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열기로 겨울 한파를 이기는 12월의 첫날, <박지원의 식탁>의 주제 역시 ‘월드컵’이다.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지역과 국민을 통합하고 지구촌과 호흡하는 ‘큰 정치’의 세계이다. 대통령에게는 그야말로 기회의 장이다. 박지원 비서실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월드컵 비화를 소개하며, 월드컵을 대하는 대통령의 바람직한 자세를 이야기한다. 2002년 월드컵 8강전에서 스페인과의 경기를 하루 앞두고 셋째아들이 구속됐지만, 김 전 대통령은 경기 전날 대국민 사과를 하고 다음날 경기장으로 향한다.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승리를 기원하는 대통합의 자리이기에. [편집자 주]

✔ 문체부 장관 시절 경기장 건설, 비서실장 시절 개최한 월드컵과의 인연✔ 축구 좋아하던 김대중 대통령, 청와대에서 붉은악마 티 입고 함께 응원✔ 가장 마음 아픈 날에도 국민을 대표하여 경기 관람 응원해야 했던 DJ✔ 스포츠는 가장 좋은 국민 통합의 장. 서로 다독이며 함께 응원하자✔ 윤대통령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 통한 포용과 화합의 리더십 보여주길

DJ, 박태준 만나고 한일전 경기 관람

김유정 : 지금 월드컵 시즌인데요. TV에 비친 카타르 현지에서 응원하는 붉은악마들, 또 비를 맞으며 함성 지르는 광화문 광장에 모여 있는 청년들 보니까, 그 (이태원) 참사가 없었더라면 함께 광장에서 응원했을 청년들이 생각이 나서, 마음껏 응원을 못하겠더라고요. 울컥하더라고요. 또 중동 지방에서 열리는 월드컵이라서 냉방시설을 빵빵하게 가동해도 더위에 선수들이 고생이 많을 겁니다.

박지원 : 그런데 심판이 벤투 감독에게 마지막에 레드카드를 주더라구요. 저도 레드카드를 줄 사람이 하나 있는데.

김유정 : 누구한테 레드카드를 주실지는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만.

박지원 : 천공 스님이나 건진 법사가 잘 예측을 했다면 이길 건데. 역시 지원 법사가 나서야겠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월드컵을) 어디서 보시죠?

이관후 : 다른 월드컵 같으면 대통령께서 같이 응원하는 모습이 언론에 나온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김유정 : 선수단에게 응원의 메시지 한마디 없지 않나요?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박지원 : 두 골이나 넣은 조규성 선수나 손흥민 주장의 투혼에 격려의 말씀을 보내줘야죠. 사실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징크스가 있습니다. 시합에 가거나 응원을 했다가 져버리면 ‘당신 때문에 졌다’ 이런 말이 나오니까 (공개적인 응원을) 안 해요. 사실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둔) 김대중 총재 때 (9월에) 도쿄에서 한-일 월드컵 예선전을 했습니다. 이걸 가야 하느냐(를 놓고 고민이 많았어요).

(위험부담을 생각하면) 안 가셔야 하는데 굉장히 (축구를) 사랑했어요. 이때 사실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 합의가 됐는데, 또 한 분의 거물인 자민련의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님의 입장이 결정되지 않았어요.그래서 저와 박태준 회장님 설득 문제를 고민하는데, 박 회장께서 월드컵 한-일 예선전 축구를 보러 가신다는 거예요. 가셔서 김대중 총재를 오쿠라 호텔에서 만나 소위 면접 시험을 보겠다는 거야, 그래서 (김대중 총재가 도쿄에) 가셨어요.

(2편에서 말씀드린 예화처럼) 미국의 정보기관 고위 간부와 2시간 얘기해서 ‘사상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시험 패스하듯이, 박태준 총리님도 그런걸 의심하니까. 거기서 얘기를 해서 ‘김대중 절대 그런 사람 아니다’라고 한 뒤 합의를 해서 DJP가 아니라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이 됐죠. 그리고 축구도 이겼어요.

이관후 : 만약에 지면.

박지원 : 한-일전에서 지면 DJ 때문에 졌다, 역시 재수가 없다, (이런 말이 나왔을테니) 저도 떨리더라구요.

김유정 : 예측할 수 없는 거니까요.

