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요한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겸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성성한 백발에 포근한 시골 할아버지 인상의 소유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순천 사람보다 더 순천 사투리를 잘 쓰는’ 사람으로 유명한 그가 메디치미디어TV에 나와 ‘1980년 5월 광주’를 이야기했다. 당시 갓 20대의 대학생인 그는 시민군이 계엄군에 진압되기 직전인 5월 25일 전남도청에서 열린 시민군의 외신 기자회견에서 통역을 맡아 항쟁의 진상을 세계에 알렸다.인 교수는 5⸱18 당시의 체험과 숨은 이야기, 그 뒤에 겪은 어려움 등을 전하며 43년 전 ‘광주’를 오늘로 되살린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정한 의미를 계승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담담하게 말한다. [편집자 주]

✔ 43년 지나도… 5월이 되면 80년 광주로 돌아가는 마음
✔ 무장한 군인들이 겨누는 광주, 거대한 장례식장의 모습
✔ 눈에 빤히 보이는 진압… '도청을 끝까지 사수할 겁니다'
✔ '전두환 왜 놔두냐'고 항의… DJ, '보복은 못쓴 것이여'
✔ 푸르른 봄, 자유 선사한 이들의 희생과 의미 곱씹고 있나

<5·18 인요한 인터뷰> 방송 바로 가기

정아은: 안녕하세요. 바쁘실 텐데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요한: 불러주셔서 고맙죠.

정아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인요한: 이제 정년이 가까워지니까 그동안 살아온 것도 생각하고, 앞으로 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되면 뭐 할 건지 그것도 생각하고 계획 중입니다.

정아은: 1980년에서 벌써 43년이거든요. 그동안 교수님 내면에서도 광주에 대해서 많은 것이 더 깊어졌을 것 같아요. 5월이 되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5월이 오면 우울‘805로 마음이 돌아가

인요한: 지금도 5월이 되면 굉장히 우울합니다. 봄이니까 새로운 잎도 피고 화창한데, 저는 매년 5월이 되면 80년 5월로 마음이 돌아갑니다.

정아은: 당시 22살이셨잖아요. 청년 인요한이 겪었던 5월에 대해서 조금 얘기를 해볼게요. 저는 그 얘기를 선생님이 쓰신 책에서 접했는데, 원래 순천에서 가족들하고 계시다가 광주로 건너가시잖아요.

인요한: 가족들이 처음에 서울에 있었죠. 대전을 거쳐서 광주에서 차 갈아타고 순천에 가려는데, 그때가 아마 5월 19일일 겁니다. 거기 비아(현 광주 광산구 비아동 일대)에서 못 들어가고 돌아서 다시 대전으로 올라와서 기차로 내려갔어요. 집에서 조선대, 전남대 학생들 얘기를 듣고 아버지하고 대화 중에 한번 가봐야겠다고 말했어요. 그때 말로는 소위 유언비어라고 그랬죠. 근데 유언비어가 다 사실이었어요.

먼저 말씀드려야 할 건 저는 하루만 경험했습니다. 5월 25일 검문소를 일곱 개를 거쳐서 담양을 통해서 그 교도소(광주교도소) 앞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광주로 들어갔습니다.

정아은: 25일이면 광주가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거기에 들어가실 수 있었을까요?

인요한: 24일에 아버지하고 대화를 좀 나눴어요. 거기 나오는 얘기들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고.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데, 선교사들도 있고. 그러니까 한번 가 봐야 되겠다고. 아버지가 저한테 ‘너 들어가서 죽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아마 한국 부모 같으면 절대 못 가게 했겠죠. 그러나 서양 문화는 조금 달라요. ‘네가 알아서 해.’

인요한 교수(왼쪽)와 정아은 진행자(오른쪽).

