. 북한이 ICBM 기술을 완성하려면 몇 년은 더 걸린다고 보고 일단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룬 거다. 정보 분석의 실패이다. 일례로, 미국은 사이버 공격을 통해 이란의 원자로 기술을 몇년 뒤로 돌리는데 성공한 바 있다. 그런데 북한에도 통할 줄 알고 똑같은 공격을 했지만 이란에서만큼 성공하지는 않았다. 이란 등의 상황이 북한보다 훨씬 급하기도 했다. 당시 중동은 이스라엘의 호전적 상황 등 매우 위험천만한 지형이었다. 그 사이에 북한이 ICBM 완성을 선언해버렸다. 과거 김일성, 김정일은 ‘평화협정 안 맺으면 목에 칼을 겨냥하겠다’고 핵 개발 추진으로 협박을 했는데, 김정은은 실제 칼을 만들어 목에 들이 댄 거다. 미국 입장에는 문제 해결 최우선 순위에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다.”

합의 영속성 지키기 위해서는 보다 글로벌한 메시지 필요

북미 관계 정상화가 이뤄지더라도 트럼프가 오바마의 이란과 쿠바 합의를 뒤집은 것처럼 다음 대통령이 북한과의 합의를 뒤집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합의의 영속성을 다지기 위해서는 트럼프만 볼 것이 아니라, 미국 의회 등 주류의 변화를 이끄는 전략도 중요해 보인다.

“우리 정부가 미국의 주류 기득권층, 나아가 글로벌 시민사회의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메시지에 더 고민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작년 9월 평양과 유엔에서의 연설은 평화 만들기를 위한 세계사적 연설로 기록될 것이다. 당시 지형에서 북한에 대한 존중의 메시지를 담은 것은 적절했다. 다만 모호하게라도 지구 시민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추구를 언급해줬어야 한다. 문재인의 평화 메시지가 과거 만델라나 하벨 전 대통령의 21세기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되어 국제 담론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소프트 파워다.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88년 만에 쿠바를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오늘 발표하는 새로운 쿠바 정책으로 쿠바 사회가 하루아침에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관여 정책을 통해 우리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지키고 쿠바인들이 21세기로 가는 동안 자립하는 것을 도우리라고 확신합니다.’

정치적 균형을 세심하게 고려한 발언이었다. 오바마는 과거 미국의 제국주의적 노선에 대한 진정성 있는 성찰, 과거를 뒤로 한 국교정상화와, 그 걸림돌이 될 통상·수출 금지 조치 해제라는 큰 선물을 언급해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법치와 정치적 표현의 자유 등 인권과 정치 개혁의 보편적 가치도 언급했다. 당시와 정치적 지형과 조건이 다르고 북한과 쿠바의 수용성이 다르지만 한국의 대통령은 이미 지구 시민사회의 리더로서 보편주의적 메시지 강화라는 방향은 여전히 중요하다.

미국 상하원을 비롯해 정가와 시민사회에 한반도 맥락과 평화 만들기의 담론을 전파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도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국은 정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지금 트럼프에 의해 어떤 합의가 이뤄질지 모르지만, 미국은 나중에라도 북한의 인권 문제, 독재, 평화적 핵 재처리 문제 등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존 캐리 국무장관이 천신만고 끝에 이란과의 지혜로운 합의를 했지만, 트럼프가 단번에 뒤집지 않았나. 우리도 다양한 상황과 변수를 가정한 시나리오 플래닝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일본은 일상적으로 접촉하며 ‘재팬 핸즈’라는 미국 내 일본 지지 그룹을 만들었다. 이후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 못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데 이에 대비도 해야 한다. 지금 미국 내 자타천 대선 후보만 10명이 넘는다. 이들을 미리 철저히 모니터링 하고 이들 주변의 인력 풀 들과 다면적으로 접촉해 나가야 한다.”

DJ의 '임동원 중용' 초당적 인사 기억하라

‘글로벌한 공감대 형성’이라는 명제가 국제 사회에만 필요한 것 같지 않다. 국내에서 정치적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수 진영의 공감대를 끌어내는 것도 중요해 보이는데.

“여전히 6.25 전쟁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세대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정혜신 씨의 책 <당신이 옳다>에 태극기 집회에 나오는 노인 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념적 논쟁부터 벌일 게 아니라, 그 분들의 삶을 인정하고 경청을 하니 훨씬 더 온화하게 대응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돌아가신 노회찬 의원을 존경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노회찬 의원 팬 중에는 자유총연맹 팬도 있다는 점이다. 나는 미국에도 비슷한 진보 의원인 고 폴 웰스톤 의원을 존경한다. 그도 참전 용사들의 열정적 지지를 받았다. 극우라고 자꾸 부정하고 배제만 할 것이 아니라, 공통의 가치 지반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적어도 민주공화국을 지향해가는 우리 대한민국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라는 가치는 기본적 공감대는 공유하고 있지 않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잘했던 것은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임동원 같은 분들을 중용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 분들을 끌어들인 것이 초당적인 인사였다. 지금도 조금 더 오른 쪽에 있는 인사들을 광범위하게 끌어 들여 초당적 지반을 강화해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미국에 부시 정부가, 오바마 정부 때는 우리나라에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는 등 정치 시계의 타이밍이 참 안 맞았다. 문재인-김정은-트럼프로 구성된 리더십 지형 형성이 절호의 기회인 것 같기도 한데.

“우리가 분단 트라우마를 이야기 하지만, 베트남도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겪은 나라이다. 미국의 네이팜탄을 맞은 자식의 살갗이 녹아 내려가는 고통은 그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지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그걸 극복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했고 오늘날 가장 친미적인 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나는 호치민과 베트남 민족을 존경한다. 우리도 위대해질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야가 좁은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된 586세대들은 젊은 시절 글로벌한 DNA를 형성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지금의 세상은 기후변화와 양극화라는 두 가지 난제 등에서 매우 위험하게 치달으며 지구적 정치 리더십을 갈구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평화 만들기에서 훌륭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다만 시야를 한반도 내와 전통적 패러다임에 국한하지 말고 지구 시민사회의 긴급한 아젠다에 호소력 있는 새로운 문명적 담론과 정치 거버넌스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간다면 한 차원 높은 진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단지 정치권의 과제가 아니라 지식인 집단, 대학 등 시민사회 모두의 긴급한 실천적 과제이다. 얼마나 훌륭한 전환적 기회인가. 이 기회를 놓친다면 한동안 회복이 어려울 것이다.”

인터뷰 / 김하영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