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묵직한 ‘화두’ 하나가 던져지고 있다. 한국은 핵무장이 필요한가? 핵무장은 한반도에서 불필요한 긴장감만 높이는 것인가? 북한뿐 아니라 중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수단으로 핵은 필요한가? 핵무장을 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는가? 핵무장을 미국이나 중국이 용인할 것인가?올 하반기 들어 북한발 ‘핵 위협’ 수위가 높아지면서, 한국도 핵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최근의 ‘핵 개발론’은 기왕의 ‘핵무장론’이 보수 진영의 단골 레퍼토리였던 것과 달리, 온건·중도 진영에서도 제기돼 눈길을 끈다. ‘북한 핵의 불가역성을 인정하고, 자체 핵무장까지 가야 할 시점’이라는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매우 조심스럽고 민감한 ‘핵 개발론’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위해 <피렌체의 식탁>이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그 첫 번째로, 박정욱 필자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서 핵무장을 이룬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를 검토하며, 한국이 두 나라의 경로를 밟을 수 있는지 따져본다. 그리고 ‘노’(No)라고 결론내린다. 왜 그럴까? [편집자 주]

NPT 체제 하에서 우리도 과연 이스라엘같은 핵보유 가능할까?NPT 체제 무시하고 핵무기 개발한 사례는 인도, 파키스탄, 북한이 전부인도는 중국과의 카슈미르 국경 분쟁에서 패한 후 핵개발에 매진인도 핵개발에 위협을 느낀 파키스탄 역시 연쇄적으로 핵 무기 개발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과 우리나라 상황은 많이 다르다는 현실

이미지:셔터스톡

최근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을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진 듯하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들어선 이후 핵무장에 성공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를 보면서 한국이 핵무장을 시도할 경우 넘어야 할 현실적인 과제가 무엇인지 검토해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경우 우리의 안보와 국제적 위상은 훨씬 더 향상될 것이다. 하지만 핵보유국이 되려면 한국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 현재의 핵무기 보유국 가운데 한국이 따라 할 수 있는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은 현실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실현이 가능한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한국의 핵무장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려야 한다.

1. 이스라엘은 한국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이근 교수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에선 영국과 프랑스, 남아시아에선 인도와 파키스탄, 중동에선 이스라엘이 핵을 가졌다”며 이 중에서 이스라엘을 한국의 핵무장 모델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핵 개발 과정은 한국이 따를 수 있는 모델이 아니다. 그때와 지금은 핵을 통제하는 글로벌 거버넌스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개발한 시점은 1960년대 중반이다. NPT 체제가 출범한 1970년 이전에 이뤄진 일이다. 당시는 전 세계가 미국이 이끄는 진영과 소련이 이끄는 진영으로 나뉜 냉전시대였고, 미국의 진영에 속한 이스라엘의 경우 진영의 패권국가인 미국만 허락한다면 핵무장을 할 수 있었다. 

이집트를 필두로 한 아랍 연합군과 생존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기술지원을 받아 핵무기를 개발했으며 미국은 이 사실을 알고도 눈감아 주었다. 하지만 NPT 체제 출범 이후인 오늘날에는 핵보유 기득권 국가이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5개 나라가 다른 나라의 핵 개발에 대해 공동으로 규제하며 세계 35개국 대표로 구성된 이사회가 운영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통해 핵시설을 사찰하고 있다. 

NPT 체제를 요약하자면, 핵을 보유한 미, 영, 프, 러, 중 5개국이 다른 나라들에게 이렇게 약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핵을 가지고만 있고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가지고 있는 핵무기도 감축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전부 핵을 보유해서는 안 된다. 예외적으로 평화적 핵 이용은 허락하겠지만 그 경우에도 IAEA의 감시를 받아들여야 한다.” NPT 체제 출범 시점인 1970년부터 핵 기득권 5개국이 모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1992년 이후 프랑스와 중국이 조약에 가입함으로써 NPT 체제는 명실공히 세계 안보 질서의 최상위 룰로 기능하고 있다.

