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미국과의 대결에 있어 장기적인 빅 픽처를 그리는 모습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이 사실상 미국의 러시아 피 말리기, 미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이라는 것은 발발 후 1년이 지나면서 거의 공인된 해석이다. 그런 러시아가 청나라 말기 이후 160년 만에 자발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 개방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경제력과 해군력이 극동 러시아에 가세하면 이 에너지는 북극 항로를 타고 미국(해군력)과 유럽(경제력)으로 향할 것이다. 푸틴이 중국의 힘을 업고 동북아시아 해역에서 미국과의 제2 전선을 열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라시아 중심의 이런 관점에서 보면 러-우 전 이후 중앙아시아의 이례적 평화도 주목할 일이다. [편집자 주]

✔ 163년 만에 중국에 블라디보스토크 개방한 러시아
✔ 동해 '뜨거운 바다' 되다… 새로운 지정학적 사고할 때
✔ 중앙아시아, 지정학적 가치 상승으로 세력 간 가교 역할
✔ 80% 넘는 푸틴 지지율은 소련 해체 트라우마 때문

✔ 재편되는 유라시아 판도… 유라시아로 시야 넓혀야

 

사진: 강인욱

 

서방의 정상들이 일본에서 G7 회담을 할 때 중국과 러시아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유라시아 경제연합을 열고 스탄 국가나 아시아 국가들과 어깨를 걸고 잇따라 모였다. 이 행사들은 서방에 대한 '맞불' 행사가 아니다. 러시아 총리 미스슈틴이 상하이협력기구에서 중국에게 러시아와 협력하는 새로운 ‘일대일로’를 제안한 것은 유라시아 대륙의 미래에 새로운 지정학적 이정표를 던졌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유럽으로 가는 기존의 일대일로 루트 대신에 중국에 두 가지 새 길을 제시했다. 시베리아 열차(TSR)로 러시아와 동구권으로 가는 육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북극 항로로 유럽에 이르는 해상로다. 특히 해상 루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중국에 개방한다는 것은 중국 만주 지역의 해양 개방성을 대폭 상승시키는 일이다. 뤼순, 다롄 등이 보하이만과 한국 서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1860년 베이징 조약 이래 지난 160년 동안 중국, 그중에서도 동북 3성 1억 1천만 인구는 철저히 내륙국 신세였는데 그 봉인을 풀 수도 있다는 놀라운 제안이다. 어떻게, 얼마나 실현될지 그 가능성과 폭은 지켜봐야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변수와 코로나 사태가 촉발한 21세기 동북아시아의 일대 정세 변화를 예고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이 일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러시아 방송에서 보도된 러시아가 제시한 일대일로 (사진: 강인욱)

 

실크로드와 엮인 한국의 지정학적 운명

러시아가 중국에 진출을 허용한다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어떤 지역인가? 이 얘기는 실크로드로부터 출발한다. 러-우 전쟁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서 벌어진 전쟁이지만 동쪽에 더 큰 충격파를 가져올 수 있다. 그 충격파는 실크로드를 타고 온다. 2200년 전 한무제는 흉노를 치기 위해 그들의 왼쪽 어깨인 고조선과 전쟁을 했고, 그 오른쪽 어깨를 끊기 위해 서역의 오아시스 제국들과 연계했다. 실크로드는 그러한 동맹과 동맹 유지에 필요한 교류의 상징이다. 중국은 북방 수비의 오른쪽 어깨가 튼튼해지자 왼쪽 어깨에 힘을 주었고 그 결과는 고조선의 멸망이었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최초의 국가 간 교류 사례로 꼽히는 서기 7세기 소그드 왕국의 궁전벽화 아프라시압 유적에 묘사된 고구려 사신도 단순한 사절이 아니었다. 사신은 중국 영토 북방의 실크로드를 통해 소그드 국에 파견되었다. 그 먼 나라까지 깃털 꽂은 모자를 쓰고 고구려 사신이 왜 갔을까?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성 함락의 위기를 맞자 군사 원조를 청하기 위해서 파견했을 가능성이 크다. (강인욱 유라시아 역사 기행 2015, 266페이지). 일본에는 실제 원병을 청한 게 기록에 남아 있다. 보장왕의 왕자 둘이 잇따라 파견돼 원병을 청했으나 그 몇 년 전 백제 부흥차 파견했던 5만 군사가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자 일본 조정은 한반도 불개입 방침을 정했고 망국의 운명에 처해 오갈 데가 없어진 두 왕자는 지금의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에 고려신사를 짓고 잔류하게 되었다.

