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술 패권 전쟁에서 미국의 진정한 노림수는 뭘까? 미국이 1990년대 이래 정착된 글로벌 분업 체계와 글로벌 공급망을 중단하고, 미국 본토 안에서 반도체 산업의 ‘A부터 Z까지 모두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음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구상은 과연 중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할까?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필자는 미국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의 설계-제조 사이의 생태계 독점이 아닌, 앞으로 활용될 기술과 로드맵에서의 주도권, 기술 사용권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예상한다. 현재를 넘어 미래를 장악하는 전략이다. 그리고 이런 미국의 중장기적 구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마련해야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확보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지금은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 반도체 산업 R&D 협력은 필수? 이제는 옛말✔ 경제적 가치 아닌 정치적 고려 대상 된 반도체✔ NSTC, 미래 반도체의 로드맵과 표준 될 수도✔ 미 정부와의 협상, 비전 공유를 기반으로 해야✔ 국제 정치의 현실주의, 한국에게 새로운 돌파구

사진: 셔터스톡

3월 둘째 주, 서울 코엑스에서는 IEEE(전기전자기술협회)가 주관하는 제7회 EDTM(Electron Devices Technology & Manufacturing) 학회가 열렸다. 이 학회는 전 세계의 반도체 소자 및 제조 관련 최신 기술에 대해 산업계와 학계의 연구자들이 모이는 대규모 학술대회다. 학회에서 여러 사안이 논의됐지만, 그 가운데 한 세션에서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졌다. 특히 글로벌 반도체 산업을 지금까지 지탱해 왔던 국제 R&D 협력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반도체 산업에서 협력적 R&D의 의미

‘기업들의 치열한 기술 경쟁이 전투를 방불케 하는 현장일 것 같은 반도체 산업에서 R&D 협력은 웬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본격적으로 분업 체제를 선택한 이후 각국, 그리고 여러 회사들의 R&D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협력이라는 개념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웨이퍼 크기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협력이다.

1990년대까지 반도체 업계에서 주력으로 생산되던 칩의 기준은 8인치(200mm) 웨이퍼였다. 공정 장비와 소재, 부품 모두 8인치 웨이퍼를 기준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반도체 생산성 향상을 위해 웨이퍼 크기의 증가는 필수적인 방향이었고, 그다음 세대로서 12인치(300mm) 웨이퍼가 선택되었다. 문제는 웨이퍼 크기를 키우는 일이 반도체 산업 전체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8인치 웨이퍼에 표준을 맞췄던 그간의 기술과 장비는 대부분 사용하지 못하게 되므로, 장비 개발 비용이 치솟고, 패터닝 같은 전 공정 난도 상승과 공정 파라미터 변화는 물론 패키징 같은 후공정에서의 공정 단계와 비용 증가도 예상되었다.

특정 회사가 단독으로 8인치에서 12인치로 가겠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그것이 기술적인 면에서나 경제적인 면에서나 가능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웨이퍼 크기의 확대라는 중대한 변화를 위해서는 반도체 산업 생태계에 있는 모든 참여 주체들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는 설계, 제조, 장비, 소재, 패키징 등 모든 산업 분야에 걸친 회사들이 R&D 단계에서부터 암묵적인 표준과 로드맵을 상정하여 투자를 하게 만들었으며, 다년간에 걸친 학회와 공통 협의체에서의 논의를 거쳐 국제적인 협력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02년 이후,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의 제조 주력은 12인치 웨이퍼로 옮겨오게 되었으며, 현재 8인치 웨이퍼는 특정한 종류의 시스템반도체 제조 등 제한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상황으로 바뀌어 왔다. 12인치 웨이퍼가 주력으로 자리 잡은 후 대부분의 참여 주체는 생산성의 향상이라는 과실을 공유하였으며, 12인치에서의 성공은 그다음 세대로 가기 위한 초석이 되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목표를 두고 거대한 전환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R&D 단계에서부터 협력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게 반도체 업계에선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개발 비용의 절약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의 축소, 같은 스케줄의 공유, 지식과 기술의 교환을 통한 비즈니스 파트너십 강화 등의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다.

