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버스 엔지니어링' 방식 추격 모델은 이미 한계
  • 대기업 선단 구조, 공공부문 비효율 구조 개혁 시급
  • 고부가가치 산업 해외 기술-인력 확보 시급
  • 4차 산업혁명: AI가 뭐에 쓰는 건지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 기능장 숙련 노동 유지 대안은 공제조합
  •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을 '지역 연구소'로 확대 재편하자
  • 중견기업 해외 시장 개척 나서고 정부가 지원해야
  • 혁신은 위기 속에서: 위기 두려워 해서는 안 돼

더불어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고한석 부원장은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IT 정책을 공부한 정책 전문가입니다. 2012년 미국 오바마 대선 캠프의 빅데이터 전략을 분석해 쓴 저서 <빅데이터, 승리의 과학>은 우리나라 정치계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고한석 부원장은 지난 1년 우리나라의 산업정책을 파고들었습니다. 연구 결과는 <한국의 논점 2019>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경제 분야에서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는데, 이를 돌파하기 위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에 속도를 내야하고, 이를 위한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고한석 부원장을 만나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편집자>

 

‘구조적 위기’ 진지하게 이야기해야할 때

현재의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해 ‘위기냐, 아니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일고 있다. 보수 세력의 정권 공격을 위한 과장이라 보기도 하고, 장하준 교수는 ‘비상사태’라고 말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얼마 전 미국 정치학자 마크 재커리 테일러 교수가 쓴 이라는 책을 봤다. 200년에 걸쳐 일어난 각종 산업과 기술 혁신의 배경을 살펴보니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있을 때나 위기가 닥쳤을 때 혁신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기업계이든 노동계이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막는다. 하지만 대공황이나 1,2차 세계대전 등의 위기 상황에서는 양보 안 하면 다 같이 죽기 때문에 기득권을 양보하고 혁신이 일어나게 된다. 북유럽에서 사민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도 대공황과 전쟁을 거치며 코너에 몰려 다 죽겠다 싶으니 서로 양보한 거다. 사실 우리나라도 박정희 정권 시절에 중화학공업 육성했던 것도 안보 위기 덕이었다. 미군 철수와 베트남 패망 위기가 부각되면서 국방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에 적극 투자한 거다. 그렇다고 혁신을 위해 전쟁 위기를 만들어 내거나 대공황에 몰리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최근에는 기후변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혁신 담론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반향이 없지만.

현재의 우리 경제 상황이 ‘파탄’날 정도는 분명 아니다. 문제는 양적 위기이기 보다는 질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 개혁이 시급한데 재벌과 노조가 개혁의 저항 세력이 될 수 있다. 의도적으로라도 ‘구조적 위기론’을 진지하고 활발하게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안전망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경제적 기득권 집단들에게 위협과 협박을 해서라도 구조개혁이라는 ‘데스밸리’(Death Valley)를 넘어야 한다. 폭풍이 몰려오고 있으니까.”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전략은 적절했나.

“임금주도, 고용주도, 소득주도 세 가지 개념으로 나눠 봐야 한다. 임금주도 성장은 북유럽처럼 고용률이 높고 연대임금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효과적이다. 고용주도 성장은 최저임금 개념을 아예 없애는 것이다. 실업률이 매우 높은 나라에서는 이를 통해 고용 총량을 늘릴 수 있다. 소득주도 성장은 전기료, 통신, 의료비 등 기본 생활 필수 비용을 낮추고 정부의 소득이전을 늘려서 가처분 소득을 늘리는 것이다. 사실상 분배 정책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성장’이라는 이름을 굳이 붙여 놓은 것 같으며 이 때문에 스탠스가 꼬이는 거다. 처음부터 케인즈적 분배 정책이라고 했으면 그 누구도 뭐라 안 했을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성장 전략, 신성장동력이 바뀌니까 혼란만 계속되고 있다. 슬로건만 있고 제대로 된 산업정책이 없다.”

