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의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1차관이 <피렌체의 식탁>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한 대목이다. 30년이 훌쩍 넘는 경제관료 이력 중에서 거시경제와 금융 분야의 커리어가 특히 두드러지는 김 전 차관의 경고라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는 올해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도 금융위기 예방을 꼽았다.
2023년 한국 경제의 현주소,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는 국내외 경제 질서, 정부의 정책 과제 등 여러 영역에 대한 김 전 차관의 견해를 전한다. [편집자 주]
✔ 에너지 자급률은 낮은데 각종 의존도는 높은 한국
✔ 경제성장률 예측치는 낮아지고 세수는 부족해져
✔ SVB 사태 신속 수습은 금융당국 긴장감 반영된 것
✔ 복합적인 인플레 원인… 금리 떨어지기 어려울 듯
✔ 성장률도 중요하지만 금융 불안정성 최소화해야

<피렌체의 식탁>과 인터뷰하는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1차관
‘한국 경제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23년 들어 우리 경제를 두고 부쩍 제기되는 질문이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그동안 당연시해온 경제 질서들이 흔들리면서 혼란스러움이 커진 탓이다. 실제로 금융, 수출(무역구조), 산업구조 등 경제의 전방위 영역에서 지난 20년 가까이 익숙했던 질서들이 깨지는 것은 물론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일시적인가, 아니면 구조적 전환인가?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1차관을 만났다. 현재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인 김 전 차관은 최근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김병연 원장)이 내놓은 정책 분석 보고서 <한국이 당면한 지정경(地政經) 리스크: 평가와 대응>에 ‘한국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위한 과제’라는 챕터를 썼다.
김병연 원장, 안도걸 전 기재부 2차관과 함께 쓴 이 글에서 김 전 차관은 한국 경제가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정학 위기가 더욱 커지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고, 그에 따라 금융 시스템이 흔들리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을 경험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 보고서 <한국이 당면한 지정경(地政經) 리스크: 평가와 대응> 전문 바로가기
정재권: 한국 경제의 현재를 살필 수 있는 지표에서 출발해 보자. 올들어 3월까지 무역수지 적자가 236억 달러를 기록했다. 3개월 만에 벌써 지난해 전체 적자의 절반 수준이다. 너무 급격한 것 아닌가? 원인은? 앞으로 개선될 소지가 있나?
김용범: 무역수지가 13개월째 적자이긴 하지만, 분기로 보면 지난해 3/4분기부터 급격히 적자 규모가 커졌다. 지난해 1/4, 2/4분기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서 올해 1/4분기의 적자가 지난해 전체의 절반 정도라는 염려가 나오는 것 같다. 2023년 전체로 보면, 최악의 구간은 지나간 것으로 판단된다. 2/4분기부터는 무역수지가 기록적인 적자 상황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무역적자 3대 요인…유가 급등, 반도체 하락, 중국 ‘제로 코로나’
김용범: 지난해 3/4분기부터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무역수지가 나빠졌는가를 보면, 첫 번째 이유는 유가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고, 서방이 러시아에 대해 제재를 시작하자 러시아는 가스관을 잠갔다. 전쟁 불안감에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 130달러까지 치솟았다. 그 이전에도 탄소중립 때문에 유가가 오르고 있었는데 전쟁이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문제는 다른 나라도 다 유가 급등의 영향을 받았는데 유독 우리가 타격이 큰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에너지 자급률이 가장 낮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자급률이 낮고, 석유화학처럼 에너지를 수입해서 가공해 파는 산업이 크고, 국민 생활에서 에너지 과소비도 심하고.
두 번째는 우리 수출의 핵심 품목인 반도체의 사이클 영향이 있다. 2020~21년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각 나라가 ‘락 다운(lock down)’에 들어가면서 비대면 활동이 늘어나자 반도체 재고가 부족해 반도체 대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우리나라가 엄청나게 반도체를 많이 수출했다. 그런데 그 재고들이 쌓이면서 2022년 반도체 수요가 확 줄었다.
