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째에 접어든다. 전쟁으로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고, 대한민국 국민들도 예외가 아니다. 부쩍 오른 난방비 고지서는 단적인 사례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국제적 비판과 공분도 커지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의 물적, 인적 피해도 예상보다 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전쟁이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러시아는 무슨 생각인 것일까? 왜 이런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는 것일까?

우리의 눈에는 비합리적이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이 전쟁을 다르게 보는 것 같다. 바둑에서는 다음 수가 보이지 않으면 상대의 입장에서 판을 살피라고 한다. 우리 경제와 국제 관계에 미칠 영향을 냉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선악과 바람을 넘어서 당사자의 시각에서도 사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종수 전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장은 러시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가다. 일생의 오랜 시간을 러시아에서 보냈다. 박종수 필자가, 러시아의 시각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복기하고, 앞으로의 상황을 전망해 본다. [편집자주]

✔ 1년째 치열하게 싸우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피해 규모는 천문학적✔ 베트남, 중동, 이라크 전쟁과 시리아, 예멘내전에 이은 미·러간 대리전✔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푸틴은 서방의 경제제재가 실패했다고 공언✔ 최대의 수혜국은 미국과 북한, 최대의 피해국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자주 국방력 강화하고 남북한 군비통제 동시 추진의 이중 접근법 필요

사진:셔터스톡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째 지속되고 있다. 러시아가 지난해 2월 24일 ‘특수 군사작전’을 선포하고 수도 키이우를 압박할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며칠이나 몇 주 안에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젤렌스키 정권이 물러나든지 아니면, 작전에 실패한 푸틴 정권이 서방에 굴복하든지.

오판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동남부 4개 주를 점령한 상태에서 우크라이나군과 치열하게 교전하고 있다. 종전은커녕 휴전조차 기약이 없다. (러시아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군사력을 동원한 소모전이지만 언제 끝날지 예단할 수 없다. 양측의 인적·물적 피해는 천문학적으로 늘고, 심지어 핵전쟁의 공포마저 감돈다.

이 전쟁은 예방할 수 없는 불가피한 군사적 충돌이었는가? 장기화되는 배경은 무엇인가? 한반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러시아의 입장에서 이 전쟁을 살펴보자.

전쟁의 이유 1 : 원인(遠因)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는 어떤 나라인가? 민족이 같고 역사가 같고 종교가 같고, 언어가 유사하다. 통상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같은 슬라브 민족국가로 분류된다. 이 세 나라의 원형은 882년에 형성된 ‘키예프 루스’다. 오늘날 러시아 유럽 지역의 북동지방이다.

키예프 루스는 동로마제국의 문화를 수용해 강력한 유럽 국가로 부상했으나 2세기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14세기 말 몽골로부터 독립하면서 러시아 민족의 중심국가가 되었고, 18세기 초에 표트르대제가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사회주의 혁명 후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자카프카스 공화국이 연합해 소비에트연방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1991년 12월, 이 공화국들이 ‘독립국가연합(CIS)’을 창설하면서 소련연방이 해체됐다.

러시아 정교회는 988년 키예프 루스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제국의 동방정교회를 수용해 정착시킨 국교다. 그렇지만 그리스·라틴 교회와는 다른 독자적인 경로로 발전하면서 러시아 민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구심점 됐다. 그 후 모스크바 공국이 중앙 집권을 이루는 과정에서 정교회의 정통성이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오늘날 음악, 미술, 건축 등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예술의 모든 영역은 정교회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다.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벌어진 ‘그레이트 게임’에서 잘 나타나듯이, 지정학적 관점에서 유라시아의 중앙을 차지해야 전 세계의 패권국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이 유럽과 러시아에게 존재한다. 우크라이나가 바로 그 중심국가다. 인구·영토·자원 3요소를 갖췄고, 유럽과 아시아, 발틱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교차로다. 러시아에게는 전략·안보·경제·역사·종교의 핵심지역이다. 따라서 소련 해체 후에도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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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푸틴 대통령은 소련연방의 해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으로 인식했다. 그는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는 자는 심장이 없고, 소련 시절로 회귀를 원하는 자는 머리가 없다”고 말할 정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제국적 부활’을 견제할 급소다.