7개 검문소 부딪칠 때마다 영어로만 미국 대사관 직원 흉내 내

인요한: 그래서 제가 다음 날 차를 가지고 가는데 담양에서 바리케이드가 호남고속도로에 쳐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차를 몰고 담양읍을 들어가서 국도로 교도소까지 가서 검문소를 7개인가 통과했죠. 검문소에 부딪힐 때마다 거짓말을 했어요. 내가 막 영어로 떠들고 (옆의) 통역이 ‘이 사람 미국 대사관 직원인데 당신들 큰일 나. 이거 외교적인 문제가 생겨’라고. 근데 다행히 그 검문소 지켰던 사람들이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야.

정아은: 한국말을 못 하는 척하신 거죠?

인요한: 예. 그런데 제일 인상에, 가슴이 그냥 찢어질 만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검문소 다 거쳐서 들어가는데 처박혀 있는 버스에 ‘뭉쳐라 전남, 우리밖에 없다’라고 (쓰여 있는 겁니다). 그게 지금도 굉장히 마음 아파요. 마지막 검문소를 거쳤을 때, M16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쫙 누워서 광주를 겨누고 있는 (거예요).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저 속에서 그러고 있나, 젊은 마음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아은: 근데 일반적인 심리에서 생각할 때는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어떻게 거기 들어갈 생각을 하셨는지요?

인요한: 철딱서니가 없었죠. 어리고 호기심이 넘치고. 또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이 나오면서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는 얘기도 하고. 피투성이다, 비참하다, 그래서 정말인가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무슨 통역을 목적으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냥 제 눈으로 한번 보고 나와야겠다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 이어진 겁니다.

정아은: 근데 실제로 가서 맞닥뜨렸던 광주는 대단히 고립돼 있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도시의 모습은 아니었잖아요. 겁나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어요?

인요한: 나이가 젊어서 그랬는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고요. 그리고 광주가 다 정리돼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데모의 흔적은 파출소 시커멓게 불탄 거, MBC 불탄 거. 그 당시에 광주역을 통해서 도청으로 돌아갔는데 굉장히 정리가 되어 있고 조용했어요. 차량이 안 다니고 오토바이하고 자전거가 다니고.

광주는 거대한 추모, 장례식장이었다

인요한: 그리고 벽보가 많이 붙어 있었어요. 아직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이 안 됐는데 전두환에 대해서 아주 격렬한 글이 많이 쓰여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그걸 읽으니까 같이 간 서울대학교 친구가 ‘빨리 가자. 좀 분위기가 안 좋다’고 (했어요). 얼굴이 미국 사람이니까. 근데 전혀 위협감을 느끼진 않았어요. 도청 앞에 가니까 장례식이었습니다. 나이 좀 드신 여자가 마이크를 잡고 오열을 하는데, 아들이 죽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무슨 폭동이다? 이런 건 웃긴 얘기고요. 그 거대한 추모. 뭐랄까, 꼭 장례식장에 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도청 건너편 건물 지하에 시신이 있다고 그래서 거기에 가서 제가 새치기를 했어요. 그때 처음 시민군하고 부딪혔죠. 지금도 후회하는데, 총을 메고 있는 시민군이 와서 나보고 ‘선생님 질서를 좀 지킵시다. 새치기를 하면 어떡합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러고. 도청으로 와서 학생증 보여주니까, 대학 학생증만 있으면 다 통과가 돼요.

정아은: 그런데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나중에는 시민군하고 외신 기자들 사이에서 통역을 하시게 되잖아요. 어떻게 통역을 하시게 됐고 당시에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외국 기자들을 위해 3시간 시민군 인터뷰를 통역하다

인요한: 도청 들어가자마자 앤드류 네고스키라는 기자를 만났어요. <뉴스위크>,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기자들, 외국 기자들이 다 와 있었어요. 그런데 앤드류 네고스키라는 사람을 기억하는 이유는, 저를 만나서 영어로 ‘이 사람 한국말 한다. 우리 기자회견 하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 순진했죠. 이제 한 시민군 대표가 나왔는데, 시민군 대표는 띠가 두 개입니다. 저는 학생이고, 그분은 30대 나이에 마르고 키가 좀 큰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좀 기다리라고 해서 30분 정도 기다렸죠. 도청 도지사실에서, 아마 지도가 많은 방이었어요. 거기서 이제 외신을 위해서 3시간 기자회견을 했죠. 마지막에는 질문을 주고받고 광주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가 다 나왔어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사진: 연합뉴스)