그다음으로 우리의 제1 수출국인 중국이 ‘제로 코로나’에 들어간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만 불거져도 무역수지가 적자로 전환될 수 있는데 세 가지가 한꺼번에 터졌으니, 이 특별 요인의 영향이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이 특별 요인들이 조금씩 나아지는 상황이다. 원유 가격의 경우, OPEC 플러스가 감산을 한다고 해서 불안하기는 하지만 100달러를 넘길 것 같지는 않다. 중국도 리오프닝을 했고. 다만, 반도체는 계속 좋지 않을 텐데 삼성전자가 고육지책으로 감산에 들어갔기 때문에 가격이 조금 안정될 것으로 기대한다.
정재권: 그렇지만 최근의 무역적자 양상을 특별 요인 탓으로만 설명하기엔 불안감이 든다.
우리 경제 체력의 허약성 드러나
김용범: 그렇다. 무엇보다 우리의 경제 체력이 허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에너지 자급률이 너무 낮다는 것, 수출에서 중국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것, 반도체라는 단일 항목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것 등이 취약점으로 확인됐다. 그렇다고 반도체 산업 비중을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수출이 잘 나갈 때 반도체 때문에 나타나는 착시현상을 우리의 기초체력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정재권: 2023년 전체의 경제 상황을 두고도 걱정이 많다. 최근 국내외 주요 기관들이 잇따라 우리나라의 올해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낮추고 있다. 특히 올해 경제를 ‘상저하고’로 예상하고 있는데, 하반기에 한국 경제가 상반기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김용범: 올해 경제성장률은 정부의 전망치가 1.6%이고, 국제통화기금(IMF)은 얼마 전 1.5%의 수정 전망치를 내놨다. 양쪽 수치에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그런데 정부의 전망치를 보면, 상반기에 1.1%, 하반기에 2.0%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반기가 상반기보다 나으리라는 건 일반적 예상이긴 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의 여전한 가능성
김용범: 그렇지만 1.5%라는 숫자도 녹록지 않아 보인다. IMF도 전망을 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0.4~ 0.5%포인트가 떨어진다는 단서를 명시적으로 달아 놓았다. 그만큼 위기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지난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스위스 크레디트스위스은행의 파산에서 보았듯 글로벌 금융위기의 짙은 먹구름이 언제든 몰려올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외생적인 돌발 요인이 발생한다면 1.0%의 성장률조차도 꽤 도전적인 숫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올 상반기 큰 폭의 세수 부족, 추경 불가피
김용범: 그리고 또 하나, 걱정스러운 게 있다. 올들어 2월까지 국세 수입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15조 원 넘게 감소했다. 큰 폭의 세수 부족이 나타난 것이다. 이게 메꿔지지 않으면 재정, 즉 정부 부문이 성장에 기여할 여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정부가 기대하는 성장률 1.6%가 만만치 않다. 더구나 정부는 급격한 경제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 상반기에 재정 지출 비중을 65%로 높게 잡았다. 하반기에 쓸 재정을 미리 당겨 쓰는 셈이다.
결국은 경기 관리 등을 위해 추경 편성이 불가피해 보이는데, 정치적으로 재정 건전성 논란 등을 낳을 수 있어 염려스럽다. 어느 정도의 정치적 논쟁은 피할 수 없겠지만, 경기가 지금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공감한다면 재정이 최소한의 경기조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정재권: 지난 3월 미국과 스위스의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 사태 때 국제적인 금융위기가 올 것처럼 걱정이 컸지만, 지금 사람들의 머릿속에선 그 이슈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글로벌 금융위기의 짙은 먹구름이 언제든 몰려올 수 있다’고 보는 이유가 있나?
실리콘밸리은행 사태, 미국은 전면적 금융위기로 인식
김용범: 무엇보다 지난 3월 뱅크런 사태의 격렬한 전개 양상과 미국을 비롯한 주요 나라들의 신속한 수습 조치들을 보면, 그야말로 전면적인 금융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가 실리콘밸리은행에 대해 25만 달러 이상의 예금도 전액 보장을 해주는 파격적인 대응을 했다. 예금보호제도의 원칙을 깬 것인데, 그러려면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미국 정책 당국은 ‘시스템적 위기 시’ 특별하게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법률 조항을 근거로 삼았다. 지금까지 거의 적용된 적이 없는 조항이다. 그만큼 2023년 3월의 상황을 미국 금융당국이 시스템적 위기라고 자인하고 긴급 조치를 취한 거다.
그리고 크레디트스위스로 위기가 번지자 6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통화 스와프를 한 상태다. 이 조치 또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경우를 빼곤 거의 발동하지 않는 조처다. 6개 중앙은행의 통화 스와프는 지금도 가동 중이다.