IMECSematech의 사례

이러한 협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의 기술보다는 앞으로의 기술 개발 과정에서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여러 회사들은 몇 가지 협의체를 구성하여 협력적 경쟁 관계를 이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벨기에의 IMEC와 미국의 Sematech이다.

1984년에 설립된 IMEC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세 나라가 접경지대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전략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벨기에가 담당한 기관은 종합적인 반도체 기초 기술을 연구하는 기관의 설립이었는데, IMEC는 몇 년 후 네덜란드가 설립한 반도체 설계 기술 연구 및 교육 기관인 INVOMEC & MTC와 합병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유럽의 반도체 회사들과 주로 협력하여 반도체 설계 및 공정 기술 개발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 외 미국, 일본, 한국, 대만 등의 반도체 회사들도 회원사로 받아들여 설계부터 제조까지 아우르는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기관이 확장되었다. 2020년 기준으로 IMEC의 연구 인력은 800여 명에 달하는데, 그중 2/3 이상은 이러한 회원사들의 위탁 연구나 산학협력 연구 프로젝트에 종사하는 인력이다. IMEC의 연구 예산 80%도 이런 다국적 반도체 회원사들로부터 충당된다.

IMEC는 벨기에 연구기관이지만 그 연구 성과는 일부 민감 기술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연구 자금을 투자한 회원사들에게 투자금에 비례하여 귀속된다. 그 회사가 벨기에 혹은 EU권에 있는 회사인지 여부는 이 과정에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IMEC의 가장 큰 회원사 중에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TSMC 같은 동아시아권의 대기업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 다국적 회원사는 단독으로 IMEC와 협력할 수도 있지만, 복수의 회원사가 공동으로 협력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앞서 기술했듯, 반도체 기술 관련 R&D 비용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협력적 R&D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특히 오랜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회사들이라면 IMEC를 일종의 협력 플랫폼으로 이용하는 것은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IMEC는 벨기에 루벤에 위치한 유럽 최대 규모의 종합 반도체 연구소이다. (사진: 셔터스톡)

미국의 Sematech 역시 IMEC와 비슷한 시기인 1987년에 미 정부의 지원금과 일부 회원사들의 공동 출자를 통해 텍사스주 오스틴에 설립된 후, 1990년대 후반부터는 정부 재원에 의지하지 않고 주로 인텔, AMD, 글로벌 파운드리,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같은 회원사들의 투자로 운영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8인치~12인치 웨이퍼로의 전환을 주도한 것도 바로 Sematech였으며, 이를 계기로 Sematech는 International Sematech로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Sematech 역시 IMEC와 마찬가지로 개별 반도체 회사가 수행하기에 위험 부담이 큰 공정 기술을 대신하여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주로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차세대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의 기초 연구에도 집중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DUV나 EUV 같은 노광 공정에 필요한 기술들이다. 예를 들어 EUV 전용 마스크, 감광재, EUV 공정에 맞는 GAAFET 같은 새로운 종류의 트랜지스터 동작을 정밀하게 제어하는 산화물 게이트 소재, 이종접합공정 같은 새로운 패키징 공정에 쓰이는 금속 배선 공정 및 소재 등으로 연구 분야를 넓히고 있다.

IMEC나 Sematech는 모두 회원사들의 R&D 투자를 밑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그 연구 성과는 회원사들에게 각각 귀속되면서도 공동 활용의 통로는 늘 열려 있다. 예를 들어 EUV 노광 공정에 대해 EUV 감광재, EUV 전용 블랭크 마스크, EUV 에칭 용액 등 서로 다른 소재와 공정 기술이 필요한데, 각 세부 기술은 다른 기술들과 결이 맞아야 한다. 이는 각 세부 기술 개발에 투자한 회원사들이 협력적 경쟁 혹은 경쟁적 협력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내며, 이는 IMEC나 Sematech 같은 공동의 연구개발 플랫폼이 존속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제공한다.

