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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칼럼] 소선거구제 버려야 지방소멸 막는다

By | 2023년 1월 13일 | 미래, 미분류, 정책, 정치

선거제도에 정답은 없다. 특정한 시공간에서 유용한 제도가 있고, 다른 제도와의 상관성이 중요하며, 무엇보다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과 의지를 갖고 있는지가 결정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치권이 선거제도 개혁을 대하는 태도는 장단점 정도가 아니라 유불리를 따지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관후 필자는 특정 선거제도의 장단점을 따지기 전에, 왜 우리 사회가 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는지부터 성찰해 보자고 말한다. 특히 ‘지방소멸’이라는, 그동안 정치권과 학계에서 비중 있게 거론되지 않았던 이슈를 제기한다. 1인 1표라는 인구비례적 표의 등가성이 왜 기만적인지도 설명한다. 현재의 소선거구제가 왜 수명을 다했는지 함께 생각해보자. [편집자주]

✔ 20년째 별다른 변화 없이 지지부진한 선거제도 개혁
✔ 수도권 집중, 지방소멸 때문에 소선거구제 이제 버려야
✔ 수도권 의석수가 늘어나면서 수도권 집중도 더 높아져
✔ 표의 등가성을 산술적으로만 계산하려 들면 안 돼
✔ 대선거구제는 지역간 협력성이 커진다는 장점 있어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제도 개혁’을 한국 정치의 최대 과제로 제시한 지 약 20년이 흘렀다. 그러나 사법절차를 통해 비례대표에 대한 정당투표가 시행된 것을 빼면 괄목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선거제도 개혁의 딜레마

정치학자들과 시민사회가 ‘비례대표제 포럼’을 만들어서 10년 넘게 활동했지만, 이들이 주장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난 선거법 개정 과정에서 누더기가 되었다. 그나마 합의 처리도 되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위성정당’이라는 부산물을 만나 좌초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현재의 ‘준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2024년 총선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상식이 된 딜레마가 여기 존재한다. 연동형 비례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이 1:1 정도가 되어야 작동한다. 그러려면, 지역구를 50개 이상 줄이면서 국회의원 정수도 100명 가까이 늘려야 한다. 불가능하다. 지역구를 1~2개 줄이기도 힘들 뿐더러,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것에 찬성하는 국민은 10%도 안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제기한 것이니 반대한다?

새해 초에 윤석열 대통령이 판을 흔들었다. 중대선거구제를 제시한 대통령의 생각은 자명하다. ‘지난해 야당이 다수당인 국회 때문에 ‘시행령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입법으로 해야 할 일들이 하나도 진행이 안 되었다. 그렇다고 내년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하면 좋은가? 아니다. 곧바로 레임덕이 올 거다. 거대 양당이 있는 한, 대통령은 권력을 작동시키기가 어렵다.’

그런 대통령에게는 중대선거구제가 돌파구처럼 보인다. 한 선거구에서 2~3인을 뽑으면 전체적으로 국회가 균형을 이루면서 과반을 넘는 다수당이 나오기 어렵다. 두 정당은 극단적으로 대치하면서 싸울 것이고, 국회가 어느 쪽으로든 나아가지 못하면, 결국 대통령에게 힘이 쏠릴 것이다. 무엇보다 정치 양극화와 적대적 양당제를 해소한다는 명분을 갖는다.

학계와 정치권에서는 회의적인 분위기다. 중대선거구제에 대해서는 지난 수십 년간 학계에 누적된 고찰이 있다. 2~3인 선거구로는 현재의 지역 구도가 해체되지도 않고, 부작용만 가중시킨다는 경험적 분석도 존재한다.

국민의힘에서는 양쪽으로 손해라는 입장이다. 먼저 수도권에서는 지방선거처럼 대역전을 해야 하는데 중대선거구제가 되면 결국 나눠먹기가 된다. 지방도 별로다. TK에서는 일부 의석이 민주당에게 가고 PK에서는 6:4로 나뉠 것인데, 반면에 호남에서는 3위 안에 당선이 어려우니 손해라는 것이다.

