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프로젝트’. 1980년대 미국이 세계 시장에서 일본의 경쟁력에 밀리자 레이건 행정부가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제조업 부흥을 위해 마련한 산업정책을 말한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물론 초강대국 지위 유지였고, 미국은 그 목표를 이뤄냈다..최근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법’을 통해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의 재구축과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재편을 노리는 것에 대해 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필자는 중국의 도전을 떨쳐내려는 ‘제2의 소크라테스 프로젝트’라고 진단한다. 특히 이번에는 경제적 주도권 차원을 넘어 외교군사적 목적까지 내포하고 있어, 반도체법의 파장이 세계적으로 넓고 깊게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한다. 필자가 12월 초 미국에서 열린 포럼에서 만난 미 행정부와 싱크탱크 관계자들의 ‘따끈따끈한’ 분석과 전망을 들어보자. [편집자 주]

✔ 반도체 사업 부흥에 2481억 달러 투입할 미국의 반도체법✔ 반도체법은 미약해 보이지만 앞으로 반도체 부흥의 마중물 될 것✔ 한국과 대만의 업체는 대중 규제의 혜택과 손해를 동시에✔ 반도체 산업 지배력을 외교 안보 영역까지 확장하려는 미국✔ 2020년대 반도체 지정학, '동북아 vs 미국' 양대 축으로 개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12월 6일(현지시간)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가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짓고 있는 컴퓨터 칩 공장 건설 현장을 류더인(劉德音) TSMC 회장(오른쪽), 웨이저자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둘러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8월 9일, 이른바 '반도체법'이라 통칭되는 반도체 칩과 과학 법(CHIPS and Science Act·이하 반도체법)에 서명하였다. 반도체법은 하원에서 논의된 미국 경쟁법(America Competes Act)과 상원에서의 논의된 미국 혁신경쟁법(USICA) 중에서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기술 산업과 관련된 사항에 초점을 맞춰 재구축된 통합 법안으로 볼 수 있다. 이 법안은 미국의 첨단 제조업, 특히 반도체 산업 중흥을 위해 총 2481억 달러를 투자하기 위한 기금과 연방 예산 편성을 주요 골자로 하며 세 가지 부(Division)로 이루어져 있다.

반도체법, 반도체 산업에 2481억 달러 투자

이 중에서 특히 관심 있게 살펴봐야 하는 내용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다. 첫 번째 부(Division A)에서는 반도체 제조, 반도체 연구개발(R&D) 등에 대해 향후 5년 간 총 782억 달러 규모의 예산 투자가 언급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약 520억 달러 규모의 미국 반도체 기금(CHIPS for America Fund) 설립이며, 이는 미국 상무부가 주관한다. 520억 달러 중에서 약 390억 달러는 반도체 제조, 조립, 시험, 패키징 등 주로 반도체 공정 기술 개발 및 기반 조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특히 반도체 생산기술의 현대화에 예산이 투입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110억 달러는 반도체 R&D 보조금 펀드로 조성되는데, 이 예산을 이용하여 국가 반도체 기술센터(National Semiconductor Technology CenterNSTC)를 신규로 창설하고 동시에 기존의 미국립표준원(NIST)에서 수행하던 반도체 관련 R&D 센터에 대한 지원이 늘어난다. 또한 NSTC 혹은 NIST와 협력하기 위한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파트너십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도 배정되어 있는데, 주로 첨단 제조 기술과 패키징 프로그램에 대한 기술 개발 보조금 격이다.