돌아가신 분 600명 이름이 적힌 종이복사 못 해 평생의 한

인요한: 제가 제일 후회한 것은 그 종이에, 이거 많은 혼란을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아요. 종이에 돌아가신 분 600명 명단이 있었어요. 거기에 실종된 사람도 있고 그런데 그게 진압 전이에요. 그거를 제가 복사를 해서 하나 가지고 나왔어야 하는데, 그게 평생 제일 한스러운 일이에요.

정아은: 나중에 공식 기록은 그거보다 훨씬 축소되게 남겨졌죠.

인요한: 200여 명으로 돼 있죠.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제 생각에는 훨씬 많은 것 같아요.

정아은: 그러면 그 종이는 시민분들이 작성한 것이죠?

시민군 대표 북쪽을 향하고 있는 총을 왜 우리한테 돌리느냐

인요한: 그 기자회견은 질서 있게 시민군 대표가 나와서 인사말부터 시작했어요. 오래됐기 때문에 내용은 다 기억을 못 하지만 ‘북쪽을 향하고 있는 총이 우리를 지켜주는 총인데 왜 총대를 우리한테 돌려서 우리를 죽이는가? 이해가 안 간다. 너무너무 억울하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했어요. 그다음에 강조를 한참 한 게 ‘우리는 빨갱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애국가를 부른다. 그리고 아침에 반공산주의 구호를 외치고 시작한다. 우리를 자꾸 사상범으로 만드는데 우리는 대한민국 애국가 부르고 시작한다’였어요.

정아은: 당시에 통역하셨던 내용들이 국내에는 전혀 전달이 안 됐었죠?

대학교로 돌아간 뒤 경찰이 2년 동안 따라다니며 괴롭혀

인요한: 하나도 전달 안 됐죠. 그 당시에는 2년 동안 경찰이 저를 따라다니고 괴롭혔는데, 아주 보이게 따라다녔어요. 근데 표현을 할 수가 없죠. 그 분위기가 얼마나 억압된 분위기였는지. 전두환 정권 동안에는 뭐 학교에 100일 만에 다시 돌아왔는데 경찰이 학생만큼 숫자가 많았어요. 사복경찰.

정아은: 그러면 5월 25일이 일요일이었죠. 그때 한 3시간 정도 통역을 하신 뒤에 광주에서 나오게 되시잖아요. 그리고 시민군 쪽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가시는 걸로 책에서 제가 봤거든요. 근데 결국에는 그다음에 대사관을 방문하시고 힘을 쓰시다가 다시 못 돌아간 상태에서 광주항쟁이 진압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약속을 못 지키게 됐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마음이 어떠셨나요?

인요한: 우선 그 통역을 하려고 기다리는데, 처음 상무관에 들어가서 시신 보려다가 새치기를 해서 시민군이 ‘질서 지키세요’ 하는 좀 창피스러운 일을 당했죠.

두 번째로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한 중년 남자가 무전기를 고치고 있는데, 배터리가 없는 거야. 그러면서 한 학생 보고 (배터리를 구해오라고 한 거죠). (그래서 학생이) ‘가서 그냥 달라 그러면 줘요?’ 그러니까, 그 어른이 ‘절대 안 돼.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더라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모자에서 5000원짜리를 꺼내더라고요. 그걸 학생한테 주고 ‘돈 주고 사’라고 합니다. 둘 사이에 약간 논쟁이 벌어졌어요. ‘아무 가게나 가서 달라고 그러면 그냥 줍니다.’, ‘아니야, 그렇게 하면 안 돼. 꼭 돈 주고 사.’