다수당이고 수도권에서 현역이 많은 민주당도 적극적이지 않다.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내년 예상 선거 결과가 아니라) 지난번 선거 결과로 시뮬레이션을 해 봤더니 손해가 크더라는 점. 대통령이 제기했으니 찬성할 수 없다는 점. 윤 대통령이 잘못 할 것이니까 가만히 있으면 야당이 당선될 것이라는 믿음. 마지막으로, 지역구를 다녀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당선될 것 같다는 확신. 이것이 민주당이 지난해 정치개혁을 먼저 주장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유다.

그래서 여야 모두 현재의 소선거구제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비례대표 의석 배분만 위성정당을 방지하는 식으로 조금 변형하자는 정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대선거구제나 권역별 비례제의 대폭 확대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이런 행태를 비판하거나 특정한 선거제도를 주장하려는 데 있지 않다. 대신 대통령의 속셈이 문제든, 이상적인 제도의 도입 어렵든, 현재 상황에서 소선거구제를 계속하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정치 양극화가 아니다. ‘수도권 집중’과 ‘지역소멸’이다.

소선거구에서 표의 등가성이 무너지다

소선거구제는 어떤 제도일까? 선거로만 보면 ‘한 지역구에서 한 명을 뽑는 제도’다. 그래서 소선거구제는 모든 각 ‘지역’의 이익을 더하면 곧 ‘국가’ 전체의 이익이 된다는 산술적 관념의 제도다. 각 선거구에서 뽑힌 대표, 곧 국회의원들이 모자이크처럼 다 모이면, 주권이 빠짐없이 대표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소선거구제는 ‘지역 대표성을 가진 대표들이 모여 입법자가 됨으로써 주권을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지역적 대표성을 아무렇게나 정하면 안 된다. 잘못하면 평등선거의 헌법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평등’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보통 우리는 ‘1인 1표’를 떠 올린다. ‘인구 비례성’이다.

그런데 실제로 적용할 때는 인구의 급속한 변동도 있고, 도시와 시골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1:1 적용이 일률적으로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최근 우리 헌법 판결에서는 그 차이가 1:3을 넘지 못하게 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소선거구에서 표의 등가성을 인구비례로 잘 나누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이건 형식적으로만 그렇다. 특정 정당이 싹쓸이를 하는 지역들에서 대부분 국민의 표는 의미가 없다. 그 지역의 국민은 거의 평생 사표만 행사하기 때문에, 투표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낙선자를 찍으면 사표가 되더라도, 당선자를 찍은 표는 유효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럴까?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에서 당선자를 찍는 유권자들은 ‘자동판매기’ 역할을 할 뿐이다. 냉정하게 말해 표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없다. 형식적으로는 인구 비례로 표의 등가성이 존재하지만, 이 형식적 표의 등가성은 소선거구 앞에서 실질적으로 완전히 무너진다.

법률에 따른 소선거구가 헌법적 기본권을 영구적으로 제한한다면

결국 법률에 따른 선거구의 획정이, 실제로는 다수 국민의 헌법적 기본권을 박탈한 결과를 낳고 있고, 너무 많은 국민에게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가 더 오래, 가령 한 인간의 전 생애에 해당할 정도로 지속된다면 반드시 심각한 헌법소원의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전에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푸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선거구의 크기만 키우면 그 사표(死票)들은 바로 ‘생표(生票)’가 된다. 선거구의 크기를 키우는 방식은 중선거구, 대선거구, 권역별 비례대표제, 전국 비례대표제 등으로 많다.

물론 소선거구제는 ‘사표’를 충분히 감안하고서도 대표성의 책임성과 명확성, 양당 책임정치 같은 장점을 살리기 위해 선택된 제도다. 즉, 원리상 사표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현행 소선거구제가 국가 전체의 1/3 정도에 해당하는 국민을 거의 영속적으로 입법자를 뽑는 선거에서 실질적으로 배제하려고 의도적으로 우리가 선택한 제도는 아니지 않는가?