박지원 : 그런데 김대중 총재한테 말씀드리니까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으셔서 “가셔야 합니다. 축구도 이길 거고 TJ(박태준)도 설득될 겁니다”라고 했지요. 가서 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때로는 국민의 말을 잘 듣는 것이 대통령이 할 일이예요.

김대중 대통령은 경기장 안 나가시는 날에는 청와대에서 비서실 수석들과 모여서 응원을 했어요. 지금도 국민들이 ‘16강’을 염원하고 있는데 (윤 대통령이)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이 방송 나갈 때는 늦은 것 같고, 오늘(12월1일) 내가 대통령실에 전화해 가지고 ‘대통령실 응원장을 만들어라’고 해야겠다.

이관후 :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응원하시는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지요.

박지원 : 붉은악마 티셔츠 입고 응원하는.

DJT 연합과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관후 : 당시 일본에서 이겼던 경기가 이민성 선수가 마지막에 중거리 슛을 해서 이겼던 그 경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아마 송재익 캐스터가 ‘지금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멘트를 했지요.

김유정 : 이관후 박사님이 정치학 박사시잖아요. 그런데 영국 유학 시절에 축구 관련 기사를 쓰고, 런던 올림픽 때는 차범근 선수 통역을 해서 올림픽을 지켜봤다고 하거든요.

박지원 : (이 박사님) 달리 보이네.

이관후 : 당시에는 가난한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생계형으로 뭐라도 해야 하는데, 2010년 전후니까 영국 프리미어리그가 한국에 막 중계가 돼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차가 안 맞잖아요. 그래서 제가 ‘현지 에디터’ 이름으로 경기를 바로 보고 기사를 써서 보냈죠. 한국에서 아침에 일어나시는 분들이 바로 기사를 볼 수 있게 하는. 아르바이트였죠. 당시에 포털의 메인에도 제가 썼던 축구 기사들이 올라갔는데, 지금도 검색을 하면 나옵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는 우리가 축구에서 동메달 따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차범근 전 감독님이 해설위원으로 오셨는데, 제가 축구 기사를 썼던 인연도 있고 해서 (통역 가이드를 맡아) 한 달 가까이 매일 같이 지내고, 그리고 전 경기를 현장에서 봤지요. 우리나라가 동메달 따는 경기까지 현장에서 봤어요. 사실은 차범근 해설위원과 배성재 해설위원 두 사람이 (중계석에) 앉아 있으면, 차범근 해설위원 카메라 바로 바깥쪽에 제가 항상 앉아 있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의 또 다른 주역

김유정 :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우리가 이탈리아를 꺾고 16강 진출을 했죠. 그때 안정환 선수 골든골도 기억이 나고. 그때 월드컵 경기장 짓는 것에서부터 지대한 공헌이 있으시잖아요. 비서실장과 주무 장관으로서.

박지원 : 저의 단점 하나가 제 자랑을 많이 하는 겁니다. 기성세대들은 자랑하는 것을 싫어하더라고요. 그런데 젊은 세대들은 오히려 솔직하게 해주라 해요. 사실 제가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면서 구장을 지었고,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월드컵을 치러냈습니다. 당시 월드컵 구장이 10개 필요한데, 한일 월드컵이니 우리는 5개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일본에 5개 있고.

그래서 국비로 5개를 선정하니까 지자체에서 ‘우리 예산으로 국비 지원 없이 만들겠다’고 해서 인천 문학 경기장, 전주, 특히 서귀포는 제주도에서 하는 게 아니라 서귀포시장이 (하겠다고). 그래서 그걸 다 허가했어요. 그런데 자기들이 짓겠다고 해놓고 중간에 뻗어버려. 돈 없다고. 그러니 웬수 같은 기자들이 월드컵은 다가오는데 구장 안 짓는다고 얼마나 두드려 패던지. 그런다고 내가 전용기가 있어서 ‘너 타지 마’ 할 수도 없고.

제가 문체부 장관이기 때문에 생각을 해낸 것이, 체육진흥기금이 몇백억 있었어요. 그래서 이걸 생각하고, 다섯 곳 단체장들을 초치해 “(지원) 해줄 테니 지어라”고 했죠.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께 국무회의에서 건의를 했죠. “구장을 만들지 못하면 우리 월드컵 안 됩니다”라고. 그러자 대통령께서 허락해서 체육진흥기금을 풀어 구장을 지었어요.  파주의 축구 전용 연습장도 허정무 감독의 요청을 받아 제가 직권으로 지었지요.