인요한 교수

한 대학생 가족, 친구가 죽은 사람들이 도청을 끝까지 사수

인요한: 그 학생이 성균관대 학생인데 광주 출신이야. 내가 광주 들어오면서 (군인들이) 전부 광주를 향해서 M16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봤으니, (그 학생에게) ‘너 그냥 포기하고 가라. 진압이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랬더니 그 학생이) ‘선생님, 저희한테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여기 남아 있는 사람 중 갈 사람 다 갔습니다. 친척이나 가족, 친구가 죽은 사람들이 도청을 끝까지 사수할 겁니다. 우리는 안 갑니다’라고 해요. 얼마나 내가 낯이 뜨거웠는지 미안하고.

그리고 뭐 차를 준비했다고 그래요. 외곽을 나가는데, 군용 트럭이에요. 그런데 13번을 그려놨어. 영어로 미국에서는 13번이 굉장히 재수 없는 번호예요. 그 차를 타고 가다가 산모를 만났어요. 그 산모가 더 급하죠. 진통이 와. 그래서 산모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외곽으로 간 거예요. 근데 이 친구가 겁이 없어 자꾸 외곽으로 간 거야. 나는 ‘제발 좀 세워라. 여기서 걸을게.’ 막 총격이 올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에요. 근데 이 친구는 그냥 뭐 막무가내로. 그래서 설득해서 좀 일찍 내려서 이제 걸어서 나갔죠.

시민군이 수상한 사람군인들한테 넘겨줘북한 연루설 난센스

인요한: 그런데 아마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는 게 5·18을 북한 간첩이 내려와 주도를 했다? 오늘 처음 밝히는데, 제일 기가 막힌 얘기가 시민군이 의심스럽고 수상한 사람을 체포했대요. 그리고 서로 맞서고 있는 군인들한테 백기 들고 가서 그 사람을 넘겨줬대요. ‘이 사람 잘 조사해 봐라. 이 사람 뭐 심상치가 않다. 우리가 봤는데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이 북쪽의 연루설이 얼마나 난센스인지 좀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정아은: 당시 도청에서 만났던 시민군이라든가 보초를 섰던 분, 아니면 외신 기자들을 광주 민주화 운동이 끝난 다음에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인요한: 한 명도 못 만났습니다. 외신 기자들은 다 한국을 떠났고, 아마 제가 만난 사람들은 거의 죽지 않았나 싶네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끝까지 도청을 지키겠다(고 했잖아요). 진압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그런데 저를 보초 섰던 성균관대 학생이 자기 여자친구 번호를 적어 주면서 자신이 무사하다는 걸 나가서 전화해달라(고 했어요).

정아은: 어떻던가요?

인요한: 그냥 알려줬죠. 전화해서. 근데 이후에는 전화번호도 잊어버렸고 확인을 못 했죠. 그다음에 지금 우리가 이런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살아서 그 분위기와 그때를 느낄 수가 없어요. 그때는 이제 하루가 어떻게 될 건지 고민하고 살았던 때예요. 너무 삭막했습니다. 나라 자체가 경찰국이었죠. 지금은 제가 경찰에 대해서 참 마음이 넓어요. 명예 경감이고 경찰대학교 강의도 많이 나가고. 그때는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아은: 굉장히 모순적인 시기였죠. 겉으로는 많이 봉합되어 있었지만 밑에서는 폭력이 부글부글 끓는 시기였는데, 그 폭력의 한복판에 들어갔다 나오신 셈이잖아요. 이제 한국 사회의 어른이신데, 지금까지 매 시기 정부가 광주를 대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인요한: 사실 정부들이 보상은 꾸준히 해왔어요.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김영삼 정권,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까지. 광주기독병원 원장님이 (당시에) 3일을 계속 수술을 했거든요. 그러면서 그분이 이제 보상위원회에 들어갔었던 것 같아요. 그분 얘기는 보상은 꽤 많이 나왔답니다.

