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보내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무겁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고담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자유를 꿈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지금의 삶을 견디게 하고, 또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이 된다.

10월 말, 메디치미디어에서 이탈리아 북부 여행을 런칭했다. 밀라노-볼로냐-피렌체를 중심으로 발사믹의 고향 모데나,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넬리의 공방이 있는 크레모나, 와인 생산지 끼안띠를 포함한 코스다.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한 일행이 5인 5색의 여행기를 보내왔다. 독자들이 만추의 쓸쓸함을 달래고,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붓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모든 '노릇'으로부터 놓여나는 해방감이야말로 여행의 목적시끄럽기만 하던 마음 안팎이 뜬금없이 고요해지게 하는 여행인간 문명이 이룬 것들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도시 피렌체협동조합의 원리가 지배하는 창조적 시장 경제의 도시 볼로냐✔ 맛이 있는 동시에 멋있었던 볼로냐 학교의 이탈리아 기행

마키아벨리의 집. 사진:이관후

우리는 떠나야 한다이진수, <세상을 움직이는 글쓰기> 저자

늙은 알프레드는 웨인 가문의 집사다.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진 젊은 주인에게 집사는 간곡히 당부한다. ‘나는 주인님이 7년 동안 사라졌을 때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대신 어느 날 내가 매년 휴가를 가는 곳에서 당신을, 당신의 아내와, 가능하다면 당신의 아이를 볼 수 있기를 기도했다.’

배트맨 3부작 마지막 편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엔딩은 사람을 씩 웃게 만드는데, 스치듯 지나갔던 알프레드의 당부가 실현된다. 알프레드가 어느 노변 카페에서 애인과 함께 있는 브루스 웨인을 조우한 것이다. 요컨대 그 야단법석의 끝은 휴가 여행이고 여행이야말로 ‘평범한 행복’의 끝판왕이라는 얘기다. 아, 참 알프레드의 휴가지는 피렌체였다. 

피렌체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까짓 피렌체, 구글 맵 위에 마우스만 올리면 옛 시가지 골목이 스트리트 뷰로 뜬다. 마우스를 방향키에 따라 클릭하면 마치 걸어가는 기분도 난다. 심지어 하늘에서 드론이 360도 빙빙 돌며 찍은 영상으로 두오모나 베키오 궁전을 볼 수 있다. 밑에서 쳐다보는 것보다 5배는 멋있다. 여행 안 가도 보고 싶은 것 다 볼 수 있는 세상이다.

보는 게 여행의 목적이 아니라면, 그럼 이탈리아를 ‘그랜드 투어’했던 30대 후반의 괴테처럼 알기 위해 여행하는 걸까? 아는 만큼 보이니, 하나를 보더라도 더 많이 알고 가야 할까? 유튜브에서 피렌체를 검색해보라. 녹색 창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쳐보라. 정보가 아주 쏟아진다. 안 가도 알려고 하면 끝도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오히려 ‘TMI’(Too Much Information)가 문제인 게 요즘 세상이다. 

왜 우리는 여행을 ‘떠날까?’ 명곡을 남기고도 잊혀진, 최성원이라는 가수가 말했다. ‘제주도의 푸른 밤’ 첫 소절이다. ‘떠나요,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여행은 그렇게 떠나는 것이다. 당신의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이며 밀려오는 건 해방감이다. 묶여 있던 것으로부터 단칼에 놓여난다.

30년 동안의 시집살이와 엄마 노릇, 벌어도 보고 망해도 보면서 휴가 한 번 못 간 중소기업 사장 노릇, 수백 번의 업무 출장은 다녔어도 유럽 한 번 못 가본 이사 노릇, 순방 동행이나 해외 취재를 하면서도 보도자료 받아쓰기와 뻗치기만 반복했던 기자 노릇,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 노릇에서 벗어나듯 그 모든 ‘노릇’으로부터 놓여나는 해방감이야말로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다. 여행은 무조건 떠나고 볼 일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삼부작 중 세번째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마지막 장면.

어디를, 누구와 함께 가는가도 물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해방감을 키우거나 줄인다. 그런 점에서 알프레드가 ‘매년’ 피렌체만 반복해 간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제 브루스 웨인은 피렌체뿐 아니라 이탈리아 중북부를 두루 다녀야 한다. 밀라노와 제노바, 베네치아와 파도바, 볼로냐와 시에나…. 