 

아프라시압 벽화 앞의 필자 (사진: 강인욱)

 

이후 여러 역사가 있지만 한반도와 실크로드는 19세기 이후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으로 다시 연결되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19세기 중반부터 50년 정도 유라시아 대륙 심장부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대립을 빚은 게 그레이트 게임이다. 러시아는 통일하려 했고 영국은 이란, 아프간, 터키, 한반도에서 거기 구멍을 내려 했다. 고종이 러시아와 친해지려 하자 영국이 돌연 남해안의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여 러시아 견제에 나선 게 거문도 사건이다. 이러한 대립은 거문도 사건 전 크림 전쟁, 사건 후로는 러일전쟁이 이에 해당한다. 러일전쟁 당시 영국은 일본을 밀었다. 크림 전쟁(1853~1856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곧바로 전장을 극동아시아로 확대했다. 1854년 8월에 시베리아 최동단의 캄차카반도에 있는 러시아 요새를 공격한 ‘페트로파블롭스크 공성전’이 그것이다. 캄차카반도라면 좀 멀리 느껴지겠지만 당시 사할린과 아무르강과 같은 지리에 대한 정보가 불충분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 대한 정보가 충분했다면 아마 한반도 근처 어딘가에서 충돌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해석이다.

동방을 침략한 영-프 연합군을 간신히 막아낸 러시아는 캄차카의 요새를 버리고 대신에 빠르게 아무르강과 연해주로 진출하며 극동의 거점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1860년에 건설된 '동방을 정복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명명된 것이다. 이때 맞닿은 조-러 국경은 북-러 국경을 통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파죽지세와도 같은 러시아의 동북아 부동항 확보 성공은 수도가 잇따라 외국군에 함락되는 청 제국 말기 제국의 무능이나 무감각이라기보다 크림 전쟁 이후 유라시아의 정세와 동아시아가 연동함을 간파하고 빠르게 움직였던 러시아 측의 전략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봉인을 풀고 나오려는 용

러시아는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조선과 14km의 국경을 맞대는 데에 성공했고, 러시아의 진출은 중국의 차단을 의미한다. 거대한 용과 같은 중국은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이 막혔다. 청나라 말기 유약한 함풍제 시절에 베이징 북쪽의 열하 승덕산장에서 맺어진 이 조약으로 중국 북방은 아시아 대륙에 봉인된 셈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개혁·개방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중국은 다시 끊임없이 만주-동해를 거쳐 태평양으로 가는 길을 노려왔다. 때로는 나진-선봉지구와 두만강 일대를 조차하는 방법으로 북한으로 때로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통해 진출하려 했다. 하지만 봉인을 해제한 용이 날갯짓을 하는 순간 러시아의 동방 억제력과 힘의 균형은 붕괴될 것인지라 러시아 측은 그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막아왔다. (러시아의 극동 인구는 5백만 명, 중국은 동북 3성 인구만도 1억 1천만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블라고베센스크같은 아무르강을 끼고 있는 여러 도시가 개방 직후 수많은 중국인의 이민과 자본으로 상권을 장악당한 경험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시 중국인 거주자, 상인, 투자가들로 사실상 중국 영토가 될 것을 우려할 만하다. 신장 위구르에서 한인 이민자들이 이슬람 위그르인을 소수민족으로 전락시킨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두만강변 3국의 국경 (사진: 강인욱)

 

그런 러시아가 이번에 내린 결정은 러-우 전쟁과 급변하는 세계 정세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상징이 될 듯하다. 러시아는 지금 미국의 궁극적 목표가 러시아 붕괴에 있다고 보고 극동 러시아의 영토 주권이 위협받더라도 중국을 풀어주는 게 낫다고 보는 게 아닐까? 160년간의 봉인, 그리고 그 해제를 국면 전환의 히든 카드로 내밀 정도로 러시아는 절박해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극동 러시아가 중국에 일대 개방되는데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중국의 태평양 진출 가능성을 제시한 것 자체가 독한 결심과 상전벽해식 변화를 읽게 하는 상징적인 신호가 아닐 수 없다.