이렇듯 점점 기술 개발 난도가 높아지고 투자 비용과 시간 역시 증가하는 현재의 반도체 산업에서는 적어도 연구개발 단계에서의 경쟁적 협력은 필수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은 1990년대 초반 이래, 전 세계적으로 자유무역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고 반도체 산업에서도 글로벌 분업 체계가 정착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기술 개발에 따른 위험성을 축소하고 개발 비용을 절약하며 표준 협의를 효과적으로 이끌어 내면서도 각자의 상대적 우위를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서 글로벌 분업 체계와 공급망, 그리고 차세대 기술에 대해 공통의 연구개발 플랫폼의 존재는 지난 30여 년간 당연한 상식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지만 이제 이러한 상식은 더 이상 상식이 아닌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급변하는 차세대 반도체 R&D의 지형

2020년 이후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를 놓고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각국은 반도체 산업을 경제적 가치가 아닌 안보적 차원에서 더 우선적으로 정책적, 정치적 고려 대상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반도체가 아닌 첨단 산업들이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아지기 전에 첨단 반도체에 대한 자급도를 조금이라도 높이는 방향으로 각국의 정책 기류는 급격하게 바뀌고 있으며, 이는 반도체 산업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 자국에서 단독으로 반도체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다자간 협력기구나 심지어 정치적 동맹체제로 범위를 넓혀 반도체의 수급 안정화를 꾀하는 정책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개편이 그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2022년에 통과된 미 반도체법은 미국의 반도체 산업 리쇼어링 즉, 미국 본토 내에서 반도체 산업의 A부터 Z까지 모두 이루어질 수 있게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잘 알려져 있다. 미국 내에서라면 그 산업에 참여하는 주체는 반드시 미국 기업일 필요는 없지만, 미국에서 반도체 산업을 영위하는 이상 외국 기업이라 하더라도 미국이 새로 짜고 있는 산업의 문법을 따라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는 지난 2월에 있었던 미 상무부 장관 지나 레이몬도(Gina Raimondo)의 연설 중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는 미국이 첨단 칩을 생산할 수 있는 모든 기업이 상당한 규모의 R&D 및 대량 제조 시설을 갖춘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은 연구소에서 새로운 첨단 구조의 칩을 개발하고, 최종 응용처에 맞게 설계하고, 양산하고, 최첨단 패키징도 가능한 세계 제일의 목적지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기술 리더십, 공급업체 다양성, 탄력성의 조합은 현재 전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거나 글로벌 시장이나 경쟁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를 달성한다면 성장하는 제조 생태계를 갖춘 미국은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글로벌 산업을 선도하기 위한 더 강력한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연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미국 정부가 획책하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변화는 미국 안에서의 새로운 생태계 형성이며, 다른 국가에서 이를 독점하는 것을 견제하고 자국이 유일한 생태계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이러한 희망은 미국의 근시안적인 욕심에 그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수 있다. 반도체 산업같이 글로벌 분업 효과가 확실한 산업에서 한 국가 안에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것은 반드시 비효율적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애초에 반도체 제조 공정이 왜 조금씩 미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과 대만,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에 이르기까지 서진(西進)을 거듭해 왔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금방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나온다. 레이몬도 장관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는 제조업에만 집중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390억 달러의 인센티브는 반도체 제조업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올 것이지만, 강력한 R&D 생태계가 있어야 그것이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와 인재를 창출하는 강력한 반도체 R&D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110억 달러를 투자할 것입니다. 이 투자의 핵심은 국립 반도체기술센터(NSTC)의 설립입니다. NSTC는 정부, 업계, 고객, 공급업체, 교육 기관, 기업가, 투자자가 모여 혁신하고, 연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야심 찬 민관 파트너십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전국에 여러 센터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통해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관련성이 높으며 보편적인 R&D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업계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연구는 제조 생태계를 위한 새로운 장치, 프로세스, 도구 및 재료를 창출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양자 컴퓨팅, 재료 과학, AI부터 아직 생각지도 못한 미래 애플리케이션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선도할 수 있도록 NSTC가 앞장서겠다는 것입니다.”