그러다 보면 웨인은 깨닫게 될 것이다. 중북부 도시국가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운 물적 토대는 고리대금업, 좀 점잖게 말하자면 상인자본이었다는 사실을. 하여 억만장자인 자신이 배트맨으로 온몸이 부서지도록 동분서주한 것도 그리 억울한 일은 아니었음을. 그러든지 말든지 일단 피렌체는 아름답다. 볼로냐는 붉고 시에나는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모데나는 정겹고 크레모나는 고급지다. 하나같이 너무 이뻐서 내가 누구였는지 잊게 만든다. 일? 직장? 집? 그따위 하나도 생각 안 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떠나야 한다. 쉴 권리가 있다. 놀 자격 충분하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웃어도 된다. 우리 모두 고담(Gotham)시를 위해 할 만큼 하지 않았던가? 이태원 참사 소식을 들은 건 돌아오는 기내, 그러니까 중동의 사막 위쯤이었다. 모래바람을 맞은 것처럼 목이 막혔다. 현실은 여전히 갓뎀(goddamn)이니, 돌아서 다시 떠나고 싶어졌다. 

이탈리아, 절절함, 고요함, 안도감.김지실, 글로벌 금융기관 수석본부장 

여행의 출발은 ‘공부’였다. 참가자들은 여행 출발 전에 총 8~9회의 수업을 <볼로냐 학교>에서 받기로 했다. 일종의 예습 과정이라고나 할까. 매력적인 수업들이 매월 진행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페데리코 파일라 주한 이탈리아 대사가 진행한 수업이었다. 수업 말미의 문답 시간에, 나는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를 언급하며 질문을 던졌다.

“대사님, <하우스 오브 구찌>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구찌 말고도 이탈리아에서는 패션 가구 등 여러 분야에서 명품 브랜드들이 참 많은데요. 왜 유독 이탈리아에는 이런 럭셔리 브랜드들이 많은 것일까요? 그런 럭셔리 브랜드들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는 국가 정책이 있나요? 있다면 뭘까요?” 

돌아온 답변 중에 마음에 꽂혔던 한 단어가 있었는데, 바로 “DNA”였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이탈리안들의 DNA, 그들의 ‘유전적인 미감(美感)’이 그런 럭셔리 브랜드들을 만들고 번창시키는 이유 중 하나일 거라는 담담한 답변이었다. 

나는 금세 수긍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돌이켜보면 그 끄덕임은 매우 직관적인 제스처였다. 이탈리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면서, 왜 그렇게 쉽게 대사의 답변에 동의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동안 접해온 수많은 콘텐츠가 일관되게 제시한 어떤 이미지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미지들을 실제로 확인하는 작업은 밀라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아함으로 가득찬 밀라노와 아름다움을 향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DNA를 담아 낸 영화 <아이 엠 러브>

너무나도 유명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아이 엠 러브>는 한 장면도 버릴 것이 없는 매혹적인 걸작이다. 주인공 틸다 스윈튼은 밀라노의 대재벌가 며느리인 엠마로 분해서 신들린 듯한 우아한 연기를 펼쳐 보였는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의 틸다 스윈튼의 연기가 그녀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절정에 이른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하염없이 오르던 밀라노 대성당의 계단과 사색하던 난간, 빛이 쏟아지던 밀라노 시내, 초록빛 오르막길, 그 끝의 풀밭, 또 햇살. 그 모든 우아한 로케이션이 밀라노에 그대로 있었다. 일정이 여의찮아 대성당 계단을 오르지는 못했는데, 나로서는 밀라노에 다시 돌아올 이유를 만들어 놓고 온 셈이라서 그다지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루카 구아다니노와 틸다 스윈튼이 결연한 또 다른 작품 <비거 스플래쉬>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끼안티 부근 어느 빌라에 묵기 위해서 저녁 무렵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빌라의 전경에 놓여있던 텅 빈 수영장 위로 <비거 스플래쉬>에서의 느슨했던 수영장이 당연한 듯 오버랩되었다. 수영장 저 너머 희미한 싸이프러스 나무들이 보였고, 오렌지빛 노을이 번지듯 그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가 여름이었다면 우리는 <비거 스플래쉬>에서의 주인공들처럼 황혼의 빌라 수영장에서 ‘스플래쉬 스플래쉬’ 했을 것이다.

