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의 일본’은 미국의 ‘푸들’일까? 미중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며 일본이 미국과 한몸처럼 밀착하자, 일본을 두고 ‘미국의 푸들’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시절 이라크 전쟁 등에서 미국 뜻에 충실히 따랐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국제 문제 전문가인 한승동 필자는 이런 주장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일본은 10여 년 전부터 중국 견제를 위한 ‘인도태평양’ 구상을 주창해 미국이 수용하게 했고, 그 속에서 일본만의 독자 외교의 길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일본의 외교력은 미국의 대중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한편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과의 협력을 더욱 다지는 최근 모습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고 필자는 분석한다.마침 4월 26일, 윤석열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어떤 외교력을 발휘하게 될까. [편집자 주]

✔ 중국의 일본 추월, 센카쿠열도 분쟁으로 비화해✔ 일본 외교의 최대 발명품은 '인도태평양' 프레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기시다 외교 변화해✔ 일관된 친중 독자노선 강화 방침 보이는 기시다✔ 세계 변하는데… 복고주의적 외교 반복은 안 돼

 

사진: 셔터스톡

 

“아베는 중국이 헤게모니를 쥔 아시아에서 일본이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브루킹스연구소 동아시아정책연구센터의 미레야 솔리스 소장은 지난해 7월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글에서 2012년을 이렇게 회상했다.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분쟁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일중 관계는 최악의 상태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국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동맹국으로서 일본에 대한 안보 공약을 지킬 것이라고 거듭 다짐할 정도였다. 솔리스 소장은 “미국이 이 지역에 확실하게 남아 있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밝혔다.

센카쿠열도 분쟁은 어떤 면에선 아시아에서의 ‘힘의 역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분쟁 2년 전인 2010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일본의 그것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그 뒤 중국과 일본의 GDP 격차는 가속적으로 벌어졌지만, 그것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미국의 비호 아래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룬 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반세기 이상 아시아에 군림했던 일본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전까지 일본의 서점가에는 중국의 모순과 분열, 파산을 전망하는 책들이 많이 깔려 있었고 대중적 관심도 높았다. 하지만 믿기 어려웠던 중국(경제 규모)의 일본 추월은 현실이 됐고, 거대 중국의 대두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외와 불안, 경쟁의식과 거부감이 센카쿠열도 분쟁을 통해 분출됐다.

 

일본명 센카쿠열도, 중국명 댜오위다오. (사진: 연합뉴스)

 

아베, 2007년에 ‘인도양과 태평양의 합류’를 주장하다

2012년 말 총선에서 이겨 다시 정권을 잡은 아베 신조 총리(제1기 집권 2006년 9월~2007년 9월, 제2기 2012년 12월~2020년 9월)는 중국이 주도권을 장악한 아시아에서 일본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한다.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과, 일본 외에 인도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가 참여하는 안보협의체 쿼드(Quad) 추진도 그 중의 하나였다.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의 출발은 5년 전인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총리 취임 이후 처음으로 인도를 방문한 아베는 인도 의회 연설에서 자신의 구상을 설파했다. 그것은 인도양과 태평양의 합류에 대한 비전이었다. 오늘날 미중 분쟁에서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드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의 토대가 된 것이 바로 인도 의회에서 설파한 아베의 비전이었다.

아베 비전의 핵심은 단독으로 대적하기 어려워진 거대 중국의 힘과 영향력을 인도와 일본이 함께 손잡고 대처하자는 것이었다. 아베는 인도 외에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끌어들여 4자 안보대화체(QSD)를 만들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매파였던 딕 체니 부통령이 참석했던 이 안보대화체가 중국을 겨냥해 대규모 합동 군사연습까지 벌이자, 중국은 ‘아시아판 나토(NATO)’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당시 비동맹 맹주 가운데 하나였던 인도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안보대화체에서 빠졌고 대신 영국이 들어가면서 쿼드(QUAD)가 됐다.

2021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 미국이 군사협력체 ‘오커스(AUKUS)’를 결성했고, 여기에 일본이 가담함으로써 ‘조커스(JAUKUS)’가 될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같은 해 10월에 조 바이든 정부가 발표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구상도 그렇지만, 이들 서방의 안보경제 협력기구들은 모두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 그 중심 국가는 미국이고, 이런 안보 논의 구조와 기구를 생각해 내고 구체화한 것은 일본, 아베 신조의 일본이다. 윤석열 정부도 지난해 5월 출범 직후 IPEF에 가입했다.

미국이 받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

아베 정권이 거대 중국의 힘과 영향력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고안해 낸 인도태평양 지역의 이런 안보협의체 결성 작업을 통해 일본은 미국 뒤만 따라가던 수동적인 외교에서 독자적인 외교력을 갖게 됐다. 그 전에는 일본의 독자적인 외교라는 게 사실상 없었다.