NPT 체제 아래서는 미국이 묵인한다고 해서 비밀리에 핵무장을 할 수 없다. 당장 미국에 홀로 통제되지 않는 IAEA의 면밀한 사찰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지금은 1960년대와는 달리 초정밀 카메라를 탑재한 위성시스템이 발달해 있다. 한국이 미국의 도움 아래 비밀리에 핵 개발을 하더라도 이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일 중국이나 러시아가 위성 등을 통해 탐지할 것이며, 일단 한국의 핵 개발이 포착된다면 이들 나라가 순순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위성 등 감시 시스템이 빈약했던 1960년대에 비해 21세기에는 핵무기의 비밀 개발이 훨씬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다. 

만일 한국의 핵 개발이 대외적으로 노출됐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감싸준다면 미국은 북한과 이란 등 적대국의 핵 개발도 용인해줘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핵 개발은 미국이 덮어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필히 NPT 조약에서 탈퇴해야만 이룰 수 있는 목표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사례는 한국의 핵무장 모델이 될 수 없다.

2. 또다른 모델?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과정

NPT 체제를 거부하고 핵무기를 개발한 사례는 인도, 파키스탄, 북한이 전부이다.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건국 이래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는 것. 미국이 제재를 한다고 해도 별로 잃을 것이 없는 국가적 체질이 갖추어진 나라들이다. 핵보유국으로 아직 인정받지 못한 북한은 논외로 하고, 당당히 핵보유국에 이름을 올린 인도와 파키스탄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건국 초기부터 적대관계였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에서의 잦은 군사적 충돌에도 불구하고 핵무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인도의 초대 대통령인 자와할랄 네루는 ‘평화적 원자력 에너지 개발’을 내세워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게 원자력 기반 시설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이 첨예하게 펼쳐지던 시기에 비동맹 세력의 리더를 자임하던 인도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게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이 시기 영국과 미국 등은 연구용 원자로, 고농축 우라늄 등을 제공하고 원전 건설 프로젝트에도 도움을 주었다.

파키스탄 역시 건국 이후 상당 기간 핵무장을 꿈꾸지 않았다. 1955년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이스칸데르 미르자 대통령은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했다. ‘거인’ 인도와 군사적 대치를 하고 있던 파키스탄으로서는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과 손을 잡는 게 안전했기 때문이다. 미국도 파키스탄을 자신의 편으로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비동맹 세력을 이끌며 소련과 미국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인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아시아를 넘어 남하하려는 소련의 시도를 막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파키스탄에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파키스탄 정부도 미국의 의지에 반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이 먼저 평화적 목적의 원자로 지원을 제안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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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도의 핵무장 ‘방아쇠’를 당기다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1950년대 내내 유지되던 적대적 균형을 깬 당사자는 중국이었다. 1962년 중국과 인도 사이의 카슈미르 국경 분쟁에서 인도가 패배한 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티벳을 넘어 인도 국경으로 진격해 들어오기 직전까지 인도의 네루 총리는 자신이 중국 지도부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었다. 네루는 ‘죽의 장막’에서 은거하고 있던 중국을 ‘비동맹 사교계’에 데뷔시켜 주었노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며, 특히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긴밀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험준한 고산지대를 타고 급작스레 공격을 개시한 중국군에게 인도군이 속절없이 패배하고 카슈미르 북동부의 악사이친 지역을 빼앗겼다. 인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서쪽의 적인 파키스탄과 동쪽의 적인 중국에게 협공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인도의 정치권과 언론을 강타했다. 게다가 1964년 중국이 핵보유국이 되자 인도인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때부터 인도의 엘리트들 사이에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후 인도는 본격적으로 핵 개발에 매진한다.

