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상자를 통째로 주운 듯한”(김석희), “발견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조성은), “삶의 굽이굽이마다 생각과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작은 돌”(송광용),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을 쓰고픈 분들에게 건네는”(이동식), “인간의 겉과 속을 보여주는”(유용선), “소설을 읽는 인간과 그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에세이들”(김봉석).번역가이자 작가인 박산호가 최근 낸 에세이집 <소설의 쓸모>에 대해 동료 작가 6명이 페이스북에 쓴 글들을 모았다. <소설의 쓸모>에 대한 짧고 편안한 감상평이자 안내의 글이다. 동시에 ‘지금 시대에 소설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물음이자 답변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

✔ 소설의 종언을 말하는 시대, 소설의 쓸모를 외치다
✔ 사랑스러운 가족 이야기, 마치 잘 만든 '일드' 같아
✔ '질문이입', 저자의 고민과 질문에 나를 이입시키다
✔ 과거에 대한 아쉬움, 소설은 그 간극을 해소해준다
✔ 좋은 독자의 독서 후 활동을 종이책으로 읽게 되다
✔ 여전히 픽션의 힘은 강력하고, 때론 개인 뒤흔들어

 

 

 

보석상자를 통째로 주운 듯한

◇ 김석희

‘보석상자를 통째로 주운 듯한 에세이집 : <소설의 쓸모>’

소설의 종언을 말하는 시대에 소설의 쓸모를 외치는 용감한 책이라니.

박산호의 <소설의 쓸모>를 펼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이야기 너무 좋아하지 말어.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라는 할머니 말씀이 예언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것은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하신 예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박산호는 나와 생일이 같다. 생일이 같은 자의 운명적인 가난인가? 하면서 웃었다. 물론 가난의 척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말이다.

이 책은 크게 ‘영감이 기다리는 세계’와 ‘미스터리를 환대하는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가진 서사의 세계겠지. 이 책은 목차만 읽어도 소득이다. 아니, 목차를 꼭 찬찬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를테면, ‘일기를 쓰면 모두 덜 미친다’라든가, ‘걸작을 만들어 낸 질문’이라든가, ‘젊은 여주인공이 기필코 성공하는 이야기를 읽는 사회’라든가. 읽는 것만으로도 사유하게 되는 목차. 그리고 그 제목 밑에 주옥같은 소설들의 제목이 적혀 있다. 그것만 골라서 읽어도 득템이다.

이 책은 한 챕터, 한 챕터 읽어나가는 게 아깝다. 아깝지만 첫 번째 챕터만 조금 소개해 볼까? 첫 번째 챕터는 ‘만약 세상이 그토록 문자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면’이라는 제목 밑에 <활자 잔혹극>이 적혀 있다. 언젠가 내가 유튜브에서 <더 리더>와 <연애소설 읽는 노인> 이야기를 하면서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댓글에 링크 걸어도 되겠죠?), 이 챕터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좀 더 ‘찐하게’ 전개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반가웠던 것은, 첫 문장에서 바로 독자의 호기심을 멱살 잡고 끌고 가는 소설이 두 개 있었다는 대목이다. 한 편은 당연히 <활자 잔혹극>인데, 다른 한 편이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또 소리 내어 웃었다.

맙소사! 생일이 같은 자의 운명적인 책인가? 나도 그런 책이 두 권 있는데, 하나는 <킨>이고 하나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었다.

이런저런 우연으로 말미암아 따뜻한 온도를 느낀 책. 챕터마다 보석 같은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으니, 이 책을 보석상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글이 정말 좋다. 작가 자신의 담백하고도 바지런한 삶이 그대로 담긴 책이다.

*풋노트 : 박산호 자신이 미스터리 소설 전문 번역가인 동시에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니, 이런 목차가 너무 당연하기도 하다.

 

사진: 김석희 SNS

 

 

‘발견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 조성은

번역가로서 작가로서 오랜 기간 소설을 흠모해온 사람으로서의 애정과 역량이 엿보이는 에세이다. 제목을 접하는 순간 과연 내게 ‘소설의 쓸모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리뷰이기도 하지만 전혀 딱딱한 서평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재미있고 유익하다.

책에 등장하는 열일곱 권의 소설들은 만만치 않다. 흔하게 접할 수 없었거나 쉽게 지나쳤던 책들의 목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책을 검색해 보든, 발견의 기쁨을 누릴만한 책들이다. 장르 소설이면서 문학성이 넘치는 소설을 만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오랜 기간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접한 애호가나 시네아스트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에세이로서도 진정성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의 전작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라는 자전적인 에세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독특하며 사랑스러운 가족의 이야기가 마치 잘 만들어진 일본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에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여성들이 눈여겨봐야 할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 점에 대해서는 박산호 작가가 자세하게 책 소개를 해주셨으니 꼭 찾아서 읽어보시길.

