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 모멘트. 지난 11월 말 중국 50여 개 대학에서 동시에 코로나 봉쇄와 시진핑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규모 면에서 1989년의 천안문광장 시위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중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점, 그리고 코로나 봉쇄 뿐 아니라 체제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1989년을 떠올렸다.

시진핑 체제의 무엇이 문제일까? ‘봉쇄’와 ‘색출’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는 중국의 감시체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공원국 필자는 사회인류학자 대런 바일러가 발로 누비며 쓴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생각의힘)을 보라고 말한다. 거기서 우리는 시진핑 체제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공원국은 ‘중국은 아메리카 제국의 대항마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중국 역시 체제 유지를 위해 전 지구적 감시자본주의에 스스로 편입된 감시 국가일 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거기에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랐다. [편집자 주]

✔ 영혼을 양도한 감시 기술기계 국가자본에게 감시기술을 팔다✔ 언제라도 범죄자로 분류된 위험 안고 사는 신장 출신의 무슬림✔ 전염병처럼 퍼진 감시자본주의, 시진핑은 이를 어떻게 활용하나✔ 이 이야기를 읽고, 널리 퍼뜨리는 것이 그들과 함께하는 길

위구르족 시위대 (사진:연합뉴스)

언제나 밤은 그들의 무기였다. 테케스(特克斯. 일리카자흐자치주의 한 현)에서 내가 친구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불이 꺼진 지 얼마 후 그들이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신장(新疆)으로 들어가는 열차 안에서도, 새벽 세 시 반에도 손전등과 함께 그들이 들어왔다.

가장 은밀한 순간 불빛 뒤에 눈동자를 숨기고 음성부터 등장하는 그들. 처음에는 거칠게 대항했다. 그러나 영혼을 누군가에게 넘겨준 듯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암흑의 심장(Heart of Darkness)’에서 몰려나온 제복을 걸친 복제물들은 끊임없이 침투했다. 저항이 두려움으로 바뀌고 무기력으로 추락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런 바일러의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를 읽으며, 다시 잠을 잃고 섬망과 악몽에 시달렸다. 바일러는 오랫동안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현지 조사를 수행해 온 미국의 사회인류학자다. 이 책은 수용소에 수감 되었거나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기반으로 쓴 시진핑 체제에 대한 고발서다.

그러나 저자가 다양한 사회학 분야의 연구를 섭렵했기 때문인지, 이 책은 시진핑 체제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의 지평을 넘어 전 지구적 ‘감시기구-자본-기술’에 대한 광범위한 시야도 제공한다. 그래서 이 책은 덩샤오핑 이래 철의 규칙으로 여겨지던 집단지도체제를 해체하고 독재의 길로 들어선 시진핑 체제를 위로부터 분석하는 데 집중한 일반적인 중국 비평서들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저자는 시진핑 체제가 가장 극적으로 인간을 옥죄고 탄압하는 중국의 끝에서 태평양 너머의 첨단기업과 연결된 지구적 차원의 감시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신장의 사례를 통해서 9·11 테러 이후 ‘감시자본주의’가 전지구적인 전염병으로 얼마나 만연하고 있고, 중국 시진핑 체제가 이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런 바일러(Darren Byler) 저, 홍명교 역,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원제: In the Camps: China's High-Tech Penal Colony)

공범 되기를 거부하라

최근 코로나 방역조치로 봉쇄된 아파트에 갇혀 열 명이 화마에게 희생된 사건이 코로나 봉쇄에 항의하는 시위의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우루무치’가 바로 신장의 수도다. 신장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바일러는 달아난 사람들을 다시 깨워 앞을 보라고 다그친다.

본국으로 귀국한 유학생 베라 저우는 시진핑의 ‘영도’ 아래 번영하는 중국 경제에서 경력을 쌓고 싶었다. 그러나 영문도 모른 채 경찰차 뒷자리에 앉아 수용소로 향하는 자신을 이내 발견한다. 그녀는 얼마 후 자신의 목소리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소리친다. “우리나라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 건가요?” 그녀는 자신이 신장 출신의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예비 범죄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본서 1장 ‘예비 범죄’)

거리에 감시초소들이 가파르게 지어지던 2016년, 카자흐족 청년 바이무라트는 ‘경찰 보조원’이라는 좋은 직장을 얻었다. 법정 최고임금의 거의 세 배에 달하는 임금을 보장하는 이 일자리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소수민족 청년에게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래서 그는 위구르인들과 자신의 동족 카자흐인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말한다. “그 장치로 사람들의 신분증이나 핸드폰을 스캔하면 그 사람이 베일을 쓰고 있는지, 왓츠앱을 설치했는지, 카자흐스탄 여행을 다녀왔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죠.” 이 조건 중 하나라도 해당하는 소수민족이라면 ‘예비 범죄자’다.