인도의 핵 개발은 연쇄적으로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자극했다. 특히 1965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파키스탄 군부 내에서 높아졌다. 하지만 당시 아유브 칸 파키스탄 대통령은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는 인물이었기에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핵 개발을 추진하려 하지 않았다. 1972년 파키스탄에서 오랜 군부 정권이 막을 내리고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새 대통령이 되자 친서방 정책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 등에서 연료 및 중수를 지원받아 1972년 카라치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기에 이른다. 파키스탄도 서서히 독자적 핵 개발 능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1970년 3월 5일 세계 각국의 핵 개발을 통제하기 위한 최상위 거버넌스인 NPT 체제가 발효됐다. 인도는 이 조약에 가입을 거부했다. 인도에게 있어서 NPT는 적대국인 중국의 핵 보유를 보장하는 반면, 인도는 영구적으로 핵을 보유할 수 없게 가로막는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4년 5월 남아시아의 핵 개발을 자극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인도가 첫 번째 핵기폭장치 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세계는 NPT 체제 출범 이후 핵확산 통제의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파키스탄, 인도의 핵무장에 화들짝 놀라다

누구보다 놀란 건 당연히 파키스탄이었다. 파키스탄 군부에서는 보다 과감하게 핵 개발에 나서자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후 파키스탄도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로 들어선다. 1976년 파키스탄 역시 핵확산금지조약 가입을 거부했다. 인도가 NPT 가입을 거부하고 핵 개발에 나서고 있는데 이에 가장 위협을 받는 파키스탄이 비핵화를 추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파키스탄에 대한 일체의 지원을 중단하고 외교적·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미국 상원은 1976년 글렌-사이밍턴 수정안(Glenn-Symington Amendment)을 통과시켜 IAEA의 승인 없이 재처리 및 농축 시설을 도입하는 국가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중단하는 제재을 실시하기로 했다. 물론 인도와 파키스탄이 최우선 타깃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핵실험에 성공한 인도는 물론이고 파키스탄의 핵 능력 역시 이 시점에선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다. 파키스탄은 연간 10~20kg의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한 독자적 핵 재처리 시설을 건설할 능력을 보유했다. 게다가 두 나라는 생존을 위해 굳이 미국에게 손을 벌릴 필요가 없었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농업 비중이 압도적으로 큰 나라였고, 수출도 공산품보다는 자원에 치우쳐 있었다. 미국의 제재는 원조자금이 들어오지 않는 걸 의미했을 뿐, 두 나라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특히나 냉전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인도와 같은 대국을 압박할 경우, 자칫 소련이 인도와 손을 잡는 어부지리를 취할 가능성이 컸다. 

서방의 제재는 인도·파키스탄에 왜 무력했나

결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제재 조치는 인도를 그리 오래 옭아매지 못했다.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1970년대 후반 미-소 데탕트가 깨지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안보 위기감이 커지자 의회의 강력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인도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고 오히려 우라늄 수출과 중수 제공을 약속했다. 인도는 비동맹이라는 외교적 자산, 미국에 대한 낮은 의존도, 그리고 거대한 ‘덩치’를 최대한 활용해 서방세계의 제재를 피해 가며 핵보유국의 길로 나아간 셈이다.

인도에 비해 존재감이 훨씬 약한 파키스탄도 인도와 비슷한 시기에 서방의 제재에서 풀려났다. 역시 계기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었다. 파키스탄은 아프간과 지리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구성원인 파슈툰족이 파키스탄 북서부에 모여 살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소련의 침공에 맞서고 있는 아프간에서 작전을 펴기 위해서는 파키스탄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미국은 ‘글렌-사이밍턴 수정안’으로 인한 제재를 해제하고 파키스탄에 군사·경제 원조를 재개했다. 

여기에 중국마저 파키스탄에게 지원의 손길을 보내왔다. 적의 적은 친구라 했던가. 인도의 핵무기 개발에 위기감을 느낀 중국은 인도의 또 다른 적대국인 파키스탄과 손을 잡아 인도를 견제하려 했다. 중국은 인도의 핵 개발을 자극하고, 인도는 다시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자극하는 도미노 현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198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이어 냉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략적 가치는 크게 떨어졌다. 그러자 미국은 다시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핵 개발 억제 정책을 실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정부는 미국이 주도하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에 서명을 거부하고 1998년 5월 11일과 13일 총 다섯 차례의 지하 핵실험을 강행해 성공한다. 그리고 인도 정부는 전격적으로 핵보유국을 선언했다. 파키스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지하 핵실험이 실시된 지 2주 후 인도보다 한발 더 나아간 여섯 차례의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이미 1992년 무렵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던 파키스탄도 핵보유국을 선언했다. 