이관후 : 2002년에 우리 대표팀이 굉장히 좋은 성적을 거두는데 여러모로 상당한 기여를 하셨네요.

16강 진출의 숨겨진 비밀

박지원 : 이번 BTS 병역 면제를 안 해줬습니다만, 저는 하자는 거예요. 대중문화 예술인들도 (병역 면제에) 포함시켜야지, 왜 안 시키냐, 라는 주의인데, 사실 케이팝(K-pop)이 세계에서 제일 돈도 많이 벌어오고 한국을 제일 많이 알리지 않습니까?

2002 월드컵 당시에, 16강 진출하면 병역 면제를 해주자는 거는 홍명보 주장, 또 지금 고인이 된 유상철 선수가 저를 찾아왔어요. 자기들은 군대를 갔다 왔는데, 지금 후배들에게는 이게 가장 큰 동기 부여가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제가 아무리 장관이라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님께 말씀드리기로 했어요.

개막전 경기 전에 대통령께서 선수들을 일일이 손을 잡고 격려를 하는데, 홍명보 선수가 눈도 부리부리하고 당차게 이 건의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대통령님도 간단한 일이 아니라 시원하게 답을 안 하고, ‘해당 장관하고 상의를 잘 해보겠다’라고 하시고 가세요. 그래서 제가 대통령님 가실 때 같이 안 가고, 들으시라고 뒤에서 큰 소리로 “내가 잘 해볼테니까 여러분은 경기에서 이기라”고 했지요.

경기라는 게 제일 잘하는 선수들을 모아놓은 거니까, 마지막에 컨디션이 중요하잖아요. 그 동기 부여를 최고로 해준 거지.

이관후 : 16강 진출을 히딩크 감독님만 시킨 게 아니라, 그 뒤에 박지원 실장님도 계셨네요.

박지원 : 그런 큰일이 벌어질 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해요.

한일 월드컵 당시 골을 넣은 박지성 선수와 기뻐하는 히딩크 감독.

붉은악마로 레드 컴플렉스를 극복하다

김유정 : 붉은악마 응원 이야기를 하면, 광화문 광장, 시청 광장을 떠올리게 되고, 그 붉은 물결을 외신에서 사진 찍어 보냈더니 ‘이거 합성 아니야. 이렇게 많이 모였단 말이야’라고 놀랄 정도였잖아요.

박지원 : 그러니까 그때 처음으로 태극기를 몸에다 감고 젊은 여성들이 스커트처럼 사용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전에는 우리가 태극기를 조금 잘못하면 훼손한다고 (큰일이 났죠).

그런데 미국에서는 모든 장식의 액세서리에 별, 그리고 성조기가 들어간 것은 절대 실패를 하지 않는답니다. 우리나라에선 이제 태극기가 그때 상용화된 거예요. 얼마 전까지는 태극기 훼손이라고 비난했는데. 그때부터 태극기가 굉장히 일반화되고 그렇게 몸에다 칭칭 감아도 된다, 상용화됐다, 저는 그렇게 봐요.

이관후 : 태극기가 원래 국가의 자랑스러운 상징인데, 그동안은 권위주의 정부 때 권위적이고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렵고 그랬는데, 지금 말씀 들어보니까 월드컵 때 광화문 광장에서 우리한테 가깝게 다가왔고 국민통합의 상징이 됐죠.

박지원 : 그런 변혁을 가져온 그런 때가 있었어요.

이관후 : 태극기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그 시대 상황이 잘 반영되는 것 같아요.

김유정 : 그런데 지금은 또 태극기가 이상한 상징이 되어서.

