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4월 방미설이 나오는 가운데 미국의 반도체 제재를 둘러싼 한-미 간 물밑 협상이 분주하다. 관련 부처 당국자와 학계 인사들이 워싱턴을 방문해 미 당국과 협의를 진행 중이라는 소식도 들린다.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필자는 미국 반도체 제재 조치의 과녁은 기본적으로 중국이지만, 한국 또한 심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다. 특히 미국의 기술 규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차세대 반도체 생산에도 제약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까닭에 오는 10월로 예정된 대중 반도체 기술 및 무역 제재 조치의 ‘1년 유예’ 종료를 앞두고 이 조치의 연장 차원을 넘어서는 대미 반도체 협상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 협상에서 세 가지 요소가 꼭 관철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 세 가지는 뭘까? [편집자 주]

✔ 대중 반도체 기술·무역 제재는 큰 불안 요소✔ 3D 낸드플래시에 '단수' 한계 두겠다는 미국✔ 기술 격차 벌리고 군사적 우위 점하고자 해✔ 기술 신냉전 시대, 안보와 신뢰 더 중요해져

사진: 셔터스톡

지난 2월 23일,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한미 경제안보포럼에서 미 상무부 산업안보 담당 차관인 앨런 에스테베스(Alan Estevez)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초미의 관심사에 관한 입장을 정리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남겼다. 대중 반도체 기술 및 무역 제재 조치와 관련해 1년의 유예 기간을 받은 중국 내 한국 반도체 업체들로 하여금, 유예 기간 종료 이후 반도체 기술 수준에 제한을 둘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이 유예 기간이 실제로 올해 10월로 종료될지, 다시 1년 이상 연장될지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대중 반도체 기술 및 무역 제재 조치는 유예 기간 연장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는 점점 큰 불안 요소로 진화하는 중이다.

에스테베스 차관이 언급한 ‘기술적 제한’(cap on level)의 의미

에스테베스 차관이 언급한 ‘기술적 제한’(cap on level)은 표면적으로는 중국 각지에 위치한 팹에서 생산 중인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메모리반도체 중 3D 낸드플래시 메모리의 이른바 ‘단수’(word-line)에 한계를 두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플래시 메모리는 DRAM과는 달리 전원이 off가 되어도 데이터를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비휘발성 메모리로서 동작 속도에 대한 요구보다는 데이터 저장 용량과 내구성에 대한 성능 요구에 대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 NAND 타입의 플래시 메모리는 메모리 셀이 직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셀이 병렬로 연결된 NOR 타입의 플래시 메모리에 비해 읽는 속도는 느리지만 쓰기/지우기 속도가 더 빠르다. 이 때문에 대용량 저장용 플래시 메모리반도체로서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낸드플래시의 저장 용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셀의 개수를 늘려야 한다. DRAM과는 달리 2차원 다이 평면에서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높이기 위한 선폭 줄이기 방향으로 기술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 방향으로 단수를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이 진화되고 있다. 이를 3차원(3D) 낸드플래시라고 부른다. 3차원 낸드플래시는 셀의 직렬 배열이 수직 방향으로 배치되며, 결국 수직 방향 셀 적층이 몇 층까지 가능한지에 따라 낸드플래시의 용량이 결정된다.

셀을 수직으로 적층한 3D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진: 삼성반도체이야기)

3차원 낸드플래시에서 ‘적층’의 의미와 기술 경쟁

문제는 수직으로 쌓은 셀들을 연결할 수 있는 채널을 가공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채널이 수직 방향으로 균일하게 관통될 수 있으려면 층마다 채널의 형태가 일정하게 형성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플러그 에칭’(plug etching) 기술이 매우 중요해진다. 그렇지만 수직 적층 단수가 높아질수록 에칭 공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 예를 들어 채널의 너비가 불균일해지거나(non-uniform CD) 부풀어 오르는(Bowing) 현상, 채널의 관통 방향이 휘어지는(Twisting) 현상, 채널이 특정 단에서 더 관통하지 못하고 멈추는 불완전 에칭 등의 문제가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는 공정 수율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

