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질서가 요동치는 ‘혼돈과 격동의 시대’다. 지금 우리에겐 세계의 변화 양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올바른 생존과 발전의 전략을 짜는 일이 중요하다. 관성적으로 당연시해 온 ‘낡은 것’들에 대한 냉정한 진단과 개선이 절실한 이유다.‘이제는’ 바뀌어야 할 관념들과 한국 사회의 새로운 방향에 대해 담대한 제안을 던지고 있는 김도훈 아르스 프락시아 대표가 이번에 다룬 화두는 ‘디지털’이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21세기 ‘4차산업’ 생태계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20세기 관성으로 디지털 ‘혁신’을 외치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임 있는 정책 당사자들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디지털 선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편집자 주]

✔ 맥락적 사고보다 기계적 적용을 먼저 가르치는 교육 실태✔ 2차산업 정책의 방법론을 4차산업에 적용하는 구태 반복✔ 젊은 현장 전문가가 정책적 숙의와 의사 결정에 참여해야✔ 실질적 문제 해결 주체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 필요✔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 고유의 비전·모델을 수립할 시점

사진: 셔터스톡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기 얼마 전, 필자는 어느 공공기관의 강의실에 서 있었다. 빅데이터와 관련된 강의를 해 달라는 전화에 짧은 강연 요청인 줄 알고 선선히 승낙한 것이 화근이었다. 알고 보니, 지난 3개월간 빅데이터 교육 코스로 주 5일 내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강해 온 인원들에 대해 마지막 날 8시간 내내 강의를 해야 하는 요청이었다. 바쁜 일상에 내용을 뒤늦게 확인했으니,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당신들의 노력은 헛돌고 있다

학생들에게 지난 3개월 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물어보았다. 통계 및 빅데이터에 대한 개론부터 R로 구현할 수 있는 변수 간 상관관계 분석, 다변량 회귀분석, 파이썬(Python) 패키지 활용 및 코드 작성, 데이터 크롤링, 자연어 처리, 텍스트 마이닝, 머신러닝의 의사결정 트리(decision tree)부터 랜덤 포레스트(random forest), 딥러닝(deep learning)까지 사실상 적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지식과 테크닉을 압축해서 배운 상태였다.

작업한 포트폴리오를 확인하고 8시간의 강의를 마친 후 질문을 받았다. 기다렸다는 듯 손이 올라갔다. “대표님이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구를 채용하실 것 같습니까?” 첫 번째 질문이었다. 주변의 눈빛이 간절했다. 찰나의 고민 후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실상을 빨리 아시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저라면 아무도 채용하지 않을 겁니다.” 3개월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불철주야 공부하며 데이터 사이언스가 좁은 기회의 문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거라 믿어온 이들의 낙담한 얼굴이 내내 눈에 밟혔다.

필자가 당시 수강생들에게 냉정한 답변을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프로그램 패키지와 라이브러리(library)를 활용하여 주어진 과업과 명령을 적용하는 테크닉을 단기 속성으로 배웠지만, 자신이 산출한 결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경험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맥락적 사고 이전에 기계적인 적용부터 배웠기 때문에 온전한 이해와 활용을 위해서는 얼기설기 배운 내용들부터 지워야 할지도 몰랐다. ‘모두가 하라고 하는 건 따라가지 마세요.’ 말이 나오려다 삼켜졌다.

사진: 셔터스톡

20세기의 관성이 이끄는 디지털 혁신

교육기관에서 여러 해 데이터 사이언스를 배우고 회사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생겼다. “당신들의 배움과 이해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엑셀 같은 툴을 좀 쓸 줄 안다고 마치 자신이 뛰어난 통계학자인 양 착각하는 바보가 되지 마세요!” 모든 이들이 뛰어난 시스템 아키텍트나 모델러가 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사이언티스트’라면 데이터 분석의 인식론적 근거와 활용의 맥락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면서 지식과 기술을 연계해야 할 책무가 있다. 현재의 교육은 파이썬 패키지로 고답적 이론과 기능만 가르친다.