박지원 : 붉은악마도 나왔잖아요. 기독교에서는 악마라는 걸 굉장히 싫어하죠. 또 왜 하필 붉은악마냐, 역시 김대중이 사상이 의심스러우니까 빨간 티셔츠를 입고, 붉은악마라고 한다, 이런 비난도 많이 받았죠. 그래서 제가 붉은악마를 직접 만났어요. 그 사람들을 만나서 (색깔과 명칭을) 좀 바꾸면 어떠냐 했더니, 자기들은 이게 무슨 북한을 의미하고 공산당을 의미하냐, 우리는 좋아서 하는 거다,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한나라당이 빨간색으로 바꾸더라고. 민주당이 제일 잘못한 것은 빨간색 먼저 안 가져간 거야.

김유정 : 어떤 의미에서는 2002년 월드컵이 우리가 소위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하던 계기였네요.

박지원 : 엄청난 변혁이 있었어요. 스포츠가 국민에게. 그래서 지금 대통령실에서는 내일 경기라고 하면, 국민들한테 분위기를 잡아줘야 됩니다. 예를 들면 대통령이 카타르에 가실 수도 있지. 아니면 대통령실에서 이렇게 응원을 하겠다, 그런 것도.

김대중 대통령도 붉은악마 옷을 입고 고깔을 쓰고 수석과 비서관, 행정관들이 치맥을 들면서, 우린 그렇게 했어요. 그런 분위기를 잡아가야 되는데.

김유정 : 지은 죄가 많아서 그래요. 이태원 참사를 책임지는 사람 한 명 없이 지나가려고 하니까.

박지원 : 그렇게 애도한다고 하면 이상민 장관 정도는.

김유정 : 정리하고 넘어갔어야죠.

 

연평해전과 월드컵, 분단 후 처음 서면사과를 받다

박지원 : 2002 월드컵 때, 광주에서 어디하고 했더라?

김유정 : 스페인전. 그때 저희 비서실에서 대통령 모시고 갔었죠.

이관후 :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죠. 당시에. 연평해전도 있었고.

한일 월드컵 당시 광주에서 열린 스페인 전을 관람하러 간 김대중 대통령(사진제공:국가기록원)

박지원 : 아니 북한 놈들이 포격을 가했는데 얻어맞는 사람은 나야. 9·11 테러 후 많은 나라들이 2002 월드컵에 우리 한국에 분단 리스크가 있어서 북한의 도발을 염려해 오지 않겠다는 것을,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와 안전 월드컵을 표방해서 하는데, 연평도를 딱 때려버린 거야. 그러니까 대통령님이 저를 불러가지고 엄청나게 야단을 치는데, 어떻게 김정일 위원장이 이럴 수가 있냐는.그래서 제가 항의를 했어요. 그랬더니 김정일 위원장이 황해도 해군 주둔 사령관의 오판으로 이런 사태가 났다. (위에서 시킨 게 아니다). 그래서 거기를 인사처벌했고,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더라고

그래서 대통령님께 “김정일 위원장이 이렇게 사과했습니다”라고 보고했더니, ‘어떻게 이 큰 사건에서 월드컵 상황에서 말 한마디 했다고 세계인들이 믿느냐, 서면으로 받아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임동원 국정원장이 나서 가지고 서면으로 사과를 받았어요. 분단 이후로 최초로 서면으로 사과를 받았지요.

이관후 : 그때 당시에도 화제가 됐죠. 그런데 그것 말고도 또 대통령 아들 문제도.

스페인전 당일 대통령의 상황

박지원 : 둘째 아드님이 비리 관계로 구속이 되고. 거기까지는 좋았어요. 그런데 LA에 있던 셋째 아드님까지 연관이 되어 가지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이관후 : 월드컵 기간 내내 거의 그 문제로. 박지원 : 당시 (대통령 가족 문제를 담당하는) 김한정 부속실장이 검찰총장을 만났는데, 도저히 구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야. 제가 그래서 이희호 여사님한테 설명을 했어요.

진짜 이 여사님은 훌륭하신 분이에요. 저는 늘 '김대중은 이희호로부터 나왔다'고 하는데. 말씀을 들어보시더니 ‘박 실장, 불러들여서 구속시키세요’ 하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연락해 들어오게 하겠다고.

참고로 이 셋째는 이희호 여사님이 마흔이 넘어서 본인이 직접 낳은 아들이잖아요. 그리고 대통령님한테 가서 말씀을 드리니까, 대통령이 아무 말씀을 안 해. 로스앤젤레스에서 귀국을 하니까 기자들이요 공항에서부터 헬리콥터를 띄워가지고 따라와.