최근 3D 낸드플래시 제조 공정을 선도하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워드라인 층수를 100단 이상으로 적층하는 3D 낸드플래시에 대해서는 여러 번에 나눠서 채널 홀을 플러그 에칭 기술로 균일하게 형성한 후 다시 결합하는 방식인 ‘더블 스택’(double stack) 공정 등을 이용하여 이러한 문제를 돌파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단위 공정이 많아지고 그만큼 비용과 시간이 상승하기 때문에 수익성 감소 요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수직으로 적층되는 각 워드 라인을 구분하는 산화물/질화물 층을 정밀하게(즉, 균일한 두께와 계면 평탄도를 갖게끔) 증착하는 기술 역시 매우 난도가 높은 공정 기술이다. 수직 방향으로의 높이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향으로 기술이 진화할 경우, 증착 기술은 에칭 기술만큼이나 기술적 돌파구 해결에 있어 중요한 변수가 된다.

앞으로도 3D 낸드플래시 발전의 기술 로드맵은 2차원에서의 물리적 선폭 축소가 아닌 3차원 적층 단수 확장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IEEE가 2022년에 발표한 메모리반도체 로드맵에 따르면, 3D 플래시메모리의 발전 방향은 2022년 192단, 2025년 384단, 2028년 576단, 2031년 768단, 2034년 1,024단, 2037년 1,536단으로 계속 수직 방향으로의 확장이 예상된다. 현재 낸드플래시의 3차원 단수 쌓기 경쟁에서는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미국의 마이크론이 형성하는 3파전이 지속되고 있는데, 2019년부터 기술 격차를 조금씩 좁혀오고 있는 중국의 YMTC 같은 업체들이 이제 기술 격차 축소를 넘어, 원가 경쟁력 확보 및 수율 확보에 성공하여 이 구도를 깨뜨릴 수 있을 것인지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직 방향으로의 단수를 늘리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정밀 공정 기술의 확보다.

에스테데스 차관이 언급한 단수에 대한 제한은 그 의미를 3D 낸드플래시로 한정할 경우, 현재의 적층 단수 이상으로 용량이 확장된 플래시 메모리 생산이 어려워짐을 의미한다. 이는 당장 내년부터 3D 낸드플래시 기술 로드맵에서 뒤처지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최고 수준의 3D 낸드플래시 제조 기술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조치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단수로 적층하는 과정에서 가장 필수적인 공정 기술인 플러그 에칭 기술과 절연체 증착을 제어하는 장비, 그리고 그에 필요한 소재와 부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정 장비와 제어 소프트웨어 대부분은 미국의 주요 반도체 공정 장비 회사인 Applied Materials, LAM research, KLA 등에서 수입한다.

삼성·하이닉스, 차세대 3D 낸드플래시 생산에 제동 걸리나

미국은 대중 반도체 기술 및 무역 제재 조치의 일환으로 이들 주요 장비 업체들의 장비 수출 및 장비 유지·보수 서비스 공급을 막고 있으며, 이는 이들 장비를 현업에서 대량으로 활용하고 있는 한국 반도체 업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내년부터 300단, 400단 이상으로 3D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업그레이드된 플러그 에칭 장비가 도입되거나, 현재의 에칭 장비가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에칭 공정 파라미터를 제어하기 위한 전용 소프트웨어도 업그레이드되거나 공정 파라미터가 고려된 라이브러리가 추가되어야 하며, 소모품 교체도 이루어져야 하고, 장비 개조 및 최적화를 위한 본사 엔지니어 지원도 있어야 한다. 절연막의 균일도 제어를 가능하게 하는 증착 장비도 업그레이드되거나 새로 도입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원이 불가능해지면 현재의 장비만으로 미개척 영역에 도전해야 한다.