지나 레이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 (사진: 연합뉴스)

이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 미국이 획책하는 것은 현재 기술 기반의 반도체 A~Z 독점에만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다. 설사 독점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의 지속가능성이 낮음을 미국 스스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반독점법이 가장 정교하게 발달한 나라가 미국임을 생각해 보면 된다. 독점까지는 아니더라도 산업의 생태계가 형성되고, 그 생태계를 중심으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재편되는 것을 미국이 꿈꾼다면 다른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보완하는 정책의 결과물로서 미 상무부는 NSTC의 위상을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한 R&D 선도기관이라는 점을 명확히 정의한다.

이를 좁게 본다면 현재의 IMEC나 Sematech같이 반도체 산업에서의 공동 R&D 플랫폼의 확장판의 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넓게 보아야 한다. NSTC는 IMEC나 Sematech 같은 기존의 연구 플랫폼이 하는 역할을 넘어, 미래 반도체의 로드맵과 표준, 그리고 그것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를 선정하는 선도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NSTC의 진짜 목적과 기능

기존의 IMEC 혹은 Sematech와 NSTC가 달라지게 되는 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IMEC는 일정 수준의 매출액과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라면, 기업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 기술이라는 것이 보장되는 한 국적을 가리지 않고 회원사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 멤버십 유지에 필요한 비용이 상당하기에 가입할 수 있는 회사는 제한적이다. IMEC는 앞서 언급했듯, 각 회사의 차세대 반도체 공정 및 소재 관련 기술을 협력하여 개발하며, 위험을 분담하고, 공통의 이익에 충실한 파트너가 된다. Sematech는 주로 미국 기업들이 회원사로 가입해 있지만 제조 공정보다는 소재와 기초 과학 분야의 산학 연계 연구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NSTC는 IMEC나 Sematech와는 비즈니스 운영 방식과 연구개발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기본적으로 NSTC는 정부 기관으로서 IMEC같이 프로젝트 기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국가의 반도체 이니셔티브에 충실한 정책을 실행하는 연구개발 및 그 관리 기관이 될 것이며, 이는 NSTC가 설계하고 제시하는 표준과 로드맵을 따르는 기업들에게 인센티브가 부여될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Sematech 같이 일부 회원사들의 연합을 대변하는 역할이나 기초 과학 연구에 집중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가져가기도 할 것이다. 즉, 기초 과학부터 산업응용 기술까지, 대학에서부터 정부 연구소, 그리고 기업의 연구소에 이르기까지, 산업 주기상으로는 더 포괄적이면서 멤버십은 더 제한적인 방식으로 차별화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NSTC의 연구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거나 협력을 할 수 있는 기업들은 멤버십 비용 외의 추가 자격 요건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예상할 수 있다시피 기술적, 경제적 자격을 넘어, 외교·안보적 자격으로 확장될 것이다. 즉, 미국 혹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 중에서도 미국과 밀접한 산업·기술적 협력관계를 체결한 일부 국가들의 기업이나 연구기관으로 NSTC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한정될 것이다.

NSTC가 이렇게 고객을 고를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유는 미 상무부에 이미 산업 기술의 표준을 관장하는 국립표준과학원(NIST,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 Technology)이 하부 조직으로 속해 있기 때문이다. NIST는 산업의 표준 제정과 기술 스펙 측정에 주로 관여하지만, 주목할만한 다른 업무도 있다. 그것은 대학이나 미국 국립연구소(National labs) 같이 비영리기관에서 정부의 연구 재원으로 개발된 기술이 기업으로 이전되는 과정을 관장한다는 것이다. MIT나 Caltech 같은 미국의 연구 중심대학에서 개발된 기술이 기업으로 이전될 때 이에 대한 최종 허가를 내주는 기관은 대부분 미 상무부이며(군사 목적인 경우는 미 국방부), 특히 외국 기업으로의 이전은 상무부 산하의 산업안보국(Bureau of Industry Security, BIS)이 관장하는데, 실제로 그 기술의 가치와 잠재력을 세부 평가하는 기관은 상무부 산하의 NIST다. NIST는 결국 기술 이전의 가부를 판별하는 구체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책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미국 상무부 산하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사진: https://www.nist.gov/careers/nist-locations)