전쟁의 이유 2 : 근인(近因)

첫째는, NATO의 동진정책이다. 1990년 2월 미·소 회담에서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에게 ‘동쪽으로 1인치도 이동하지 않겠다’고 세번이나 공언했다. 그러나 1999년 체코·헝가리·폴란드로 시작해 2020년 북마케도니아까지, NATO 회원국은 30개국으로 늘어났다. 이제 남은 것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뿐이었다.

그런데 2008년 4월 부쿠레슈티에서 채택된 NATO 정상회담 선언문(23조)에서 이 두 나라의 가입을 환영한다고 명시했다. 2013년 11월, 우크라이나에서는 유로마이단 쿠데타로 친러 정권이 무너지고 친서방 성향의 과도정부가 구성됐다. 위기의식을 느낀 러시아는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전격 병합했고, 4월부터는 돈바스지역의 내전이 시작됐다.

친서방의 젤렌스키 정권은 2019년 NATO 가입을 헌법에 명문화하고, 그해 9월 미국과 ‘전략적 파트너십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 바이든 정부는 NATO의 응집력을 강화해 러시아와 같은 패권국가 출현을 저지해야 한다는 대외정책을 천명했다. 러시아는 이를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우크라이나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설정했다.

둘째, 러시아의 공세적 방어전략이다. 이는 중심에서 변방까지의 거리를 최대한 넓혀 완충지대를 확보함으로써 안보 불안을 해소하는 대외전략이다. 이 전략은 1990년대에 신생 러시아가 서방으로부터 현상 변경을 강요당한 수모를 겪었던 ‘수세적 방어전략’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2000년 5월, 푸틴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위대한 러시아 재건’을 천명했다. 러시아가 설정한 핵심 국익의 침해를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인 수단을 동원해 대응하겠다는 안보전략이다. 러시아는 NATO의 동진정책이 이러한 대외정책에 반하고 더 나아가 러시아 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영토를 점령하는 것 보다는 NATO의 확대를 저지하고 옛 소련국가들의 이탈을 방지하는 것을 국가안보의 우선과제로 삼았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참을만큼 참았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는 지도자들의 개인적 성향이다. 국제정치학자 라스웰이 지적한 대로 ‘사적 동기의 공적 전위’다. 바이든은 부통령 당시 푸틴에 대해 '눈을 봤을 때 영혼을 볼 수 없다’고 인신공격했다. 또 푸틴이 정보기관을 동원해 2020년 미 대선에 개입했다면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2021년 1월 바이든은 대통령에 취임하자, 우크라이나에 첨단무기를 제공하면서 NATO 가입을 부추겼다.

푸틴도 집권 초기부터 미국의 단일패권을 강도 높게 비판해 왔다. 2008년 국제 금융위기 때 ‘미국은 세계 경제를 좀먹는 바퀴벌레와 같은 존재’라고 맹비난했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후 서방의 대러 제재로 루블화가 반토막나는 경제 악화에도 푸틴에 대한 국내 지지율은 85%를 유지했다. 이른바 러시아 사회 특유의 ‘푸틴 패러독스’요, ‘강대국의 자존심을 위해 그까짓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다’는 국민 정서의 반영이다. 러시아 국민은 부국강병을 원하지만, 굳이 택일하라면 부국보다 강병이다.

전쟁의 발발

돈바스 내전이 8년 이상 지속되면서 1만7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친러 주민들은 러시아로의 편입을 희망했지만 갈등은 갈수록 증폭됐다. 2021년 미국이 ‘NATO의 문호 개방’과 ‘안보 협력 및 군사 지원’을 천명하고, 두 차례나 우크라이나-NATO간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러시아는 임계점을 넘었다고 강력히 항의하고, 그해 12월 미국과 NATO에 안전보장안을 각각 발송했다. 그러나 워싱턴이 크렘린의 요구를 묵살함으로써 미·러간 팽팽한 기싸움이 시작됐다. 러시아는 지난해 1월 중순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서 3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바이든은 ‘2월 16일에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공습한다’는 첩보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전방위적인 국제 여론전에 나섰다. 미·러간 ‘엄포 놓기’와 ‘오기 대결’은 점입가경이었다.

마침내 러시아가 2월 24일 이른바 ‘특수 군사작전’을 선포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우는 촘스키 MIT 교수는 ‘러시아가 도발당했다’고 주장했다. 옛 소련이 1979년 미국이 파놓은 아프간 함정에 빠졌던 것처럼, 이번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는 ‘푸틴이 유럽을 황금접시에 담아 미국에 바쳤다. 브렉시트로 이완된 EU를 결속시키고 유명무실한 NATO를 강화시켰다. 푸틴의 침략은 범죄행위이며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그의 결정은 미국이 가장 원하는 일’이라고 비꼬았다.