두 번째 부(Division B)는 연구 및 혁신 지원 법안(Research and Innovation Act)을 주로 다룬다. 향후 5년 간 총 1669억 달러 규모의 예산과 기금을 조성하여 R&D에 투자하는 계획이 골자를 이루는 이 법에서는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산하의 기술혁신국(Directorate for Technology, Innovation and Partnerships·TIP)에 810억 달러의 예산이 배정되며, TIP는 반도체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양자컴퓨터, 개방형 무선접속망(Open RAN), 6G 이후의 첨단 통신, 바이오 의료, 사이버 보안, 배터리, 첨단 소재 등의 10대 미래 국가전략기술로 선정된 분야에 대한 연구개발 지원을 주관한다.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은 이 기금의 지원을 받는 미국의 기관이 이른바 적성국가 혹은 그에 준하는 국가(Countries of Concern)로 분류되고 있는 중국, 이란, 러시아, 그리고 북한의 지원을 받을 경우 자금지원을 철회한다는 점이 명시된 부분이다. 즉, 이들 국가 정부는 물론 기관으로부터 연구개발 자금을 투자받는 것에 대한 제한을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Division B의 또 다른 주요 포인트는 반도체를 포함한 국가 전략기술 분야에서의 연구개발 인력 배출 증대를 위한 장학금 명목의 STEM 지원 기금이 약 130억 달러 규모로 책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장학금 수혜자 STEM 전공 인력은 매년 3000여 명이 배출될 것으로 전망되며, 이들은 졸업 후 5년 동안 에너지부(DOE), 국방부(DOD), 상무부, NIST 같은 미국 연방정부 기관에서 관련 분야 연구개발 업무에 의무적으로 종사해야 한다. 그 외 반도체 관련, 지역 기술 허브 신설에 110억 달러(상무부 주관), NIST 기술 표준 정립 활동 기금에 90억 달러(상무부 주관), 에너지부 주관 연구개발 기금(679억 달러) 등이 있다. 특히, DOE가 주관하는 연구개발 예산 가운데 반도체와 관련이 있는 기초과학 연구-개발 분야에 대해 503억 달러 규모의 예산 중 일부가, 그리고 에너지 혁신 연구개발 지원 중에서 에너지 효율이 높은 반도체 기술 개발, 저탄소 배출 반도체 공정 기술 개발 등에 176억 달러의 예산 중 일부가 투입될 예정이다.

반도체법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목소리

이러한 법안에서 실제로 반도체 관련 직접적인 예산 투입 규모는 적게는 520억 달러에서 많게는 850억 달러까지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러한 예산 규모는 겉보기로는 커 보일 수 있지만,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한 해 연구개발 예산과 비교해보면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다. 예를 들어 2021년 TSMC의 한 해 연구개발 투자 금액은 56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미국 반도체법에서 추진하는 5년간 예산을 능가하는 규모다. 실제로 미국의 반도체 산업계에서도 반도체법에서 포괄하는 예산 규모가 충분하지 않으며, 산업 경쟁력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서는 적어도 현재보다 2~3배 이상 증액된 규모의 예산 투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한 일부 예산은 반도체 관련 STEM 전공자 양성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이지만, 한 해 3000명 정도의 인력을 추가로 배출하는 정도로는 경쟁력 있는 산업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 의견 역시 나오고 있다. 박사학위자 기준으로 중국이 한 해 배출하는 STEM 전공자는 2020년 현재 6만 명 정도이며, 중국 정부의 공격적인 인력양성 프로그램 확대 정책으로 인해 이 수치는 2025년 8만 명, 2030년 10만 명 이상으로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미국이 한 해 배출하는 STEM 전공 박사학위자는 2020년 기준으로 3만 명 정도이며, 2025~2030년에도 4만 명 정도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2020년대 들어 미국의 주요 연구 중심대학의 대학원 과정으로 유학을 하는 동아시아 출신 학생들, 특히 중국 본토 출신 학생들의 숫자가 격감하면서 양국 간 STEM 전공 학위자 숫자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미국에서 STEM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 출신 인력은 1만2000명 정도인데, 이 숫자를 제외하면 2030년에도 미국의 STEM 전공 학위자 숫자는 3만 명이 채 되지 않게 된다. 중국과 비교해 볼 때 1/3에 불과한 수치다.

반도체법이 목표로 하고 있는 반도체 공정 혁신 및 현대화에 필요한 예산 역시 아직까지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메모리 반도체 라인 한 개를 신설하기 위해 약 100억~150억 달러가 소요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미국이 반도체 공정 혁신 등에 배정한 금액은 한 해 평균으로 추정하여 이의 1/3에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여러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미국이 야심 차게 내놓은 반도체법에서 포괄하는 예산 규모는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중흥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업계 일각에서는 미국이 여전히 자국 반도체 산업의 중흥을 위한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반도체 산업의 리쇼어링(reshoring),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을 내세워 반도체 기업들을 유치하기에는 아직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반도체법은 반도체 산업 중흥 정책의 마중물