바이무라트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일을 그만두는 순간 ‘재교육 수용소’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본서 2장 ‘전화기 참사’) 감시자들은 의심받지 않기 위해, 하나는 양심을 돌아보고 하나는 양심을 외면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카메라는 감시자마저 감시한다.(본서 3장 ‘두 얼굴’).

 

울타리 안의 가축에서 도살장의 짐승으로

수감되기 전의 무슬림이 전기 울타리 안을 돌아다니는 가축이었다면, 수감 후의 그는 도축장에 들어선 한 마리 짐승이 된다. 가축의 귀에 단 인식표보다 수천 배 정밀한 생체정보가 추출되어 데이터로 저장되는 순간, 그들은 가축보다 훨씬 불행한 상태에 빠진다.

우선 그들은 가축이 누리는 ‘먹고 배설하는 권리’를 제한 당한다. 24시간 불 꺼지지 않는 방에서 산란계처럼 사육되는 동안 그들은 말하는 것은 물론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조차 감지하여 경고하는 무수한 감시카메라와 배후의 자동분석 시스템 아래서, 그들은 차라리 동물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직감한다.

가장 민감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은 기어이 자살한다. 간수들이 ‘누가 매일 식량을 줍니까?’라고 물을 때, ‘시진핑’이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얻어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성은 굴레일 뿐이다.(본서 4장 ‘동물들’)

그들은 기도를 하거나, 어떤 책을 보거나, 어떤 앱을 깔거나, 어쩌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인민의 적이 되어 수용소로 들어왔다. 가축의 고기처럼 그들의 존재 안에 남은 유용한 것이라곤 노동력 밖에 없다. 운이 좋아서 학대받는 사람끼리의 경쟁을 통과하고 순한 양으로 분류되면, 수용소 밖으로 나가 강제노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본서 5장 ‘자유가 없는 사람들’)

중국 당국이 소수민족인 신장 위구르족을 감시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는 세계 최대 감시장비 제조업체인 하이크비전은 영국에서도 '인종 인식 기술'을 광고하다 논란을 일으켰다. (사진:연합뉴스)

감시국가와 감시자본주의의 결합

도망자는 책을 다 읽은 그 시각, 더욱 구체적인 디스토피아의 환영에 시달린다. 거대한 연자방아들이 돌고 있다. 국적 없는 수십억 인간들이 발에 족쇄를 차고 어깨에 멍에를 쓴 채 악마의 검은 맷돌들(Dark Satanic Mills)을 돌린다.

그들 얼굴 30센티미터 앞에 스마트폰 스크린이 설치되고 ‘학대하며 먹기’, ‘학대하며 싸기’, ‘학대하며 외면하기’라는 세 종류 포르노그래피를 보여준다. 연자방아가 빨리 돌수록 누리는 자극은 강해진다. 어쩌다 누가 쓰러지면 ‘세상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를 갈아 버려’라는 전기자극 명령이 떨어지고, 인류 대중은 그들을 연자방아 안에 던져 넣는다. 이 요구들은 자가증식하여 누군가 보조를 맞추지 못해 족쇄가 걸리적 거리면 대중은 자극 없이도 스스로 합창한다. ‘저 낙오자를 던져 넣어 버려.’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그들은, 더 정확히 말해 ‘우리는’ 맷돌을 돌리고 친구를 던져 넣는다. 버튼 하나로 작동하는 편리한 삶, 테러리스트 없는 멸균된 삶, 그저 돈과 힘으로 남 위에 군림하는 삶을 위해.