김유정 :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면서 따라갔죠.

박지원 : 그때 MBC였을 거야. 윤 대통령이 야단칠만 해

김유정 : 그래도 김대중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마!’라고는 안 하셨죠.

박지원 : 그때, 셋째가 청와대 안 들어왔어요. 아버지, 어머니 못 만났어요. 김한정 부속실장한테 ‘야 어디로 데리고 왔냐’ 그랬더니, 웃으면서 ‘그건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라고 해요.

박지원 : 저는 이미 어딘지 알고 있는데, 나한테 보고가 왔는데, 김한정 실장이 말을 안 하니까 나도 말을 못해.

이관후 : 알아도 얘기할 수 없죠.

박지원 : 어쨌든 난리가 났어. 광주에서 스페인전이 있는 날, 그 전날부터 구속이 되니까 제가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십시오”라고 말씀드렸죠. 대통령 집무실에 옆에 조그마한 방이 있어요. 거기서 대통령님하고 저하고 둘이 앉았는데 두 시간이 되도록 말씀을 안 하세요.

내가 화장실 가고 싶어 나왔어요. 나와서 보니까 박선숙 홍보수석이 있어. 참 유능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심기 관리도 아주 잘해. 그래서 '내가 가서 지금 몇 시간을 얘기하고 설득을 해도 말씀을 안 하신다'고 말하고 박 수석에게 설득을 부탁했어요. 박선숙 수석이 능력이 있어. 한 40분 있다가 전화 왔더라고. ‘실장님 성명서 가지고 오세요’라고. 그래서 내가 써 가지고 올라갔어요.

그래 가지고 그다음 날 광주에 스페인 경기를 보러 가야 하는데, 아침 9시에 청와대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겁니다. 대국민 사과를 하고 이제 광주로 출발하는데, 김대중 대통령님은 어디 가실 때 꼭 부부간에 같이 가시는데, 제가 “오늘은 대통령님 혼자 가십시오”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자식을 구속시키게 했기 때문에, 대통령님은 사죄를 했지만 어머니는 우셔야 됩니다”라고도 했지요. 그랬더니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이제 관저에서 딱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의외로 샤이하고 외로워하세요. 저를 딱 쳐다보더니 ‘박 실장은 무슨 일 있는가’ 그러세요. 원래 지방과 외국에 가실 때는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같이 안 가요.

이관후 : 네. 따로따로 움직이시죠.

박지원 : 그렇죠. 제가 “대통령님이 가시면 저는 청와대에 있어야 합니다. 뭐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럼 가지’ 하세요.

이관후 : 외로우셨구나.

김유정 : 마음이 그러셨겠네요.

월드컵 개막식 참관 각국 정상 청와대 초청 오찬(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이회창, 정몽준, 김흥국의 추억

박지원 : 갑자기 비서실장이 가게 되면 차 행렬부터 다 달라지고, 또 광주 구장의 VIP 석이 9개인가 밖에 안 돼요. 그것도 갑자기 바꿀 수 없으니까 저는 대통령님 뒷자리에 원래 경호실장이 거기에 앉아야 되는데, 제가 앉고, 경호실장은 간이 의자 갖다가 앉고.

박지원 : 가시는 길에, 저하고만 둘이 앉아서 얘기하고. 광주에 가서도 그 대기실에서도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안 하시고, 의례적으로 악수만 하시고.

그리고 이제 딱 시합이 들어간 거야. 그런데 호랑나비 부르는 김흥국 씨가 있잖아요. 축구 광팬이고,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 따라다니고. 그런데 당시에 이회창 총재가 제1 야당 대표고 대선 후보인데, 일반 응원석에서 응원하겠다고 해가지고 건너편에서. 우리는 볼 수는 없죠.

그런데 김흥국 씨가 와서 나한테, ‘실장님 지금 이회창 총재가 저기 앉아 있으니까 우리 선수들이 골을 못 넣습니다’라는 거야. 이게 웃을 수도 없고 안 웃을 수도 없는데. 그런데 조금 있다가 또 와서, ‘이회장 총재가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깁니다’라는 거야. 뭔 소린가 했더니, 비행기 사정으로 연장전을 못 보고 나갔다는 거야.