NIST가 관장하는 또 다른 주요 업무는 반도체를 포함한 신소재의 물성 데이터베이스 관리다(Materials Genomics Initiative, MGI). NIST의 MGI는 반도체, 배터리, 항공우주, 원자력, 레이저, 의료용 소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신물질의 물성 혹은 아직 개발되지는 않았지만 미리 계산이 완료된 물질에 대한 광범위한 물성 데이터베이스를 관장한다. 특히 MGI가 중요한 까닭은 앞으로의 배터리나 반도체 산업에서 기술 혁신의 큰 축이 신소재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인데, 아직 개발되지 않은 소재에 대해서도 어떤 물성을 가지게 될 것인지를 MGI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면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소재를 통해 기술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기업들에게는 이 데이터베이스가 마치 산속에서 야간 운전을 할 때 헤드라이트나 GPS 같은 역할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에 더해 레이몬도 장관의 연설에서 볼 수 있듯이 NSTC는 미 전국 각지, 그리고 아마도 일부 동맹국에서 현지 연구개발센터 분소를 운영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NSTC는 미국 서부지역에서는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남부지역에서는 텍사스와 애리조나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중부지역에서는 시카고와 그 근교의 아르곤국립연구소, 주요 소재과학 연구 중심대학을 중심으로, 동부지역에서는 MIT, 하버드, 프린스턴 등을 중심으로 하는 클러스터의 핵심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주목해야 하는 NSTC의 역할

NIST와 NSTC를 동시에 관장하게 될 미 상무부의 반도체 산업 정책 변화는 그래서 더더욱 한국 같은 반도체 산업 강국이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순히 미국이 자국 중심으로 거대한 반도체 클러스터와 생태계를 이루는 것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아닌, 미국이 더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과 표준 제정에 한국 반도체 산업이 관심을 쏟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반도체 산업에서도 앞으로의 주도권은 기술 혁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12인치 웨이퍼도 이제 한계에 봉착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 변화는 18인치 웨이퍼로의 확장, 패터닝 과정에서의 물리적 패턴 크기를 줄이기 위한 새로운 노광 공정용 광원과 에칭 장비 개발, 수율을 높이기 위한 후공정에서의 이종접합(heterogeneous integration) 소재, 전자가 아닌 빛을 이용한 새로운 방식의 소자, 실리콘이 아닌 화합물반도체 기반의 고성능 반도체, 메모리와 논리소자가 통합된 새로운 소자, 인간의 뇌세포를 닮은 뉴로모픽(neuromorphic) 소자, 2진법이 아닌 3진법으로 작동하는 소자 등 다양한 후보 기술로부터 비롯될 가능성이 높다.

수많은 후보 중 어떤 기술이 주도권을 잡을 것인지, 어떤 기술들의 합종연횡이 일어날지, 그 기술의 표준은 누가 주도할 것인지, 각 세부 기술을 담당할 회사들 중 어떤 회사들이 NSTC와 파트너가 될 것인지, 각 후보 기술을 개발한 비영리 연구기관의 원천 특허를 어떤 회사에게 어떻게 이전할 것인지, 그 회사에게 어떤 자격과 사회적 의무를 부여할 것인지, 그 회사가 어떤 최종 제품으로 그 기술을 활용할 것인지 등이 앞으로의 반도체 산업 지형을 바꾸는 주된 요인이 될 것이다. 미국이 중장기적으로 자국 중심의 반도체 생태계 지속가능성을 꿈꾼다면 현재의 설계-제조 사이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생태계의 독점이 아닌, 앞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기술과 로드맵에서의 주도권, 그리고 기술 사용권에 더 주안점을 둘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이 레이몬도 장관의 연설문에 깔려 있는 진짜 의도라고 생각한다.