물론 물질적인 보상도 중요하죠. 누가 손해를 봤는지, 누가 희생됐는지, 또 감옥 간 사람, 누명을 쓴 사람 다 중요한데, 저는 철학적으로 생각해요. 40년이 지나서 오늘날 오해를 받은 게 더욱 (안타깝죠). 지역감정이 있는데 경상도 사람들이 폭동설을 많이 (퍼트렸죠). 전두환 정권 때 유언비어라고 했던 말이 사실이에요. 거짓말이 진짜고, 진짜가 거짓말이고 이렇게 된 겁니다. 가슴 아픈 일이에요. 에스컬레이션(상황 악화)은 불필요한 일이었어요. 그렇게 과격하게 진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에요.

광주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져야

인요한: 오늘날 제일 아쉬운 게, 결론을 짓는다 하면 오해를 받은 게 광주에게 그 희생(고통)을 두 번 주는 거예요. 사람을 두 번 죽이지는 못하지만, 광주 정신은 훌륭한 거고 우리가 나라를 세운 이승만도 있고 경제를 만든 박정희 대통령이 있는데, 광주 때문에 대한민국이 튼튼한 민주주의가 된 거예요. 이제는 그렇게 못해. 절대 돌아갈 수가 없어. 광주 전으로 그걸 가지고 광주 시민들이 굉장히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한번 딱 40주년에 행사에 갔는데, 그 행사가 좀 마음에 안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 행사는 위령제 같은 걸 했는데, 그거 필요 없고 그 유가족들을 모시고 감사하다, 당신들의 친척의 희생이 헛 죽는 일이 아니었다, 고맙다 정말 우리가 귀하게 생각한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않겠다, 이런 행사가 더 맞지 않느냐.

정아은: 김대중 대통령과 아까 만났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김대중 대통령이 이제 사면에 영향력을 행사하셨잖아요?

인요한: 타지역에서는 굉장히 그걸 이해하지 못하지만 전라도 사람은 다 알아요. 김대중 선생님은 어떤 스승이에요.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1994년에 정계를 은퇴한 뒤 제가 형한테 “꼭 독대를 하고 싶다. 한번 그분을 일 대 일로 만나고 싶다”고 청을 했어요. 그래서 만났는데, 그때 선거에서 안 되고 이제 집에 계실 때입니다.

김대중, 전두환노태우를 끌어안다

인요한: 내가 앉자마자 김대중 선생님 보고 “선생님, 박정희 대통령은 돌아가셨지만 전두환은 살아있는데 왜 보복을 안 합니까?”라고 굉장히 격한 말을 했어요. “그 녀석을 가만히 놔두냐.”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사람 죽이는 미소로 활짝 웃으면서 뭐 손자 보듯 나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보복이라는 것은 못 쓴 것이여. 만델라 인생을 봐야 돼.’

(그 말을 듣고) 만델라 강의를 30분 들었어요. 백인들이 그렇게 괴롭혔는데, 감옥에 넣어서 30년 이상 살게 했는데, 나와서 보복 하나도 안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야, 참 훌륭하다 생각했는데, 1998년으로 껑충 뛰어서 대통령이 된 거예요. 이제 막 경사죠. 여의도 (대통령 취임식에) VIP석에 앉으니 가문의 영광이죠.

그런데 머리 벗겨진 사람이 들어오더란 말이에요. 그래서 저 사람이 왜 여기 와 있어! 옆에 보니까 노태우 대통령도 와 있고 난 아주 격분을 했어요. 마음속에 ‘왜 이 거룩한 장소에 저 사람들이 온 거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미성숙한 거야. ‘야, 저 어른 대단하구나. 저 사람들을 포용하네.’ 북한을 다녀오기 이전 아닙니까? 취임식 때 내가 ‘야, 저 사람 노벨상 감이다. 훌륭한 사람이다. 말로만 나한테 보복이라는 거는 못 쓴 것이오, 라고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저 사람들을 끌어안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김 대통령 임기 안에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더 형을 안 살게 했고 전혀 손을 안 댔습니다.