존 미어 샤이머 시카코대 교수도 그해 3월 영국 <이코노미스트> 기고문에서 "푸틴의 전쟁 책임론과 전쟁의 원인은 별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원인은 미국이다. 막대기로 곰(러시아)의 눈을 찔렀다. 그 곰은 우크라이나를 발기발기 찢어버릴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함정(Bear trap)을 부수고 뛰쳐나와 동남부 4개 주를 병합하고 매일같이 우크라이나 전역에 미사일을 날렸다.

러시아가 보는 전황과 핵무기 로드맵

개전 후, 전 세계 141개국이 UN의 대러 비난성명에 서명했다. 48개 국이 대러 경제제재에 동참했고, 31개국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동의했다. 미국은 지난해 말까지 9차에 걸쳐 지옥 같은 대러 제재를 가했다. 그중에는 4차례의 디폴트선언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반토막이 난 루블화 환율이 한 달 만에 반등해 크림 병합 이전의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국내외 전문가들의 전망과는 달리 전년 대비 마이너스(-) 2.5%로 비교적 양호했다. 중앙은행 기준금리는 개전 이전보다 낮고, 실업률도 1992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외환보유고는 지난해 8월 기준 5806억 달러로 여전히 세계 5위다.

러시아는 국제금융결제시스템(SWIFT)에서 퇴출당했으나, 대체결제시스템(MIR)을 구축해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튀르키예, 아랍, 베트남, 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통용하고 있다. 러·중간 교역액은 지난해 1~10월에 1500억 달러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푸틴은 서방의 대러 경제제재가 이미 실패했다고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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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되는 것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무기 지원이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무기 없이 사실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 마치 산소호흡기와 같아서 제거하는 순간에 죽는다. 그렇다고 서방이 모든 무기를 무제한 지원할 수도 없다. 공격무기 지원으로 러시아가 수세에 몰리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여하튼 세계대전은 막아야 한다는 것에 암묵적 동의가 존재한다.

최근 서방이 미국의 에이브럼스와 독일의 레오파트2 등 전차 80대 지원을 결정함에 따라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푸틴은 핵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단계별 로드맵을 설정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1단계로 흑해나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포세이돈’과 같은 가공할 핵실험을 단행하고, 2단계로 1~5kt의 저위력 핵폭탄을 교전지역 인근에 투발하며, 3단계로 10~50kt의 전술핵을 사용하는 수순이다.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15%를 병합한 상태에서 지난해 후반부터 미사일과 드론을 이용해 기간시설을 집중 포격하고 있다. 새해 벽두에는 수도 키이우 등 주요 도시를 향해 드론 80여 대를 날렸다. 최근 러시아군이 도네츠크 주의 전략 요충지인 솔레다르를 장악했다. 개전 1년째로 접어들면서 양측의 피해 규모는 천문학적으로 늘고 있다.

지난해 11월 말 우르줄라 폰테어라이엔 EU집행위원장은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재산 피해가 6000억 유로 이상이고, 인명 손실은 10만여 명을 넘어섰다고 공개해 논란이 됐다. 물론 러시아 측 피해 규모도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위해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가 병합한 영토를 포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러시아가 보는 전쟁의 성격

첫째, 이 전쟁은 미·러간 대리전이다. 대리전은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차악의 선택일 수 있다.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이라크전쟁, 시리아내전, 예멘내전 등이 대표적이다. 촘스키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우크라이나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역대 최악의 대리전으로 아프간 전쟁을 지목했다. 미국이 9.11 사태의 배상을 요구하면서 뉴욕은행을 동결시키자, 아프간 시장에 음식이 있어도 사먹을 돈이 없어졌고, 그 결과 아이들이 기아선상에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프간 전쟁은 영국도, 소련도, 미국도 패퇴한 제국의 무덤으로 변했다.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핵심국가다. 반면 미국에게는 러시아의 부상을 견제할 수 있는 급소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고 있다.

