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이 숨가쁘게 지나간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우선 ‘한 해 살이’가 어땠는지 반성하게 된다. 나와 가족, 이웃, 그리고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 성찰의 크기만큼 우리네 삶은 앞으로 나아갈 게다.한 해를 차분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며 ‘동네 사회학자’ 조형근 박사를 만났다. 그는 2019년 대학의 정규직 교수로 1년 남짓 근무한 뒤 스스로 걸어 나와 ‘동네’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아래로부터의’ 연구와 저술, 실천 활동에 힘쓰고 있다. 그가 올해 낸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대학과 지식인, 청년세대와 86세대, 불평등, 민주주의, 윤석열 정부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편집자 주]

✔ 안정된 대학을 떠나 동네살이를 시작한 동네 사회학자✔ 목적의식 없이 책을 읽어 행복한 대학 떠난 후의 삶✔ 삶의 고민이나 지향과 결합한 인문학, 생활 인문학✔ OECD 가입이래 25년 새 두 배 가까이 늘어난 한국의 빈곤층✔ 사회는 정치와 경제가 깃드는 둥지, 사회적인 것의 복원 필요

경기도 파주의 쩜오책방에서 조형근 박사(오른쪽)가 정재권 콘텐츠 코디네이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이정은)

조형근. 그의 이름이 우리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9년 11월이었다. 당시 한림대 교수였던 그는 <한겨레> 칼럼 ‘대학을 떠나며’에서 이렇게 썼다. “1년 남짓한 정규직 교수 노릇을 그만두었다. 지금 대학은 누구나 가는 곳이 된 대신 공고한 서열과 세계 최고 수준의 등록금으로 민중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다. 엘리트주의적 상아탑 모델이 답은 아니다. 나는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이런 대목도 있다. “서민 주제에 정년 보장과 사학연금을 마다하고 백수가 된다니 (주위에서) 말리는 게 당연하다. 다시 대학에 적을 두는 일은 없기를 꿈꾼다.”

그로부터 3년, 조형근은 자신이 꿈꾼 대로 ‘대학 바깥’의 존재로, 스스로 이름 붙인 ‘동네 사회학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그의 주요 근거지는 경기도 파주 교하에 있는 협동조합 서점 ‘쩜오책방’과 지역연구소인 ‘소셜랩 접경지대’다. 아마도 ‘동네 사회학자’라 불리는 이는 조형근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걸어나와 ‘동네’로 들어온 뒤 세상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조형근은 이런 궁금증에 대한 답변이 될만한 세 권의 책을 올들어 연달아 출간했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우리 안의 친일>, <키워드로 읽는 불평등 사회>가 그것이다. 이 책들을 통해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단하고, 비판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울림이 크다. 쩜오책방에서 ‘동네 사회학자’ 조형근을 만났다.

정재권 : 시작부터 너무 직설적인지 모르겠다.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정규직 대학교수 자리를 1년 만에 그만뒀다. 그리고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결정을 돌이켜본다면?

대학을 그만둔 뒤 ‘목적 없는 독서’가 행복했다

조형근 : 새로운 일상에 완전히 적응했는지, 그 결정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질문을 받고 생각해 보니 문득 이메일 공포증이 떠오른다. (대학 안에 있을 땐) 주말이 지난 다음 월요일 아침에 이메일을 여는 게 공포스러웠다.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주말 사이에 벌어지고 쌓여 있다는 게 끔찍했다.

남들이 볼 때 공부하는 직업이 평소에 별로 바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딱히 휴일도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주중에는 수업과 각종 업무로 공부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렵다. 결국 휴일, 방학에 더 집중해서 공부하고 일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월요일 아침에 서로의 메일함에 쌓여 있는 업무 이메일이다. 대학이 경쟁체제에 완전히 포섭된 이후로 실적 압박이 과거보다 훨씬 심해졌다. 그런 압박감에서 해방된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후회할 일이 없다. 정신 건강이 매우 좋아졌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여유로운 책 읽기다. 먹고 살아야 하니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목적의식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다. ‘목적 없는 독서’야말로 한국 사회가 가장 결여한 미덕이다. 우리가 민족중흥이든 개인적 행복이든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태어난 수단적 존재가 아닌 것처럼, 독서도 특정한 목적 아래 종속되면 일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인문학 공부조차 결국 경제적 효과가 있고, 잘 사는 데 도움이 되니까 해야 한다는 식으로 정당화하곤 한다.