20년 사이에 24석이 늘어난 수도권 의석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선거제도는 단순히 정치적 대표를 뽑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뽑힌 대표가 ‘무엇을 왜 하느냐’를 좌우한다. 그래서 잘못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

2021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인구의 50.3%가 수도권에 산다. 이런 말을 들으면 ‘다른 나라는 안 그런가?’ 싶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수도권 집중이 심각해서 여러 대책을 세우고 있다. 영국은 12.5%, 프랑스는 18%, 일본은 무려 28%의 인구가 수도권에 살고 있어서, 각 나라는 비상한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국회의원 선거제도랑 관계가 있나? 관계가 있다. 대통령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던 노무현 정부 이후, 국가의 균형발전 의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어느 정당이 집권했느냐, 국회 다수당이 어디냐와 큰 관계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국회와 중앙정부, 지방정부 등에서 일해 본 경험으로 볼 때, 필자는 ‘수도권 의원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16대 국회에서 수도권 국회의원은 모두 97명(서울 45, 경기 41, 인천 11)이었다. 지금 21대 국회에서 수도권 의원은 모두 121명(서울 49, 경기 59, 인천 13)이다. 20년 사이에 무려 24명이 늘었다.

어디서 빠져나갔을까? 인구소멸 지역이다. 그래서 힘의 균형추는 단순히 ‘+24’가 아니라 ‘±48’이다. 20년 사이에 ‘지방 정당’에서 ‘수도권 정당’으로의 영입이 ‘±48’이 된 셈이다.

개별 의원들의 합리적 선택조차 수도권 집중을 강화한다

필자는 지금 이 의원들이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을 일부러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별 국회의원들은 모두 지역구의 발전을 위해서 ‘합리적 선택’을 할 뿐이다. 의원들 입장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자기 지역구에 가져 오려는 노력을 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많은 자원이 수도권에 뿌려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여야에 상관 없이 힘을 잘 모은다. GTX라든지, 수도권 규제 완화라든지, 인천공항 확장이라든지, 신도시 재개발이라든지 하는 이슈에 있어서, 수도권 의원들은 여야 없이 함께 입법과 예산을 추진한다. 그 숫자는 이리저리 나눠진 지방 국회의원들의 수를 쉽게 뛰어 넘는다.

사실 지금 수도권은 국가적인 자원 전쟁에서 국회의원들의 도움 없이도 일방적으로 유리하다. 정부 예산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집중되는 것은 기업들의 투자와 양질의 노동력이다. 국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업들은 경기 남부권 이하로는 가지 않으려 하고, 청년들은 쉼 없이 수도권으로 올라간다.

균형발전 정책은 이런 엄청난 구심력을 조금이나마 구부려서 반대로 잡아당기려는 원심력을 작동시키려는 몸부림이다. 그래서 행정부는 관심이 없다. 공무원들에게는 ‘효율’과 ‘객관성’이 중요하다. 국가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 선이라고 믿고 있는데다, 나중에 감사 등으로부터 안전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될 곳’에 예산을 줘야 한다.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 입법부도 행정부의 행태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수도권 국회의원들은 지역구와 관련된 전철이나 신도시 같은 거대 수도권 프로젝트 예산을 쉽게 수십 조원씩 따오지만, 지방에서는 300억 원짜리 사업들조차 ‘예타’라는 통곡의 벽을 넘지 못한다. 특별히 지방에 배려하는 사업들이 아니라면, 경쟁적으로 공모되는 사업들에서 지방은 수도권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

종종 국회의 ‘균형발전특위’에 수도권 의원들이 포진해서,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경우도 있다. 그분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본인 지역구와 지방 사이의 경쟁이 벌어진 경우에, 이분들이 지역소멸을 막기 위해서 본인 지역구의 이익을 과감하게 포기하자고 할 것인지는 별개의 일이다.

잘못된 ‘표의 등가성’ 논쟁,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지속적인 지방의 인구 유출과 수도권 집중에 따라 지방소멸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개인 수준에서 표의 등가성 추구가 오히려 집단적 수준에서는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고.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지방은 정치적으로 분명하게 ‘소수 집단’화 되고 있다. 수도권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수의 폭정’을 휘두르는 주체가 되고, 지방은 영원한 ‘마이너리거’가 되는 것이다. 산술적 인구비례만을 기준으로 선거구를 계속 획정할 경우, 농어촌 지역을 포함한 인구 저밀도 지역의 정치적 소외와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이래서 나온다.

그동안 우리는 표의 등가성을 개인 단위로만 생각해왔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국민이 수도권보다 더 많은 표의 가치를 갖는다고 말한다. 이제는 정치학자들도 그런 하나마나한 산술적 논쟁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표의 등가성 논쟁을 ‘형식’에서 ‘실질’로 가져오면, 지방은 표의 가치가 아예 없거나 앞으로 영원한 소수자다. 소수자라서,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그 안에서 한 사람의 주장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갖는다는 식의 논변이 정말 합리적인가?