둘째, 전방위적 하이브리드전이다. 이번 전쟁의 ‘최대 희생자'는 '진실’이다. 이른바 정보전이라는 미명하에 가짜뉴스가 전 세계 매스컴을 도배한다. 오웰의 디스토피아가 횡행할 뿐이다. 이미 설정된 이분법적 선악구도 하에서 침략자 푸틴은 악마요, 침략당한 젤렌스키는 영웅이다. 푸틴은 치매환자요, 파킨슨병 환자요, 암투병 환자로서 통치 능력을 상실했다고 비난받는다. 그렇다면 전쟁은 이미 끝났어야 한다. 그래서 ‘도덕적 분노’를 집요하게 자극하는 서방언론의 프로파간다는 자승자박의 모순에 빠지고 있다. 반전주의자들은 “미국은 러시아를 처벌하려고만 하지 말고, 단 한 사람의 우크라이나인이라도 구하라!”고 외치고 있다.

셋째, 약육강식의 경제전쟁이다. 미국 중심의 자유자본주의와 중·러 중심의 국가자본주의간 대결이다. 아울러 서방권의 금융자본주의와 사회주의권의 산업자본주의간 진검승부다. 중국과 러시아는 탈냉전 후 미국의 달러패권을 와해시키는데 진력해 왔다. 러시아는 지난 20여 년간 외환보유고를 달러 대신에 금이나 여타 결제수단으로 대체해 왔다. 달러 비중이 16% 수준으로 낮아졌다. 게다가 러시아는 자원무기화를 통해 국제 에너지시장을 쥐락펴락한다. 아홉 차례의 서방 제재에 맞서 외환을 방어한 비결이다.

미국 주도의 G-7이 연대하면 러시아 주도의 브릭스(BRICs)도 결속한다. 러시아가 병합한 우크라이나 영토 15%의 자원 매장량만도 12조4000억 달러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도 이번 전쟁의 최대 수혜국이다. 비단 방위산업 뿐 아니라 원유, 가스 등 자원 원자재 시장에서 경제 이익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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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러시아는 이미 병합한 4개 공화국을 순순히 양보할 리 없다. 우크라이나도 패전국의 오명 속에 전쟁을 멈출 생각이 없다. 서방은 밑빠진 독에 물 붓듯이 전비를 쏟아붓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전세를 바꿀 수 있는 첨단무기 지원은 자제하고 있다.

지리한 소모전에서 희생되는 것은 민간인과 일선 병사들이다. 개전 6개월에 걸친 열전 이후 지리한 고지전을 2년 가까이 지속한 한국전쟁과 동일한 패턴을 답습할 수 있다. 스탈린이 1953년 3월 사망하지 않았다면 휴전은 더 늦춰질 수도 있었다. 필자는 ‘전쟁이 언제 끝날 것 같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바이든, 푸틴, 젤렌스키 중 한 사람이 죽어야 휴전할 것"이라고 답변한다.

이번 전쟁에서 최대의 수혜국은 미국과 북한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적극적인 군사 개입 의지와 능력이 축소된 대외 영향력의 한계 또한 보여주었다. 반사이익을 얻는 나라는 인도, 튀르키예, 중국이다. 반대로 최대의 피해국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다. 반사불이익을 받는 나라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국이다.

그러나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협회장과 이안 브레머 유라시아그룹 회장의 주장처럼, 장기적 관점에서는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가 끝나고 G-제로 시대의 무극체제로 접어들 것이다. G-제로 시대에서 국제 질서의 불확실성이 증폭되지만, 지역 차원에서는 주요 국가들의 안보 자율성이 증대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외관상으로 자유주의 블록과 권위주의 블럭간 충돌이지만, 내면적으로는 NATO·중국·러시아의 전략적 삼각관계, 외교적 중재를 자임하는 인도·튀르키예의 자율적 행동, 그리고 아프리카·중남미 국가들의 무관심 등이 상호 중첩된 복합적인 싸움이다. 중·러간 전략적 제휴도 권위주의라는 국가체제의 공통가치보다는 상호 이익에 따른 편의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튀르키예와 같은 지역적 중추국가(pivotal state)의 국제적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한반도와 우크라이나 전쟁

남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다. 한국은 개전 초부터 우크라이나편에, 북한은 러시아편에 섰다. 한국은 유엔의 대러 비난성명·경제제재 및 우크라이나 무기지원·복구작업에 참여함으로써 러시아로부터 비우호국으로 지정됐다. 북한은 2021년 말부터 러시아와 찰떡공조를 유지하면서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를 지지했다. 돈바스공화국을 승인했고 전후 복구 작업에도 참여한다.