게다가 이 책은 ‘발견의 기쁨’(책을 사랑하는 이라면 모름지기 남들이 아직 모를 것 같은 책을 선점했을 때의 쾌감에 대해 잘 알지 않나요?)을 누릴만한 책이다. 오후의 산책 끝에 들린 서점 어딘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뽑아 들었을 때 더욱 매력을 느낄만한 책이랄까.

소설의 쓸모란 무엇일까.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가 흐려진 지금 그 쓸모란 한 가지가 아닐 거다. 지루한 여행의 동반자, 새로운 세계를 다중으로 경험하게 하는 오래된 멀티버스, 다른 이가 되어 보는 놀라운 경험.

책 속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책 속에는 친절한 안내를 도맡는 썩 괜찮은 안내자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역할을 아주 쓸모 있게 해내고 있다.

 

사진: 조성은 SNS

 

 

삶의 굽이굽이마다 생각과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작은 돌

◇ 송광용

<소설의 쓸모>는 소설들을 놓고 썰을 푸는데, 유려한 서평이기도 하고 책을 매개로 작가의 생각과 삶을 풀어낸 에세이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책에 관한 생각과 삶의 얘기가 적절한 비율로 섞여 있어서 흥미롭게 몰입할 수 있었다. 소설들은 삶의 굽이굽이마다 작가의 생각과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작은 돌이 되어주었고, 난 그런 소설의 영향력이 바로 소설의 쓸모라고 이해했다.

<소설의 쓸모>엔 챕터마다 화두의 시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그 책들을 읽지 못했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친절하게 풀어내는 게 작가의 특기니까. 밤에 스터디카페에 들고 와서, 글을 끼적이다가 졸음이 몰려왔을 때 꺼내 들었다. 서문이나 훑어보고 일어서자는 생각이었는데, 홀린 듯이 책에 빠져 앉은 자리에서 반이나 읽고 말았다. 읽는 내내 줄곧, 책에 소개된 소설을 통해 던지는 작가님의 질문을 내 것으로 바꾸어 했다. 대화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어떤 대상의 감정을 내 것처럼 여기며 빠져드는 걸 ‘감정이입’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고민과 질문에 이입시키는 힘이 있다. ‘질문이입’하게 만드는 책.

“나는 그에게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소재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는데 대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민진은 미국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마음에 항상 걸리는 것,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것에 대해 써보라고 독려한다고 한다.” 26쪽

“이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뭘 꿈꾸며 나아가야 할지 몰라 힘들었던 것이다. 부모나 남편이 알려주거나 결정해주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나란 인간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스스로 나아갈 길을 정해야 한다는 것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래서 잠시 길을 잃은 채 깜깜한 어둠 속에서 멈춰 서 있었다.” 40쪽

“인생의 불확실성과 미지의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통제력을 상실할 가능성에 대한 공포, 태어나서 지금까지 쌓여온 자동 재생되는 편견과 습관을 계속 가동하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의식에 자동 저장된 그 프로그램을 삭제할 때만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설과 삶을 통해 내가 본 그 모습은 생각보다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이것만큼은 믿어도 좋다.” 90쪽

 

사진: 송광용 SNS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을 쓰고픈 분들에게 건네는

◇ 이동식

아쉽다.

단숨에 너무 빨리 읽어서(더 읽고 싶은데)

저자의 독서력을 보건대 읽어온 수많은 소설 중 17편만을 선택해야 하는 고충이 글을 쓰는 시간보다 더 괴롭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마 50편 100편이라도 저자의 머릿속에는 충분히 담겨 있을 그 어마어마한 생각의 창고를 독자인 나는 의심하지 않는데) 겨우 17편이라니!

분량의 한계로 인해 저자가 가지고 있는 그 폭넓은 장르에 대한 독자들의 알 권리를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두어야 하는 것이 아쉽다.

혹자는 <소설의 쓸모>라는 제목에서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등 우리가 흔히 문학 그리고 명작이라 할만한 책들을 다루고 있겠거니 라고 생각하면 그 짐작은 영락없이 빗나간다. 저자의 전문 분야는 번역이고 그 중 ‘스릴러’나 ‘추리’ 쪽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나 주장의 설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내려놓아도 된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미 오랜 기간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분석과 이해들을 대중들에게 소개해온 베테랑 번역가이며 작가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쓸모>에는 17편의 소설(아마 그중 제대로 들어본 제목이 없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이 소개된다. 전문 번역가답게 길지 않은 페이지에 그 줄거리를 아주 맛깔나게 소개하면서 그 상상 속 이야기들을 우리들의 현실에 잇대어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그러니 이 길지 않은 책을 읽으면 우리는 17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과 그 소설에서 얻은 통찰로 현실을 분석하는 저자의 멋진 일상 에세이를 동시에 엿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책은 어느새 마지막 장을 달려가고 있다.