물론 현재의 에칭이나 증착 장비만으로 300단이나 400단, 혹은 그 이상으로 단수가 올라가는 3D 낸드플래시를 절대 만들 수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실제로 중국이 육성하고 있는 반도체 장비 업체들은 이전 세대의 외국 반도체 공정 장비를 개조하여 중국산 부품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자체적인 장비를 제작하여 테스트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장비는 품질관리가 되지 않았을뿐더러, 새로운 공정 파라미터가 고려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구형 장비 투입은 단위 생산 공정 증가 및 시간의 증가, 그리고 원가 상승과 수율 감소를 야기한다. 이로 인해 공정 수익성이 급격하게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로 귀결된다. 다음 세대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에서 제때 장비와 기술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익은 언제든 손해로 바뀔 수 있는 것이 메모리반도체 제조업의 특성인데, 이제 그 타이밍이 열려 있는 틈은 점점 좁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기술적 제한’은 하이닉스의 중국 내 DRAM 생산에 타격 줄듯

에스테베스 차관이 언급한 ‘cap on level’이라는 표현은 3D 낸드플래시의 단수에만 국한된다고는 볼 수 없다. 메모리반도체 전체의 기술적 수준(level), 나아가 반도체 생산 기술의 전반적인 세대로까지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중국 입장에서는 3D 낸드플래시 외에도 DDR5나 GDDR 같은 최신 세대 DRAM의 자급자족이 자국의 반도체 자급률 제고 면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이다. 그런데 DRAM의 기술적 진화에는 3D 낸드플래시보다 더 많은 선행 기술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국의 ‘cap on level’ 조치는 이러한 조건들을 가로막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고, 이로 인해 다음 세대로의 DRAM 기술 전환도 가로막히게 된다.

문제는 SK하이닉스가 중국 우시 공장에서 자사 DRAM의 거의 절반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DRAM은 3D 낸드플래시와 달리 수직 적층보다는 아직까지는 2차원에서의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높이기 위한 물리적 선폭 축소가 주요 기술적 발전 로드맵의 핵심 요소다. 선폭 기준으로 2022년 16.6nm, 2025년 14nm, 2031년 12.4nm, 2034년 10.5nm 등으로 꾸준히 선폭이 줄어드는 것이 IEEE가 예상하고 있는 로드맵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공정은 바로 웨이퍼에 트랜지스터 회로를 새길 수 있는 초미세 패터닝 공정이며, 이를 위해 EUV 노광기와 차세대 에칭 및 증착 장비가 투입되어야 한다. 또한 패터닝이 끝난 웨이퍼를 패키징하고 검사하는 후공정도 점점 중요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전공정, 후공정에 필요한 장비 대부분은 미국, 일본, 그리고 네덜란드 장비 회사들이 과점하고 있다. 이러한 장비들은 미국의 대중 제재 조치에 따라 점점 대중 수출이 불가능해질 것이고, 이는 SK하이닉스의 우시 DRAM 팹에서 생산되는 DRAM의 세대 교체도 가로막게 될 것이다.

사진: 연합뉴스

실제로 2022년 4분기 미국의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 규모는 2021년 4분기에 견줘 무려 56%나 감소한 것으로 보고됐다. 미국 장비 업체들의 대중 수출은 올들어 더욱 큰 폭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신규 수출 대부분이 허가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닉스는 이로 인해 새로운 공정 장비로의 업그레이드가 거의 불가능해지며, 자사의 절반 정도의 DRAM이 점점 구세대 DRAM이 되면서 수익성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이는 이미 투입한 수많은 장비와 기술 자산도 동반하여 악성 자산이 되는 과정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커짐을 의미한다.

‘cap on level’이 심각한 이유

에스테베스 차관이 언급한 ‘cap on level’이라는 표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애초에 미국이 왜 이렇게 중국을 타깃으로 반도체를 신호탄으로 하는 기술 패권 전쟁을 시작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미국이 중국을 상정하여 기술 패권 제재를 하는 것의 첫 번째 이유는 중국과의 첨단 기술,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의 격차를 지금보다 더 벌리는 것에 있다. 제이크 설리번(Jake Sullivan)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2022년 9월 'Special Competitive Studies Project Global Emerging Technologies Summit'(특수경쟁연구프로젝트(SCSP)가 주최한 ‘글로벌 신흥 기술 서밋’)에서 이렇게 명시했다. “우리는 이전에 몇 세대만 앞서면 된다는 ‘스케일 격차 유지(sliding scale)’의 접근 방식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전략적 환경이 아니다. 첨단 로직과 메모리 칩 같은 기술의 근본적인 특성을 감안할 때, 우리는 가능한 한 큰 우위를 유지해야만 한다.”