정아은: 그 부분을 여쭤보고 싶어요. 그거는 단순한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이 마땅히 형을 살고 나왔어야 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저도 김대중 대통령 존경하는데, 그 부분이 굉장히 아쉬워요. 그때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사면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 ‘북한에서 300명이 내려왔다더라’ 이런 식으로 유언비어와 가짜뉴스들이 돌게 된 원인이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사진: 연합뉴스)

용서는 하되 잊어서는 안 된다

인요한: 그럴 수 있지만 제가 목격한 것은 깊은 신앙심이에요. (김대중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유교에서는 ‘소림사에 가서 뭐 태권도나 배워 가지고 내려와서 부모 원수를 갚아야 돼. 이것이 미덕이야’라고 하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보복은 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지 마라’고 하죠. 제가 보기에는 김 대통령의 신앙심에서 나온 것 같아요.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고 저는 김대중 대통령을) 진짜 크리스천으로 보거든요.

유대인 말을 빌리자면 ‘Forgive, but Don’t forget’입니다. 우리가 용서는 하지만 그 사건을 잊어서는 안 돼요. 도청도 그 총알 자국을 파냈으면 좋겠어요. 파내 가지고 다시 페인트칠을 해서 총알 자국이 있는 그대로, 누구나 와서 도청을 걸어 들어가면 (알 수 있도록). 제가 제일 충격받은 게 광주로 들어갔을 때 도청의 총알 자국이었어요. 작은 소총 자국도 있지만 큰 총으로 헬기 사격을 안 했다는데 다 거짓말이에요. 헬기 사격을 했죠. 그러니까 머리로만 이해하면 부족해요. 가슴으로 이해할 때 그게 안타깝고.

5년 동안 중앙정보부도 우리 집에 왔고 경찰도 왔는데, 내가 “5년 말하지 않겠다. 나 좀 건들지 마라. 당신들이 건들면 내가 하버드나 좋은 대학에 가서 정치학 공부해서 이 정권 무너질 때까지 일하겠다. 죽일 생각도 하지 마라. 기자들이 다 나에 대해서 체크하고 있다”라고 거짓말했어요. 그리고 “당신 얼른 커피 마셨으니까 가라”고 했지요. 5년 동안 말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어요.

그때는 굉장히 내가 날씬했는데 5kg가 더 빠져버렸어요. 밤에 커튼을 안 닫으면 잠도 못 자고. 왜냐하면 어디 나가면 두 명, 세 명이 따라다녀요. 근데 그것도 재미난 게 순천의 정보과, 외사과 거기서 따라다니는데 내 담당하고 친해져 버렸어요. 그래서 겨울방학이면 그 사람하고 살아. 그 사람이 나한테 컴플레인(항의)도 많이 했어요. 너무 일찍 다닌다고. 좀 늦게 다녀라 그래서 내가 가서 경찰 조회 끝날 때까지 기다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와서 이제 옆에 타면 수첩을 닫아요. ‘오늘 근무 끝. 가세!’

정아은: 교수님, 그런 거 보면 진짜 정 많은 한국인이신 것 같아요.

인요한: 근데 당시에 아버지가 ‘미국 대사관에 왜 다시 안 들어갔냐? 미 대사관에 가서 네가 본 거를 다 보고해야 돼’라고 하셨어요. 우리 아버지는 진주만 폭격 세대라 정의, 진실에 민감해요. 그래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완행열차를 타고 전주로 가서 고속버스 타고 서울에 와서 5월 26일 오후 1시쯤 대사관에 들어갔어.

내가 보기엔 정부 쪽 사람들 같아. 정치과라고 그러더구만. 근데 정치과면 좀 냄새가 나죠. 거기서 또 한 3시간 설명을 했어요. 내가 보고 느낀 걸. 그리고 “그 사람들을 구해달라, 그 사람들 제3국으로 좀 옮겨달라, 일본이나 광주 미군 비행장이 있으니까 비행기 하나 띄워서 데리고 가라”고 요청했어요.