미국이 주도할 반도체 클러스터, 한국의 반도체 산업 대응 전략

미 상무부의 반도체법에 부속되어 있는 다양한 조항들에 대해 한국을 비롯한 많은 외국 반도체 기업들은 불만과 불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인센티브처럼 보이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도 결국 초과이익 분담이나 대중 수출 규제 등 ‘독이 든 성배’처럼 느껴지고 있으며, 그것을 거부할 경우 오히려 인센티브가 아닌 규제의 차원 즉, 앞으로의 기업 활동에 큰 제약이 있을 것이라는 불안이 생기는 것은 외국 기업들 입장에서는 기존의 기업 활동을 저해하는 요소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국가 간 갈등으로 비화할 소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0여 년간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던 자유무역주의와 국제분업체제는 더 이상 상식이 아니며, 경제적 가치 이상으로 경제안보적 가치가 중시되는 방향으로 국제정치 기류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업들도 인지해야 한다. 이를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근본적인 상황 변화로 인식하고 진지하게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은 이러한 미국의 산업 정책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며, 그 대응은 당장의 이익 감소와 기술 유출 가능성보다는 중장기적 비전에 맞춰져야 한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과거 일본처럼 불과 한 세대 만에 글로벌 최정점의 위치에서 제대로 된 반도체 제조 기업이 전무한 상황으로까지 쇠락하게 되는 운명을 똑같이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기술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파괴적 혁신은 어떤 분야에서 나오게 될지 모르며, 현재의 첨단기술은 내일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될 수 있다. 더 적극적으로 한국 기업들이 미국의 연구개발 기관들과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하고, 더 많은 미국의 연구 중심대학, 국립연구소들과 협력을 이어 나가야 한다. 한국의 연구 중심대학과 연구기관들도 미국에 현지 부설 연구소를 만들어 한국 기업들, 미국 연구기관들과의 다자간 협력센터를 만들 필요가 있다. 정부는 더 많은 국제 공동 연구프로젝트를 출범시켜 특정한 세부 기술을 타깃으로 원천 기술을 개발하고 그것의 IP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의 명확한 목적이 형성되게끔 만들어야 한다.

미국으로 오는 수많은 해외 반도체 기업이나 연구기관들과의 협업 플랫폼 역시 한국 기업들과 연구기관이 놓치면 안 되는 자산으로 고려되어야 하고, 그 자산의 일부를 한국이 점유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텍사스 테일러 주변에 건설하는 차세대 파운드리팹의 일부라도 미국의 NSTC와 협력하여 2나노 혹은 옹스트롬 수준의 초미세 패터닝으로 가는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ASML이나 Zeiss 같은 기업들과의 협력 체제를 형성하여 미국-네덜란드-독일-한국의 다국적 협력 체제에 기반한 차세대 노광공정 공동 기술 개발 플랫폼이 나올 수도 있어야 한다. 삼성전자는 그 과정에서 NSTC에 참여하면서도 관련 원천 기술 특허를 보유한 미국의 연구기관들과 더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어야 한다.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와 협상하면서 이에 대한 보장을 공식적으로 받아내야 하고, 한국 기업들의 참여는 물론, 프로젝트의 성과물에 대한 지분, 우선 사용권 역시 정부 간 협상을 통해 보장받아야 한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파운드리 공장 부지 (사진: 연합뉴스)

이는 한국이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다양한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산업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인공지능 전용칩 생산은 파운드리팹의 일부를 할당해서라도 현지에 디자인하우스를 만들어 설계-공정 공동 최적화(Design-process co-opimization)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다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의 수많은 인공지능 전용칩 개발 업체들에게도 좋은 시장 진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미국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나

