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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칼럼] 한국 경제와 한국 문명의 클라이맥스

By | 2022년 10월 11일 | 미래, 미분류, 사람

‘한국의 클라이맥스는 2022년이었다.’ 경제학자 우석훈 필자가 우울하고 도전적인 진단을 내놨다. 인구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성찰과 대처를 게을리한다면 훗날 역사는 한국 사회를 이렇게 기록할 것이라고. 출생아 수는 1971년 102만 명으로 정점을 기록한 뒤 감소세를 지속해 2021년엔 26만 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우석훈은 한국 사회가 ‘경제적 풍요와 저출생’의 고착화라는 문명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경쟁 지상주의’가 몸에 밴 ‘1971년 세대’들이 지금 한국 사회의 정점을 차지해, 출생아 감소라는 문명적 위기를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그의 경고가 섬찟하다. [편집자 주]

✔ 외환위기 극복보다 더 시급했던 과제, 출생률 문제
✔ 통계나 숫자만 보고 살림살이 나아졌다 할 수 있을까?
✔ 경제 관점에서 인구는 생산력보다 소비 구조가 걱정
✔ 2022 한국의 현주소, 경제적 풍요와 저출생
✔ 경쟁 완화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문명으로 전환해야

사진:셔터스톡

1.
아주 오래전, 박사 코스웍을 하던 시절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아직 생태학을 공부하기 이전이었고, 철학과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극대화 공리’에 대한 철학적 접근으로 박사 학위를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세미나 수업에서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지도 교수가 나에게 ‘사랑의 경제학’에 대한 이론을 만들 수 있으면 아마 노벨상 받을 것이라는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팍팍한 내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인 삶을 살도록 허락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연세대학교의 구성렬 교수가 인구경제학 전공을 하면 20년 후에는 매우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얘기를 건너 들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그 얘기가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주제를 전공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없었다. 

역시 뒤에 건너 들은 얘기인데, 2000년을 맞아 한국의 어느 방송사에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한참 IMF 경제위기가 진행되던 중이고, 그래서 선진국이 갖는 여러 가지 고민에 대해서 들어볼 생각이었단다. 그때 담당 피디가 준비해간 질문들을 듣던 토니 블레어가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심각하고 어려운 건 출산율 문제가 아닐까요”, 그런 얘기를 했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 한국의 보편적 정서에서 그런 얘기가 별로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다음, 그때 솔직히 토니 블레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하는 얘기를 담당 피디에게 들었다. 자신에게 가장 공포스럽고 시급한 문제가 인구 문제라고 영국 총리가 얘기할 때, 2000년대 초반의 한국인, 아니 방송사 피디 같은 엘리트 중에서도 그 뜻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인구 문제에 정책적 노력을 하지만, 실제로 합계 출산율이 2에 어느 정도 도달한 나라는 프랑스밖에 없다. 스웨덴이나 영국 등 대부분의 나라들은 아직 2를 넘지 못했다. 프랑스 학자들에게 어떻게 프랑스는 성공했느냐고 물어보면, 보통은 자신들도 잘 모른다고 답변한다. 여러 가지 보육 정책, 주거 정책 그리고 동거에 대한 지원정책 등 많은 것들을 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어느 순간에 출산율이 회복된 것이라서,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인과론적이고 기계론적인 분석으로는 무엇이 성공 요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통계학 이론이 발달하더라도 동시에 발생한 요소들을 동시에 알기는 어렵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요소가 프랑스가 출산율을 회복하는데 개입하는지 알 수가 있을까? 그 사람들도 정확히 모르는데, 그걸 피상적으로 관찰한 우리가 도대체 무슨 수로 알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가진 것은 수많은 가설들 뿐이다. 

2.
1인당 국민소득을 한국 통계청에서는 주로 GNI(Gross National Income)를 가지고 발표한다. 국민소득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이렇게 하는 게 맞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 나라의 경제 규모를 좀 더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참고로 보기 위해서는 1인당 GDP(Gross Domestic Product)를 더 많이 사용한다. 차이는 해외 송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GDP에서는 국내의 외국인들이 생산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잡지만, GNI는 그들의 해외 송금액은 뺀다. 마찬가지로 해외의 한국인들이 번 돈을 GNI에서는 잡아주지만, GDP에서는 뺀다. 국내의 외국인 송금액과 해외에 나간 자국민의 송금액의 차이가 1인당 GNI와 GDP의 차이를 만든다. 

비슷하지만, 약간 차이가 있다. GNI로는 아직은 우리가 일본과 좀 차이가 있지만, 1인당 GDP 기준으로는 팬데믹 기간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 물론 한국이 올라가면서 추월한 것은 아니고, 코로나 팬데믹 피해를 일본이 더 많이 보면서 역전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환율 등 많은 요소가 동시에 개입하는 수치라서, 절대 수치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고, 그 추이가 중요하다. 특히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엔화와 원화의 가치 변동에 따라서 얼마든지 널을 뛸 수 있는 수치다. 이건 추세가 중요한 수치다. 

추세만으로 보면 연도에 차이는 있더라도 한국의 1인당 GDP는 언젠가 일본을 추월할 것이었고, 그게 조금 빠르든 늦든,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넓은 기간을 놓고 보면, 한국이 몇 년 지나지 않아 1인당 GDP라는 수치적 관점에서는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독일은 한참 더 위에 있다. 물론 한국 경제의 1인당 GDP가 일본을 추월하거나, 심지어 프랑스를 추월한다고 해서 우리가 더 좋은 시스템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그 해에 그 나라에서 벌어진 부가가치를 달러로 측정한 것에 불과하다. 이 수치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지속가능성이 중요하다. 