학생들의 중재 요청서를 받으러 광주로 가던 중 진압 뉴스 들어

인요한: 근데 이제 또 뉴스가 또 나왔어요. 하루 지났는데. 그래서 밤 11시에 내가 대사관에 전화했어요. 학생들이 중재를 요청한다고. 근데 서류를 받은 것이 없다는 거야. 참나, 그 상황에서 어떻게 서류를 (보내요)? 그래서 내가 “내일 들어가서 받아줄게”라고 했지요.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서 강남 터미널에서 버스 타고 광주로 가는데, 뉴스에서 광주가 진압이 됐다고 나오더군요.

정아은: 그때 마음이 너무 불안하셨겠어요.

인요한: 엄청 불안한 거죠. 그다음에 한 2주 되니까 이제 또 경찰이 막 따라다니고 미 대사관에서 또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미 대사관에 가니 총영사가 5공화국에서 온 편지라며 종이를 보여줘요. 내가 광주에서 데모 주동을 했다는 거야. 그래서 삿대질을 했죠. “당신 말이야, 미국이 정의스러웠고 진실을 추구하는 나라라면 기자회견을 열어서 나를 지켜줘야 된다.” 그랬더니 ‘너는 골치 아픈 외교 문제 덩어리’라며 당장 김포(공항으로) 가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옆에서 또 부추기는 거예요. ‘너 몸에는 총알이 안 지나가는 줄 아냐. 너 교통사고 나면 우리가 어떻게 하냐.’ 나는 그날 일평생 미국이라는 나라를 교과서에서 배운 거에 대해서 왕 실망을 해버렸어요. 이럴 수가 있을까. 왜냐하면 미국 내에서 미국의 윤리와 외국의 독재 정권의 윤리가 다르구나, 라고.

미국에 대한 실망, 자국과 타국에 대한 윤리가 달라

인요한: 나중에 제가 (병영 훈련을 위해) 문무대에 갔는데, 미국 대사관에 가서 허락을 받아오래요. 그래서 갔다가 미 대사관에서 쫓겨났어요. 내가 그때 또 영사한테 뭐라고 그랬거든. 타국 군대에 참여하는 것은 국적 박탈의 조건이라고 해서 그 여자 영사한테 “그럼 팀 스피어스는 왜 하냐?”고. 그러니까 이제 해병대 아이들 불러서 나를 친절하게 바깥에까지 (웃음).

정아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으셨어요. 최근에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가 사죄하러 갔잖아요. 어떻게 보셨는지요?

인요한: 좋은 일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좀 아쉬운 거는 본인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냥 ‘I’m sorry’ ‘너무나 불행한 일이었다’ (등의 진심이 담긴 사과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책의 내용도 왜곡이 됐고.

근데 거기 북한이 개입했다는 사람들 나이를 내가 계산을 해봤는데, 광주에 15살 때 들어 왔어야 돼. 그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벌이 아마도 1~2년 형을 받은 것 같은데, 한 5년 정도 이상 살아야 되지 않느냐 생각해요. 그거는 사실은 국가 모독죄, 모욕죄예요. 그런 거는 우리가 광주이기 때문에 더 엄하게 해야 되는 게 아니라 거짓말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이제 거짓말을 잡아야 되는데 불행하게도 그 거짓말을 믿고 싶어 하는 거죠.

그때 (전두환의 측근으로) ‘3 허 씨’(허문도, 허화평, 허삼수)가 있었거든요. 그중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장군 출신이에요. 한 10년 전에 만났는데, 밥 먹으면서 그냥 ‘폭동, 폭동, 폭동’이라고 하는 거예요. 한 시간 정도 듣다가 내가 “당신 그만해. 내가 거기에 있었어. 폭동 아니었어”라고 말했죠. 그 사람 한 시간 얘기했는데 나는 두 시간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그냥 찍소리도 못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진실이라는 게 요새 가짜뉴스가 많은데 잘 확인해서 정확한 팩트, 사실에 기초해서 해결하면 됩니다.