동네살이가 우리 사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만 동네살이와 전국적인, 세계적인 의제들을 연결해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이 조형근 박사의 꿈이다 (사진:셔터스톡)

동네살이와 전국적·세계적 의제의 연결

정재권 : 지난 3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삶의 공간이 ‘동네’인 것 같다. 스스로를 ‘동네 사회학자’라고 부르고 있다. 동네 사회학자의 일상을 소개해 달라.

조형근 : 동네가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숱한 문제들의 해결책인 건 아니다. 어쩌다가 내가 선택한 현장일 뿐이다. 동네살이가 주는 기쁨과 위안도 있지만, 갈등과 문제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벅차기도 한데, 그래도 꿈은 동네살이와 전국적인, 세계적인 의제들을 연결하고 싶은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 모순이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어떻게 일상의 삶, 실천을 통해 거시적인 변화와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을지 실마리를 찾고 싶다.

동네에서의 일상은 협동조합 책방, 동네 합창단 같은 모임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협동조합 책방이 동네살이의 중심 공간이다. 일주일에 하루 책방지기로 일하고, 몇 주마다 한 번씩 토요일에도 책방지기를 한다. 손님 오면 책 팔고 발송하고 예약 받으면 주문하고 들어오는 책 입고처리하고 그야말로 일을 한다. 책방에 상근직원과 아이들, 조합원, 이웃들이 늘 찾아와 함께 머물기 때문에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책방에는 강연, 공연, 전시, 글쓰기, 독서 모임 같은 일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조합원들이 돌아가면서 맡아서 진행한다. 조합원들의 책임감이 커서인지 잘 된다. 동네의 문화 플랫폼 노릇을 한다. 나는 올해 책 세 권을 낸다는 핑계로 많은 일을 면제받았다. 이제 책이 다 나왔으니 앞으로는 열심히 제 몫을 해야 한다. 올해 낸 세 권을 기반으로 연속 강좌를 만들자고 책방에서 제안해 와서 궁리 중이다.

동네 합창단 ‘파노라마’ 활동도 중요하다. 혼성 4부 합창단인데 지휘자도 없고, 내가 기타로 반주하는 그야말로 소박한 합창단이다. 다만 편곡만큼은 작곡을 전공한 지인이 우리 합창단이 소화하기에 딱 어울리게 맞춤 편곡을 해줘서 행운이다. 평소엔 연습하고 동네와 지역의 행사 때면 축하, 위로 공연을 한다.

그 외에도 마을잡지, 얼마 전 출범한 마을 유튜브 채널, 협동조합 먹거리공간 등 여러 곳이 있는데 계기적으로 참가하고 응원한다. 마을에 머물다 보면 은근히 바쁘다. 바쁠 때는 슬쩍 잠수를 탄다. 서로 그 정도의 ‘느슨함’을 추구한다.

그동안 옆 동네 아파트에 살면서 동네 커뮤니티가 모여 있는 곳에 드나드는 식으로 참여했는데, 올해 이곳 동네 안에 집을 지었다. 집을 지어준 현장소장은 앞집 사는 이웃이고, 각종 가구와 쉼터, 데크 등 여러 시설을 만들어주고 있는 목수는 두 집 건너 사는 옆집 이웃이다. 본업이 영상감독이던 소장은 우리 집을 짓다가 이참에 본인의 오랜 꿈이던 건축업자로 전업했고, 옆집 사는 목수는 본업이 따로 있다. 그러니까 취미와 생계가 묘하게 중첩되고 오가는 상태에서 집이 지어졌다. 또 여러 이웃이 수시로 찾아와서 일손을 도와주었다. 결국 이웃이 같이 지은 집이 됐다.

정재권 : 지난 8월에 낸 책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는 2019년의 칼럼 ‘대학을 떠나며’의 문제의식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 결과물로 읽힌다. 책을 쓰게 된 이유 혹은 계기는?