미스슈틴 총리의 제안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난 5월 4일에 이미 중국 세관은 동북3성의 통로 항구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사용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5월 15일 러시아 TASS 통신도 간단하게 그 사실을 전하며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 여파를 의식해서인지 인민망이나 환구시보 같은 대표적인 언론사에서는 다루지 않았을 뿐 중국 내 여러 매체에 알려지며 160년의 꿈이 이루어졌다며 반응은 뜨거웠다.

만약 시베리아 철도가 중국의 일대일로에 편입되고 중국이 극동의 항구를 이용하여 태평양과 북빙양으로 나갈 수 있다면 당장 동해는 '뜨거운 바다'가 될 것이다. 현재의 한-미-일 연결 고리와 북-중-러 연결 고리로 맞서는 상황에서는 잠시 우리의 갑갑증이 커지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한국은 동해를 일본이 활처럼 감싸고 있고, 서해는 중국과 맞대고 있어 3면이 바다임에도 해양의 개방성보다는 바다 끝 섬 같은 느낌을 받아왔다. 중국의 극동 러시아 진출이 현실화되는 새 판도에서는 한국도 새로운 지정학적 사고를 장착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인도의 활발한 움직임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인도에서 동남아를 통과해 극동을 거쳐서 북극항로로 나가는 구상을 제안하고 있다. 한국을 패싱해서 동방과 북극으로 나가는 교역로를 열자는 주장의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그러한 구상을 공식적으로 제안할 정도로 지정학적인 판도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23년 초여름, 한쪽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 개방을 논의하는 시기에 한쪽에서는 일본 함대가 욱일기를 달고 부산항에 들어왔다. 동해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판도가 160여 년 만에 흔들리는 상징적인 상황이었다. 과연 우리는 이런 변화에 얼마나 대비하고 있는가?

21세기 그레이트 게임

한국이 지정학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임박한 가운데 중앙아시아 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는 상승하고 있다. 러-우 전쟁의 여파로 유라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 연대하는 '신 유라시아 연대'의 등장 조짐이 보인다. 유라시아에는 러시아 정교와 사회주의 종주국인 러시아, 튀르키예에서 북극해까지 유라시아에서 가장 많은 지역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경제와 인구로 모두를 압도하며 팽창하는 중국과 그 뒤를 잇는 신흥 강국 인도, 그리고 근동에서 시작해서 유라시아 다수의 종교를 점하는 이슬람 공동체 등이 섞여 있다. 이러한 다양성이 그간은 분열의 원인이었으나 서방이 러시아를 압박하는 힘은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내버려 두면 상호 갈등과 갈등이 여전할 터인데, 서방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미국이 내뿜는 힘은 유라시아의 여러 나라에 공통의 압력으로 작용하며 결속력이 약간 강화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유라시아의 다양한 문화가 이미 공존하고 있는 중앙아시아가 각 세력 간 완충지대 및 가교로서의 역할을 키우고 있다. 어쩌다 보니 평화의 징검다리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 또한 배경에는 러-우전, 더 깊숙이는 미국의 유라시아 압력이 의도와 달리 지역 내 구심력의 강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를 지킨 용사들을 기리는 판필로프 기념비와 그 앞을 걸어가는 무슬림 가족 (사진: 강인욱)

 

중앙아시아의 가장 큰 대국이며 경제적으로도 앞선 카자흐스탄의 최대 도시인 알마티가 그 좋은 예이다. 알마티의 중심부에는 2차 대전 당시 모스크바를 구한 28인의 용사를 기린 판필로프 기념 공원이 있다. 그들의 무공이 다소 과장되었다는 논란도 있지만, 어쨌거나 독일과의 대조국전쟁에 중앙아시아의 여러 튀르크계 주민들도 함께 참전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념비이다. 올해도 5월 9일 전승 기념일에도 중앙아시아 정상들이 모스크바에서 모여서 함께 전승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 판필로프 공원 안에는 제정러시아 시절에 만든 젠코프 러시아 정교회가 있고, 그 옆에 거대한 바자르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모스크가 사이좋게 있다.