사진:셔터스톡

선거구의 크기를 키우면 판이 달라진다

여기서 잠깐! 그럼 선거구제를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가?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수도권에 집중된 의석수를 억지로 줄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의석수를 조정할 순 없어도, 논의와 관점, 협력과 경쟁의 틀을 바꿀 수 있다. 선거구의 크기를 키우면 상황이 달라진다.

지금 같은 소선거구제에서 개별 국회의원들의 이해관계는 ‘자기 동네’를 넘지 못한다. 수도권과 달리 연결성이 약한 지방에서는 이 차이가 매우 크게 나타난다. 쉽게 말해 주변 지역의 다른 입법자는 협력 대상이라기보다 경쟁자다.

그래서 지역의 국회의원들에게는 대규모 지역 전략(메가시티 등)이나 중소형 지역 전락(시군 통합, 시군 연계 사업)보다는, 희소한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소지역주의(지역구주의)가 합리적 선택이 된다. 권역별로 나눠주는 중앙정부의 공모사업 경쟁에서 이런 모습이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앞서 말했듯이, 지방에서는 정부 사업 중에서 지역 구분이 없는 공모사업은 애초에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권역별로 1개씩 지정해준다는 식의 사업이 나오면, 광역 이하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배불리 먹은 중앙이 배고픈 지방들 사이에 빵 쪼가리를 던지는 볼썽 사나운 상황이지만, 급한 쪽에서는 별수 없다. 함께 모여서 뭔가 더 큰 일을 도모하기에는 가성비가 안 나온다.

기피 시설은 또 어떤가? 소각장이나 화장장, 폐수처리장 같은 시설 등을 놓고 빚어지는 갈등과 협력 관계의 경계는 지역구 단위를 벗어나기 어렵다. 입법자들은 대체로 이 문제를 그저 방치한다. 골치가 아픈 건 지자체장들과 국민뿐이다.

권역별 비례’, ‘대선거구’가 되면 지방의 전략이 달라진다

국회의원 선출 단위가 커지면 어떻게 될까? 8명을 뽑는 광주, 10명을 뽑는 전남, 18명을 뽑는 부산, 16석을 뽑는 경남이 권역별로 하나의 선거구가 되거나, 많아야 2~3개의 대선거구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 지역의 협력성이 커진다. 관점과 논의의 단위가 커지고, 권역 전체 수준의 사업과 지역 전체의 발전이 화두가 된다. 소규모 자원 경쟁보다는 중규모 이상의 지역 전략이 채택될 수 있고, 대규모의 협력사업도 용이해진다.

무엇보다 한 정당이 지역을 독식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정당 간의 경쟁, 심지어 같은 정당 내부에서도 정치적 경쟁이 활발해진다. 지역이야 망하거나 말거나 내 지역구에서 공천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정치는 이런 선거구 크기에서는 어리석은 전략이다.

왜 입법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새학기가 시작되면 ‘벚꽃 엔딩’이 또 시작된다. 꽃 이야기가 아니라 지방대학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다. 산업이 발전할수록 ‘인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지방대학의 소멸은 그 자체로 지방의 경쟁력과 미래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리고 올해도 많은 지방대학의 학과들이 지원자를 전혀 받지 못했다.

학령인구 감소 시대에 경쟁력 없는 대학의 퇴출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따져보자. 그게 그 대학의 잘못인가, 아니면 국가 정책의 잘못인가. 물론 그 대학의 잘못이 있다. 국가가 수도권 중심의 발전을 내버려 둘 때, 균형발전 같은 말을 믿지 말고, 얼른 서울로 왔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방대학은 뭘 잘못해서 망하는 게 아니라 그저 거기 있어서 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지방대학’을 ‘지방’으로 바꿔도 맥락상 아무 문제가 없다.

지방이 이렇게 무너지면 수도권은 좋을까? 지금도 수도권은 청년 정책에 엄청난 돈을 쓰고 있지만,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해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수도권으로 몰려들어 온다. 당장은 과열된 부동산이 잠깐 잠잠해 보여도, 구조적으로 인구집중 요인이 계속 발생하면 결국 서울의 집값은 떨어지지 않고, 수도권은 무한 확장을 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그러면 나라는 지속가능할 것인가?

