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수출, 수출…. 1970년대를 연상시키는 ‘수출 제일주의’가 2023년 대한민국의 제1 목표가 됐다. 정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경제의 탈출구로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다시 외치고 있다.그런데 수출로 우리 경제가 예전의 ‘신화’를 다시 쓸 수 있을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올들어 우리나라는 40여 일 만에 176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무역수지는 지난해 3월부터 매달 적자 행진이다. 왜 이럴까? 박현 필자는 세계 경제의 변화 속에서 우리나라의 무역구조가 ‘구조적 전환기’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한마디로 세상의 ‘룰’이 달라졌는데 정부는 이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무역 환경은 어떻게 변했는가? 답보 상황을 타개하려면 어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것일까? [편집자 주]

✔ 수출 전망치를 마이너스로 내놓은 이례적 상황✔ 구조적 전환기에 들어선 우리나라 무역구조✔ 한계에 봉착한 기존의 수출주도형 성장 전략✔ 한-중 수출, 보완·동조에서 경쟁 관계로 전환돼✔ 산업·통상 정책을 중심으로 전략을 재설계 해야

사진: 셔터스톡

정부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는 매해 연말에 다음 연도 경제정책 방향을 내놓는다. 여기엔 성장률과 고용, 물가, 경상수지 등 거시경제 전망 지표들이 담긴다.

기재부는 지난 연말에도 어김없이 ‘2023년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공식 발표 하루 전인 12월 20일 언론사 논설위원들에게 미리 설명을 하는 자리가 있었다. 기재부 자료엔 암울한 지표들이 나열돼 있었다. 경제 성장률 1.6%, 취업자 증가 10만 명, 소비자물가 3.5% 등등. 대부분 예상했던 숫자들이었지만, 예상외의 숫자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수출 -4.5%, 수입 -6.4%.’

‘수출주도형’ 성장전략 50여 년 만에 첫 마이너스 수출 전망

1997년 외환위기 때부터 경제 담당을 해왔지만, 정부 정책 방향을 담은 자료에서 이렇게 수출 전망치를 마이너스로 내놓는 경우는 처음 봤다. 정부 전망치는 정부의 정책 의지가 담기기 때문에 아무리 어렵더라도 플러스 전망치를 내놓기 마련인데, 마이너스 전망치를 내놓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우리나라가 1962년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채택한 이래 아마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추경호 부총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전 세계 경제가 역사상 3개 이벤트, 즉 오일쇼크,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 대재앙 외에는 지금과 같이 성장률을 낮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년에는 세계 환경이 그렇다. 우리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가 굉장히 어렵다. 하루아침에 우리가 세계 경제와 유리돼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과 유사한 계획을 같이 가지고 가는데, 그래도 우리가 해야 될 일들은 해야 되겠다는 차원에서….”

올들어 41일 만에 무역적자 176억 달러나 기록

한마디로 세계 경제가 어려우니 우리도 어쩔 수 없으며, 어찌 됐든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겠다는 비교적 솔직한 얘기다. 최근 발표된 수출입 실적 자료를 보니, 추 부총리의 말이 엄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기재부 전망치가 상당히 낙관적이었다고 여겨질 정도다. 관세청 발표를 보면, 올해 1월 1일부터 2월 10일까지 수출(통관 기준)은 639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3% 급감했고, 수입은 815억 달러로 2% 증가했다. 이로써 올해 무역적자는 벌써 176억 달러에 이르렀다. 역대 최대였던 지난 한 해 무역적자 규모(475억 달러)의 37%에 해당하는 적자를 41일 만에 기록한 셈이다. 2월까지 무역적자가 지속되면 12개월 연속 적자인데, 이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5년 1월~1997년 5월에 29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한 이후 가장 긴 기록이다.

정부는 겨울철 에너지 수입 증가와 반도체 수출단가 급락, 코로나로 인한 중국의 경제활동 차질을 연초 대규모 무역적자의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추 부총리는 1월 수출입 실적이 발표된 2월 1일 연설에서 “향후 무역수지는 여러 변수가 작용하겠지만, 1월을 지나면서 계절적 요인이 축소되고 중국의 리오프닝 효과가 시차를 두고 반영되면서 점차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다소 낙관적인 전망이다. 그러면서 그는 무역수지 개선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방산·원전·인프라의 수출 지원 강화, 반도체 투자세액공제 확대, 아랍에미리트(UAE) 정상외교 성과의 ‘신 중동 붐’으로 확산 등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설명했다.