피렌체 두오모를 연인들의 성지로 만든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사이>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과 그 이후를 다룬 동명의 일본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두 연인이 다시 만난다는 설정 때문에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로 등극하였다. 지금 그 영화를 다시 본다면 마음에 걸리는 유치한 설정을 한두 개 발견해 낼 수도 있겠지만, 20년 전 그때에는 광화문 어디쯤의 소극장에 홀로 앉아 절절한 마음으로 그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 고미술품 복원사였는데, 그 직업이 그리도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도 다 그 영화 덕분이었다. 밀라노에 도착한 첫날에 들렀던 <브레라 미술관>에서는 복원 작업을 감상할 수 있는 구역이 아예 따로 있었는데, <냉정과 열정사이>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남자 주인공 준세이를 떠올렸을 것이다. 

준세이가 자전거로 달리던 아르노 강변과 그 뒤로 펼쳐진 베키오 다리, 여기에 로도비코 치골리의 ‘회개하는 막달레나’까지 소환됐다면 그 영화의 열광적인 팬이었음을 인정받을 만하다. 그렇게 로맨틱하기만 했던 피렌체를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처음 맞닥뜨린 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원숙하고 자신만만한 그의 실제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마치 젊은 시절 정성을 다해 사랑을 쏟아부었던 옛 정인을 늘그막 중년이 되어 마주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끔 그리웠고, 재회가 반갑기도 한데, 이제 뭘 어쩌지 하는 모호한 기분 말이다. 

피렌체에서의 둘째 날, 보볼리 정원의 내막도 모른 채 우린 그곳에서 느긋하게 산책을 했다. 영화 <인페르노>에서 톰 행크스와 펠리시티 존스가 죽을힘을 다해 도주했던 이런저런 비밀을 품은 곳인데 말이다. 올트라노(Oltrarno) 거리를 2만 보쯤 걸어 다니다가 어느 광장에 앉아 스프리츠를 홀짝거리기 시작하자, 문득 맥락 없는 생각 하나가 마음에 일었다. 

“시끄럽기만 하던 마음 안팎이 뜬금없이 고요해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가을 냄새, 좁은 두오모 계단을 오른 후의 감성적 성취감, 십 년 동안 감상하고도 남을 그림들을 한나절 몰아서 본 후의 지성적인 노곤함, 그리고 그 밖의 사소한 나의 개인 사정들이 각기 제 몫을 다 했겠지만, 결론은 안도감, 안도감의 힘이었다. 실제가 이미지를 너끈하게 이겼다는 안도감에 혼신이 고요해진 것이다. 앞으로 남은 이탈리아의 일정 중에, 딱히 걱정할 일들이 없어 보였다.

광장엔 어느덧 색색의 조명등 들이 하나둘 불을 밝혔고, 주민들의 천연한 표정들이 불빛 사이로 넘실거렸다. 그 순간 그곳 사람들(이탈리안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집에서 마신 ‘군주론’이관후, 페렌체의식탁 수석 칼럼니스트

피렌체! 내가 사랑하는 도시. 언제 다시 올 수 있으려나 생각했었다. 그리고 왔다. 14년 만에. 

마치 어제 갔던 것처럼 골목 하나하나가 익숙하다. 피렌체 도시 전체의 지도가 늘 머릿속에 있었다. 눈을 감으면 나는 피렌체역에서 두오모로, 베키오 궁전으로, 우피치 미술관을 지나 아르노 강변으로, 베키오 다리를 건너 피티 궁전으로, 다시 강을 따라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그곳에서 석양을 보고, 다시 밤중에도 하얀 대리석이 빛나는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가죽공방들을 지나 다시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람들과 섞여 와인을, 그 예전 메디치가의 귀족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걸었을 그 길로 나는 걸었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로 그 길을 다시 걸었다.