또한 남북한은 양측에 각각 무기를 지원하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발다이클럽 연설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면 양국 관계는 파탄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11월에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북한은 민간 용병회사인 와그너 그룹에 로켓과 미사일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차관은 올해 초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서방의 제재로 인한 양국 협력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실용적이고 균형 잡힌 외교노선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을 지켜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은 러시아를 확고하게 지지해 준 국가"라면서 "두 나라는 시급한 국제 현안에 대해 유사한 접근 방식을 택해왔고 높은 수준의 정치적 대화와 상호 이해를 보여줬다"고 부연했다. 러시아에 진출한 서방 기업들이 대부분 철수했지만 우리 기업들은 아직 버티고 있다. 특히 한·러 양국 협력의 상징 사업인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자동차 공장은 부분적이나마 재가동했다.

이번 전쟁에서 주목되는 것은 북한이 누리는 전쟁 특수다.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부각했다. 1년 내내 미사일을 폭죽놀이 하듯 쏘고, 핵사용 5개 조건을 법제화했다. 또한 서방의 대북 제재를 회피하는 호기로 삼았다. 전후 복구를 명분 삼아 대규모 노동력을 파견하고 러시아에 미사일과 탄약을 판매하는 외화벌이에 나섰다. 돈바스 공화국의 중공업 설비 부품과 코크스를 저렴하게 수입하고 북한산 마그네사이트를 수출하는 호혜무역을 늘리고 있다. 냉전 당시에도 없었던 ‘좌중우러’라는 사회주의의 두 맹방을 옆에 끼고 전쟁의 반사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협회장은 최근 한반도가 2차대전 이래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핵카드를 만지작거리고 북한은 전술핵 운용훈련 등 전례 없는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미국 없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듯이, 러시아도 북한의 지원이 천군만마와 같다. '서부전선은 러시아, 동부전선은 북한'이 맡는 환상적인 안보 역할 분담이다. 한·미·일이 연대하면 북·중·러는 더욱 밀착할 것이다. 김여정이 지난 1월 말 “미국의 우크라이나 탱크 지원 결정은 반인륜적 범죄 행위”라고 강도 높게 비난한 것도 이를 반증한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나?

최근 한반도 정세는 2010년 11월 말 북한의 연평도 포격 당시보다 더 엄중하다. 특히 북·중·러 대 한·미·일간 대결로 확대되면서 위기 상황이 고조되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정교한 외교력이 요구되는 과도기적 상황이다. 한국이 분단국·반도국·동맹국·통상국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다. 한국도 우크라이나처럼 미·중과 미·러 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중간국이다. 서방과 러시아라는 양날의 칼을 가진 지정학 국가는 강대국 의존 지향의 안보와 특정국가를 배제하는 편승외교를 추진하면 주변국으로부터 정치·경제·안보 등의 강한 반발을 야기한다. 한국이 처한 외교·안보적 상황을 ‘제로섬의 시각’으로 보기 보다는 ‘포지티브섬'(Positive-Sum)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명실상부한 자강외교다.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한 미·러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의 자리는 없다. 스스로 힘을 키우지 않으면 주변 강대국들의 위세에 휘둘리는 것이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이다. 자주 국방력을 강화하고 남북한 군비통제를 동시에 추진하는 이중 접근법을 구사해야 한다. 동맹의 의존도를 줄이는 전시작전권 환수는 빠를수록 좋다. G-제로 시대로 진입하면서 적극적 균형 외교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가 강대국 정치의 대결장이 되는 것을 상시 경계해야 한다.

셋째, 국익 우선의 실용외교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정권은 미·러간 전략적 이해관계가 직접 충돌하고 민감하게 교차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대외정치적 입지를 좁혔다. 동맹 관계인 미국, 전략적 동반관계인 중국과 러시아는 21세기 한국의 생존과 국가적 번영을 좌우하는 글로벌 강대국이다. 신냉전의 안보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바탕으로 북방세력과의 외교 협력을 모색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동북아 소다자주의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하얼빈’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꿈꾸던 동양평화는 동양의 모든 나라 백성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양성이 아니었을까? ‘카레야, 우라!’(한국 만세!)가 114년의 세월을 타고 메아리친다.


글쓴이 박종수는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를 거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러시아 공사를 지냈고,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을 총괄했다. 공직 생활 이외에도 서강대 겸임교수를 지내는 등 외교 일선과 학계를 넘나들며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대표적인 러시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