장하준 교수는 “운동권 출신들이 ‘산업정책은 군부독재가 파던 파쇼정책’이라는 식으로 산업정책 폐기에 동조해 신자유주의적 구조 위기를 불러일으켰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과거 산업정책은 사실상 두 가지였다. 재벌(대기업) 정책과 에너지 정책. 그런데 재벌들을 굳이 도와줄 필요가 없어지니 산자부의 산업 파트가 할 일이 없어졌다. 1997년 이후에는 경제학계에서 ‘산업정책은 후진 정책, 없어져야 할 정책’이라는 생각이 주류가 됐다. 그러다보니 국내에 산업정책을 공부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게다가 과거 산업정책의 핵심 중 하나는 보호 무역을 통해 유치산업을 키우는 거였는데, WTO 때문에 무력화 됐다. 중소기업부를 만들었지만 산업정책이 아니라 기업정책만 있다. 산업정책은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데 중기부의 기업정책은 사실상 나눠주기 정책이다. 최근 청와대가 이러한 흐름을 바꾸려고 노력 중인데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국도 제조업 중심으로 유턴

고용 지표가 나빠진 데는 제조업 경기 둔화의 원인도 컸다.

“‘스마일 곡선’이라고 있다. 제조업 프로세스는 ‘프리 프로덕션(pre-prodution)’, ‘메인 프로덕션(main-production)’, ‘포스트 프로덕션(post-production)’으로 나눌 수 있는데, 메인 프로덕션의 부가가치가 가장 낮다. 미국은 메인 프로덕션을 포기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프리와 포스트 프로덕션에 집중했다. 그러다 오바마 정부 때 전략을 수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1600만 명이던 미국 제조업 노동자가 2000년까지 1400만 정도로 유지됐다. 그러던 것이 2010년에는 900만 명이 됐다. 10년 만에 500만 명이 줄어든 거다. 이유가 뭐냐면, 메인 프로덕션 파트가 전부 해외로 나가면서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수행되는 R&D(연구 개발) 투자도 함께 빠져 나가는 현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충격을 받은 오바마 정부는 빠져 나간 고부가가치 제조업 부분을 국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제조업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오바마 정부의 정책을 다 뒤집은 트럼프 정부도 제조업 보호 육성 정책은 더 강화해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제조업은 어떻게 봐야 하나. 우리나라 제조업 위기의 큰 원인 중 하나는 중국의 추격이다.

“개발도상국의 선진국 추격 전략에는 세 가지 모델이 있다. 우선 해외의 직접 투자를 받는 모델(FDI)이 있다. 동남아시아가 이 모델을 따랐다. 조립 공장 수준의 산업은 생겼는데 기술 이전이 안 되니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질 못 한다. 외국 자본에도 취약하고. 사실 우리나라도 세계은행 등에서 FDI 방식을 권유했었는데 거부하고 ‘리버스 엔지니어링’ 방식으로 갔다. 선진국에서 제품과 설비 들여다 다 뜯어보고 따라갔다. 이게 하드웨어 중심 시대에는 통했다. 그런데 중국이 보기에 한국 방식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다른 방식을 택했다. 큰 내수 시장을 무기로 ‘상품시장과 노동시장을 열어줄 테니 기술을 이전해라’라는 합작 방식으로 빠른 시간 안에 기술을 습득했다.”

중국에게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면 기술 격차라도 유지해야 할텐데.

“제조업을 저부가가치와 고부가가치 산업 두 가지로 나눠서 봐야 한다. 저부가가치 산업은 가격경쟁이 안 되기 때문에 어차피 내보내야 한다. 그중 핵심적인 부분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4차 산업 혁명, 헛돈은 쓰지 말아야

고부가가치 산업이 될 것이라는 이른바 ‘4차 산업’ 분야에서는 중국이 이미 추월했다는 위기감도 있다.