그렇지만 여기서 주목하여 보아야 하는 점은 반도체법이 담고 있는 총예산 규모가 아니다. 미국이 추구하는 반도체 산업 중흥 정책은 이 법안 하나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법안은 그에 대한 신호탄 혹은 마중물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정부가 직접적으로 투자하는 부분은 반도체 관련 인력 양성과 각 대학 혹은 국립연구소 등에 투자할 반도체 기술 관련 R&D 예산이며, 이는 미국에 직접 투자를 하기 위한 미국 국내 기업들, 그리고 협력 국가들의 기업들로 하여금 투자에 대한 불확실성을 낮춰주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테크노드 10 나노급 공정 기반의 파운드리 공장의 경우, 국가의 보조금이 없는 상황에서는 미국에서의 공정 원가는 싱가포르에 비해 1.3배, 대만에 비해 1.5배, 중국에 비해 2.3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TSMC나 삼성전자, UMC 같은 외국의 파운드리 기업이 미국에 직접적으로 신규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 위한 투자를 주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외국 파운드리 기업뿐만 아니라, 인텔이나 글로벌 파운드리 같은 미국 파운드리 기업들 역시, 고비용 구조로 인한 수익성 악화라는 구조적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파운드리 분야에 대한 기술 투자 확대, 생산 시설 확대 등을 위한 국내 투자를 더디게 진행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미국이 이번에 의지를 보인 반도체법은 바로 이러한 비용적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로 작동할 수 있다. 직접적인 연방 정부의 보조금(미국산 장비 구입 과정에서의 혜택 등)과 더불어, 간접적인 주/시 정부의 보조금(인력 고용, 지역 SOC 활용 등), 그리고 최대 10년간, 최고 25%에 달하는 연방/주 정부의 법인세 공제 혜택(총 240억 달러 규모) 등은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외국 기업들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직접적 투자를 결행하게 하는 촉매가 될 수 있다.

실제로 12월 6일, 대만의 TSMC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불황의 사이클로 접어들고 있는 이 시기에도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신규 파운드리 증설을 미국에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즉, 미 애리조나주 피닉스 공장에서 짓고 있던 파운드리 라인(2024년 이후 가동)의 규모를 기존 12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까지 늘리겠다는 결정을 한 것인데, 이는 반도체 생산 규모의 확대와 동시에, 테크노드 3 나노 이하 급의 최선단 공정으로도 시설의 확장(2026년 이후 가동)이 이루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즉, 기존에 집행하기로 계획했던 120억 달러 규모의 투자는 테크노드 5 나노급 파운드리 전용 시설의 건설 비용이고, 추가로 투입되는 280억 달러는 테크노드 3 나노급 파운드리 전용 시설의 신규 건설에 투입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당연히 3 나노급 신규 파운드리의 주 고객은 미국의 팹리스 업체들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2021년 기준, TSMC의 상위 주요 10개 고객인 팹리스 업체 중 무려 7개가 미국 업체들이다(1위 애플, 3위 AMD, 4위 퀄컴, 5위 브로드컴, 6위 엔비디아, 9위 ADI, 10위 인텔). TSMC는 파운드리 양산 수준에서는 가장 최첨단 공정인 테크노드 3 나노급 공정을 대만을 벗어나 타국에서 신규로 건설하는 것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항상 최첨단 공정은 대만에 둠으로써 전략적인 관점에서도 기술의 우위를 가져가는 것이 TSMC, 그리고 대만 정부의 암묵적인 정책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120억 달러 규모의 기존 투자 계획도 5 나노급 공정에 국한되는데, 3 나노급 공정에 비하면 2020년대 중반 이후에서는 세대가 뒤쳐지게 되는 공정이었다.

TSMC의 미국 투자 확대, 대만 정책 변화의 신호?

그런데 이렇게 TSMC가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에 대해 기존에 취해오던 보수적인 태도를 벗어나, 보다 전향적으로 공격적 투자에 나서게 된 이면에는 미국의 반도체법에서 명시한 혜택이 있다. 단순히 법인세 혜택을 받는 것을 넘어, 미국에서 생산된 반도체에 대한 미국 연방 정부가 향후 5년간 부여하는 중장기적인 혜택이 이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주요 팹리스 업체들이 대만 타이난에 위치한 3 나노급 공정 파운드리에서 칩을 생산하는 것과 미국 애리조나주에 위치한 3 나노급 공정 파운드리에서 칩을 생산하는 것을 비교하면 세제 혜택 등으로 인해 비용적인 측면에서는 거의 동일해지는 것은 물론, 설계에서 제조로 이어지는 일련의 단계가 미국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근거로 생산된 제품은 ‘MADE in USA’로 분류된다. 따라서 동일한 보조금 및 세제 혜택을 받는 미국의 장비, 소재, 부품 업체들이 생산 과정에 참여하게 될 경우, 추가적인 원가 절감이 이루어진다.