이미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외된 이들과 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던 저자답게 책의 상당 부분은 그 지점들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바쁘고 분주한 시대에 우리는 그 시간도 길고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이야기를 왜 읽거나 들어야 할까? 책의 제목을 보면 결국 이 질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속한 종교 분야에서 소설은 거의 불모지와 같다. 절대적 진리와 믿음을 주장해온 신앙 앞에서 ‘상상’은 그 진리를 오염시키거나 훼손할 여지가 많은 위험으로 여겨져 좀처럼 그 나래를 펼치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것은 신자들이 좀 더 폭넓고 다양한 읽기, 이해, 더 넓은 지각을 펼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라면 교회에서 신학책만이 아닌 재미난 소설을 읽으면서 까르르 웃으면서 자신들의 발칙한 상상과 해석으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으면 오히려 더 성숙한 신자들의 모습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늘 품기 때문이다. 내가 불경한 것인가?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저자는 자신이 읽은 소설들을 통하여 자신이 살아온 과거 후회, 회한, 희열 등 많은 것들을 돌아보기도 다짐하기도 한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이들의 인생, 가보지 않은 세상, 소설이 아니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순간과 장면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새롭게 돌아보기도 하고 가정하기도 한다. 물론 종종 두려움을 벗어나 용기를 주기도 한다.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점점 줄어들면서 과거의 많은 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 떠오르곤 한다. 소설은 그 간극을 많이 해소시켜 줄 여지를 우리에게 허락한다.

어젯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것이 옳은 것일까? 라는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지막 장을 넘겼다. 아마도 그런 주춤거리는 읽기의 시간은 드러나지 않아도 나의 일상 어느 순간에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오늘 네 권을 주문했다.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을 쓰고자 하는 어떤 분들에게 전해드리기 위해. 책을 받아 들고 느낀 그 반가움이 그분들께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진: 이동식 SNS

 

 

인간의 겉과 속을 보여주는

◇ 유용선

-나도 외할머니 손에서 컸는데.

-우리 할머니는 남자가 눈물이 많으면 가난하게 산다 그랬지.

-난 만화방에서 문자 깨쳤는데.

-난 프랑스어를 배우면 <어린 왕자> 같은 작품을 무진장 읽을 줄 알았지. ㅋㅋ

-고난을 극복하는 어린 주인공들. 호오, 그래서 코랄이 중요한 시점마다 용감한 선택을 잘하는구나.

차를 마시며 어린 시절을 주고받는 듯한 프롤로그를 거쳐 <소설의 쓸모>를 재밌게 읽고 있다.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반다나 싱 짓고, 김세경 옮김) 챕터에서는 훌륭한 작품을 읽은 보답을 독서 감상문의 진수로 대신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스토리의 결말을 너무 빨리 그것도 정확히 예측하는 바람에 김이 빠진 어떤 책 챕터에서는 좋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훌륭한 감상을 이끌어낸다. 일기를 쓰면 모두 덜 미친다.(내가 조금 전에 읽은 부분이다)

책 제목이 어째서 <소설의 쓸모>인지 알겠다.

문학은 인학(人學) 또는 인간학이다. 에세이는 인간을 설명하고, 소설은 그의 겉과 속을 보여준다. 정치도 종교도 다 거기에서 탄생했다.

'문학의 쓸모'는 좋은 독자의 독서 후 활동으로 확장된다. 그 좋은 모범례가 종이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왠지 2권이 나올 것 같다. 책을 절반쯤 읽었는데, 1/4에서 1/6을 읽은 느낌. 이런 촉은 대체로 적중한다.

 

사진: 유용선 SNS

 

 

소설을 읽는 인간과 그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에세이들

◇ 김봉석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배운 것과 픽션으로 배운 것 중에서 무엇이 더 많았을까. 당연히 경험이지만, 소설과 영화와 만화에서 배운 것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더 많이 흔들리고 더 자주 비껴가지 않았을까.

소설은 참 쓸모가 많다. 다양한 유형의 재미에 더해, 특정한 지식이나 정보를 주기도 하고 때로 세상을 보는 원칙이나 시선 같은 것을 주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픽션의 힘은 강력하고, 때로 개인을 뒤흔든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흔들 필요는 없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책이 아니라 개인이니까.

<소설의 쓸모>는 그런 쓸모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누군가는 그런 걸 왜 보냐고, 시간 낭비라고 말하는 픽션들이 어떤 쓸모가 있었는지 말해주는. 그러니까 소설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소설을 읽는 인간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에세이들. 쓸모 있고, 흥미롭다.

 

사진: 김봉석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