피렌체! 이 도시는 우리가 지금 누리는 문명의 원천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지금 마시는 모든 물의 수원을 따라가면, 결국 피렌체라는 도시에 이르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피렌체는 인간 문명이 이룬 것들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도시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도시였다. 시민들이 스스로 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경험은 근대 공화정을, 아시아와 지중해를 유럽과 연결시켰던 상인들의 자신감과 부는 세계무역과 근대 금융을 탄생시켰고, 다빈치와 갈릴레오, 두오모의 돔을 완성시킨 브루넬레스키까지 의학, 천문학, 수학, 건축술에서의 대전환점이 피렌체에서 탄생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보티첼리 등 수많은 예술가들과 그들을 후원한 메디치가의 노력으로 근대 예술이 출발한 곳이 여기 피렌체다. 오늘날 ‘이탈리아어’가 로마가 아닌 피렌체 말이 된 것도 피렌체 사람 단테가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썼기 때문이다. 

로마가 고대와 중세 문명의 수도라면, 피렌체는 근대와 현대 문명의 수도다. 로마가 황제의 도시라면, 피렌체는 상인과 학자, 예술가의 도시다. 로마가 신의 도시라면, 피렌체는 인간의 도시다.

30년 간의 복원을 마치고 메디치 궁을 거쳐 우피치에 정착한 라파엘로의 <방울새의 성모>. 사진: 이관후

다시 찾은 피렌체에서의 여행은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시작했다. 풍성한 엉덩이를 자랑하는 다비드상과 함께. ‘냉정과 열정 사이’ 같은 스토리가 없어도, 두오모 꼭대기에서 바라본 피렌체의 전경은 인류 문명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세상이었다. 우피치 미술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라파엘로의 <방울새의 성모>와 재회한 것이 가장 기뻤다.

 이 작품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메디치가의 궁전에서 잠들어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14년 전 피렌체에 갔을 때, 이 작품은 30년에 걸친 복원 작업을 마무리하고, 우피치가 아닌 메디치궁에서 첫선을 보이고 있었다. 그림 옆에는 20대에 복원 작업을 시작해서 이 한 작품에 평생을 다 바치고 백발이 된 복원가가 애정어린 눈빛으로 작품을 보며 서 있었다. 이 작품이 이제는 우피치에 와 있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피렌체 정치 행정의 심장인 베키오궁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곳을 방문한 외국 국빈들을 위한 건물이었다. 메디치가의 통치자들은 베키오궁과 우피치 미술관을 연결했고, 이 ‘바사리 회랑’은 다시 베키오 다리를 거쳐 아르노강을 건너서, 시내와 성당을 관통한 후 피티 궁전까지 이어진다. 메디치가의 통치자들은 암살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이동하면서도 피렌체 사람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영화 <인페르노>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바사리 회랑은 3년여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곧 개방될 예정이다.

 이번 피렌체 방문의 가장 큰 기쁨은 근교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집에 다녀 온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정 시기에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메디치가가 복귀한 후 고문을 받고 피렌체에서 추방당한다. 40대 초반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서 약 20km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울분 속에서 비장한 각오로 <군주론>을 쓰고 공직으로 복귀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피렌체로 돌아가 공직을 맡지 못했다. 

그가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멀리 피렌체가 보이는데, 저곳으로 돌아가 재능과 경험을 다시 발휘할 날만을 이제나저제나 손꼽아 기다린다’라는 대목이 있다. 차로도 40분 정도 걸린다는 그곳에서 과연 피렌체가 보였을까? 그것은 그저 너무나 간절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일행은 밴 택시를 빌려, 미켈란젤로 광장을 넘어 마키아벨리의 집으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맞이한 마키아벨리의 집 정원에서, 나는 멀리 피렌체의 두오모가 아련하게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저렇게 손에 잡힐 듯 말 듯 보이는 피렌체를 그리워하며, 이곳에서 마키아벨리는 얼마나 침통한 마음으로 <군주론>을, <로마사논고>를 써 내려갔을까. 지금 그곳에는 마키아벨리의 후손이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군주론’이라는 이름의 와인을 판다. 우리는 그곳에서 ‘군주론’을 마셨다.

마이카벨리 와이너리의 와인 <군주론> 라벨. 사진:이관후

마키아벨리의 집에 다녀오기 전후에는 산타크로체 성당에 가보는 것이 좋다.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택시 정류장도 어차피 그곳에 있다. 산타크로체 성당에는 마키아벨리는 물론이고 갈릴레오, 미켈란젤로, 단테의 무덤도 있다. 누가 누군지 설명서가 없어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왜 그런지는 비밀.