또 미국 연준은 이번에 은행들이 유동성 위기에 대처할 수 있도록 1년짜리 한시 프로그램인 BTFP(Bank Term Funding Program)를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이 파격적인 이유는, 국채의 시가가 하락해 액면가를 밑돌 경우 시가가 아닌 액면가로 매입해 준다. 10년짜리 채권의 시가를 평가했더니 액면가의 85%가 나왔다면 15%는 은행의 손해인데, 금융당국이 15%의 손실을 떠안으며 액면가로 사준다는 것이다. 유동성 지원이 아니라 자본손실까지 중앙은행이 부담하는 조치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
정재권: 왜 이런 조처가 나오나?
지금도 극히 불안정하고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
김용범: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금융당국이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위기의 정오’가 바짝 다가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긴장감을 느끼고 있느냐인데, 지금은 극히 불안정하고 위험하고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다.
우리가 겪은 1997년의 외환위기나 2008년의 금융위기만 해도 위기의 초기 징후가 나타난 뒤 전면적인 위기로 번질 때까지 1년 혹은 1년 6개월 정도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실리콘밸리은행의 뱅크런만 봐도 급작스럽고 사전징후가 전혀 없었던데다, 인출사태 전개가 순식간에 이뤄졌다. 2008년 위기 이후에 강화해 놓았다고 생각한 시스템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정재권: 국내적으론 지난해 이후 고금리, 높은 가계부채, 부동산 가격 급랭 등으로 경제주체들의 어려움이 크다. 이런 경제 상황이 개선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데.
김용범: 더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 과거 오랫동안 저금리, 저유가 체제가 유지되다 2020년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이 나타나며 고금리, 고유가에 고임금 체제로 바뀌었다. 거시경제의 외부를 이루고 있는 큰 질서가 변화한 것인데, 이런 새 질서 하나하나가 대한민국에겐 아픈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거시경제의 큰 질서가 변화했다
김용범: 자금 공급이 수요보다 원활해 자금 조달이 쉬운 ‘이지 머니’(easy money) 상태가 지속되면서 세계적으로 부채가 늘었지만, 대한민국은 특히나 부채가 많이 증가했다. 게다가 정부나 기업보단 가계의 부채 절대 규모가 굉장히 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변동금리 비중이 높다. 무척 아픈 대목이다.
그런데 ‘이러다가 금리가 다시 내려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인플레이션 원인이 복합적이고 단기간에 쉬이 해소되기 어려워 당분간 금리는 잘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정재권: 방금 우리 경제의 구조적 측면을 짚어주셨는데, 현재의 상황을 보면서 ‘대한민국 경제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라는 물음들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뭔가 새로운 체제, 새로운 상황에 들어섰다는 위기감일 텐데.
김용범: 2022년부터 어려워졌으니 2022~2024년의 3년 정도는 경기 사이클상 불황기라 볼 수도 있다. 알다시피 지금은 긴축 국면이니까. 지난해부터 미국 연준이 금리를 무섭게 올렸고, 우리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통화 긴축 국면이다
그런데 지금의 어려움이 경기 사이클 문제라면 사이클이 끝나고 1~2년 뒤 호황이 있으니 견딜 수 있겠지만, 시계를 조금만 넓히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우선 ‘이지 머니’ 문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들이 거의 ‘제로 금리’ 상황에서 양적완화를 통해 시중에 엄청나게 자금을 풀었다.
지난 15년 동안의 ‘이지 머니’ 시대는 끝나
김용범: 2007년에는 미국 연준이 자산을 0.9조 달러밖에 안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 GDP의 5% 수준이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소위 양적완화(QE) 정책을 펴면서 2017년에는 보유자산이 4.5조 달러, GDP의 13%까지 늘어났다. 돈이 그만큼 엄청나게 풀려나간 거다. 2020년 팬데믹 위기 대응 차원에서 연준이 다시 기록적인 양의 채권을 시중에서 사들인 결과, 지금 미국 연준의 보유자산이 8.5조 달러, 미국 GDP의 34%까지 부풀어 올라 있다. 그러니까 2008년 기준으로 보면 15년 사이에 중앙은행의 보유자산이 여덟 배가 늘어난 셈이다. 소위 ‘이지 머니’ 시대였다.