조형근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는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한 명쯤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썼다. 공감해주는 반응이 많았지만, “반성하는 나를 전시하는 책”이라고 비꼬는 반응도 접했다. 딱히 반박할 생각이 없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드러나지 않는다면 반성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다. 반성은 내면의 행위지만, 동시에 소통되어야 한다. 물론 반성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자랑이 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반성의 진실성 같은 것을 내 입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 판단은 독자가 내리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책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성은 내면의 행위지만, 동시에 소통되어야

정재권 : 책의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글을 쓸 때면 정의를 찾게 된다. 그렇게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내 삶이 글처럼 정의롭지 않다. 그 격차를 부끄럽게 고백하되, 그 사이 긴장과 모순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수밖에 없다.” 꼭 이런 ‘고백’ 때문만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의 시 <참회록>의 마지막 구절인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가 떠오르기도 했고.

조형근 : 윤동주 시인까지 거론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책 제목 그대로 평소 그렇게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 못 된다. 별생각 없이 사는 때가 훨씬 많다. 늘 팽팽하게 긴장하고 성찰하며 살 수는 없다. 자신에게 너그럽지 않으면 타인에게도 너그러울 수 없다. 자기와 잘 지내려 한다. 글쓰기는 그런 자기와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성찰적 계기다.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을 꾸미게 되지만, 그렇게 꾸미고 있는 자신을 또 깨닫게 된다. 이 모순적 과정은 끝이 없을 것이고,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차라리 비관주의자에 가깝다.

다만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나는 현실주의자다. 자기와 잘 지내고, 자기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내게 글쓰기는 사회적 발언이면서도, 무엇보다 자기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대학과 교수가 경쟁체제에 종속됐다

정재권 : ‘대학을 떠나며’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한때 한국에서 대학은 고고한 희망의 사다리였다. 거기 가서 엘리트가 되었다. 지금 대학은 누구나 가는 곳이 된 대신 공고한 서열과 세계 최고 수준의 등록금으로 민중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다.” 대학 바깥에서 보는 대학의 모습은 어떠한가? 달라지지 않았거나, 강화됐다면 어찌해야 하나?

조형근 : 내가 나온 후 지금까지 사이에 달라질 정도로 대학 문제가 사소하지 않다. 전체적으로는 대학과 교수가 경쟁체제에 거의 종속됐다. 예전에는 대학의 서열화에 맞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있었지만, 지금은 교육부와 언론 등의 대학평가에 서로 목숨을 건다. 대학의 자율성이라는 가치, 지향을 포기한 지 꽤 됐다. 대학평가에 공공성이나 사회적 다양성 증진 같은 건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연구실적, 취업률, 동료 평가 같은 항목들, 결국 경쟁력이 기준이다. 대학이 우리 삶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자본과 권력에 봉사하는 기관이 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최근 예일대와 하버드대 로스쿨이 대학평가 시스템을 최초로 만든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의 대학평가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공익 변호사를 맡은 졸업생들을 실업자로 분류하고, 장학금도 저소득층 학생이 아니라 점수가 높은 학생에게 지급해야 평가 점수가 높게 되어 있는 등 “사회경제적 다양성을 향상시키려는 로스쿨의 약속”에 반하는 평가 기준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학평가라는 틀 자체를 아예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한계가 있지만, 대학의 자율성을 지키고 공공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러 기관들이 경쟁적으로 벌이는 대학평가가 상당히 비합리적인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대학들이 평가와 경쟁체제 속에서 각자도생할 것이 아니라 함께 손잡고 맞서야 한다.