2월 3일엔 장관급으로 구성된 수출투자대책회의가 신설돼 첫 회의가 열렸다. 추 부총리가 주재하고 문체부·농식품부·산업부·복지부·여가부·국토부·해수부·중기부·공정위·금융위 등 관계부처 장·차관이 참석했다. 경제부처 장·차관은 그렇다치고 복지부·여가부 장·차관은 왜 참석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윤석열 대통령의 수출진흥 의지가 대단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정부의 노력이 가상하기는 하나, 과연 정부가 수출 부진과 무역적자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고 있으며, 그 대책은 현실성이 있는 것일까. 지금의 무역적자가 경기 사이클이나 중국 코로나 상황,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일시적 요인이 사라지면 원상 회복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1970~80년대 개발연대식 수출진흥 정책에 매진하는 정부에 잘하고 있다며 응원을 하면 되는 것일까.

무역구조는 구조적 전환기, 그런데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정부의 원인 진단과 전망, 대책은 우리 현실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현재 우리나라 무역구조는 구조적인 전환기에 들어섰는데 정부가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세계 교역 환경의 급변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교역 규모는 정체 또는 축소 국면에 들어섰으며,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중 패권 경쟁의 심화로 미래 전망은 더 어둡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1월 내놓은 보고서(‘지정학적 분절과 다자주의 미래’)의 맨 앞에는 1870년부터 2021년까지 무역개방도를 보여주는 그림(하단 「그림 1」)이 나오는데, 지금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역개방도는 모든 나라의 수출입 합계액이 글로벌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계산된다. 2차 세계대전 직후 10%대 후반이었던 무역개방도는 ‘브레튼우즈 시기’(1945~1980년)와 ‘자유화 시기’(1980~2008년)에 지속적으로 증가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50%대 중반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그림 1」 IMF 보고서의 무역 개방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무역은 ‘슬로벌라이제이션’ 시대로

그 이후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zation) 시기’(2008년~)에 정체 또는 축소가 진행되고 있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빗대어 만들어진 조어로 세계화의 정체 현상을 뜻한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 때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채택한 우리나라는 브레튼우즈 시기와 자유화 시기에 세계화의 세례를 받아 수출대국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슬로벌라이제이션 시대는 우리나라에겐 불리한 환경이다. 대외 의존도가 매우 높아 글로벌 변동성에 취약한 탓이다. 기존의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얘기다.

코로나 팬데믹이 소멸되면서 중국을 비롯해 세계 경제에 차츰 온기가 돌겠지만, 미-중 패권 경쟁과 보호무역주의는 세계 경제에 큰 도전임이 분명하다. 지난해 말 바이든-시진핑 정상회담으로 위기 관리 모드로 들어가는 듯했던 미-중 관계는 ‘정찰 풍선’ 사건으로 다시 긴장 국면으로 되돌아갔다. 지난해 미국 중간선거와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이라는 정치 이벤트가 끝나면서 한숨 돌리는 듯싶었는데 의외의 복병을 만난 것이다. 당분간 미-중 관계는 두 강대국의 국내 강경 여론에 볼모가 잡힐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조기 종전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상 블라디미르 푸틴 같은 독재자가 뚜렷한 승리를 하지 못한 채 전쟁을 먼저 끝낸 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미국의 관점에서도 이번 전쟁을 러시아를 쇠락시킬 절호의 기회로 삼을 공산이 크다. 미국은 중국이 더 강력해지기 전에 중국의 우방국인 러시아의 기세를 먼저 꺾어놔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을 할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선 미국이 중·러 두 강대국을 한꺼번에 상대할 만큼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에 지금 두 나라와 맞서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필자가 국제통화기금이 연초에 내놓은 미·중 성장률 전망치를 토대로 계산해본 바에 따르면, 중국의 경제 규모는 2022년 기준으로 미국의 78% 수준인데, 2028년께 90%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경제 규모는 보수적 시나리오(2030년 이후 2%의 저성장)에서도 2040년께 미국과 엇비슷해진다. 미-중 패권 경쟁에 따른 지정학적 불안이 상당 기간 세계 경제를 지배할 개연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중국, 우리나라의 생산기지에서 수출 경쟁국으로 변모

