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2023년의 첫 달, 메디치미디어가 구성한 기행단 ‘룩소르 학교’팀 16명이 이집트를 찾았다. 카이로로 입국해 룩소르, 아부심벨을 찍고 다시 남으로 알렉산드리아까지 열흘의 여정이다.(설을 끼고 움직여 5일 연차로도 가능한 드문 경우였다) 멤버는 다양했다. 언론인, 교수, 셰프, 공기업과 사기업 간부, 출판사 임직원, 작가, 홍보 전문가 등이 어울렸다.

이집트 7000년 역사는 인류의 역사(written history)와 거의 비슷하다. 기행에 참여한 5명이 피라미드 이집트에서 현대 이집트까지 폭넓은 시공간을 넘나든 소감을 전한다. 여행은 세상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길이다. [편집자 주]

✔ 피라미드 대공사는 사람을 굶기지 않고 민심을 달래는 '정치'✔ 광활한 사막에서 숨 막히는 일출과 푸른빛의 신기루를 만나다 ✔ 북쪽에 피라미드가 있다면 남쪽엔 신전과 오벨리스크✔ 인간의 목숨은 스러져도 욕망은 여전히 남아 우리를 유혹해✔ 알렉산드리아가 이집트를 개방 사회로 이끄는 창구 되기를

피라미드, 관광객을 태워주고 돌아가는 마차 그리고 말똥 치우는 사람(사진: 정석)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다

정혜승 작가(전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

고대 문명에 홀리는 시간여행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4500년 전 무덤부터 도무지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외계인 문명설을 의심하며 감탄사만 쏟아냈다.

나일강을 따라 이어지는 여정에서 첫 번째 만남은 피라미드였다.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50km 거리, 도심 바로 옆에 사막과 기자 지역 피라미드가 불쑥 등장한다. 비현실적이다. 이집트 역사는 기원전 5000년까지 올라간다. 피라미드는 기원전 2500년, 즉 4500년 전에 절정기였다. 우주를 탐사하는 인류는 아직 피라미드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 파라오의 부활과 영생을 위해 만든 무덤에서 오히려 영원하지 않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우주를 탐사하면서도 여전히 풀지 못한 피라미드의 비밀

압도적 아우라와 달리 피라미드는 여행자에게 인색했다. 후다닥 인생샷을 찍는 것 외에 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기획이 없었다. 기자 피라미드의 역사를 알려주는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웅장한 유적 앞에서 겸허해지는 시간을 갖기에는 무척 어수선했다. 낙타 상인들도, “원 딸러”를 외치며 물건을 들이미는 꼬마들도 자기들끼리 경쟁하는데 호구가 되는 기분이었다.

고대 파라오들이 일을 잘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146m 높이 쿠푸의 대피라미드는 2.5톤 석재 230만 개를 210단으로 쌓았다. 당대 권력이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노예처럼 부린 줄 알았는데 오해였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SOC(사회간접자본) 사업이다.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나일강은 해마다 범람해 비옥한 흙을 남겼는데, 홍수 탓에 1년에 4개월은 농사를 짓지 못했다. 농부들이 일감 없이 먹고살기 막막한 농한기에 피라미드 공사가 이뤄졌다. 피라미드 인근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유적지에는 빵과 맥주를 대량 생산한 흔적이 남아 있다. 소뼈도 나와 ‘쇠고기 먹고 일했구나’ 한단다. 파라오 쿠푸가 1년에 4개월씩 20여 년 동안 대피라미드를 지은 것은, 사람들을 굶기지 않고 민심을 달래는 ‘정치’였던 셈이다.

민초들의 삶을 벽화에 남긴 이도 있다. 기자 인근 사카라에는 4300년 전 고위 관료 카젬니의 무덤이 있다. 규모는 소박하지만, 내용에서는 단연 압권이다. 그 시절 옷을 입지 않았던 소년과 옷을 입은 어른들이 함께 메기와 뱀장어, 오징어를 잡고 있다. 큰 물고기는 줄에 꿰어 나르고, 작은 물고기는 파피루스 바구니에 담았다. 사람들이 카젬니에게 선물을 가져온다. 사슴, 오리, 비둘기, 쇠고기, 파피루스, 파…. 아직 닭은 이집트에 없던 시대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한 벽화는 신을 경배하는 만큼 국민도 챙긴 그 시절 지도자를 상상하게 한다. 좋은 통치자는 어려운 이들의 살림살이를 먼저 챙긴다. 이렇게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다 보면 다시 현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고대 이집트인의 생활상이 담겨있는 카젬니 무덤 벽화(사진: 이혜옥)

이집트 정부가 좀 더 유능했다면, 관광지에서 돈을 뜯는 관행이 없어졌을까? 유적지는 제대로 정비됐을까? 세금을 덜 내기 위해 짓다 말고 철근이 삐져나온 건물들은 완공됐을까? 꼬마들은 관광지에서 “원 딸러”를 외치는 대신 학교에 갔을까? 관리 능력이 없는 이집트 대신 귀한 유물을 보관할 뿐이라는 영국과 프랑스의 박물관들은 입장을 바꿨을까? ‘아랍의 봄’ 이후 여름이나 가을은 오지 않는 걸까?