글로벌 신흥 기술 서밋에서 발언하는 제이크 설리번 (사진: 유튜브 SCSP 채널 갈무리, https://www.youtube.com/watch?v=C2pAm6oXItM)

미국의 대중 첨단 기술 제재의 두 번째 이유는 중국으로 하여금 첨단 기술의 군사적 전용 범위를 최대한 통제하기 위함이다. 설리번 보좌관의 발언을 다시 인용해보자. “컴퓨팅 관련 기술, 생명공학 및 청정기술은 기술 생태계 전반에 걸쳐 진정한 ‘전력 승수 요인’(force multipliers)이다. 그리고 이들 영역 각각에서의 리더십은 국가 안보에 필수적이다.”

이 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 미국은 반도체를 비롯한 몇몇 전략 기술(양자컴퓨터, 바이오, 탄소중립 기술 등)이 경제적 목적은 물론, 군사적 목적에 전용될 경우 지정학적 전략 판도를 뒤바꿀 정도로 영향력이 생기는 전력 승수 요인 (force multipliers)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미국이 가장 먼저 시행한 제재 조치 중 하나가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라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미사일 궤도 및 목표 제어에 들어가는 반도체가 몇 세대만 기술적 수준이 뒤처져도 명중률이 1/10로 떨어지는데, 이는 반대로 이야기하면 현 세대의 반도체가 미사일 제어에 쓰일 경우, 미사일 전력은 10배로 강화됨을 의미한다. 즉, 이 반도체는 미사일 전력의 10배를 가져오는 전력 승수 요인이 되는 셈이다. 미국의 제재로 인해 러시아는 미사일 제어에 필요한 최신 반도체 확보에 실패하면서 미사일 명중률이 크게 낮아졌다.

즉,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기술, 특히 첨단 반도체를 자체적으로 설계-제조할 수 있는 기술의 주요 지점을 통제함으로써 산업 경제적 측면에서 기술 격차를 벌리는 것은 물론, 군사적 목적의 전용 가능성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몇 년 전부터 꾸준히 10nm 이하급 시스템반도체 생산 제재, AI 가속기 수입 제재, AI 가속기와 연동될 수 있는 메모리반도체 생산 제재, 설계 자산 제재 등, 첨단 반도체 생산 시스템 전면에 대해 제재 조치의 깊이와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특히 첨단 반도체, 특히 10nm 이하급 공정이 필요한 AI 반도체와 초미세 패터닝이 필요한 메모리반도체는 미국이 제어 대상으로 고려하는 주요 전력 승수 요인임을 추측할 수 있다. 추론과 예측에 특화된 AI 반도체, 그리고 그에 필요한 필수적인 하드웨어인 대용량 초고속 메모리반도체는 군사적 전용 가치가 매우 클 것이기 때문이다. 좁게는 공격용 무기 제어 시스템부터 넓게는 군용 통신 암호화, 고해상도 초분광/다분광 위성 이미지 해석, 사이버 보안, 로봇이나 드론, AUV 등의 자율 무기/군사용 운송수단 제어 등 고성능 AI 반도체의 사용처는 풍부하며, 이는 이미 중국이 중국 내 이른바 ‘국방칠자’(国防七子, Seven Sons of National Defense)로 대표되는 이공계통 연구중심대학의 인공지능과 반도체 관련 연구 프로그램을 군민융합형 전략(军民融合, Military-Civil Fusion Strategy) 프로젝트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이 유예 기간 연장에만 매달려선 안 되는 까닭은