둘째는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인 중국이 우리나라의 생산기지에서 탈피해 이제는 주력 산업의 수입대체에 성공하면서 수출시장의 주요 경쟁국으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코로나 국면이 끝나도 중국과의 교역에서 과거처럼 대규모 흑자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시장에 처음엔 최종재로, 나중엔 중간재를 수출하면서 급성장했다. 중국은 우리나라에서 중간재를 수입해 이를 가공·조립해 세계시장에 수출하는 구조였다. 이런 모델이 2010년대 중반까지는 작동했다. 그런데 중국이 2015년 ‘중국제조 2025’ 전략을 발표하고 본격 시행한 시점부터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중국제조 2025는 첨단산업 분야에서 선진국을 추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조업 중간재 생산을 자립해 수입대체를 하는 것도 핵심 목표 중 하나였다. 한-중 교역이 2010년대 중반부터 구조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코로나를 계기로 더 심화했다고 보는 게 정확한 진단으로 보인다.

최근 나온 국제금융센터 보고서는 이런 맥락을 잘 짚고 있다. 국제금융센터는 2월 1일 발표한 ‘대중국 수출 위축 원인 분석’ 보고서에서 수출에서 한국과 중국이 기존의 보완·동조화 관계에서 경쟁 관계로 이미 전환됐다고 분석했다. 국제금융센터가 무역협회 수출 자료를 활용해 실증 분석한 결과, 중국 제품의 세계시장 수출이 1단위 증가할 때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탄력성 추정치는 2001~2015년 0.622에서 2016~2022년 0.378로 하락했으며,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의 탄력성 추정치는 같은 기간 0.907에서 0.377로 크게 하락했다. 보고서는 “중국이 첨단제조업 육성을 목적으로 ‘중국제조 2025’를 본격 추진한 2016년부터 중국의 수출에 대한 우리나라 수출 및 대중국 수출 탄력성이 하락(동조화 약화)했다”며 “이는 한-중 수출이 보완에서 경쟁 관계로 이미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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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중립의 메가트렌드’가 주는 타격

셋째는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높은 수준에서 형성될 개연성이 높다는 점이다. ‘2050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 세계가 에너지 전환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에너지 가격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폭등한 건 사실이지만, 가스와 석탄 가격의 경우 전쟁 전인 2021년 하반기부터 이미 급등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른바 ‘그린플레이션’(친환경 정책으로 인한 물가상승) 현상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에너지 공급망 재편이 본격화하고, 자원보유국을 중심으로 ‘신자원 민족주의’가 대두하는 것도 좋지 않은 신호다.

이런 흐름이 우리나라 무역수지에 미치는 함의는 명확하다. 우리나라는 에너지를 거의 모두 수입에 의존하는데다, 산업구조마저 에너지 다소비형으로 짜여 있어 무역적자를 키우는 요인이 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역대 최대 무역적자를 기록했는데, 수출이 부진해서가 아니라 에너지 수입이 급증한 영향이 컸다. 지난해 통관 기준으로 수출은 6340억 달러(6.1% 증가)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으나, 수입이 7312억 달러(18.9% 증가)에 달해 472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나타냈다. 지난해 에너지 수입 증가분은 전년 대비 784억 달러였는데, 이는 연간 무역적자(472억 달러)보다도 312억 달러나 많은 규모다.

이런 현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핵심 원자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자재인 니켈과 리튬의 경우 2021년 하반기부터 오름세를 보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일본과 함께 전기차 배터리 3강에 속하지만, 핵심 원자재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출을 확대하면 에너지·원자재 수입도 덩달아 증가하는 구조이므로 기존의 수출 확대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새로운 환경에 맞는 성장전략의 설계가 필요하다

한계에 봉착한 기존 모델을 뛰어넘을 새로운 산업·통상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아직 여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이 한계에 도달했으니 내수 소비를 더 확대하자는 주장은 단견이다. 우리처럼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내수 의존 경제로는 G-10 규모가 된 나라의 경제를 유지하긴 어렵다. 더군다나 부동산 버블 붕괴와 임계치를 넘어선 가계부채 상황에서 내수 주도 성장전략은 한계가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의 ‘빚내서 집 사라’는 정책을 반복할 수는 없다. ‘수출 대 내수’가 아니라, 해외 시장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 보호무역주의 횡행과 중국의 경쟁자로의 변모, 그리고 탄소중립의 메가트렌드에 따른 에너지·원자재 가격 상승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맞게 산업·통상 정책을 중심으로 성장전략을 재설계해야 한다.