친구 T가 2004년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는 거리에 히잡을 쓴 여자들이 매우 드물었단다. 2009년에는 절반이 쓰고 있었고, 2014년에는 안 쓴 여자를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2023년에는 머리카락을 가린 스카프 정도가 아니라 달랑 두 눈만 노출한 니캅 차림의 여자들도 종종 보였다. 이집트가 100년 전 아랍 페미니즘의 산실이었다는 T의 설명은 믿기지 않는다.

이집트 문명 기행은 누구에게나 로망이다. 다시 이집트에 가고 싶다. 도시가 정비되고, 관광의 경험이 달라지고, 유물 관리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며 여자들이 히잡을 벗은 자유로운 이집트를 만나면 더 좋겠다.

 

람세스 2세의 아부심벨 신전(사진: 이혜옥)

미완성 오벨리스크에서 고향의 굽은 소나무를 떠올리다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도시공학)

‘아스완, 황금의 심장(Heart of Gold)’이라고 쓰인 표지가 곳곳에 보인다. ‘황금의 심장’이라. 이집트 여행 둘째, 셋째 날을 아스완에서 보내고 나니 이 말에 공감이 갔다. 맞다. 아스완은 이집트의 보물이다.

아스완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가장 먼저 간 곳은 아스완하이댐. 1960년부터 8년간 옛소련의 지원으로 건설된 이 댐과 수력발전으로 이집트는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 주요시설이어서일까. 사진 촬영도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아스완댐에서 멀지 않은 곳, 나일강 가운데 있는 아질키아섬에 조금 특별한 신전이 있다. 오시리스 신의 부인이고 호루스 신의 어머니인 이시스 여신을 위한 신전으로, 뭍에 있는 신전들과는 다른 특별한 매력을 선사한다. 필레 신전이다.

필레 신전은 이집트 마지막 왕조였던 프톨레마이우스 시기(BC 304~30)에 지어진 로마 문명의 키오스크 건물까지 함께 있어 더욱 특별한 느낌을 준다. 신전을 돌아보고 벽에 그려진 그림과 글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존재인 절대자를 무어라 부르고 어떻게 섬기는지는 동서고금 역사마다 다양한데, 신을 대하고 섬기는 방식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서로 싸워 죽이고 죽어갔을까. 조금씩 다른 차이는 서로 품어줄 수 없었을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차이 때문에 벌이는 전쟁들이 언제쯤 끝날까.

미완의 오벨리스크(사진: 정혜승)

미완성이어서 아스완을 지키는 오벨리스크의 운명

신전을 돌아본 뒤 아스완 시내에 있는 미완성 오벨리스크(태양 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를 찾아갔다. 이집트 문명의 독특한 유산 중 하나가 오벨리스크인데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 뺏기고 이집트에 남아 있는 오벨리스크는 많지 않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완성 오벨리스크다. 거대한 채석장에서 오벨리스크를 만들다 돌에 금이 가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은 오벨리스크의 모습이 처연하다. 미완성 덕분에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벨리스크를 보면서 고향을 지키고 서 있는 굽은 소나무 생각이 떠올라 애잔했다.

여행 셋째 날은 새벽 3시에 일어나 남쪽 아부심벨 신전으로 향했다. 아부심벨까지는 버스로 3시간 여정. 75번 도로를 타고 깜깜한 사막을 한없이 달렸다.