전 세계는 남아시아의 두 적대국이 경쟁적으로 벌이는 핵실험에 크게 놀란다.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유엔 안보리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장을 비판하는 결의안 1175호를 통과시키고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일체의 금융 여신 제공 및 경제·군사 지원을 금지하는 초강력 제재를 단행했다.

하지만 인도에 대한 제재는 이번에도 오래 가지 못했다. 1990년대를 통해 경제적·군사적으로 무섭게 성장해버린 중국 때문이었다. 미국 내에서는 점차 ‘중국 위협론’이 힘을 얻고 있었고 국경에서 여전히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인도의 전략적 가치가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제재는 6개월 남짓 실시되다가 서서히 해제되었다. 

특히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후 미국 부시 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인도 정부도 여기에 동참했다. 이 부분에서 미국과 인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9·11 테러를 가한 알카에다의 지도부는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에 맞서 싸운 무자헤딘 전사들이었다. 당시 파키스탄인들 가운데서도 이슬람 대의를 위해 아프간 전쟁에 뛰어든 무자헤딘 전사들이 있었는데, 소련과 싸워 아프가니스탄을 ‘해방시킨’ 이들은 다음 ‘해방시킬’ 지역으로 인도령 카슈미르를 지목했다. 

무자헤딘 전사들에게 인도령 카슈미르는 ‘힌두 이교도’들이 무슬림의 땅을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무슬림 형제들을 ‘압제’하는 공간이었다. 그리하여 1990년대 내내 카슈미르 지역에서는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둔 급진 이슬람주의 무장조직들의 테러 공격이 계속됐으며, 이것이 인도의 안보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은 곧 인도 정부의 숙원사업이기도 했다. 이렇듯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양국은 2001년 정상회담을 통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으며, 2005년에는 ‘글로벌 동반자 관계’로 업그레이드함과 동시에 ‘미국-인도 민간 핵 협력 구상’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더 나아가 2008년 10월 1일 미국 의회는 ‘미국-인도 핵 협정’을 비준함으로써 인도를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파키스탄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 제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해주고 있는 탈레반 정권을 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전격 침공한다. 또다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을 벌여야 했던 미국은 이번에도 파키스탄의 협력이 필요했다.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국내 무슬림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협조했다. 물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파키스탄에 대한 모든 제재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막대한 원조자금이 파키스탄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로 인해 무샤라프 정부는 역대 최고 수준의 경제 호황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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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도와 파키스탄은 한국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인도와 파키스탄은 한국의 핵 개발 모델이 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오’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NPT 체제를 거부했다. 물론 그에 따른 제재를 겪었다. 하지만 제재 조치는 두 나라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두 나라는 자신들의 지정학적, 국제정치적 위치를 교묘하게 이용해 강대국들을 설득했다. 크게 세 가지 지점에서 한국과 비교해볼 수 있다.

한국, 미국과 거래할 ‘카드’가 없다

첫째, 두 나라는 모두 미국의 절묘한 안보적 이해를 공유하는 지정학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중요한 카드였으며, 전통적인 비동맹 세력으로서 미국과 미국의 경쟁국 사이를 오가며 외교적 줄타기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로 인해 늘 미국의 외교적·군사적 통제에서 한 발 비켜설 수 있었다. 

파키스탄의 전략적 필요성은 아프가니스탄이었다. 미국이 1979년 이후 10년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에서 대소 봉쇄 작전을 펴는 과정에서 파키스탄의 협력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2001년 이후에는 또다시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서 파키스탄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 역시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 역할을 하면서도 미국의 라이벌로 부상한 중국과도 손을 잡음으로써 인도를 견제하는 동시에 미국의 압력을 덜 받을 수 있는 위치를 차지했다. 