이관후 : 연장전을 할 거라고 생각을 못했군요. 비행기 예약 시간이.

김유정 : 승부차기까지 갔었잖아요.

박지원 : 승부차기를 해서 이기니까 김흥국이가 또 왔어. 자기 말이 맞다고. 김대중 대통령도 어떻게 얘기할 수 없으니까 빙긋이 웃기는 하시지.

이관후 : 그날 하루 동안에 굉장히 많은 일이 있었군요.

박지원 : 그날 제가 뒤에서 얼마나 응원 소리를 세게 하고 만세하고. 얼마나 세게 했든지 그 후로 대통령께서 ‘박 실장은 음성이 왜 그렇게 커. 도대체 뒤에 앉아 가지고 어떻게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귀청이 멍멍하더라’ 그러셨어요. 그날 사진이 목포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김유정 : 정말 함께 기뻐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이제 4강에 올라갔잖아요. 추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날 대통령님은 또 그런 아픔을 갖고 계셨네요.

박지원: 이겼어도 서울 오는 기차에서도 혼자 계시고. 나만 옆에 앉아 있었어.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관후 : 정치인 또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날에도 다시 국민들 앞에 서서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 어떻게 보면 그런 일이 생기면 원래 예정이 돼 있더라도 ‘아침에 사과까지 했는데 내가 꼭 굳이 가야 되겠어?’, 이럴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어려운 결정 하셨네요.

박지원 : 김대중 대통령도 그만하라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일체 그러한 것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대국민 사과하시고.

이관후 : ‘국민 축제의 날, 그 전날 대통령 아들을 굳이 데리고 가서 잡아놓고, 대통령이 사과까지 하게 만들고.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어?’ 대통령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박지원 : 그래도 소위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통령으로서 그렇게 검찰에 개입할 수는 없었던 거지.

김유정 : 그때 검찰은 지금 검찰하고 다른 검찰인 것 같습니다.

박지원 : 아니죠. 같은 검찰인데, 대통령이 다르지. 원래 검찰은 누구든지 잡아 넣으려고 하는 속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검찰은 무는 거예요.

이관후 : 오늘 월드컵과 정치, 대통령 이렇게 얘기를 해보고 있는데요. 당시에 2002 월드컵의 최고 수혜자는 아까 말씀하셨던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아닐까요? 당시에 노무현 후보하고 단일화까지 가는 과정도 사실은 월드컵이 없었으면 어려운 상황이었을 텐데요.

박지원 : 어쨌든 당시에 정몽준 회장이 그렇게 월드컵의 공로자 아니에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하고 단일화 어쩌고 하는 과정에서 밉상이 박힌 거야. 그래서 4강 진출 카퍼레이드를 하는데 빼놓았나 봐. 나는 그것까지는 몰랐죠.

이관후 : 네. 그것까지 아시긴 어렵죠.

박지원 : 그런데 (빼놓았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연락해 가지고 정몽준 회장 빨리 태우라 했지요. 야단도 치고. 그런데 문제는 정몽준 회장이 지금도 어디 가서 박지원이 안 태웠다, 이렇게 오해를 하고.

이관후 : 반대로 알고 계시네요.

김유정 : 박지원의 식탁을 통해서 꼭 바로 알려야겠네요.

박지원 : 내가 태웠는데, 안 태웠다고. 내가 그렇게 모략을 많이 받는다니까요. 난 정몽준 회장 태웠습니다.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을 축하하는 카 퍼레이드 중 환호하는 시민들에세 태극기를 흔들며 인사하는 히딩크 감독과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 회장.

지금은 월드컵이 가장 큰 정치

이관후 : 월드컵이 지금 한창인데요. 2002년 월드컵 때 보았듯이, 국민통합에 가장 좋은 게 스포츠고, 또 국민이 하나 될 수 있는 통합의 장인데, 이번 월드컵에는 우리 대통령실에서 메시지가 전혀 안 나오네요.

한편으로는 국내 정치 상황이 이러니까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늘 얘기 나눠보니까 2002년 월드컵 때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대통령이 스포츠로 국민통합을 위해 노력한 게 실감이 나네요.