나일강 유역 1km 바깥쪽은 대부분 사막이다. 사막을 하염없이 달려보니 알겠다. 사막에는 사막밖에 없다는걸. 여우도 어린 왕자도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게 없다. 그저 사막의 지평선만 끝없이 이어진다. 5시 30분쯤 동녘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온다. 6시 30분까지 1시간여 사막의 일출을 지켜보며 처음 목격한 장관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았다. 감동을 넘어 숨이 턱 막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왜 태양신을 섬겼을까? 사막의 일출을 직접 와서 보니 알 것 같다.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세상을 밝게 비추며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 밤의 추위를 몰아내고 따뜻한 온기로 감싸주는 태양만큼 귀하고 고마운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

사막의 신기루, 태양신 숭배

이집트의 파라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람세스 2세(BC 1279~1213 재위)가 영토 최남단 누비아 땅 나일강변 바위산에 지은 아부심벨 신전에 도착했다. 바위산을 깎아 만든 두 개의 신전이 나란히 서 있다. 왼쪽 대신전 정면에는 람세스 2세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20m 높이의 네 개 조각상이 있고, 가운데 문을 통해 들어가면 열주실과 전실을 지나 지성소에 이른다. 지성소에는 프타신, 태양신(아멘, 라), 호르아크티신과 함께 앉아 있는 람세스 2세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신과 동격임을 스스로 선언한 것인가. 한 해에 두 번, 2월과 10월에 태양 빛이 정문을 통해 이곳까지 비추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아부심벨 신전은 원래 위치에서 위로 옮겨진 것이다. 아스완댐 건설로 수위가 높아져 신전이 수몰될 상황에 처하자, 유네스코가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전 세계의 도움을 받아 원래 위치보다 60m 위에 인공산을 만들어 이전·복원했다. 이것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도 도입의 계기가 되었으니 뜻깊은 역사의 현장이다. 이전·복원 뒤에도 태양 빛은 여전히 지성소를 비춘다니 복원 솜씨가 압권이다.

오른쪽 소신전은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신전으로 전면에 람세스 2세와 왕비의 6개 조각상이 서 있다. 왕비를 위한 소신전의 제일 안쪽 지성소 입구 문 위에 제비집이 있었다. 신전 주변에도 또 신전 안에도 제비들이 바쁘게 오가는 걸 봤는데, 알고 보니 어린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부모 제비들의 분주함이었다. 신의 존재 이유는 피조물의 행복일 것이다.

사막의 신기루(사진: 차현진)

아부심벨을 다녀오는 길에 사막의 신기루를 목격했다. 차창 너머 사막 저쪽에 푸른 빛의 물이 보여 나일강인가 했더니 아, 이게 바로 신기루구나! 버스에서 내려 한참 사진과 영상에 신기루를 담았다. 사막의 일출도 보고, 신기루도 보고. 사막에서 많이 깨친다.

 

룩소르의 아침, 나일강변에 떠오르는 열기구(사진: 이은형)

나일강을 타며 얻은 것들

한혜경 가톨릭대 교수(중국언어문화학)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내가 있다는 사실, 계획과 무관하게 벌어지는 예측 불가의 상황들이 여행의 짜릿한 묘미가 아닌가 싶다.

아스완에 머물며 아스완하이댐과 필레 신전을 둘러보고 사막을 달려 아부심벨 신전을 방문한 뒤 나일강 크루즈에 탑승했다. ‘알리사(Alyssa)’란 이름의 유람선이다. 워낙 물을 무서워해 혹시 멀미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나일강의 물살은 잔잔했고 배의 움직임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객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나일강은 유속이 완만하고 양안 거리가 멀지 않아 적응하기가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크루즈는 나일강을 따라 쉬지 않고 이동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느새 목적지에 당도해 있곤 했다.

나일강을 수놓는 열기구들의 장관

투어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수건을 곱게 접어 만든 원숭이나 코끼리 친구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 모양이 얼마나 귀엽고 깜찍하던지, 크루즈 승무원들의 센스 있는 서비스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이렇게 소소한 것으로도 승객을 유쾌하게 만들다니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하늘은 맑고 깨끗했으며 바람은 부드러웠다. 루프탑에서는 때때로 티 파티가 열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의 시간을 가졌다. 밤이 되면 총총히 떠 있는 별을 보며 별자리 찾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크루즈 여행 이튿날 아침 루프탑에 올라가니 나일강 저편으로 수많은 열기구들이 두둥실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튀르키예의 카파도키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관이다.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나일강이 점점 더 정감 있게 다가왔다. 이집트 문명의 원천인 나일강에 와 있다는 사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크루즈를 타고 나일강 양안의 신전을 돌면서 고대 이집트의 역사와 마주했다. 악어 신전으로 유명한 코몸보 신전에서, 호루스 신전으로 불리는 에드푸 신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코몸보 신전의 석벽 부조나 갤러리에 모셔진 악어 미라에서, 악어신 소베크를 모셨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강렬한 악어 숭배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 에드푸 신전에서는 성소의 돌을 깎아 만든 태양 방주 모형이 인상적이었다.