이 경쟁체제에서 뒤처진 지방대학 대부분은 존립 자체가 위기다. 그런데 사실 대학은 지역에서는 비교할 대상이 찾기 어려운 소중한 지적·문화적 인프라다. 대학이 지역사회에 대해 전면적으로 열리고, 광범위하게 협력할 자세를 갖춘다면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자꾸 산학협력만 생각하는데, 지역사회의 혁신과 문화적 활력을 위해서도 대학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실 지역의 인프라가 너무나 부실하기 때문에, 대학 이외에 그런 역할을 할 만한 주체가 마땅하지도 않다. 문재인 정부가 공약했던 지방 사립대의 공영형 사립대로의 전환도 이런 맥락에서 긍정적인 방향 설정이었다. 그런데 애초 수백억 원대의 사업에서 불과 10억 원대의 시범 사업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공약은 했어도 정권의 의지가 실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주체가 되어야 할 대학이, 교수가 지역사회에서 신뢰를 얻어야 한다. 지방대 교수 중 상당수가 서울, 수도권에 살면서 주중 3일 내외로 머물거나, 아예 출퇴근을 한다. 가족의 직장, 자녀 교육 등 개인적인 사유가 있는 것은 당연하고 나도 이해한다. 나도 그렇게 살았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국 지역 활동을 제대로 하기 어렵고, 신뢰도 구축하기 어렵다. 자기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안 바뀌면서 세상만 바뀌라고 하니 무척 어렵다.

삶의 고민이나 지향과 결합한 인문학, ‘생활인문학’

정재권 :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비판적 지성의 위기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조 박사는 이런 위기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대학 중심적 사고’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대학 밖에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문학 수요가 만개하고 있다며, 이를 ‘생활인문학’이라 불렀다. 생활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조형근 : 내가 생각하는 생활인문학이란 한마디로 삶과 유리되지 않은, 삶의 고민이나 지향과 결합된 인문학이다. 특정한 학문 분야나 패러다임 같은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 공부하면서 맺는 주변과의 관계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대학 안과 밖이 중요한 구분은 아니고, 장소가 어디든 삶과 밀착한 인문학이 중요하다. 그걸 생활인문학이라고 표현해봤다.

전공이 사회학이기는 하지만 인문학 인근에서 공부했고 녹을 먹었다. 인문학의 가치가 소중하다고는 해도, “인문학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같은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학의 인문학이, 인문학자가 무슨 수로 우리를 구원해주겠는가? 본인들도 믿지 않을 것이다.

삶과 철학, 인문학, 학문이 별개가 아니다

지금은 인문학이, 넓게 보면 학문, 앎 자체가 우리의 삶과 유리되어 제도화되고 이윤을 추구하는 대학과 기업에 의해 도구화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과 삶의 유리가 위기인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던질 때면 나는 플라톤과 디오게네스가 나눴다는 대화가 떠오른다. 어느 날 플라톤이 디오게네스를 찾아왔다. 디오게네스는 더러운 물로 샐러드를 씻고 있었다. 플라톤이 말했다. “만약 당신의 사유를 왕과 나누었다면 지금 그 샐러드를 당신이 직접 씻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디오게네스가 대답했다. “당신이 자기 샐러드를 스스로 씻을 줄 알았다면 권력의 노예로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삶과 철학이, 인문학이, 학문이 별개가 아니다. <인문학의 미래>를 쓴 월터 카우프만은 형벌에 대해 공부하는 한 학기 동안의 커리큘럼 구상을 통해 인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형벌은 철학과 종교, 그리스 비극과 러시아 소설은 물론 정치이론과 심리학, 사회학과 인류학이 만날 수 있는 학제간 접근의 대표적인 사례다. 미술작품, 영화 감상, 공연 등과 결합할 수도 있고, 재판 방청과 교도소 탐방도 병행할 수 있다. 카우프만은 재판 한 번 방청해 보지 않은, 교도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도 없는 이들이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고 법관이 되어 징역형을 선고하는 현실에 대해 질문한다. 그래도 되겠느냐고?