또한 미 NIST가 IBM, 구글, AMD 등 미국의 다양한 팹리스 반도체 기업들, 반도체 선행 기술 개발 기업들과 구축하고 있는 차세대 반도체 기술 표준 로드맵에도 더 실질적인 지분을 확보하게 되어 차세대 반도체 기술 분야에서의 연구개발 비용 절감은 물론, 불확실성의 축소가 덤으로 얻어진다. 동시에 미국 정부의 지원금을 받게 되면서 미국에서 생산된 TSMC의 반도체는 대중 수출 규제에 놓이게 된다. 이는 적어도 미국에서 가동되는 TMSC의 최첨단 파운드리 공정은 중국 팹리스 업체들의 주문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텍사스주 테일러를 중심으로 3 나노급 파운드리 공정을 건설하고 있는 삼성전자 역시 이러한 혜택과 규제 정책이 동시에 적용되는 대상이 된다.

사진:셔터스톡

반도체 산업 ‘글로벌 분업체제’의 종언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반도체법을 통해 미국이 드러내는 의지는 미국 반도체 산업의 중흥, 그리고 생태계의 확장이다. 이는 과거 1980년 당시 미국 카터 정부에서 처음 시작된 이른바 ‘산업정책’(Industrial Policy·IP), 그리고 이후 레이건 정부에서 ‘소크라테스 프로젝트’(Project Socrates)라는 이름으로 계승된 산업정책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1980년대 들어 미국의 제조업은 일본과의 경쟁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점유율이 감소하는 것은 물론, 자국 시장마저도 일본 업체들에게 내어주고 있었는데, 미국 정부는 산업정책을 기반으로 다시 미국의 제조업을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소크라테스 프로젝트로 일으킨 대규모 예산을 대학, 기업, 국립연구소 등으로 배분해 자유시장 경쟁 논리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당시의 첨단 산업(전자공업, 반도체, 자동차 등)에 대한 산업 경쟁력을 제고하는 것이 미국 정부 산업정책의 주요 골자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개막되고 국제 분업화되는 반도체 산업의 기조에 맞춰 글로벌 공급망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세계화 경향이 짙어짐에 따라 힘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2020년대 들어, 적어도 반도체 산업에 대해서는 1980년대의 소크라테스 프로젝트급 이상의 산업정책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의 산업정책과 차별화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제조업 경쟁력의 강화 동기가 경제적 논리보다는 외교안보적, 정치적 논리에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미-중간 기술 패권 경쟁이 점차 격화됨에 따라 더욱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필자가 최근 워싱턴 등지에서 만난 미 상무부의 CHIPS 법안 담당 고위 공직자와 미국 전략싱크탱크인 CSIS(Center for Strategic & International Studies)의  고위 임원은 공통적으로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CHIPS 법안의 핵심은 경제적 논리가 아닌 외교안보적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반도체 산업은 1990년대까지는 인텔로 대표되는 종합 반도체(IDM) 비즈니스 모델이 우세했으나, 2000년대 들어 구글 등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시대, 애플 등으로 대표되는 모바일 시대, 그리고 엔비디아, 퀄컴, 아마존, 테슬라, 메타 등으로 대표되는 AI와 IT 대기업 시대가 차례로 열리면서, 제조보다는 설계, 그리고 칩의 다양화를 위한 지적재산권 확보 방향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게 되었다. 미국에는 여전히 메모리 반도체 3강 중 하나로 분류되는 마이크론이나 파운드리 랭킹 5위 권에 들어가는 글로벌 파운드리, CPU 같은 로직/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하면서 동시에 직접 생산하는 인텔 등으로 대표되는 반도체 제조업이 건재하나, 이들이 미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창출하는 부가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 미만이다. 대부분의 가치 창출은 이른바 팹리스 업체들에서 나오고 있으며, 이는 엔비디아의 GPU/NPU, 구글의 TPU, AMD의 CPU/GPU, 애플의 M1/M2칩, 퀄컴의 스냅드래건, 테슬라의 도조 칩 같은 칩들이 이들 기업이 직접 생산하는 것이 아닌 설계한 칩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창출하는 부가가치의 60%는 팹리스 업체들로부터 나올 정도로 미국의 반도체 산업은 팹리스 위주로 굳어지고 있었다.