이튿날 아침 룩소르에 있는 왕가의 계곡을 찾아 람세스 4세, 메렌프타, 세티 1세, 람세스 1세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아름답게 채색된 무덤 속 부조와 벽화들이 눈을 압도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장례를 치르는 신전)을 보고는 그 웅장함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카르낙 신전에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하늘 높이 세워져 있었다. 이 신전은 한때 지진으로 무너진 적이 있지만 다른 신전에 비해 정비가 잘 된 편이라고 한다. 다만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듯 아무렇게나 놓인 석상들이 눈에 띄어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이집트 유적의 현장에서 태양신을 숭배하고 불멸을 추구했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북쪽에 피라미드가 있다면 남쪽에는 신전과 장제전, 오벨리스크가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펠루카를 타다가 만난 누비안족 소년(사진: 정혜승)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고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기쁨이다. 다만 이집트인들의 일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흥겹게 노래를 불러주던 펠루카의 누비안 뱃사공과 그의 아들, 말을 직접 몰아보라고 말채찍을 내 손에 쥐여주던 마부 아저씨, 친절한 미소로 반겨주던 알리사의 승무원 무하마드, 아스완하이댐에서 보았던 한량 같은 견공들이 떠오른다. ‘얄라얄라’를 외치던 우리의 모히도…. 여행할 때마다 누리는 즐거움만큼 내게 던져지는 질문도 하나둘씩 늘어난다. 여행은 끝났지만, 이집트에 관한 공부,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고찰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투탕카멘 가면(사진: 위키백과)

드디어 투탕카멘을 보았다

이현주 국립중앙박물관 홍보전문경력관

카이로박물관은 이집트 고대 유물 관련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다. 소장된 유물이 12만 점에 달한다. 박물관 건물 정면에는 ‘1892~1901’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지만, 박물관의 공식적인 설립일은 1902년으로 되어있다. 건물 앞, 정원 연못에 피어 있는 연꽃을 찍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양한 석상들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조각했을 것이고, 그 솜씨 또한 최고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가장 고귀한 숙녀’란 뜻의 이름을 가진 하트셉수트 여왕, 크리스탈 눈을 지킨 쿠푸왕 형제 부부도 봤고 입을 맞추고 있는 사랑 가득한 아케나톤의 석상도 보았다. 수많은 석물을 살짝 맛만 보고 올라가는 2층 계단엔 파피루스들이 액자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장에 끝없이 보이는 수많은 미라와 동물 미라들, 거대한 목관과 부장품들을 그저 놀라움 속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2층 전시장의 한곳에서 드디어 투탕카멘을 만날 수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중앙에 보이는 투탕카멘 가면. 오뚝한 콧날, 검은 선으로 꾸민 눈, 도톰한 꾹 다문 입술을 가진 투탕카멘 가면은 이마 중앙에 코브라와 독수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황금을 바탕으로 흑요석, 색유리, 터키석 등을 박아 넣어 만든 선명하고 화려한 자태라니. “너무 아름답잖아”를 맘속으로 되뇌며 눈에 레이저를 단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투탕카멘 가면의 높이는 54cm, 너비는 39.3cm, 내부 깊이는 약 49cm다. 발굴된 후, 이집트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준 가면답게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정말 달랐다.

이집트 카이로박물관(사진: 이현주)

인간의 욕망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투탕카멘은 어린 나이 19세에 권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은 무덤은 왕의 계곡에서 살아남아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4겹의 황금 사당 안에 황금관 3개가 들어 있었다. 황금 관은 110kg의 순금으로 만들었단다. 수천 점의 보물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황금 장신구들, 목걸이, 팔찌 등을 보고 있자니 은으로 만든 장신구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탐이 났다. 반지들을 보며 L 선생님과 함께 “저는 이것이 가지고 싶네요”라며 서로 욕심을 부렸다. 인간의 욕망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죽은 자들의 삶을 도와주는 사브티만도 413개가 나왔다고 한다. 죽은 이후의 삶을 위해서 도와줄 사람들인 사브티 말이다.

19세기 이집트의 발굴작업을 후원했던 사람들과 그 후원을 받아들인 이집트 정부는 발굴품의 50%를 가져갔다. 발굴은 황금으로 만든 부장품들을 가질 수 있다는 유혹 때문 아니었을까. 이집트 정부는 20세기에 들어서 자국의 유물을 해외로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덕분에 투탕카멘은 이집트 카이로박물관에서 안거할 수 있었다.