만일 한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모델을 따르려면 NPT를 탈퇴한 이후 미국과 거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미국 이외의 강대국과도 전략적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인도는 미국과 소련(러시아), 파키스탄은 미국과 중국에 대해 그런 위치에 있었던 반면, 한국은 미국에 훨씬 기울어져 있다. 한국이 NPT를 탈퇴한다면 누구보다 중국이 열심히 핵 개발을 감시할 것이며 한국을 제재하도록 미국을 압박할 것이다. 이 경우 미국이 한국을 감싸려면 이란이나 북한에도 같은 대우를 해줄 수밖에 없다.

한국, 대외 경제의존도가 너무나 높다

둘째,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경제적으로 대미의존도가 낮았다. 핵 개발에 몰두했던 1980년대 후반까지 두 나라는 농업을 비롯한 1차 산업 위주의 국가로서 미국의 경제 재제에 대해 큰 타격을 입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내성이 있었다. 첫 번째 제재가 가해졌던 1970년대 후반 인도의 GDP 대비 수출입 비율은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며, 주요 교역상대국 역시 미국 이외에도 중국, 중동, 동남아시아 등으로 다변화되어 있었다. 두 번째 제재가 가해졌던 1990년대 후반의 인도 수출입 비율은 33% 수준이지만 이때는 이미 핵무기를 완성한 단계였다. 파키스탄은 수출입 비율도 더 낮고 농업 의존도는 더 높다. 따라서 미국 주도의 제재에 한계가 명확했다.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약했기에 미국의 통제력도 잘 발휘되지 않는 경우였다.

이를 한국에 대입해 보자. 한국은 안보와 경제 모두에 있어 대미의존도가 큰 나라다. 또한 수출 위주의 경제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미국과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NPT에서 탈퇴해 가면서 핵무기를 개발할 경우 큰 경제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GDP 대비 수출입 비율은 72%가 넘는다. 만일 한국에서 NPT를 탈퇴하고 핵 개발을 시도하는 정권이 등장한다면 우리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과거 인도와 파키스탄처럼 단기간에 제재를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2022년 기준 각국 핵무기 보유 현황. (이미지:셔터스톡)

한국,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민주주의 국가다

셋째,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 개발에 몰두하던 시점에는 야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강력한 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인도에는 건국 초기부터 장기 집권을 하고 있는 인도국민회의 정권이 외부의 압력을 막아주고 있었다. 당시 파키스탄은 잠시 존재했던 민간 출신의 부토 정권이 무너지고 파키스탄 역사상 최대 독재자인 지아울하크 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두 나라 모두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로 경제가 힘들어진다고 한들 국가 내부의 동요가 크게 일어날 리 만무했다. 

1990년대 후반 인도의 국민회의 정권이 흔들리기는 했으나 제재가 짧았던 탓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 시기 파키스탄은 민간으로 정권이 이양되긴 했으나 핵무기를 개발하는 건 온전히 군부의 몫으로 넘어가 있었다. 90년대 초반 군사정권이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에서 군부는 정부도 손댈 수 없는 독자적인 성역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군부의 이익에 개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외부의 압력이 온다 한들 군부가 포기하지 않으면 핵 개발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날 핵 개발을 해야 한다는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수출로 먹고살던 경제가 제재로 타격을 입는다면 그 과정에서 국내의 여론이 악화할 것이고 다음 선거에서 반대 정당으로 정권이 교체될 것이다. 그렇게 집권한 새 정부는 경제 논리를 앞세워 핵을 포기하고 NPT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는 한국에서 가능한 모델이 아니다. 

결국 한국은 기존에 존재하던 국가에서 핵 개발 모델을 찾을 수 없다. 한국이 핵무장을 하려면 기존의 모델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방안은 도출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여전히 한국의 핵무장은 불가능하다.


글쓴이 박정욱은직업은 라디오 PD이나 역사책을 읽는 것이 최고의 취미인 역사덕후. 특히 중동과 러시아 인도 등 '아시아의 서쪽, 에덴의 동쪽'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종교와 정치가 만나는 역사를 흥미롭게 공부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국제 정치의 핵심에 서 있는 중동에 대한 안내서가 부족하다고 느끼던 중 직장이 6개월간 장기파업에 들어가면서 시간이 주어진 것을 계기로 중동 역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2018년에 <중동은 왜 싸우는가?>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