미국은 설계, 중국·한국·대만·일본은 생산

그렇다면 이러한 칩들의 생산은 그동안 어떤 회사가 담당하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만의 TSMC나 한국의 삼성전자 같은 외국의 파운드리 기업이 담당하고 있었다. 비록 고성능 시스템반도체 칩의 설계에서 창출되는 수익이 막강하나, 외국의 파운드리 업체들이 이들 칩의 제조 및 양산에서 얻는 수익 역시 막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글로벌 파운드리나 인텔 같은 미국의 파운드리는 이러한 미국의 팹리스 업체들이 원하는 수준의 칩을 만들 수 있는 공정 기술이 부족하거나, 양산 시설이 부족하거나, 기술이 폐쇄적이라는 등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설계부터 시작하여 제조까지 끝낼 수 있는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미국 정부의 1차 목표는 이제 반도체법을 위시로 이 불균형한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를 다시 미국에서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2차 목표는 중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 반도체법의 지원을 받아 생산되는 반도체 칩과 기술은 동시에 중국, 북한, 이란, 러시아 같은 잠재적 적국으로의 수출 통제 대상이 된다. 미국에서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가 확장됨에 따라 점점 중국 등으로 수출될 수 있는 반도체 칩과 기술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이에 따라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견제 실효성이 높아진다. 특히 동북아에 쏠려 있던 반도체 생산 시설의 상당수가 미국에서 재구축되거나 신설됨으로써, 향후 고부가가치 반도체 칩의 생산 의존도가 낮아지고, 중국은 이러한 칩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 더 낮아지게 된다.

필자가 미국에서 만난 정보통신기술 혁신 관련 싱크탱크인 ITIF(Information Technology & Innovation Foundation)의 고위 임원은 이러한 조치에 따라 “중국의 고부가가치 반도체 생산으로 인한 혁신 성장률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며, 동시에 미국과 동맹국들에게 혁신의 동력이 추가로 제공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고위 임원은 ‘전반적인 시장의 축소로 인해 혁신의 잠재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가’라는 필자의 반문에 대해 “글로벌 시장 자체의 축소는 미미할 것이며, 중국이 글로벌 고부가가치 반도체 칩, 그리고 군사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고성능 칩을 생산할 수 있는 혁신 모델로 가는 동력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도체는 ‘경제’를 넘어 ‘외교안보’ 가치로

결국 미국이 중장기적으로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를 재구축하고 확장하려는 것은 산업에 대한 지배력을 외교안보적 가치로 확장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그래서 생태계 구축을 위해 반도체법이 다루고 있는 분야는 우선적으로 미국의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약한 연결고리인 제조업에 집중된다.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 생산 시설의 확장과 재구축, 최첨단 파운드리 공정의 신설, 외국계 반도체 업체들의 적극적인 대미 투자 유도를 통해 애리조나, 텍사스, 뉴저지, 일리노이, 캘리포니아 등 미국 전역에서 반도체 클러스터를 복수로 형성하는 것 등이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상무부 산하 BIS(산업안보국)의 고위 담당자는 미국에서의 반도체 클러스터 형성은 중국으로 투자하려던 많은 외국 반도체 기업은 물론 자국 기업들에게도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의 대표적인 반도체 제조업체인 인텔 역시 테크노드 10 나노 이하급 파운드리 산업에서의 지배력 확대를 위해 반도체법을 기반으로 하여 투자 금액을 늘리고 있다. 오하이오주 공장에 200억 달러, 애리조나주 공장에 300억 달러를 투자함으로써, 첨단 공정(테크노드 5~10 나노급)은 물론, 4 나노 이하급 최첨단 파운드리 공정을 신규 건설하고, EUV 기반 3 나노 혹은 그 이하급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현재의 TSMC와 삼성전자 양강 구도를 3강 구도로 재편하는 것까지 목표로 하고 있다. 2020년 하반기까지만 해도 인텔의 미국 내 투자 계획은 불투명해 보였으나, 2021년부터 반도체법이 조성되는 기류에 맞춰 이러한 투자 계획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으며, 2022년에 반도체법이 통과되자 인텔은 최근 10년 이내 최대 규모의 투자를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더해 레거시 공정(테크노드 10~28 나노급) 기반의 파운드리를 다루는 또 다른 미국의 파운드리 업체인 글로벌 파운드리 역시 뉴욕주의 공장을 업그레이드하고 추가로 생산 규모를 확장하여 시스템반도체 생산량을 늘린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반도체법의 주안점이 우선적으로 미국의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TSMC나 삼성전자의 투자 계획은 물론, 미국의 업체들이 투자 규모를 확대하는 움직임은 이 정책의 기조와 맞물린다.