정아은: 제가 마지막으로 드릴 질문이 그거였습니다.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북한군이 300명이 개입을 했다든가 아니면 폭동이었다든가 이런 설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미워하는 움직임도 있거든요. 그런 젊은 사람들 또는 5·18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한마디 해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정아은 진행자

광주, ‘아픈 역사를 넘어 민주주의의 자부심으로

인요한: 아픈 역사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아시아권에서 제일 먼저 평화스러운 정권교체를 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거기 머물러 있으면 안 돼요. 머무르지 않고 거기서 교훈을 배우고 성숙해지고 광주 시민들이 좀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슬픔에 머물러 있으면 돌아가신 사람들을 위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딛고 넘어서 대한민국이 업그레이드돼서 우리 후대들한테 이 역사를 잘 설명해주고, 불행한 일이지만 이걸 통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기여를 했다, 이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광주라는 곳이 원래 동학에서부터 일제 학생운동,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이 무등산의 문화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기여를 했지요.

정아은: 맞습니다. 제가 준비한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하는 말씀 있으시면 해주시죠.

인요한: 일제강점기 때 제 할아버지는 국가유공자고, 아버지는 참전용사예요. 웃긴 얘기지만 최근에 나보고 ‘민주 투사’랍니다. 광주에서 통역한 게 하루 한 거예요.

대한민국이 생기고 나서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어요. 미국 사람들은 단점을 잘 덮어요. 조지 워싱턴이 영국군이었고, 미국을 세운 사람이 영국군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이승만 대통령도 단점들이 있었고, 링컨도 헌법을 70번 이상 어겼어요. 근데 미국 사람들은 그걸 언급을 안 해요. 나쁘게 표현하면 미화지만 단점을 알면서도 언급 안 하는 거죠. 링컨이라는 사람이 헌법을 많이 어겼지만, 연합을 지켰잖아요. 그리고 흑인에게 자유를 줬고. 그래서 우리가 링컨을 굉장히 훌륭하게 생각하죠.

보복하지 말고, 머물러 있지 말고, 전화위복으로 가자

인요한: 그런 것이 좀 안타까워요. 이순신 장군이 왜 감옥을 갔어야 되는데, 그런 점들은 우리가 계승해서 석연치 않은 행동을 한 사람도 그 부분은 조금 (덮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랑이 뭡니까? 사랑이라는 것이 남의 강점은 부각하고 남의 나쁜 점은 조금 가려주는 거, 이게 사랑 아니겠습니까? 역사도 그렇게 긍정적으로 김대중 대통령 말을 본받아서 보복을 하지 말고, 머물러 있지 말고, 전화위복으로 가자고 말하고 싶어요.

정아은: 상대의 장점을 많이, 강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줘야 된다, 이런 말씀이죠?

인요한: 그래서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제일 존경합니다.

정아은: 1980년 5월 27일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병력 앞에 9일 동안 진행되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광주 시민들이 뿌렸던 씨앗은 한반도 곳곳으로 날아가 심어졌죠.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화사한 꽃으로 피어나게 됩니다. 지금 굉장히 푸르른 봄인데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이 자유를 선사해 준 이들의 희생과 그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곱씹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43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전 광주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한 박관현 열사의 유족이 묘소 앞에 물을 주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 본 텍스트는 <5·18 인요한 인터뷰> 방송 내용을 읽기 쉽게 정리한 것으로, 출연자의 실제 발언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다 정확한 내용은 영상(메디치미디어 유튜브)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만난 사람 인요한은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이자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부터 전남 순천에서 자라 스스로를 ‘순천 촌놈’이라 부른다. 한국형 구급차 개발 등의 공로로 2012년 ‘특별귀화 1호’로 한국 국적을 얻었다. 이때 미국 이름인 존 린튼의 성 ‘린튼’에서 착안해 ‘순천 인씨’가 됐다. 지금까지 의료를 통한 봉사, 북한 어린이 의약품 돕기, 국내 외국인 권익 신장 등의 활동에 애쓰고 있다. <내 고향은 전라도>를 썼다.

진행자 정아은은
2013년 <모던 하트>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은행원, 통·번역가 등의 직업을 거쳤다. 주요 저서로는 <잠실동 사람들>, <맨얼굴의 사랑>,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등이 있다. 최근에는 광주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인 전두환의 집권 전후 삶을 다룬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