연자방아가 어설픈 은유처럼 들리는가? 저자가 인류학자로서 듣고, 읽고, 현지에서 겪은 바로는 그렇지 않다. 자체의 생존을 위해 인간을 갈아 윤활유로 쓰는 윗돌이 있다. 그것은 제국의 세계질서 안에 있는 ‘감시 국가기구’ 무리다. 그리고 아래에는 마치 눌리는 척 연기하며 실은 인간의 피와 살을 흠뻑 먹으며 날로 견고해지는 밑돌이 있다. 그것은 ‘감시 자본주의’의 기반인 초국적 빅테크 연합체다.

실리콘밸리와 베이징의 영혼을 양도한 감시 기술기계들이 국가자본에게 감시기술을 팔며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감시 기술기계들은 ‘기술은 중립적이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돈과 힘을 쫓는 영혼 없는 모리배들일뿐이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본서 ‘나가며: 시애틀 뒤에는 신장이 있다’를 보라.)

중국은 아메리카 제국의 대항마가 될 수 없다

바다 건너 저쪽 아메리카에서는 감시자본이 고독한 군중을 맷돌에 갈아 추출한 행동잉여로 배를 채우고, 이쪽 유라시아에서는 감시국가가 감시자본과 결탁하여 ‘예비범죄자’들을 맷돌에 던져 자신의 생존을 위한 윤활유로 쓰고 있다. 감시자본과 감시국가는 태평양의 양대 제국처럼 상호의존적이다.

그리고 이 모든 체제를 지탱하는 동력은 바로, 30센티미터 앞 스마트폰 화면에서 나오는 편의를 위해 인간성을 지탱하는 각종 권리를 양도하고, 나와 다른 이들을 쓰러트리는 일에 서슴없이 공범이 되는 소비대중에게서 나온다! 순결한 피가 모두 고갈되고 나면 그 무정한 연자방아는 이내 우리 자신의 혼탁한 피를 요구할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국가권력-감시자본 카르텔의 숙주가 된 채.

아메리카 제국의 대항마로 유라시아 제국(중국 혹은 러시아?)을 내세우는 방식은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런 대안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느 순간 국제정치학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현실주의’(현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의 아류로 떨어짐을 ‘좌파’는 아직 모르는 것일까.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우루무치 화재 참사 추도식 도중 시민들이 코로나19 봉쇄 조치에 반대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읽음으로써 친구들의 삶을 지켜주기를

나는 이 책을 더 알려야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저주처럼 들리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단코 중국을 저주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 서로 벙어리가 되어 눈으로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무수한 친구들이 있다.

내 영혼의 날개에 아직 구더기가 쓸지 않았던 꿈 많던 청년 시절, 함께 미래를 나누기로 약속한 친구들이 거기 있다. 우뚝한 설산 아래 광막한 사막 위로 ‘달빛(아이누라)’, ‘봄꽃(자즈굴)’, ‘용사(바트르)’, ‘생명(외미르)’ 같은 투르크식 이름을 단 친구들 사이에 내가 끼어 걸어갈 날을 꿈꾼다.

시의적절한 시기에 반드시 나와야 할 책을 번역해준 역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은연중에 성실성과 사명감을 드러내는 역자주가 읽기를 돕는다. 디스토피아적 억압 앞에서 소위 ‘좌파’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옮긴이의 말’ 또한 독립적으로 읽을 가치가 있다.

크든 작든 당장 맷돌로 던져지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든 행동이 새로운 판본으로 진행될 ‘거대한 전환’의 시작임을 나는 믿는다. 이미 읽은 분들에게 부탁드린다. 잊지 말고 주위의 친구들과 이야기하시라. 아직 읽지 않은 분들에게 부탁드린다. 읽는 순간 이미 여러분은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

* 현장에서 쓴 공원국 필자의 다른 글들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변경에서 본 징조’ ‘표어의 정치’ ‘통합의 두 얼굴’ 


글쓴이 공원국은탐험하는 인류학자이자 작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중국지역학을 전공했으며, 중국 푸단대학교에서 인류학을 연구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목축 지대에서 생활하며 현장조사를 수행중이다. 기록되지 않은 유목의 역사를 그들의 언어에서 발굴하고자 『말, 바퀴, 언어』를 번역했고, 『유라시아 신화기행』, 『여행하는 인문학자』, 『퇴근길 인문학 수업 : 연결』(공저), 『굴욕을 대하는 태도』, 『가문비 탁자』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