미국과의 협력은 불가피하나 인도·아세안 시장 주목해야

무엇보다도 미국·유럽 등 거대 경제권이 보호무역주의로 기울고 중국이 서구 중심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되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글로벌화가 정체 또는 위축되는 대신 지역 블록 중심으로 새로운 판짜기가 시도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쇠락한 제조업의 부활을 기치로 내세우며 한국·대만 등 동맹·우방국들의 기업들까지 미국에 투자를 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서는 우리의 미래를 보장받기 어렵다. 지금 삼성·현대차·에스케이·엘지 등 국내 대기업들은 앞다퉈 미국에 첨단 공장을 짓거나 연구개발 센터를 설립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단기적으로 이렇게 생존을 보장받으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강화되면 국내 산업기반이 약화하고 고용이 위축되는 부메랑을 맞을 수밖에 없다.

대기업도 안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과의 협력은 불가피하지만 국내에 본부 기능과 연구개발 및 첨단 제조 역량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미국이 지난 20~30년 동안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 아웃소싱을 맡겼다가 제조업이 쇠락하고 기술개발 역량마저 위축된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미국이야 세계 패권국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다시 자국 산업을 일으키려는 시도라도 할 수 있으나 우리는 그런 입장이 못 된다.

대안은 인도와 아세안 시장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현 정부는 ‘제2의 중동 붐’으로 수출을 만회하려고 하나 여러 측면에서 인도·아세안에 못 미친다. 인도·아세안은 성장 잠재력이 글로벌 차원에서 가장 크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워 지역 블록을 형성하는 데 유리하다. 우리에게 부족한 자원도 풍부하게 갖고 있다. 또한 우리와 산업 발전 단계가 달라 상호보완적인 분업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우리의 기술·자본과 인도·아세안의 노동·자원이 결합하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지금처럼 격변기였던 1990년대 초반 우리 정부는 북방정책을 통해 중국·러시아와 발 빠르게 수교했다. 이들과의 교역 증대는 우리가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대중국 수출 증가율은 1999년 14.6%, 2000년 34.9%에 달했다. 중국은 2003년에는 우리나라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8.1%에 이르러, 미국(17.7%)을 제치고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고도성장하는 중국 경제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 우리도 재도약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인도·아세안 경제는 이제 발전 초기 단계이므로 지금 협력·분업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우리가 얻는 것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미국-동아시아 분업모델처럼 한국-인도·아세안 분업모델을 정부가 주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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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다소비 구조로는 미래가 없다

에너지 문제도 현재의 소비 양태나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 구조로는 미래가 없다.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무려 93%에 달하는 나라에서 전기·가스를 물 쓰듯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게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최근 난방비 급등 사태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긴 하지만, 국민 사이에 에너지 절약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중산층의 난방비 부담을 경감해주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는 철회하는 게 맞다.

또한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2021년 기준 8.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2030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목표를 문재인 정부 때의 30.2%에서 21.6%로 8.6%포인트나 낮췄다. 시대에 역행하는 결정이다.

지금이야말로 국제질서 급변과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읽고 국가 경제의 미래를 재설계해야 할 때다.


글쓴이 박현은두 군데 신문사에서 서른 해 남짓 일간지 기자로 살아왔다. 《한겨레》 국제부장·경제부장·부국장을 지냈다. 현재는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며 경제와 국제 문제를 다룬 사설과 칼럼을 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인 2013년 오바마-시진핑 정상회담을 취재하며 미·중 관계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두 지도자의 만남에서 비롯된 관심은 알리바바·화웨이 등 중국 첨단 기업들의 발전상을 취재하며 양국의 빅테크 경쟁, 나아가 반도체·배터리를 비롯한 첨단기술 경쟁 전반으로 가지를 뻗었다. 저서로 <기술의 충돌>(서해문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