 

알마티 중심가에 위치한 젠코프 러시아 정교회 성당 (사진: 강인욱)

 

알마티라는 도시는 100년 전에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러시아 코사크인들이 세운 요새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카자흐인들의 언어는 튀르크계로 따로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튀르키예를 비롯해 여러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비슷하다. 그리고 종교는 이슬람을 대부분 믿고 최근에 아랍 지역의 영향이 강해지면서 히잡을 두른 여성들의 비율이 대폭 증가하고 있다. 반면에 거리 곳곳에는 서양식의 맥주바와 와인이 넘쳐나고 바자르에는 중국의 기술과 물건이 넘쳐나고 있다.

서로 이질적(때로는 적대적)이며 다양한 문화가 섞여서 전혀 거슬리지 않고 서로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은 실크로드의 전통이다. 과거의 강대국인 러시아, 현재와 미래의 강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 존재한 중앙아시아는 신유라시아연대가 구체화 될수록 그 중요성은 커질 것이다.

상하이협력기구가 끝나자마자 중앙아시아의 정상들은 곧바로 모스크바로 이동해서 “유라시아 경제포럼”을 열었다. 러시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은 물론 얼마 전 전쟁을 한 불구대천수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도 함께 앉았다. 수많은 나라의 정상들이 앉았지만 통역은 없었다. 쿠바를 제외한 참가국과 옵저버 나라의 정상들은 모두 유창한 러시아어로 경제협력에 대한 발제를 했다. 그리고 마치 조공국의 방문을 배알하는 천자처럼 푸틴은 중앙에 앉아서 회의를 주재했다. 소련이 붕괴된 지 32년이 되었지만 모스크바에 모인 각국의 정상들이 모국어 수준의 러시아어로 소통하는 그림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모습을 어필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각 정상들의 발제는 의례적이며 평범했다는 중평이다. 동서를 오가며 무역을 하던 실크로드의 후예답게 중앙아시아의 정상들은 중국과 러시아를 오고가며 조정자 역할을 하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러-우 전쟁의 반사이익을 누리며 오히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고 있다.

푸틴의 선택

시간을 거슬러 작년 2월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어떠한 러시아 전문가들도 러시아의 전면적인 공격은 예상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전면전은 현재까지의 전황을 보면 러시아 측의 패착이지만 정작 왜 무모한 전쟁을 했는지, 그리고 전쟁이 16개월간 이어져도 푸틴의 지지율은 80%를 넘는지 많은 사람에게 미스터리이다. 현재의 정세는 궁극적으로 1991년 소련의 멸망이라는 사건과 맞닿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소련이 사라진 직후인 1990년대 중반에 러시아에서 유학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을 꽤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러시아 사람은 소련이 순진하게 서방을 믿었다가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선전을 믿고 러시아에 기대는 소련 연방국들을 독립시키면 자신들도 미디어에 비치는 서방처럼 살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개혁·개방을 한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다. 1년도 안 돼서 그들은 세계 초강대국에서 거지꼴로 추락했다. 반면에 소련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던 중국은 공산당이라는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중국의 굴기는 극명하게 소련의 선택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서방은 여전히 러-우 전쟁의 여파로 소련이 몰락하듯이 다시 푸틴의 러시아가 무너지길 바란다. 5월 26일에는 미 상원의원인 린지 그래험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러시아인이 죽어가고 있고(Russian is dying), 이것은 우리 정부가 쓰는 돈 중 제일 잘하는 것이다(US military assistance to the country is the best money the U.S. has ever spent)"라고 한 발언이 우크라이나 공식 채널로 공개되었다. 미 정치인의 입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은 결국 러시아인들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는 극도의 적대감이 여과 없이 표출된 것이다.