이런 종류의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형벌에 대해 종합적으로 사고하며, 소크라테스적 질문하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즉 우리의 무지, 우리 지식의 한계에 대해 질문하게 되고, 형벌을 받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이런 강의 모델은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 지방대학이라면 지역의 삶을 주제로 한 다양한 강좌를 학생과 시민이 듣고 함께 실행 프로그램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 바깥 인문학에서도 이런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재권 : 좀 더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선전한 요인 중 하나로 젊은층의 지지, ‘Z 웨이브’를 들고 있다. 반면에 우리 사회에선 ‘20대 남성의 보수화’가 정치·사회적 화두로 대두됐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그리고 조 박사는 ‘20대 남성’이라는 단일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동네살이의 중심 공간이라 할 협동조합 책방에서 만난 조형근 박사. (사진:정재권)

20대, 세대 안 차이·불평등이 세대간 차이·불평등보다 훨씬 커

조형근 : ‘20대 남성의 보수화’라는 말로 흔히 퉁 치는 어떤 현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려운 노동시장 상황, 경쟁 지향적 교육이 빚어낸 피할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히 말하기 어렵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덜 보수적이고 기성세대보다 더 진보적인 면도 보여주지만, 경쟁 지향성이나 차별적 보상에 대한 선호라는 면에서는 20대 남성과 차이가 크지 않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만큼 경쟁을 당연시하면서 자랐다는 말이다.

그런데 또 여러 조사는 20대 안에서 젠더 차이만큼이나 계층별 차이가 크다는 걸 보여준다. 하층으로 갈수록 보수성이 약화되고, 포용적이고 협력적인 세상을 바라는 경향이 뚜렷하다. 중상층 이상의 20대 남성이 단군 이래 가장 낙관적인 희망에 가득 찬 집단이라면, 중하층 이하는 의지할 데 없이 실의에 빠진 집단이기도 하다. 이들이 하나의 세대라고 간단히 말하기 어렵다. 세대 내 차이와 불평등이 세대간 차이와 불평등보다 훨씬 크다. 세대론으로 계급계층간 불평등과 젠더 불평등 문제를 대체하려는 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재권 : 이른바 ‘86세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자기반성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기득권’화했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됐을까? 86세대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조형근 : 86세대에 대해 대학 시절부터 권력욕이 컸던 집단이라는 식의 비판이 있다. 혹은 권력을 잡고서 타락했다는 식의 비판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도 하겠지만 적절한 비판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도 왜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불평등 구조 자체는 그대로 둔 채 그 불평등 구조의 윗자리를 장악해서 그 윗자리의 힘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자가당착에 대해 직시해야 한다.

또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86세대는 ‘기득권화’되었다기보다는 애당초 동일 연령대 인구 중 상위의 학력 엘리트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86세대는 1960년대 출생자로서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을 가리킨다. 1960년대 출생자의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률이 70% 정도쯤 된다. 4년제 대학 진학률은 30%대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1960년대 출생자 중 4년제 대학 진학 비율이 20% 남짓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가장 넓게 봐도 86세대는 동일 연령 인구집단 중 20%에 불과하다.

‘86세대’란 없다, ‘86집단’ ‘86세력’이 있을 뿐

그런데 사실은 더 적다. 실제의 어법에서 86세대는 이른바 ‘메이저 캠’이라고 불리던 명문대, 지방국립대 출신을 주로 가리킨다. 그들이 1960년대생의 몇 %쯤 될까? 5%에도 한참 못 미칠 것이다. 그래서 86세대는 동일 연령대 인구집단을 의미하는 세대, 코호트라기보다는 특정한 가치와 신념, 경험을 공유하는 느슨한 인맥, 인적 네트워크라고 보는 게 맞다. 베이비붐 세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지금의 60대는 모두 베이비 붐 세대라고 봐도 되지만, 지금의 50대 대다수는 86세대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86세대라는 말을 거부하고, 86집단, 86세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입장이다.

이렇듯 86세대는 애초에 그 연령대 최상위의 학력 엘리트층이었다. 1980년대 상황의 긴장이 그들을 열렬한 투사로 만들었고, 민중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다가 마음만 바꿔 먹으면 얼마든지 경쟁하고 출세할 수 있는 최상층 집단이었던 것이다.

86세대가 기성 사회에 진출하고 사회 각계의 주도층이 되어가는 사이 한국 사회는 한편으로 발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불평등이 심화됐다. 이 불평등 심화 과정에서 86세대는 학력 엘리트로서, 강력한 네트워크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집단으로서 상위 10%, 5% 이내로 편입된 것이다.