반도체 생태계 확장의 또 따른 목표, ‘차세대 기술’ 확보

반도체법이 미국 반도체 생태계 확장을 위해 목표로 하는 또 다른 부분은 R&D 확대다. 기본적으로 상무부나 NSF에서 주관하는 반도체 관련 연구과제의 규모와 개수를 늘리는 것을 넘어, 대학-기업, 대학-연구소, 연구소-기업 등의 산학연 협력 과제가 늘어난다. 이는 특히 향후 10~20년 이내에 가시권에 들어오게 될 현재의 반도체 공정에 대한 기술적, 물리적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다양한 후보 기술군의 탐색 과정을 더욱 깊고 넓게 저인망식으로 진행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될 수 있다. 필자는 한국이 이러한 미국의 장기적 정책에 동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최근 미국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밝힌 바 있다. 그것은 미 상무부나 NSF에서 주관하는 산학연 반도체 기술-생태계 개발 프로그램에 한국의 대학, 연구기관, 그리고 기업들이 미국의 기관에 준하는 자격을 인정받으며 참여하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러한 방식은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플랜에서 동맹국들의 첨단산업 기반을 보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정책적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셔터스톡

2020년대 중반 반도체 지정학, ‘동북아-미국’ 양대 축으로 바뀐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현재의 국제 분업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을 불러올 것이며, 이는 미국의 장기적인 안보 정책에 기대어 장기간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편되는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에는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 혹은 협력국의 주요 기업들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특히 동북아에 쏠려 있던 DRAM, 3D 낸드플래시 같은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 제조 기반의 상당수가 미국으로 옮겨가게 되거나 미국에서 신설되는 시설로 대체되기 시작하면서 2020년대 중반 이후의 반도체 지정학은 동북아에서 동북아-미국의 양대 축으로 변모해 나갈 것임이 예상된다.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은 미국의 반도체 제조 능력 회복과 동시에 중국의 고립을 가속화하게 될 것인데, 결국 중국이라는 가장 큰 소비 시장이자 반도체 수입 시장을 점차 상실하게 될 한국, 일본, 대만의 주요 반도체 업체들이 과연 이러한 재편에서 얼마나 손실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시장이자 생산지로서의 다음 후보군을 찾는 노력으로 귀결될 것이고, 그 후보군에는 베트남 남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의 동남아권 국가들, 그리고 인도가 들어간다.

베트남·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 새로운 축이 될까?

이들 신시장 국가들이 동북아-미국으로 재편될 시장에 대해 추가적인 축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는 이들이 시장으로서의 위치를 넘어, 중국이 차지하고 있던 생산기지의 역할을 일부 감당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 이와 관련해 반도체법을 담당하고 있는 미국 상무부의 고위 관료는 필자에게 “공급망 개편 과정에서 새로운 시장의 출현은 예견된 일”이라며 “그 시장이 동시에 생산기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여부는 그 지역에서 고급 엔지니어가 자체적으로, 안정적으로 양성될 수 있는 기반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즉, 앞으로 재편될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구도에서 중국 시장에 그동안 많은 의존을 하고 있던 한국, 대만, 그리고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은 이러한 신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강화하기 위해, 시장 개척은 물론 현지 반도체 인력양성 프로그램 강화 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산업 구도 전반의 변화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세계화 시절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경제성과 효율성만을 내세우던 국제 분업체계는 각국의 기술 패권과 산업정책, 그리고 안보라는 가치의 뒤로 밀리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미국의 반도체 산업 생태계 확장이라는 정책이 놓여 있다. 앞으로 재편될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구도가 과연 미국의 뜻대로 흘러갈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반격이 있을 것인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결국 반도체 산업의 재편을 통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나라는 중국이고,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국 내 반도체 산업의 규모 확장 및 다양성 확보 전략을 내세워 버티기 수준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20차 당대회 이후, 중국은 미국의 산업정책에 대해 어떠한 대응 수순을 밟을 수 있을까? 중국의 버티기 전략은 실효성이 있을까? 중국의 반도체 자급자족 계획은 현실성이 있는 것일까?


글쓴이 권석준은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마치고 MIT 화학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 책임연구원을 지냈고 차세대 반도체 소재 및 광(光) 컴퓨터, 양자 컴퓨터 등의 차세대 IT소자 원천 기술 등을 연구 중이다. 현재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금까지 60여 편의 논문을 해외 저명 학술지에 게재했다. 최근에 한중일 반도체 산업에 관한 저서 <반도체 삼국지>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