반면에 현재 러시아는 어떻게든 1990년대의 실패는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가 친서방화되면 러시아 세력은 완전히 힘을 잃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1990년대부터 브레진스키가 “거대한 체스판”에서 예언해왔던 바이다. 푸틴이 서방과의 타협 대신에 무모하게 군사력을 동원한 전쟁을 택하고, 전쟁이 끔찍한 선택임에도 그에 대한 지지율이 80%를 넘는 것은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는 소련 해체의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러시아의 국력과 영향력이 얼마나 축소되었는지를 절감하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큰소리쳐도 이미 이류 국가로 전락해버린 러시아의 처지는 외면할 수 없다. 겉으로는 여전히 유라시아의 맹주임을 자처하는 러시아 역시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에 핵과 같은 물리적인 군사력이 아니라 지정학적인 이점을 이용한 영향력 강화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 배경에는 냉전 시기와는 완전히 달라진 위상의 아시아, 그리고 눈에 띄게 힘이 빠진 서방의 단결력, 여기에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중앙아시아가 있다. 러시아는 그들의 지정학적인 이점을 지렛대로 새로운 판도를 꾀할 것이다. 5월 29일에는 대표적인 친러 인사인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이 재선에 성공했다. 어렵게 재선되었지만 2029년까지 집권이 보장되어 유라시아 세력 간의 연대를 가속화할 것이다.

멀리 볼수록 자세히 보이는 한반도

유라시아를 둘러싼 거대한 체스판이 바뀌는 상황이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그 변화에 관심이 없다. 이 모습은 19세기 말 한국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조선을 둘러싼 체스판은 급격하게 바뀌고 있을 때 조선은 고립된 상황에 안주하며 우리끼리의 대의명분을 따지며 단순하게 대응했을 뿐이었다.

중국이 러-우 전쟁의 마무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결국 새로 재편되는 유라시아 판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의 개방은 두 나라의 이해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중국이 만약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항구적인 교두보를 마련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유라시아 연대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현재의 한-미-일 구도를 고집한다면 자칫 동북아시아 해역과 지역에서의 돌이킬 수 없는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행히 이번 중국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은 공식적으로 물류의 운송에 편의성을 취하는 정도이다. 우리에게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뜻으로 생각해본다.

필자는 전공이 북방 유라시아 고고학인지라 강의 때에 한국의 고대사를 우리만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서 거시적인 안목으로 볼 것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한국의 역사는 멀리 볼수록 자세히 보인다”. 지금 우리에게 쏟아지는 러-우 전쟁과 관련한 수많은 뉴스들, 대륙과 해양 세력의 갈등에 관한 뉴스들은 소스가 일방적이다. 세계는 러-우전으로 인해 미국의 힘을 실감한 측면도 있지만 튀르키예, 인도, 이란,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 멀티 플레이어들을 무대 위 주자들로 등장시킨 측면도 있다. 이럴수록 '누군가 들려주고 싶은 뉴스'와 '한국이 들어야 하는 뉴스'를 잘 가려야 한다. 다행히 지난 30여 년간 한국은 노태우 정권 이래 북방 지역과의 폭넓은 교류와 외교를 통해 다양한 네트워크를 구축해왔다. 정권은 바뀌어도 북방에 대한 관심은 계속 유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쌓아놓은 우리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유라시아 각지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러-우 전쟁은 우리의 생존, 이익과 직결되는 유라시아 거대한 지각 변동의 전주곡이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개방을 상징하는 금각만 대교 (사진: 강인욱)

글쓴이 강인욱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러시아과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로 일하며 고고학을 강의하고 있다. 시베리아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고고학을 주로 연구하며 한반도의 좁은 틀을 벗어나 유라시아의 관점에서 고대 또는 현재를 바라보고자 한다. '멀리서 보면 자세히 보인다'는 지론을 실감하는 것이다. 주요 저서로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유라시아 역사 기행』 『춤추는 발해인』 『옥저와 읍루』가 있으며, 그밖에 『북방 고고학 개론』(편저), 『유라시아로의 시간 여행』(공저), 역서 『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고고학 자료로 본 고대 시베리아의 예술세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