86세대, 자신들의 자산을 ‘공공화’했으면

86세대는 자원을 많이 가진 집단이다. 아래 세대와 대화해 보면 절감할 수 있다. 86세대의 폭넓은 인맥과 자원 동원 능력에 놀랄 때가 많다고 말한다. 86세대의 선천적 능력이 아니고 그런 시대를 만난 덕이다. 경제적 자원도 갖췄지만, 수많은 경험과 지적,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가진 자산을 최대한 ‘공공화’하려는 시도를 기울이면 좋겠다. 그것도 가급적 더 낮고 소외된 곳에서 말이다.

단 한 가지 과제만 꼽는다면 상위 10%에 대한 ‘증세’ 운동을 86세대가 벌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늘 “한 줌 소수의 기득권”을 규탄하는 데 익숙한 세대지만, 우리도 내놓을 때가 됐다. ‘알고 보면 나도 서민’이라는 식의 태도는 옳지 않다. 행동하고 누린 만큼 책임감을 발휘하면 좋겠다.

정재권 :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쇳말은 ‘불평등’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뜻일텐데.

조형근 : OECD 회원국이 되던 1995년에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8.3%였다. 2020년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5.3%, 빈곤층 비율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95년 한국에서는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31.8%를 차지했다. 2021년에는 그 비율이 46.5%로 늘었다. 소득 상위 1%가 차지하는 몫은 7.2%에서 14.7%로 두 배 이상이 됐다. 그만큼 중하층 몫이 줄어들었다.

2021년 한국 피케티 지수 8.8배, 아찔하다

현재의 노동에 비해 과거로부터 쌓여온 자산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피케티 지수는 1995년 5.8배에서 2021년 8.8배로 증가했다. 같은 시기 서구 여러 나라는 지수가 대개 5배 후반~6배 후반 사이를 오가는데도, 20세기 초 이후 가장 높은 수치라며 논란이 뜨겁다. 20세기 중반에는 2~3배 사이였다. 불평등이 심각해져서 비상이 걸린 중국이 2021년 기준 7.3배다. 한국의 피케티 지수는 아찔하다. 불평등 확대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이다. 지난 노무현, 문재인 정부의 정권 재창출 실패는 불평등 확대를 막지 못한 민주세력이 어떻게 심판받는지를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정재권 :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관련해 ‘사회적인 것’의 복원을 얘기했다.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그 복원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조형근 : ‘경제적인 것’이 만사를 지배하는 시대다. 하지만 사실은 ‘정치적인 것’이 결정한다. 경제적인 것의 지배를 만든 힘도 정치적 역관계의 변동에서 나왔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회적인 것’일까? 사회이론 논쟁에서 ‘사회적인 것’의 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아래로부터 ‘사회적인 것’의 복원이 필요

그런 것은 일단 차치하고 말하자면 ‘사회적인 것’은 경제와 정치가 작동하기 위한 기반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간단히 말한다면 경제의 영역에서 내 이익을 추구하고, 정치의 영역에서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서조차 상대의 존재를 존중해야 한다는 합의가 성립하는 곳에서 ‘사회’가 작동한다. 경쟁하거나 통치하려는 상대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이 사회의 엄연한 실증성이다. 사회는 정치와 경제가 깃드는 둥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승자독식 논리와 악무한적 진영 대립의 창궐이라는 현상은, ‘사회적인 것’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하거나 위기에 빠진 것을 보여주는 징후다.

‘사회적인 것’의 복원은 아래로부터만 가능하다. 동네, 지역은 하나의 출발점일 뿐이다. 학교, 대학일 수도, 공장, 기업일 수도 있다. 자기의 일상이 있는 곳이 사회의 출발점인데, 거기서 정치나 경제 논리로 포획될 수 없는 사회의 방어막을 구축해야 한다. 그건 경제 논리를 초월하거나 비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협동조합 책방은 경제활동을 하지만, 이윤 논리를 넘어서 동네 활동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정치적으로 대체로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였지만, 동네 축제 같은 일을 만들 때는 보수적인 사람들과도 같이 일을 한다. 태극기 흔드는 사람들하고도 같이 일한다. 진보의 진지를 만들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이런 활동이 정치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 대결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한 토대가 이렇게 구축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정치적 대결이 아니라 단지 지배와 예속만 있을 뿐이다.