문제는 ‘소선거구’에서 ‘시장, 군수, 구청장, 시의원, 도의원’과 경쟁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이 이런 의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일들은 괜찮은가? 당장 우리 조선업이 처한 현실을 보자, 수주 물량이 계속 들어오는 호황 속에서도, 기업들의 단기적 인력 운용과 이중적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로 이 물량을 반납해야 할 처지다. 화물운송 문제는 어떤가? 여야가 모두 미봉책으로 일을 미뤄놓은 사이, IMF 시기 진입한 개인 화물기사들의 후속 세대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조선업의 미래는 그 지역구 의원의 문제고, 졸면서 운전하는 화물차의 문제는 누구의 문제도 아니다. 물류산업이 붕괴하는 것도 지역구 국회의원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런 일들에도 아무 관심이 없는 국회가 연금개혁이나 기후 위기 대응에 책임 있게 나설 리가 만무하다.

연금은 곧 국가를 세대별 전쟁의 상황으로 몰고 갈 것이고, 기후 위기에 대한 국제 표준을 따라가려는 경쟁력 있는 기업들은 한국을 떠날 예정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입법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지역구를 잘 지키면 된다!’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 남은 소선거구제

원래 이상적인 소선거구제는 ‘높은 지역 대표성 + 강하고 안정적인 양당제 + 높은 정책 책임성과 지속성’을 장점으로 한다. 사표가 많다는 단점을 ‘공개적 정책 경쟁을 하는 안정적인 양당제’의 책임정치로 극복해나가는 것이다. 반면, 정책보다 정쟁과 이미지, 반사이익에 기대는 양당제가 지배적이고, 대통령에 대한 지지나 반대에 따른 ‘바람’이 좌우하는 정치 현실 아래선 소선거구제의 이점이 사라지고 단점만 남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훌륭한 정치 지도자들이 정당 정치를 제대로 돌려놓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선거제도의 변화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그런 기대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중대선거구제는 그 제도 자체의 호불호를 묻기 어렵다. 2인을 뽑느냐, 3인을 뽑느냐, 5인 이상을 뽑느냐에 따라 완전히 결과가 달라진다. 지금 우리 국민이 생각하는 중대선거구제는 대체로 2인 선출 방식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제도는 당연히 적대적 상호의존의 양당정치나 지역주의를 완화하는 데 별 소용이 없다.

다만 중대선거구제 자체는 선거구의 크기에 따라 변용이 가능하다. 우리의 대선거구는 실제로는 권역별 비례제와 큰 차이가 없고, 인구 500만 명 이하 국가에서 전체 의원을 비례대표로 뽑는 제도와도 큰 차이가 없다. 결국 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 유사한 제도가 될 수도 있다. 경마식, 인기투표식 여론조사보다는 전문가들과의 면밀한 논의가 더 필요한 이유다.

모든 제도는 다 장단점이 있어서, 제도를 함부로 바꾸기보다는 기존에 오랫동안 해왔던 제도 안에서 개혁을 이루는 것이 가장 좋다. 같은 제도라도 의도하지 않은 변수나 행위자의 선택에 따라서 다른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선거제도는 그 자체로 작동하기보다는 정부 형태나 의회제도와 함께 어울려 정치를 만들어 낸다.

지금 우리의 주권 대표체계는 이 시대에 맞는가?

그럼에도 지금 왜 선거제도 개편을 말하는지에 대해 정치권은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주권을 대표하는 체계가 작은 지역들의 이익을 모아서 큰 합으로서 국가 이익을 상정하는 방식으로 충분한지, 아니면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으로서의 국가 대개혁과 지역소멸에 입법자들이 잘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계가 필요한지 답을 내놓아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이관후는
<피렌체의 식탁>의 수석칼럼니스트다.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국회에서 6년간 일했다.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서강대, 경희대 등에서 강의했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경남연구원을 거쳐,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에 칼럼을 썼고, 펴낸 책으로 <한국민주주의, 100년의 혁명>, <시민의 조건, 민주주의를 읽는 시간>, 번역서로 <정치를 옹호함>이 있다. 정치와 정치학을 잇는 일에 주로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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