아베 정권의 등장 이후 새롭게 짜인 일본 외교의 최대 발명품은 바로 아시아 지정학의 필수요소가 된 ‘인도태평양’이다. 미국은 처음엔 이 발명품에 가담하기를 꺼려 했으나, 바이든 정권 출범 이후 중국과의 패권 경쟁이 더욱 치열해짐에 따라 일본이 고안해 낸 인도태평양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하고 있다. 미국은 한 걸음 나아가 나토와 인도태평양을 연결 또는 통합하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한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정상들을 초청한 게 그렇다. 기시다 정부가 5월 히로시마 G7 정상회담에 한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의 정상들을 초청하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IPEF 출범 행사에 참석한 일본(왼쪽)·미국(가운데)·인도(오른쪽) 정상. (사진: 연합뉴스)

 

미국에게 일본은 인도태평양 구상의 창안자일 뿐만 아니라 그 덩치나 무게, 전략적인 지리 군사적 잠재력 때문에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다. 이런 관계는 2차 대전에 패배한 일본이 승전국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일본의 덩치나 전략적 잠재력 때문에 전범국이자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영구 주둔이 가능한 사실상의 최대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공식적으로 확정한 것이 한국전쟁 중인 1951년 9월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 등 과거사 청산 문제들이 늘 일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처리되는 것도 그것이 미국에게 득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2차대전 뒤 재편한 아시아태평양 질서는 바로 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토대를 둔 샌프란시스코 체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체제 위에 세운 미국의 역내 안보·외교 정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전거 바큇살 또는 부챗살과 같은 2국 간 양자관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같은 집단안보가 아니라 미국 대 한국, 미국 대 일본, 미국 대 필리핀 식의 양자관계 중심에 늘 미국이 있고, 미국이 상대하는 나라들은 분산돼 있다. 아베 정권 이후 일본 외교는 이런 미국 중심의 양자관계를 뚫고 들어가 일본식 독자외교 체제를 만들어 냈다.

일본식 독자외교의 길

2007년 아베의 인도 방문과 인도태평양 비전 발표도 그렇고, 쿼드와 오커스, 점진적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CPTPP) 체결에 주도적으로 관여한 것도 그렇다. 지난 1월 기시다 정부가 영국 리시 수낙 정부와 두 나라의 군사력 전개와 훈련상의 상호 편의를 위해 체결한 ‘원활화 협정’도 그런 예다.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에도 유럽 중심의 외교를 펼쳐왔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 정세가 요동하면서 인도태평양 쪽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20세기 초의 영일 동맹이 그랬듯이 인도태평양에서 영국 외교의 거점 국가는 일본이다. 영국의 인도태평양 지향성은 보수당의 보리스 존슨과 리즈 트러스 총리 정부 때부터 강해졌다.

이를 두고 노동당 등 영국 좌파 세력은 과거 대영제국 시절의 대국 부활을 바라는 실현 불가능한 노스탤지어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보수당의 인도태평양 지향은 이 지역의 최강자인 미국과의 접점을 넓힘으로써 국제사회의 주요 플레이어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군사 협력과 경제 협력을 연계시켜 수익을 창출하는 실용적인 면도 있다. 일본과 영국, 이탈리아가 차세대 전투기를 공동 개발하기로 한 GCAP(글로벌 전투항공 프로그램)가 그런 예다.

아베 정권부터 시작된 일본의 독자 외교는 그의 갑작스러운 피격 사망으로 힘을 잃는가 했으나, 기시다 정권 이후 오히려 더욱 왕성해지고 있다는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영국 수낙 정부와의 원활화 협정을 체결한 것도 기시다 정부다. 기시다는 지난달 인도를 방문한 뒤 바로 우크라이나로 날아가 볼로디미르 젤린스키 대통령을 만났다. ‘평화헌법’의 제약을 받아온 일본 총리가 교전 지역에 들어간 것은 처음인데, 그 일로 기시다의 지지율이 많이 올라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닥 지지율 때문에 5월의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뒤 사임할 것이라는 설까지 나돌았으나, 지금은 지지율이 50% 정도까지 올라가면서 그런 관측들은 사라졌다. 기시다의 지지율 상승에는 한국 윤석열 정부와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의 ‘제3자 변제’식 타결도 한몫을 했다.