정재권 : 또 하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조 박사가 생각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무엇이며,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실현할 수 있나?

조형근 :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는 과두제화의 위기다. 보수적인 자산 엘리트와 진보를 표방하는 학력 엘리트가 과두제를 형성하고 있다. 서로는 격렬히 적대하고 대립하지만, 자산도 학력도 갖지 못한 민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 같은 기득권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약자들이 불화를 드러내는 만큼 존재한다

지금 서구에서 창궐하고 있는 포퓰리즘은 이런 과두제화에 대한 반발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이 과두제 아래서 말하지 못하는, 혹은 이미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듣지 못하는 약자들, 소수자들이 자기 삶에 대해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그동안 억눌린 약자들이 불화를 드러내는 만큼 존재한다.

예를 들면 전국장애인연합의 이동권 시위를 떠올려 보면 된다. 시설 수용 문제도 마찬가지다. 많은 장애인이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설에 수용되어 사실상 징역 생활을 해왔다. ‘시민’의 불편을 유발하는 그들의 시위는 우리가 누려온 평범하고 당연한 ‘시민성’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의 평범한 시민적 일상이 다른 존재에 대한 억압 위에서 작동해왔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분양주택의 입주자대표회의는 법정기구지만, 공공임대주택의 세입자대표회의는 임의기구다. 절반 이상의 공공임대주택에서 대표자회의가 아예 구성되지도 못하는 이유다. 분양주택 단지 안의 임대 동 주민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불화를 드러낼 수 있는 권력자원이 제한되어 있다. 이런 사례는 무수하다. 중산층 시민들은 이런 문제들에 관심이 없거나 불편해 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중산층이 누리는 민주주의조차 약화시킨다. 그래서 내 문제의식은 진보정당을 강화하자는 차원의 문제의식보다 좀 더 넓고 좀 더 아래에 있다. 더 작고 힘없는 존재와 단위가 스스로 말하고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정재권 : 이제 7월째인 윤석열 정부를 어떻게 생각하나?

윤 대통령, 보수라서 문제가 아니라 보수조차 못 되는 상황

조형근 : 윤석열이라는 개인 변수에 대해서 말한다면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평생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사람이 덜컥 대통령이 됐다는 점에서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걱정이 우스워 보일 정도로 잘하면 좋을 텐데 지금까지는 걱정한 것 이상으로 더 심각해 보인다. 지난번 수재 때의 구경꾼 같은 태도에서 보이듯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 아직도 자각이 부족해 보인다.

검찰총장 출신이다 보니 검찰 장악과 수사 개입 측면은 돋보인다. 검찰 장악이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일이지만, 이태원 참사 후속 조치를 보면 수사에 대한 ‘미시적 컨트롤’이라는 측면에서도 능력이 두드러진다. 현장의 경찰병력만으로 참사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며 ‘진노한 육성’을 대통령실이 공개했는데 명백히 수사 가이드라인을 내리는 행위다. 대통령이 저렇게 공개적으로 말하면 어느 경찰이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며 경찰청장과 행정안전부 장관 등 핵심 지휘부의 사전 예방 책임에 대해 철저히 수사할 수 있겠나?

MBC와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아닌 걸 문제로 만들어서 일부러 갈등을 조장한다. 대통령이 하면 안 되는 일에 능숙하다. 아마도 보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이해도 비전도 없다 보니, 대결을 통한 자기편 결속에 집중하는 걸로 보인다. 보수라서 문제가 아니라 보수조차 못 되는 상황이다. 정말 불행한 일이다.

보수 정치세력 자체도 그만큼 문제다. 정권은 잡았는데 무슨 어젠다를 통해 정권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건지, 어떤 세상을 만들겠다는 건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집권 주류세력이었다는 사람들이 이토록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지 갈수록 실망스럽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의 한 장에서 과연 한국에서 합리적 보수가 등장할 수 있을지 그 여부에 대해 가늠해봤지만, 역시나 매우 어렵다.