카이로박물관에서의 3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수많은 문화유산을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루 종일 있으라고 해도 좋았을 카이로박물관이었다. 자연광이 그대로 비치는 수많은 미라와 밀폐가 잘 되지 않는 전시장의 유물들을 바라봤다. 많은 관람객이 전시장을 오가는데 노출된 유물들이 괜찮을까, 공조시스템은 문제가 없을까, 걱정이 들었다. 수십 년간 박물관 밥을 먹은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다. 박물관을 나오며 새로운 박물관이 완공돼 문화유산들이 최적의 상태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탰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사진: 정석)

알렉산드리아의 봄을 기대하며

김현종 메디치미디어 대표

알렉산드리아는 낭만적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확장 건설을 지시한 도시, 당시 세계로서는 압도적인 도서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정략 연애,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 항구도시 등이 이 도시의 역사이자 이미지다. 지중해 해변에는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도시가 여럿 있는데, 그중 맏형 격이다.

그런데 겪어놓고 보니 한국인의 여행 방식에서 알렉산드리아행은 무리였다. 대개는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룩소르를 거쳐 아부심벨을 찍고 다시 카이로로 돌아오는 게 전형적인 코스다. 서울에서 부산 갔다가 서울 돌아와서 출국하는 게 아니라 다시 개성 정도를 다녀오는 게 알렉산드리아 다녀오기다. 몸이 고됐다. 그럼 후회하느냐고? 고생한 만큼 괜찮았다.

무엇보다 이집트의 다양성을 보았다. 나일강과 사막만 있는 듯한 이분법인 나라에서 바다와 해양 문화의 역사는 알렉산드리아의 몫이다. 특히 나일강은 카이로를 통과하면서 부챗살처럼 확 펴진다. 이른바 삼각주, 델타 지구다. 나일 델타는 이집트 전체 면적의 3%, 인구의 40% 이상이 사는 조밀한 농업, 공업 지역이다. 이집트는 사막의 황색, 하늘의 청색, 델타와 강 주변의 녹색으로 대표된다.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지리적으로는 지중해 세계, 역사적으로는 그리스 로마 시대와 연결되는 게 이집트다.

가는 길은 험했다. 육지임에도. 버스가 한참 가다가 판교 너머 달래네고개쯤에서 서버렸다. 안개가 많이 끼었다고 경찰이 도로를 차단했단다. 잉? 서해안고속도로 가다 보면 만나는 안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저 약간 흐린 날씨인데! 차들이 편도 6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수천 대씩 서버렸다. 우리로 치면 경부고속도로 중간에서 기상악화를 이유로 도로를 차단한 격인데, 한국에서 간 사람들 눈에는 그저 그런 날씨로 보였다.

예상 밖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즐거움

다시 달려서, 로제타스톤의 발굴지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로 들어갔다. 몇몇씩 짝지어 바닷가 거리를 쏘다닐 때도 이 도시의 매력은 애매했다. 변화는 만남에서부터 시작됐다. 일행 중 두 여자, 전직 기자인 J와 S가 스무 살 안팎의 여학생 한 무리와 조우했다. 공원에서 마주친 여학생들과 과자, 빵 과일을 나눠 먹으며 짧은 영어로 자매애를 나눈 얘기는 아래 사진이면 족할 듯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여학생들과 정혜승 작가(사진: 정혜승)

대도서관과 카타콤베, 카이트베이 요새로 이어진 다음 날 투어는 짭짤했다. 알렉산드리아대학 맞은편의 대도서관은 층고가 30m도 넘어 보이는 현대식 건물. 다들 흩어져서 책에 대한 향수에 푹 빠질 수 있어서 좋았다. 깔끔하고 근사하고 세련된 도서관 내부의 풍경이 여행에 지친 허벅지와 종아리를 유혹했다. ‘여기서 아무 생각 말고 알지도 못하는 아랍어책을 한 권 올려놓고 쉬자’고. 맞은편 알렉산드리아대학 학생들의 진지한 독서 모습과 어울려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게다가 1층과 지하에서 이집트 근현대 대표 화가들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이었다. 원색의 아프리카에 약간의 문명을 입힌 듯한 게 이집트 화가들의 그림이었다.

여행 중 일행들은 이집트의 현재에 대해 답답해했다. 도장을 가지고 있거나 완장을 차고 있는 남자들의 표정이 무표정하고 권위적이었다. 경찰, 군인, 공항의 출입국 직원들은 이의 제기라는 것을 거의 겪어보지 않은 듯했다. ‘나는 지시한다, 너는 따른다’는 행태에 길든 표정이었다. 알렉산드리아가 이베리아반도의 바르셀로나처럼 외부의 새로운 바람을 나라 안에 퍼뜨리고 기풍을 바꾸는 창구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이집트가 알렉산드리아를 지렛대 삼아 민주적인 개방사회와 경제 체제로 나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