시사 주간지 <타임>이 지난 13일 발표한 2023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기시다도 포함됐는데, 그 주요 이유 가운데에는 ‘한국과의 역사문제 가라앉히기’와 방위예산 향후 5년간 2배 증액, 적기지 공격 능력 인정 등과 함께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강화함으로써 “일본의 외교정책에 혁명을 가져다줄 일을 시작했다”는 점이 들어 있다.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오른쪽)을 만난 기시다 일본 총리(왼쪽). (사진: 연합뉴스)

 

일본, 친중 독자노선 강화

기시다 외교의 변화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본격화했다. 그 변화의 뚜렷한 행적은 최근 중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때 기시다-시진핑 첫 회담이 열린 뒤 두 나라 사이의 외교 활동이 활발해졌다. 2월에는 양국 외무·국방 장관들의 회담(2+2 회담)이 열렸고, 3월 말엔 양국 군사당국 간에 핫라인이 개설됐다.

일본 외교의 최고 목적이 거대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 영향력에 대항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역설적이다. 게다가 대만 문제와 일본 제약회사 중국법인 일본인 간부의 스파이 활동 혐의 체포,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 문제 등으로 양국 간에 긴장이 높아져 있는 상황에서 이런 안보군사 분야의 고위급 논의가 이뤄진 것은 일본이 미국과 밀착하면서도 동시에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친미 일변도로 비치는 윤석열 정부의 대중국·러시아 외교 행보와는 대조적이다.

4월 2일엔 하야시 요시마사 외상이 일본 외상으로서는 3년 만에 처음으로 베이징에 가서 친강 외교부장과 중국 외교의 총사령탑인 왕이 정치국원을 만나고 리창 총리까지 예방했다. 같은 날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도 베이징에서 왕이를 만났다.

공화당 매파인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의 주도로 ‘중국특별위원회’ 같은 호전적인 중국 대응 정책 전담기구를 만든 미국과는 달리, 일본 국회는 장기간 운용해 온 일중 의원연맹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집권 자민당은 최근에 친중파인 니카이 도시히로 전 자민당 간사장을 일중 의원연맹의 새 회장으로 앉혔다. ‘킹 메이커’로 알려진 니카이는 기시다를 총리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니카이는 2015년에 일중 관광문화 촉진을 내걸고 3000명이나 되는 방중단을 이끌고 베이징에 가서 시진핑 주석과 회담을 한, 일본 정계의 대표적인 친중파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중 의원연맹의 전임 회장이 하야시 요시마사 현 외상이다. 2021년 11월 하야시가 외상이 된 뒤 공석이던 의원연맹 회장 자리를 친중파 니카이에게 맡긴 것인데, 친중파 하야시를 외교 담당 각료로 발탁한 것부터 그렇거니와 역시 친중파인 니카이를 연맹 회장 자리에 앉힌 것은 기시다 정부의 일관된 친중 독자노선 강화 방침을 보여준다.

 

중국을 방문한 니카이 도시히로 전 자민당 간사장(왼쪽)과 시진핑 주석(오른쪽). (사진: 연합뉴스)

 

일본 외교의 이런 변화는 동서냉전 붕괴 이후에도 일반인들이 실감하기 어려웠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체제가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압도적이었던 미국 일극체제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고, 전후 질서 재편기에는 존재감이 없던 중국이 미국과 경쟁할 정도로 힘이 커졌다.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에서 압도적이었던 일본의 힘은 상대적·절대적으로 약화되고 있고 한국, 대만, 동남아국가연합 등 중위권 나라들이 급속히 힘을 키워가고 있다. 산업혁명 이래의,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방세계의 절대적 우위도 사라져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화석연료에 기댄 산업화, 온난화에 따른 기후 위기와 인구변동으로 글로벌 차원에서 삶의 행태가 달라지고 있다.

이처럼 세계가 변했는데도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2차 대전 직후에 미국 주도로 재편된 ‘전후(戰後) 질서’다. 말하자면 샌프란시스코 체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 성립 당시 중국이나 한국, 동남아국가연합은 존재감이 없었다. 그랬던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는데도 경직된 전후 질서 체제는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2차 대전 후 세계질서’의 변화를 수용한 일본 외교

일본 외교, 기시다 외교의 독자노선은 그런 현실의 변화를 반영한다. 기시다 외교가 그런 변화를 선취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존립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쫓겨 어쩔 수 없이 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하면 윤석열 정부의 외교는 현실의 그런 변화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면서도 그 변화 이전으로 되돌아가 답을 찾으려고 하는 듯한 모습이다.

미국 또는 미일 동맹이 주도해 온 전후 질서의 주요 피해자 가운데 하나인 분단국 한국이 오히려 더 집착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복고주의적, 퇴행적 외교라고 해야 할까.

 


 

글쓴이 한승동은1986년 잡지 <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8년 <한겨레> 창간 멤버로 합류했다. 1998년부터 3년간 도쿄특파원을 지냈고, 이후 국제부장, 문화부 선임기자, 논설위원 등을 거쳤다. 동아시아와 민족(통일) 문제는 물론, 환경·생태·과학 분야 등 다른 세상사에도 두루 관심이 많다. 전체를 아우르는 이른바 통섭적 안목을 갖추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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