박지원 : 지금 이 순간은 월드컵이 가장 큰 정치예요. 그러니 국민들이 응원을 할 수 있도록, 성원을 보낼 수 있도록 대통령실에서 그러한 이벤트를 해주는 게 좋다니까.

이관후 : 그러게요. 평소에 윤 대통령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했던 국민들도 월드컵 응원한다고 싫어하겠습니까?

박지원 : 우리나라 조규성 선수가 처음으로 골 넣었을 때 같이 격려도 해주고 감동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김유정 : 경제도 그렇고, 살기도 너무 팍팍하고. 얼마 전 참사로도 국민들이 굉장히 지금 마음 둘 곳이 없어요. 기댈 곳 없는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참사의 수습을 조금이나마 명쾌하게 잘하고, 월드컵 때 서로 다독이면서 함께 응원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아요.

박지원 : 그렇게 하시겠죠.

이관후 : 이번 포르투갈 전 때는 여야도 없고, 좌우도 없이 다 내려놓고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모습을 대통령실이 이끌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김유정 : 저희가 보니까 이제 축구 선수 11명이 뛰는데 골대가 12번째 선수라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이관후 : 우루과이 전에서 골대를 맞고 두 번이나 튀어나왔죠.

김유정 : 골대까지도 힘을 다 모아가지고 선수단 코치 감독 할 것 없이 우리 팀이 이기기를 바라는 열망. 이런 것들의 총합이 함께 만들어내는 감동의 드라마 아닌가 싶어요. 근데 과연 지금 우리 정치와 우리 정부는 그렇게 국민의 열망을 다 모아서 국정운영의 방향을 잘 잡고 있는지 좀 답답하네요.

박지원 : 결과가 잘못되면요, 벤투 감독 출국금지 당합니다. 손흥민 선수 압수수색 당하고, 조규성 선수 체포할거야.

‘축구만 이길 수 있다면’

김유정 :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오네요.

박지원 : 저야말로 가슴이 아프죠. 서훈 안보실장이 구속영장이 청구돼 내일 실질심사를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밤에 응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영장이 기각되냐 아니냐 마음 졸이겠죠. 저도 부르겠지만 어떻게 됐든 모든 것을 초월해서 내일만은 이겼으면 좋겠다 하는 일념밖에 없어요.

김유정 : 정말 와! 하고 함성도 좀 질러보고, 속 시원하게 웃고.

박지원 : 저한테 검찰총장이 전화해서 ‘내일 16강 이기는 것을 바라냐 검찰 조사 받는 것을 바라냐’ 묻는다면, 제가 검찰조사 받더라도 16강 이겼으면 좋겠어요.

이관후 : 굉장히 간절하시네요.

박지원 : 다 그렇잖아요. 지금 어려운데 그래도 그 순간만이라도 한 번 국민이 행복하게 활짝 웃는 시간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11월 24일 한국-우루과이전 수원월드컵경기장 응원전 모습. 경기도는 12월 2일 포르투갈 전도 같은 장소에서 응원전을 가질 계획이다. (사진:연합뉴스)

 

대통령의 포용과 화합의 메시지 필요할 때

김유정 : 지금 가장 필요한 점이 축구에 비교해서 어떤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실장님의 지혜의 수첩에서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박지원 : 정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대통령께서 자꾸 법치를 강조하시는데, 공자님도 법치는 맨 마지막이라고 그랬어요. 축구만 하더라도 국민통합하고, 열렬히 성원하면 이기는 겁니다.

대통령 관저에서 포옹했는데, 그 다음 포옹 대상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여야 한다. 그렇게 정치를 풀어가시고. 지금 도어 스테핑 문제로 언론하고도 긴장이 팽팽한데, 대통령께서 기자간담회를 하든 도어 스테핑을 다시 하시든, MBC 기자 불러서 해결을 보셔야죠.

이렇게 이재명 대표 불러서 ‘잘 좀 도와주세요’하고, MBC 기자의 등 때리는 모습을 국민들이 TV를 통해서 볼 때, 이제 좀 풀리는구나 느끼실 겁니다. 저는 가장 간단하고 좋은 방법으로 정치를 좀 풀어가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외교도, 북한도, 민주주의도 다 해결될 수 있다, 이런 말씀드립니다.

김유정 : 축구를 통해서 대통령님의 포용과 화합의 리더십 저희가 기대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