그러고 나서는 이제 피렌체의 자랑, 스테이크를 먹어야 한다. 토스카나의 심장 피렌체는 예로부터 소를 많이 키웠고, 그래서 가죽공예의 역사도 수백 년을 자랑한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 5명이 1.2kg 스테이크를 2판 먹어 치웠다. 끼안티의 와인은 바로 이 스테이크를 위해 존재한다!

다음날 해장은 ‘곱창 버거’로 하는 것이 좋다. 피렌체역 근처 피렌체 중앙시장에 가면 이 피렌체의 명물을 만날 수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냄새로 금방 찾는다. 유학 시절, 한국 음식이 너무너무 그리웠을 때, 이곳에서 만난 곱창 버거는 정말 고향의 맛이었다. 누군가 눈물 젖은 햄버거를 먹어보았냐고 물어보면, 나는 이 곱창 버거를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피렌체! 나의 사랑하는 도시.

맛있는 것 옆에, 또 맛있는 게 있다최주영, 요리연구가

매일 아침 7시면 삼삼오오 둘러앉아 크로아상, 프로슈토와 모타델라, 치즈와 에스프레소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날들이 떠오른다. 볼로냐의 저녁은 기대했던 대로 너무 근사했다. 30일을 숙성한 프로슈토와 모타델라는 달큰한 토마토 처트니를 곁들이니 와인이 술술 넘어간다. 고요하고 맑은 육수에 끓인 또뗄리니는 눈이 똥그래지도록 놀랄 맛이었다. 

맑은 육수에 조리한 토르텔리니(왼쪽)와 볼로냐에서 먹는 볼로네제 소스 파스타(오른쪽) 사진:최주영

진짜 볼로냐에서 먹는 볼로네제는 어떤 맛일까? 시켜보니 생면에 고기를 듬뿍 넣은 라구를 비벼주어 입에 착착 붙었다.(참고로 제가 만든 lots of love 고기 듬뿍 볼로네제 소스도 만만치 않습니다. ㅎㅎ)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비슷한 튀김(cotoletta)을 시켜보니 첫날 밀라노에서 먹은 것과는 달리 튀김 위에 프로슈토와 치즈가 올려 나왔다. 역시 미식의 도시 볼로냐다웠다.

볼로냐식 꼬톨레타(왼쪽)와 밀라노식 꼬톨레타(오른쪽) 사진: 최주영

여행 중 또 한 번 잊지 못할 식사는 피렌체였다.

이탈리아식 육회인 비프 타르타르와 티본스테이크는 꼭 한번 먹어봐야 한다. 함께 여행한 여러 멤버들이 ‘인생 스테이크’를 맛본 것 같은데, 이 음식의 중요함은 좋은 재료다. 진짜 건강하게 공들여 키운 소를 잘 숙성하여 맛있어지라고 주문하며 요리해주는데 얼마나 맛있겠는가? 함께 주문했던 호박꽃 튀김, 완벽한 라자냐, 세이지 버터 소스의 트러플 팍팍 올린 파스타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피렌체에서 맛 본 비프 타르타르(왼쪽)와 티본 스테이크(오른쪽). 사진:최주영

언젠가 또 간다면 이 집 오소부코를 꼭 먹어보고 싶다. 몇몇 분들은 먹어본 것 같은데 오소부코는 송아지 뒷다리 정강이뼈를 와인을 넣고 오랜 시간 끓여 만든 찜 요리다. 우리나라 꼬리찜이나 갈비찜을 생각하면 되는데, 정강이뼈는 가운데 동그란 구멍 안에 골수(bone marrow)가 들어 있어 고기 먹고 요걸 작은 티스푼으로 떠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프란을 넣은 노란빛 밀라노식 리소또가 곁들여 나오고 오소부코 위에 그레몰라타라는 토핑을 잔뜩 뿌려준다. (그레몰라타는 이탈리안 파슬리, 레몬. 마늘이 주원료) 

이러니 와인을 마시고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밖에…. 이탈리아 여행은 이렇게 맛있고 멋있다.