“4차 산업에도 여러 분야가 있는데, 구분 지어서 접근해야 한다. 우선, 인공지능(AI) 부문을 보면, 기술의 핵심은 알고리즘인데 알고리즘의 80%는 이미 다 공개돼 있다. 미국과 중국이 싸우는 건 상위 10% 알고리즘이다. 예를 들어 얼굴 인식하는 데 만 명 중에 한 명 오류냐, 세 명 오류냐 정도의 차이이다. AI가 너무 신비화 돼 있다. 목적이 불분명한 AI 기술개발에 너무 많은 돈이 투여되고 있다. 어차피 웬만한 알고리즘들은 다 공개된다. 더 큰 문제는 이걸 어디다 쓰는지 감도 못 잡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에 새 비료와 농약, 농기계가 나오면 4H클럽이나 농업기술원 같은 데서 이 비료를 쓰면 뭐가 좋고, 어떤 작물에는 어떤 농약을 쓰고, 농기계 사용법은 어떻고 이런 걸 다 가르쳐줬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AI를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아무도 안 가르쳐준다. 그러니 중소기업들 입장에서는 ‘남의 얘기’처럼 들리는 거다. 서비스 분야에서의 AI 활용은 결국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고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큰 시장이 바탕이 돼야 한다. 우리는 시장 크기로 경쟁할 수 없다. 대신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 공정혁신, 마케팅 효율성 향상 같은 데 이용할 수 있다. 기업 경영진을 대상으로 AI의 활용 가능성에 대한 교육과 컨설팅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화론에서 나온 이론인데, ‘70 대 25 대 5’ 룰이라는 게 있다. 70%는 그대로 현재의 환경에 적응된 특성을 그대로 유전하는 것이고, 25%는 유전자를 약간 변형해서 유전하고, 5%는 완전 돌연변이로 유전한다. 만약 환경이 완만히 변화하면 25%의 변형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 중 일부가 살아남아 새로운 종으로 번식하게 된다. 하지만 환경이 급격히 변할 때는 5%중 그러한 변화에 적합한 특성을 지닌 일부가 살아남아 다시 번식하게 된다. 투자 포트폴리오 구성할 때도 이 원칙을 써야 하는데, 4차 산업 분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정부든 기업이든 현재 중요한 분야에 70%를 투자하고 약간 리스크가 있는 부분에 25%를 투자하고, 나머지 5%는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겨둬야 한다. 창의적인 분야에서는 방향 설정이 무의미하다.”

 

R&D에 쓰는 돈은 세계1위인데 효율성은 28위.

‘헛 돈’을 쓰지 말아야 할텐데, 우리나라는 R&D 투자 규모에서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스라엘과 세계 1~2위를 다툴 정도로 양적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효율성을 따지면 세계 28위 수준일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R&D 투자는 공공과 민간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전체 R&D 투자금의 25% 정도가 공공이고, 75%가 민간이다. 공공 R&D 투자의 상당부분은 국책과제이거나 중소기업 R&D 자금 지원이다. 국책 과제인 경우에는 중소기업들의 실제 수요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 많은데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서 자신과 상관없는 국책 과제에 매달린다. 그리고 중소기업 R&D 자금 지원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는 R&D 평가 역량이 떨어지기 때문에 무조건 특허를 가져와야 인정해준다. 그런데 그 특허들 중 쓸모없는 특허가 너무 많다. 게다가 요즘은 시장이 글로벌화 되면서 해외 업체와 협력해 해외 특허를 함께 내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는 대부분 국내 특허다. 대부분 정부에서 R&D 자금을 타내기 위한 특허이고, 영세한 기업들은 이걸 받아 운영자금으로 쓴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의 문제도 심각하다. 지난 정부 때는 정부출연연구소들 내의 일부 선각자들이 있어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 안에 중소기업센터들을 만들고 예산도 편성해 중소기업 R&D 지원을 했다. 그런데 이번 정부 들어서면서 다 없어졌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자들의 이기심도 반영돼 있다고 본다. 말로는 ‘기초 과학 강화’라고 하지만, 자기 이력에 도움이 안 되는 중소기업 R&D 지원보다 나중에 자리 옮길 때 도움 되는 기초과학 SCI급 논문 하나 더 쓰고 싶은 거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역사관에 가보니 인조 가발이 전시돼 있다. 1960년대에는 가발이 우리나라 3대 수출품 중 하나였다. 수출이 잘 돼 머리카락 공급이 딸리니까 1966년 생긴 KIST가 화학섬유로 인조가발을 만드는 연구를 한 거다. 물론 기초과학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이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설립 정신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과기부 R&D 예산이 7조 원 정도인데 이 중 1조 원은 중소기업 R&D 바우처로 돌려야 한다.”

민간 분야의 R&D에는 어떤 문제가 있나.