책임 있는 정책 당사자들이 ICT 산업의 미래와 인력 양성의 방향을 조금만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면, 데이터와 컴퓨팅, 인공지능의 모델링 및 다양한 분야의 활용에서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깊은 맥락적(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재(극소수다)가 늘어나고 성장하도록 인센티브 환경을 조성했을 것이다. 다수의 초·중급 유저를 위해서는 기껏 배운 코딩을 금방 무용하게 만들 자동화 인터페이스와 서비스의 혁신에 기업과 공공부문이 투자하도록 생태계를 진작하는 것이 한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머신러닝이나 코딩의 상당 부분은 갈수록 고도로 자동화된 인터페이스(오늘날의 챗GPT 같은)에 의해 수행될 것이 진작부터 전망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빅데이터 인력 10만 명 양성’, ‘초등학생에게 코딩을 가르쳐라’와 같은 구호는 정책 관련자들이 현 시대에 필요한 혁신과 인재상에 얼마나 무지한지를 극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4차산업’의 특성은 극소수의 인력이 엄청난 생산성을 가지는 지식 인프라의 생태계인데, 정책의 방법론은 2차산업 시절에 공장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양성, 복제해 내는 구태를 반복한다. 그런 대량 복제는, 높은 수준의 혁신을 이끌 수 있는 인재와 생태계를 진작에 고사시킨다. 열심히 얄팍하게 배워 얄팍하고 급박하게 적용하는 시장에서, 무엇이 ‘진짜’인지를 모른 채 인력과 시스템만 값싸게 망가지고 인재는 떠난다.

특히 ICT 분야에서 한국은 좋게 말하면 얼리 어댑터이지만 지금껏 관찰된바 연초마다 호들갑이 조증처럼 찾아오는 병증이 있다. 지난 10년간 소셜미디어, 빅데이터, AI, 블록체인, 메타버스, NFT, 챗GPT 등의 용어에서 그 ‘증세’가 드러나는데, 매년 어떤 키워드의 시대가 선포되고, 1년 만에 생겨난 각종 사업과 전문기업, 전문가와 자격증이 시장과 사회를 휩쓸다 망자의 기억처럼 어느 한순간 사라진다. 그러한 시행착오 속에 축적되는 인프라와 지식에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이 적합한 시스템과 인력, 지식을 장기지속적으로 육성하고 심화하는 데는 서툴고 비효율적인 것이 사실이다.

지난 1월 세계 도시 최초로 공공에서 구축한 메타버스 플랫폼 '메타버스 서울' (사진: 서울특별시)

변화의 축: 현장성 있는 정책 허브와 문제 해결에 대한 인센티브

저임 인력의 대량 생산과 복제가 효과적인 방식이 아니라면, 무엇이 대안일까? 공공 및 민간의 관련 사업에서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요소기술의 활용이 의의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고도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과 역량을 연계하고 통합하는 정책 허브가 조직화된 후 실행을 위주로 지속적인 평가와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한다. 그런 의사결정 허브는 적확한 지식과 혜안, 리더십을 체화한 시스템이기에, 결국 적절한 사람들의 구성이 중요하다.

감히 말하자면, 현재 한국의 ‘혁신’은 고위 관료, 대학 총장, 각종 기관장과 같은 ‘노인’들이 주창하고, 이에 부화뇌동하는 학자와 언론매체가 확산시킨다. 그들 중 일부가 여전히 유용한 경험과 혜안을 갖춘 경우도 있지만,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거나 관찰해보면 나날이 새로운 현실과 관련 기술의 맥락에 대해 실제 무엇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스러워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오랜 과거의 이력 덕분에 현재에 대한 판단과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있는 경우에는 과거의 성공 프레임이 현재에 부적절하게 투사되기도 한다. 코딩에 대한 맹신과 획일적 적용, 클라우드 같은 인프라가 마치 수십 년 전의 랜선처럼 ICT 혁신을 손쉽게 이룰 것이라는 관성화된 사고, 거의 모든 사안을 인공지능이나 메타버스로 담론화하고 사업으로 밀어낸 졸속 행정 등, 공중의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엄청난 국가 자원을 낭비한 실패와 무책임은 이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최근 과학기술정통부는 디지털 역량의 심화를 새로운 국정 비전으로 주창했는데, ICT 혁신을 위한 시의적절한 정책 진화로 보인다.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정책적 숙의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을 고답적인 관료나 학자들보단 공공성과 지식을 담지한 젊은 현장 전문가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새로운 관점의 리더십을 진작할 필요가 있다. 이웃 대만과 같이 젊은 여성 해커였던 오드리 탕이 디지털 장관으로 임명되어 뚜렷한 혁신을 이끈 리더십 모델을 따라가지는 못할망정,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혁신 담론과 졸속 정책이 반복되는 고리는 끊어야 한다.