한국의 주요 연구 중심대학이나 ETRI, KIST 같은 관련 국립연구소들도 이 프로그램에 더 적극 참여해야 하며, 협의체 구성과 운영, 이익의 창출과 기술 포트폴리오의 구성에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NSTC는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다른 차세대 국가 이니셔티브인 양자정보과학기술(National Quantum Initiative)과 어느 시점에서 연결될 것인데, NSTC에서의 차세대 반도체 기술 지분 확보는 양자정보과학기술로의 전이를 위한 소중한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여전히 양자정보과학기술 분야에서는 기초 과학 연구 수준이 낮고 연구 인력, 연구 기반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 입장에서는, 이제 어느 정도 기초를 넘어 양자컴퓨터 상업화의 궤도로 진입하고 있는 미국과의 협력은 양자정보과학기술에서 선두권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 현지에서 운영될 삼성전자의 팹과 하이닉스의 플랫폼의 역할이 중요하며, 특히 양자컴퓨터 전용 칩과 그것의 전용 구동 플랫폼 개발에서의 노하우를 한국이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자 가장 핵심적인 차세대 첨단기술 개발의 파트너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삼성을 비롯한 수많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대미 투자의 주요 대가로 한국 정부가 요구할 수 있는 사안이어야 하기도 하다.

미국 정부와의 새로운 반도체 클러스터 협상은 미국에 대한 한국의 투자가 몇십억 달러인지, 몇 년짜리인지 등에 대한 숫자 싸움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미국이 새로 형성할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다른 참여 국가들과 기업들에 앞서 한국이 차지하는 핵심 역할에 대한 기술적 세부 사항과 비전의 공유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메모리반도체를 비롯한 반도체 제조 공정은 예전처럼 설계도가 유출된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미 반도체법의 보조금을 받는다고 해서 혹자가 우려하는 것처럼 기술의 속살이 그대로 쉽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문서로 된 기술 정보 이면에는 오래 축적된 암묵지가 핵심 기술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며, 핵심 엔지니어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술 문서의 유출만으로 격차가 좁혀질 기술이었다면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진작 중국에게 따라잡혔을 것이다. 한국의 핵심 엔지니어들은 한국이 미국에서 당당한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 될 수 있으며, 미국이 추구하는 차세대 공정 기술의 주도권을 공유할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주의의 시대, 그리고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실주의

한 세대 이상 지속되어 온 글로벌 분업 체제와 협력적 R&D의 개념은 이제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예전 같은 이상주의적 초국가 초기업 R&D 협력은 불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기술적 한계가 목전에 도달한 반도체 산업에서의 R&D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국제정치에서의 현실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른 상황에서 국가 간 혹은 업체 간 R&D 협력 역학관계의 변동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서 위험 요소가 될 가능성은 다분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극심해져 가는 기술개발 경쟁 구도 속에서 오히려 한국 반도체 산업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특히 한국의 주요 반도체 산업을 턱밑까지 추격해 온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집중적인 견제 하에 놓이면서 한국의 기술 돌파구 확보는 기술 격차를 더 벌리고 다음 세대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현실적 관점에서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자력으로 바꿀 수 없는 거대한 파도라면 차라리 타이밍에 맞춰 올라탈 수 있어야 하고, 이왕 올라탄 파도라면 제대로 그것을 이용하여 더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시점이 되었다. 파도가 썰물로 바뀌기 전에 먼저 올라타야 한다.


글쓴이 권석준은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마치고 MIT 화학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 책임연구원을 지냈고 차세대 반도체 소재 및 광(光) 컴퓨터, 양자 컴퓨터 등의 차세대 IT소자 원천 기술 등을 연구 중이다. 현재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금까지 60여 편의 논문을 해외 저명 학술지에 게재했다. 최근에 한·중·일 반도체 산업에 관한 저서 <반도체 삼국지>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