“대기업 중심의 선단식 모델이 과거에는 1, 2, 3차로 이어지는 협력업체들이 역할 분담을 잘해 고속 성장을 위한 성공적 모델이었는데, 지금은 우리 경제의 질곡이 돼버렸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 같은 경우에는 1차 협력업체의 영업이익률이 3%대로 고정돼 있다. 원청인 현대자동차는 경기에 따라 이익률이 고공행진하다 곤두박질치기도 하는데 협력업체의 이익률은 변함없이 3% 정도를 보장해줬다. 과거에는 협력업체의 품질을 믿지 못하니 원청이 설계도에 자재까지 공급하며 일종의 임가공 업체처럼 통제를 했다.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경기에 상관없이 원청이 마진을 보장해주고, 기술까지 제공을 하니 R&D에 투자할 동기가 없다. 설령 R&D를 통해서 생산성을 늘려 이익률을 10%로 올려도 원청이 단가 조정을 통해서 다시 그 중 7%를 가져가 버린다. 이건 그냥 협력업체들이 원청에게서 월급 받는 거다. 이런 구조가 고착화 되니 대기업 울타리 안에 있으면 그래도 쌀밥에 김칫국 정도는 먹고 살지만,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러니 R&D 여력도 인센티브도 없다.

이런 구조가 고착화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 하나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격차다. 우리나라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의 핵심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가 아니다. 대기업에 속해 있으면 비정규직이어도 중소기업 정규직보다 훨씬 많은 임금을 받는다. 대기업은 노조에 양보해 임금을 올려주고 중소기업 착취해서 벌충하지만, 대기업 선단에서 밀려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은 이에 저항할 수가 없다. 만약 용감한 중소기업 협력업체가 있어서, ‘앞으로 현대차랑 거래 안 하고 폭스바겐이랑 거래하겠어’라고 뛰쳐나와도 폭스바겐으로부터 신뢰를 얻어 충분한 물량을 수주받기까지 버텨야 하는데 이들은 버틸 여력이 없다. 진보든 보수든 가장 중요한 핵심 아젠다는 대기업 전속거래에 묶여 있는 폐쇄적 선단 구조와 R&D를 비롯해 공공 부문의 비효율을 혁파하는 구조개혁이 돼야 할 것이다.”

 

현대 고부가가치 기술은 제품이 아니라 사람에 녹아 있다.

R&D는 결국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것인데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눠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 경제를 지금까지 성장시켜 온 ‘리버스 엔지니어링’ 방식은 유효 기간이 끝났다. 산업은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넘어 가는데 기술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니 수출량은 늘어나는데 기술거래 무역의 적자폭은 더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제조업 비율이 28%로 독일(23%), 일본(20%)보다 높은데, 부가가치율을 보면 우리나라는 5~6%로 10% 가까운 독일, 일본보다 떨어진다. 수준 높은 핵심 부품과 기술은 여전히 수입해오고 있다.

유럽은 오랜 세월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며 기술을 쌓은 시간의 축적을 해왔다. 중국은 넓은 지리적 공간을 활용해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짧은 시간에 공간적 축적을 해왔다. 산업 분야에서 중국이 턱 밑까지 추격해 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자체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축적을 위한 공간적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 국내에서 시간을 들여 개발하기 어려운 기술은 해외에서 인재를 유치하든, 제휴를 하든 M&A를 하든 과감하게 들여와야 한다. 지금은 기술이 제품에 녹아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 녹아 있는 시대다. 옛날처럼 배우고 베끼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외국에서 기술이 있는 사람이나 기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한국은 여전히 폐쇄적이다. 단순히 수출을 많이 한다고 해서 글로벌 기업이 되는 건 아니다. ‘글로벌 탤런트’를 얼마나 확보하고 있느냐로 가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삼성과 엘지가 해외 유수 기술기업들을 인수하고 있는데 방향은 잘 잡은 것 같지만 여전히 기업의 개방적인 문화 측면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정부도 제도 개선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외국 기술자에 대한 기술 이민을 위해 영주권을 발급한다든가 이들의 거주 연수에 따라 건강보험, 자녀양육지원 등의 사회복지 혜택을 차등화해 인센티브로 제공하는 방안 등을 준비해 도입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응해야 한다: 기능장 공제조합

기업 차원에서는 고부가가치 기술을 해외에서 흡수해야 한다는 것인데, 노동계 차원에서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일본이 80년대 불황 때 조선업 구조조정을 해 인력을 거의 해고했다. 그런데 90년대 말부터 조선업 호황이 다시 찾아왔는데 고부가가치 배를 만들 숙련 인력을 다시 모으기 힘들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비교적 단순하고 우리보다 한 체급 낮은 벌크선 위주로 중국과 경쟁하며 조선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도 그런 위험을 안고 있다.