이러한 국면에서 한국의 반도체 업체들과 정부가 유예 기간 연장이라는 불확실한 상황을 상정하여 산업 안보 및 보호 전략을 낙관적 포지션에 무게중심을 두어 입안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유예 기간 연장 여부와 상관없이, 미국의 진짜 목적은 자국의 반도체 생산 점유율 확대와 더불어 중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의 제어 및 군사적 전용으로의 제어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는 결국 미-중 간 신냉전이 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한 경제 안보의 고도화를 둘러싼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중국 내 주요 반도체 생산품인 메모리반도체의 초고속 고용량 기술 세대교체 역시 결국 제재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특히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ChatGPT 유의 생성형 딥러닝 알고리즘에 특화된 AI 반도체와 맞물려 HBM-PIM 같은 고용량 고대역폭 고속 메모리반도체의 수요가 급증할 것임이 예상되는바, 이에 대한 중국의 고성능 메모리반도체 확보 노력, 그리고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정책이 중국 내에서 첨단 메모리반도체의 생산이 가능한 한국 기업의 대형 팹을 둘러싸고 정면충돌할 수 있음을 이제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2021년 대비 2022년에 큰 폭으로 중국 내 매출과 수익의 감소를 겪고 있다. 삼성전자 시안법인은 2021년 1조7000억 원 규모였던 당기순이익이 2022년 6300억 원 규모로 감소했다. 하이닉스 우시법인은 2021년 12조9000억 원의 매출이 2022년 9조5000억 원 규모로 급감했으며, 그 과정에서 4600억 원에 달하는 당기순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2022년 코로나로 인한 중국의 전면적인 봉쇄 조치 영향도 있었겠으나, 이러한 매출 및 수익 급감 기조는 중국 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점점 구조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미국의 기술 제재 조치로 인해 한국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 수익성은 앞으로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영적 측면에서도 더욱 불리한 환경으로 작용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패권을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 기술에 대한 경제 안보에 계속 중점을 둘 것이다. 여전히 주요 소재와 부품, 장비, 그리고 패키징 등에서 미-일-네덜란드 글로벌 업체들의 공급망에 높이 의존하는 한국 반도체 산업 입장에서 이 기술 신냉전 시대의 도래는 현실이 되었다.

대미 반도체 협상에서 고려할 요소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는 우리 정부는 모든 외교통상적 채널을 동원하여 미국의 반도체 산업 담당 정부 인사들과 더욱 긴밀하고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 특히 협상 노력을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이렇다.

1) 중국 내 한국 메모리반도체 팹의 생산품이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되는 채널이 차단되고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최종 소비-거래처에 대한 확인, 중국 내 이공계 중심연구대학과의 군민융합 프로젝트 전용이 없음을 확인).

2)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수급률 및 안정적인 가격 변동폭의 확보를 위해 중국 내 팹의 필수적인 업그레이드 범위와 깊이를 한국의 입장에서는 물론 글로벌 공급망 안정성 측면에서 설득해야 한다. 이에는 한국이 주도하는 메모리반도체의 차세대 로드맵에서 위치하는 각 마일스톤의 중요성을 충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3) 차세대 메모리반도체의 기술 발전을 위해 한국의 업체들이 가지고 있는 현 세대 공정 기술과 노하우의 온존이 필수적이며, 중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팹이 급격하게 폐쇄될 정도로 제재 조치가 급가속되면 이러한 노하우가 결국 중국으로 유출될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업체들이 가지고 있는 메모리반도체, 특히 고성능 DRAM과 고단수 3D 낸드플래시 설계 및 생산 원천 기술 보안을 위해서라도 제재 조치가 한시적으로 늦춰져야 하고,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설득해야 한다.

특히 마지막 요인은 미국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군사적 목적의 전용과도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충분히 설득력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우리 정부와 업계 관계자들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미국 정부 설득에 나서고 있고 그 노력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보다 상세한 기술적 근거 자료와 경제적 영향에 대한 시뮬레이션 데이터, 공급망과 메모리반도체 수급 영향에 대한 데이터, 군사용 전용 범위 등에 대한 데이터 등을 확보하여 한국의 대미 협상 레버리지 포지션을 넓힐 필요가 있다. 그렇게 확보한 시간을 이용하여 중국 내에서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에 정부와 업계의 노력이 보다 집중될 필요가 있다.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시찰하는 한미 정상 (사진: 연합뉴스)

기술 신냉전 시대에는 수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안보와 파트너로서의 신뢰이다. 지금 한국 반도체 산업 입장에서 안보와 신뢰에 대해 어떠한 전략이 마련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세밀하게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글쓴이 권석준은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마치고 MIT 화학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 책임연구원을 지냈고 차세대 반도체 소재 및 광(光) 컴퓨터, 양자 컴퓨터 등의 차세대 IT소자 원천 기술 등을 연구 중이다. 현재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금까지 60여 편의 논문을 해외 저명 학술지에 게재했다. 최근에 한·중·일 반도체 산업에 관한 저서 <반도체 삼국지>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