자금이 풍부하니 가계든 기업이든 대출에 어려움이 없어졌다. 자동차나 집 구매도, 스타트업 창업도 손쉽게 대출을 이용했다. 이렇게 빚이 만연한 체제가 15년가량 지속됐다. 그러다 갑자기 2022년부터 연준이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금리를 올리고 보유자산도 축소하는 양적긴축(QT: Quantitative Tightening)에 들어간 상태다. 양적긴축이라고 해도 연준이 보유자산 8.5조 달러를 양적완화 정책 이전인 0.9조 달러 수준까지 줄인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양적완화 정책이 중단되고 양적긴축으로 전환된 것 자체가 금융시장에는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 상황을 단순한 경기 사이클만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기존의 저금리, 저유가, 저임금 체제가 고금리, 고유가, 고임금 체제로 바뀌었고, 이는 거시경제 기조의 큰 변화로 인식해야 한다.
정재권: 거시경제 기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한국 경제, ‘잘 나가던’ 시대가 지났다
김용범: 한마디로 한국 경제가 ‘잘 나가던’ 편한 시대가 지났다는 얘기다. 사실 지난 15년 동안 대한민국 경제는 세계에서 제일 ‘모범생’이었다. 세계화 시대에 중국의 팽창에 힘입어 많은 이익을 올리고, 낮은 금리를 이용해 민간이 부채를 늘리며 꽤 왕성한 팽창을 했다. 그런데 거시경제 환경에 기조적 변화가 일어났다면, 이제는 연 1.5%의 성장도 고마워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1.5%라도 성장을 하며 파국을 막고 3~4년 경기침체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구간이 온다. 고령화로 2025~2026년께 우리가 본격적인 생산가능인구 감소 시대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은 베이비붐 세대가 일부 일을 하고 있어서 고령화를 아주 체감하지 못하지만, 3~4년 뒤에는 노동시장에서 상황이 아주 달라질 것이다. 이런 상황까지 겹치면 우리에게 앞으로 연 2% 성장 같은 건 아득한 옛날 이야기가 될 것이다.
정재권: 이런 상황이 불가피하다는 건가?

사진: 셔터스톡
체력이 50~60대인데 20~30대인 줄 알고 막 움직이면
김용범: 제가 비관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당연한 거다.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3만 5000달러, 4만 달러 정도의 경제가 되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부든, 기업이든, 가계든 최적화를 해야 한다. 자기 체력에 맞는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체력이 50~60대가 됐는데 아직 20~30대인 줄 알고 막 움직이면 다칠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 탈도 나고.
정재권: 거시경제 여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도 그렇지만, 리딩 국가들의 경제정책이나 산업정책도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는 것 아닌가?
김용범: 당장 미국을 보자. 제조업의 경우, 지금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과감한 정책을 쓰고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이나 반도체 칩스법(Chips Act) 등을 보면 그 속도나 파격성에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수준이다. 저런 정책은 우리 같은 추격자들이 만들 만한 정책인데, 기술의 가장 상단에 있는 나라가 시행하고 있다.
미국, 제조업 경쟁력 회복에 ‘올인’
정재권: 추격자 입장에서는 폭력적이라고 느낄 정도다.
김용범: 추격자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사실 아직도 충격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런 정책은 일찍이 후발 주자였던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 모델이었고, 일본이 본뜬 것이고, 우리를 포함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따라 했던 정책이다. 미국은 제조업을 너그럽게 내주고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으로 갔던 건데, 한 세대 두 세대를 지나며 제조업이 경쟁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중산층이 무너지니 제조업의 중요성을 재발견했다. 특히 첨단 제조업을 회복하려고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게다가 우리에겐 탄소중립 문제도 있다. 에너지 자급률도 낮은 나라가 너무 대비가 안 돼 있다. 어찌어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대응하는 것 같은데 우리에겐 매우 큰 도전적 과제다.
정재권: 이런 상황에 대해 정부든 기업이든 가계든 나름대로 대응 노력을 하고 있고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위기감을 좀 더 많이 느끼느냐 덜 느끼느냐 하는 상대적 차이가 있겠지만. 거시경제 여건의 근본적 변화와 우리의 구조적 취약성 등을 감안할 때 우선 필요한 일이나 정책은 뭘까?