불황이 찾아와도 다시 호황기에 대비할 수 있는 숙련 인력을 유지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유럽에서는 기능장들이 길드를 조직해 운영해오다 대공장이 들어서면서 길드가 무너졌다. 노조가 발달하기 전까지 그 사이에 노동자들이 자조를 위해 공제조합을 만들어 활동했다. 산업화 시기에는 노조가 역할을 했고 산별 노조가 이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노조와 기업의 대립 구도가 너무 강해 힘들 것 같다. 특히 단순 노동이 아니라 고도의 다양성과 전문성이 동시에 요구되는 사회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야 한다. 기능장 공제조합이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직무급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와 같은 기능장 공제조합이 체계화 되면 합리적인 직무급 임금 산정도 가능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산업 기능장 공제조합을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필요한 기능별로 숙련도를 ABC로 나눠 기능 맵을 만들고, 공제조합원 등록시 개개인 별로 어떤 분야의 어느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는지 분류해 데이터베이스화 한다. 인력이 필요할 때 빠르고 정확하게 필요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 정부에서 시드머니를 지원하고 해당 산업 기업협회도 지원해주고 조합 자체 적립금을 쌓아 불황기에 조합원들을 지원하는 자조금도 만들고, 최신 기술 재교육을 통해 기능을 업그레이드 시키며 재취업을 준비할 공간이 되게 해야 한다. 조금 더 범위를 확장하면 섬유 산업이 쇠퇴하면서 지방 정부와 대학, 노조, 기업이 지역 거버넌스를 구성해 섬유 산업 고도화에 나섰던 이탈리아의 밀라노 프로젝트 형식으로 갈 수도 있다.”

 

우리나라 진보는 세상 보는 시야가 너무 좁다

자금력이 떨어지는 중소, 중견기업 산업정책은 어떻게 짜야 하나.

“가격 경쟁은 이제 의미 없고, 앞으로 중소기업의 경쟁력은 기술과 시장 개척 두 가지에서 나온다. 정부가 이걸 도와줘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제법 탄탄한 중견기업들이 많다. 농심, 오뚜기 등 주로 내수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인데, 이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국책연구기관 중에 해외 경제 동향 등을 파악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을 확대 재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을 중국연구소, 일본연구소, 아세안연구소 등 주요 각 지역연구소로 독립시키고 여기에 코트라, 무역협회, 대기업 현지 법인들도 협력해, 기술력은 있으나 해외 시장 개척에 엄두를 못 내는 중견기업들이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데 도움을 주는 거다. 각 지역 연구소는 단순히 해당 지역의 경제 사안 문제뿐만 아니라 인문, 정치, 사회 등 조사 연구 범위도 넓혀 해당 지역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주변 지역에 너무 무관심하고 지역 연구 인력도 부족하다는 비판이 많다.

“우리 진보 세력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배가 항해를 하는데 우파들이야 ‘물고기를 많이 잡은 놈이 많이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그렇다 치고, 진보 세력은 선원들 간의 갈등을 잘 해결하고 공평함을 이루는 데만 중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선장과 항해사는 해류, 날씨 등 외부 경제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항로를 설정해야 한다. 국가 서비스에 대한 시각도 일국적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중국의 쑤저우 산업단지는 싱가포르 정부 산하 공단운영기관 등이 설계·운영하고 그 수익의 일부를 가진다. 글로벌 시각까지는 아니어도 지역적 시야는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 문제는 점점 더 내부의 갈등만 관심 갖는 내부지향적 사회로 굳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이 점점 섬나라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실 우리나라가 이 정도까지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만 해도 용하다고 생각한다. 성장의 한계치에 달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1987년부터 10년 단위로 큰 변화가 있었다. 80년대에는 플라자합의로 일본이 무너지면서 우리가 큰 덕을 봤고, 1997년 외환위기가 있었지만 이후 미국 등 선진시장이 호황을 누리는 상황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하고 중국의 제조업 호황을 함께 누렸다. 이 때 삼성과 엘지, 현대차, 조선3사 등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미국도 중국의 저렴한 공산품 덕에 인플레 없는 호황을 누렸지만 거품이 터져 2007년 금융위기가 왔고, 지금은 미중 갈등이라는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어 있다. 지금까지의 발전 모델로는 더 이상 가지 못할 것이다. 힘들겠지만 우리 사회는 구조 개혁을 고민해야 하고, 앞으로 큰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인터뷰=김하영/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