젊은 여성 해커에서 디지털 장관으로 임명돼 혁신을 이끈 대만의 오드리 탕 (출처: 오드리 탕 트위터)

결국 혁신의 성공 여부는 시장에서 판가름 나지만, 제도는 그 성공의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책 허브와 리더십이 성공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상부구조라면, 인센티브 시스템은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생산적인 활동이 고무되고 확산될 수 있도록 시장에 시그널을 주는 하부구조 역할을 한다. 대형 플랫폼 사업자들이 이미 자체 역량으로 시장을 선도하는 상황에서, 정부의 재원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시장의 갭을 발굴하고 메우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공공부문에서 국가와 사회의 당면한 문제해결이나 미래전략의 실행을 위한 도전적인 과제를 발굴하고 사업화할 필요가 있다. 형식적인 인프라 구축이나 ICT 기술의 단발적 포장이 아닌, 요소기술의 적절한 큐레이션과 적용, 방법론과 기술의 누적적 발전을 통해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는 피드백 시스템이 새롭게 수립되어야 한다.

디지털 선도국을 위한 비전과 모델을 수립해야

시장-제도의 장에서 신뢰성 있는 리더십과 안정적인 인센티브 구조가 없을 때 경제 행위자들은 지대를 추구하게 된다. ICT 분야에서 공공의 리더십과 비전이 부재한 채 구호만이 난무할 때 행위자들은 실질적인 기술과 역량을 심화·발전시킬 동기를 잃는다. 적지 않은 다수가 새로운 기술을 과장하여 버블을 일으키고(루나 사태가 대표적이다), 선도국(주로 미국)의 사례와 경쟁자의 기술을 재빨리 모방하는 데만 골몰하는 지적 나태 혹은 도덕적 해이가 난무한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목격한 바와 같다.

디지털 전환과 혁신에 대해 논할 때, 산업계는 늘 규제 개혁(완화)을 화두에 올린다. 분명 규제가 발목을 잡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업계의 행위자들이 주로 어떠한 동기에서 어떤 행위를 전형적으로 하고 있는지 명확히 진단할 필요가 있다. 스타트업이 고유의 기술이나 프랙티스의 축적보단 처음부터 엑시트(exit)를 위해 운영되고, 중견기업들이 그저 그런 솔루션이나 플랫폼을 폐쇄적인 거래 관계를 통해 납품하며, 대기업들이 독과점적 플랫폼으로부터 손쉽게 지대를 추구하는 시스템은 디지털 분야에서 본원적 혁신의 동기를 저하시킨다.

디지털 경쟁력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이제는 한국이 얼리 어댑터로서 기술을 재빨리 모방하고 균질한 노동력을 집중 동원해 온 과거의 관성을 탈피해야 한다. 디지털 선도국으로서의 근본적인 사고와 새로운 기술의 디자인을 위한 국내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고, 보다 창의적인 인력들이 지적 노동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으면서 디지털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민간과 공공의 비전, 그리고 인센티브 체계가 변모해야 한다. 한국의 사회시스템이 디지털 기술을 통해 성공적으로 수행해 온 과업들을 갈무리하고, 향후 미래사회의 도전과제들에 대해 기술을 어떻게 발전적으로 적용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고유의 비전과 모델을 수립할 시점이다.

사진: 셔터스톡


글쓴이 김도훈은사회학을 공부한 학자이자 데이터 전문가이다. 데이터를 분석하지만, 숫자와 도표 안에서 시민을 읽는다. 데이터 분석 자체를 사람을 이해하는 실용적인 예술이라는 생각에 회사 이름도 라틴어로 이를 뜻하는 ‘아르스 프락시아’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