창조도시 볼로냐의 짧았던 이틀한종호

가본 적도, 이름을 들어본 기억도 거의 없던 이탈리아 북부의 인구 40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 볼로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2015년 강원도 춘천에 살게 되면서부터다.

지역 창업생태계를 만들라는 거창한 미션을 가진 기관의 장이 되어 ‘춘천-원주-강릉’ 같은 인구 30만 명 안팎의 지방 소도시가 참고할만한 국내외 모범 사례를 찾아보던 중 일본 본토인 혼슈에서 동해에 면해 있는 호쿠리쿠 지역의 3개 현(후쿠이-이시카와-도야마) 이야기를 듣게 됐다. 한국으로 치자면 강원도에 해당하는 변방이다.

자연 환경이 험하고 2차 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어 가장 살기 어려웠을 법한 곳인데, 뜻밖에도 이 지역이 일본 정부의 행복도 조사에서 항상 1, 2, 3위를 도맡아 차지하고 있단다. 초·중학교 학생의 평균 성적이 도쿄 지역 아이들보다 월등히 높고 후쿠이현에서 생산하는 제품 가운데 세계 점유율 1위를 하는 게 40가지나 된다. 지역소멸을 걱정하는 시대에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지 않고 높은 취업률을 보이는 ‘이상한’ 곳이다.

그 비결을 취재한 <포브스 재팬> 의 후지요시 마사하루 선임기자가 쓴 책이 <이토록 멋진 마을>이다. 비결의 핵심은 그 지역 사람들이 외부의 힘에 기대지 않고 협력과 연대의 정신으로 강력한 내생적 발전 모델을 구현했다는 것. 그런데 이들이 전후의 폐허에서 복구를 시작하면서 벤치마킹했던 곳이 볼로냐였다고 한다. 일본의 대표적 희곡작가인 이노우에 히사시가 30년 가까이 탐구해 온 도시 역시 볼로냐다. 호기심이 불끈 솟구쳤다.

그 무렵 이노우에 히사시가 <NHK>와 함께 볼로냐 여행을 하고 돌아와 쓴 <볼로냐 기행>을 읽어보면서 이 도시의 매력에 흠뻑 젖어들게 됐다. 때마침 일간지 기자를 그만두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요리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권은중 씨의 책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도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인구는 많지 않지만, 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로 꼽히는 볼로냐는 이탈리아 북부를 X자로 가르는 도로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 덕분에 1000년 전부터 교역과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산업을 일으키고 풍부한 먹거리를 발전시켜 왔다. 1088년 유럽 최초의 대학을 만들었고 람보르기니(자동차), 두카티(오토바이), 비양키(자전거) 같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기계제품을 만들고 있다. 바로 이웃한 도시 모데나는 페라리 자동차와 발사믹 식초를, 크레모나에서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후예들이 바이올린을 만든다.

볼로냐의 기적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경쟁보다 협동의 원리로 작동하는 수많은 ‘중소기업-협동조합’들의 촘촘한 연결망이다. 이탈리아에는 4만3000여 개의 협동조합이 있는데, 그 가운데 1만5000여 개가 볼로냐 지역에 집중돼 있다. 또 볼로냐 시민의 3분의 2가 하나 이상의 조합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협동조합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장경제인 셈이다.

과거에는 볼로냐 대학 본관 건물이었고 현재는 시립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사진:셔터스톡)

볼로냐에서 ‘1박2일’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런 흥미로움을 세세하게 충족하기엔 시간이 여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을 쪼개 볼로냐대학과 유럽 최초의 해부학 실험실, ‘볼로냐 2000’이라는 이름의 도시재생 플랜에 따라 증권거래소로 쓰던 공간을 재활용해 만든 시립도서관을 비롯한 도시의 랜드마크 건물들을 둘러봤다. 포르티코(portico)라 불리는 긴 회랑을 걷다가 마조레 광장에서 버스킹을 들으며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여유도 놓치지 않았다.

저녁에는 고색창연한 로컬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인 로컬 푸드로 볼로냐를 오감 체험하며 짧았던 볼로냐 방문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내년에 다시 찾아와서 볼로냐의 사람들을 탐구해 봐야겠다는 결심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