정부의 최우선 과제, 금융위기 예방
김용범: 일단 단기적으로는 금융위기를 예방해야 한다. 금융위기는 모든 논의 자체를 의미 없게 만드는 큰 충격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1.6%의 성장률 같은 정책 목표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바깥에서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보고 금융 불안정성을 최소화하는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 금융위기가 발생할 경우 우리 안에서 어느 곳이 가장 취약한지 시뮬레이션하고, 위험이 일파만파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올해 경제정책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정재권: 고금리, 물가 상승 등으로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느끼는 고통이 특별히 클 수밖에 없다. 어떤 정책적 지원이 필요할까?
김용범: 산업구조의 변화 속에서 일자리나 고용의 양극화로 소득 격차가 커지면서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거기에다 ‘이지 머니’ 시대에 대출 등을 통해 부동산에 투자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자산 양극화가 겹쳐 어려움이 더욱 커졌다. 특히나 투자는 고사하고 임대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부동산 부담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과거에는 서울의 특정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올라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밀려나는 것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 불렀는데, 이제는 서울 전체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얼마 전 정부가 서민층 지원을 위해 50만 원의 소액 생계비 대출을 시작하니 신청자가 구름처럼 몰렸다. 무상으로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금리도 15%가 넘는데도 그렇다. 그만큼 살기 어려운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정부는 지자체 등과 협력해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을 훨씬 세심하게 살피고, 재정을 활용해 사회안전망 차원의 지원을 늘려야 한다. 이런 지원은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재권: 미-중 기술 패권 전쟁으로 인해 국제 산업구조 질서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우리나라의 ‘효자 산업’인 반도체에 미치는 영향이 특히 크다. 정부가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어떤 전략을 펼쳐야 하나? 4월 26일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때 어떤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나?
한국, 미국에 요구하고 받아낼 레버리지 있다
김용범: 올해가 한미 동맹 70주년이다. 굉장히 의미 있는 숫자다. 그리고 국빈 방문이니 우리에게 소중한 기회다. 두 나라 관계가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이라는 건 미국에게 한국이 그만큼 중요한 나라라는 뜻이다. 특히 미-중 기술 패권 갈등의 측면에서 보면, 한국은 반도체의 핵심 기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전략적 지위가 있다. 2차전지도 그렇고 하이테크 영역에서 한국은 미국에게 매우 ‘에센셜한(essential)’한 동맹이다. 요구할 것을 요구하고, 받을 것을 받아내는 레버리지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만약에 대만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난다면 시스템반도체를 전 세계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우리 말고 누가 있겠는가? 미국은 대한민국 경제가 중국과 가치사슬 면에서 불가피하게 통합돼 있는 점을 이해하고 중국에 진출해 있는 기업의 숨통을 죄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확장억제 정책의 유효성을 담보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합의될 필요가 있다.
정재권: 올들어 ‘생성형 AI’인 챗GPT를 비롯해 AI를 둘러싼 격변이 모든 영역에서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이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나?
‘생성형 AI’ 기반 기술이 됐다
김용범: 생성형 AI는 이미 변곡점을 넘어 기반 기술이 됐다고 본다. 상용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기술이 발전했으며, 지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발전 중이다. 재생산의 한계비용이 제로(0)에 가깝기 때문에 도입 여부에 따라 생산성 차이가 극명할 전망이다. 한국의 국가 경쟁력을 위해 기술 흐름을 빠르게 파악하고 빠르게 도입해야 한다.
AI 기술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핵심인 파운데이션 모델과 AI 반도체는 미국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다. 국가적 대응이 필요하다. AI 엔지니어의 기술력 차이, 지속적으로 바뀌는 기술에 대한 대응 능력 등의 문제 때문에 단기적으로 기술 격차를 줄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나, 장기적으로는 자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동시에 생산성 개선에 따른 고용구조의 변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가 불가피한 만큼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 디지털 산업의 특성상 승자독식 경향이 강해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할 것이다. 소득 분배, 사회적 갈등 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글=정재권 콘텐츠코디네이터
사진=해시드오픈리서치
만난 사람 김용범은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관료로 34년간 일하면서 미국 워싱턴 세계은행 선임이코노미스트,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기획재정부 제1차관 등을 역임했다. 코로나19 위기가 시작될 당시 거시경제금융회의 의장으로 금융시장 안정에 힘썼고,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을 실무 총괄했다. 주요 저서로 <격변과 균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