40만원이면 미얀마 고아원 40명 한 달 생계 꾸려

정재권 : ‘미얀마연대파주시민모임’을 통해 미얀마 북부지역의 고아원을 돕는 활동을 꾸준히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조형근 : 지난해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고 학살이 진행되던 무렵 파주에서 시민들이 모여 매주 촛불집회를 열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거주하는 미얀마 출신 박사과정 대학원생을 통해 미얀마 북부 카친족 자치주 호핀이라는 지역의 한 고아원 사정을 알게 됐다. 쿠데타 이후 미얀마 곳곳에서는 난민이 속출하고 외국에서 일하는 사람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서 부모를 사실상 잃은 아이들이 크게 늘었다. 반면 후원은 크게 줄어들고.

40명 가량의 고아원 아이들이 한 달에 우리 돈으로 40만 원이면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일주일에 하루 3000원 짜리 커피 한 잔을 아껴서 1만~1만2000원을 내자고 했고, 30여 명이 꾸준히 후원금을 내고 있다. 가끔씩 몇십 만원에서 100만 원이 넘는 큰돈을 내주시는 분들도 있고. 파주 시민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심지어 외국에서도 참여하는 분들이 있다. 고마울 따름이다.

우선 1년만 해보자고 시작했는데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무기한으로 진행하고 있다. 모금도 예상보다 잘 되어 기금이 좀 생겼다. 지난달에는 김포에서 매주 집회를 벌이고 있는 미얀마 노동자들을 찾아가 성금을 전했다. 또 파주의 미얀마 노동자들이 서로 돕고 미얀마를 돕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그 공동체가 주체가 되고 우리 모임이 그들을 돕는 형태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정재권 : 얼마 전 새 책 <우리 안의 친일>과 <키워드로 읽는 불평등 사회>도 출간했다. 책을 소개한다면.

조형근 : 두 권이 한 달 사이에 연속으로 나와서 생산성이 굉장히 높아 보이지만, 실은 다른 시기 동안 작업한 책들이 출간 시기가 좀 겹쳤다. 그렇게 생산성이 높은 편이 못 된다.

<우리 안의 친일>은 내 전공 공부의 결과를 쉽게 풀어쓴 책이다. 원래 전공이 일제시기 사회경제사다. 우리 사회엔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이 한국 현대사의 원죄라는 생각이 꽤 강하다. ‘토착왜구 척결’ 같은 살벌한 구호가 난무하기도 한다. 그런 입장보다 친일의 문제를 훨씬 깊고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친일’은 우리의 욕망과 습관 속에 스며들어 있다

소수의 친일파를 역사에서 단죄하면 친일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사실 친일은 저 악랄한 소수의 친일파만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과 욕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강한 힘을 숭배하고 약한 나라를 멸시하는 태도 속에,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태도 속에, 불평등 구조를 바꾸는 대신 실력을 양성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 좋은 일하면 된다는 정당화 속에 단절하지 못한 훨씬 깊고 강고한 친일의 욕망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최대한 쉽고 재미있게 쓰려고 애썼다. 문학작품과 영화, 대중가요, 사진 등이 많이 나온다.

<키워드로 읽는 불평등 사회>는 27개의 키워드를 통해 지금 한국 사회의 불평등, 차별, 모순 등을 이해하고 극복할 전망을 모색해본 책이다. 2020년부터 2021년까지 한 공중파 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매주 진행한 시사비평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시기별 이슈를 따라 방송으로 진행한 것이라 키워드 사이에 체계적 구성이 안 되는데, 키워드를 뽑고 추려보니 결국 불평등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수렴됐다.

정재권 : 키워드들이 궁금하다.

조형근 : 예를 들면 중대재해처벌법, 방송인 사유리씨의 출산, 재정준칙 등등. 출판사에서는 중학교 3학년 수준에 맞춰서 써달라고 주문했는데, 평생 학계에 있던 습관이 남아서인지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쉽고 구체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가급적 최신 통계로 현상을 설명하고, 외국 상황과 비교하고, 대안도 제시하는 방식으로.

나도 잘 모르는 이슈들이 많아서 책으로 쓰면서 더 많이 공부해야 했다. 공부의 길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더 해볼 만한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