1인당 GDP의 상대 비교에서 많은 나라들의 상대적 위치는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는다. 특히 선진국 사이의 순위는 약간의 변동이 있을 뿐이지, 극적으로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앞부분까지 온 한국이 특이한 경우인데, 그 외에 특이한 나라를 하나 더 꼽자면 스위스 정도일 것 같다. 스위스의 경우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2차 세계대전까지 스위스는 대표적인 유럽의 빈국이었다. 1980년대에 스위스 경제에 대해서 배울 때는 그냥 가난한 나라라고 배웠다. 1990년대에는 위성 경제(satellite-economy)라는 개념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말은 복잡하지만, 독일과 프랑스 같은 나름 거대 경제권에 위성처럼 붙어서 잘살게 된 나라라는 의미다. 그 자체로는 분석할 게 별로 없을 거다, 그렇게 얘기했다. 스웨덴에 대해서 분석할 때는 대공황 때의 사회적 대타협 혹은 노동조합의 역할 같은 것을 중요하게 다루지만, 스위스는 그렇게 분석할 게 없다는 말이 ‘위성 경제’라는 개념에 담겨 있다. 2000년대 들어서 스위스의 1인당 GDP는 계속해서 상승했고, 스웨덴을 넘어설 즈음에 유럽 경제학자들을 만나면 “저게 얼마나 가겠나”, 그런 얘기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스위스는 몇 년 전부터 사실상 1인당 GDP로는 세계 1위 국가가 되었다. 스위스 사람들도 이제는 자신들이 국민소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는 것 같다. 

그럼 스위스는 왜 잘 살고, 이렇게 장기적인 번영을 이루고 있는가? 한국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 얘기를 하거나 관광산업 얘기를 한다. 그렇지만 GDP 내 금융업 비중이나 관광업 비중이 유럽 평균보다 특이할 정도로 높지는 않다. 사실 우리만 모르는 것도 아니다. 정작 스위스 사람도 스위스 경제의 장점에 대해서 물어보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1년에 두 번씩 진행되는 국민투표 등 매우 발달한 직접 민주주의 요소와 강력한 지방자치를 얘기할 수는 있지만, 이것도 스위스 경제의 장점을 부분적으로만 설명해준다. 경제 이론의 한계일 수도 있다. 구조적인 변화와 장시간에 걸친 시스템의 특징 같은 것을 설명 아니 이해하기에도 시장과 국가라는 투박한 이념적 틀로 접근하는 경제 이론에는 있을 수 있다. 당장 한국 경제가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수입 대체가 아닌 수출주도형 경제 전략을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무역에서의 비교우위, 이런 거 다 무시하고 한국은 할 수 있는 거, 하고 싶은 거, 그런 정책적 요소로 경제 발전을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스위스 경제의 번영을 예상한 사람도 거의 없었고, 설명도 하기가 어렵다. 그냥 “작은 경제라서 그래”, 이 정도가 할 수 있는 얘기의 거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스위스 경제에 ‘문명’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까? 

사진:셔터스톡

3.
우리 얘기로 돌아와 보자. 한국의 1인당 GDP가 일본을 넘어서려는 국면에서 일본에서도 수많은 위기의식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일본 산업의 경쟁력과 혁신 능력에 대한 많은 질문이 있었다. 코로나 확진자에 대한 통계를 일일이 팩스로 받는 일본의 현실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한국의 번영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던 걸로 알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를 겪은 일본은 인구 문제의 중요성에 대해서 우리보다 좀 더 먼저 알고 있다. 인구 문제로 한국 경제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들이 나왔다. 물론 심각한 분석과 함께 나온 얘기가 아니라서 이런 얘기들을 정색하면서 본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잠깐 우리의 출생 수치를 살펴보자. 1971년에는 102만 명이 태어났고, 출생으로는 이때가 역대 최대였다. 이후로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잠시 등락이 있지만, 지속적으로 줄어든 출생아는 2000년에 64만 명 정도를 기록한다. 2021년의 출생아 잠정 추정치는 26만 명 정도 된다. 1970년부터 2000년까지, 30년간 출생아 수치는 대략 1/3 정도 줄어들었다. 그런데 그다음 20년 동안 64만 명에서 26만 명까지, 2/3 가량이 줄어든다. 절대 수치도 문제지만, 그 속도가 더욱 큰 문제다. 2000년에 1.48이던 합계 출산율이 2018년 이후로는 1 이하로 내려왔다. 산술적으로는 당연한 결과다. 

이미 한국을 대표하던 산부인과 병원들이 경영상의 곤란을 겪게 된 것은 물론이고, 학교 유지가 어려워진 것은 1차적 충격이다. 간단히 얘기하면, 100만 명의 출생아가 유지하던 시장에서 26만 명으로 1/4로 줄어들면 영유아 시장에서 점차 청소년 시장으로 그 충격이 확산된다. 매년 100만 명씩 새로운 청소년들이 유입되던 시절 한국에는 예를 들면 ‘청소년 토지’ 같은 청소년 책 시장이 굉장히 중요한 시장으로 존재했었다. 이미 청소년 책 시장은 명목만 남은 시장이 되었다. 10대들의 독서 패턴과 10대 모집단의 수치가 동시에 개입하는 현상인데, 책을 덜 보는 10대들의 독서 패턴 문제와 연결되면서 인구적인 분석을 별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20년 후, 1970년대에 비해서 1/4로 축소된 지금의 신생아들이 20대가 되면 문제는 좀 더 광범위해진다. 논문 저술차 아르코 대학로예술극장의 유료 고객 분석을 해 본 적이 있는데, 20대가 43.49%, 30대가 32.53%였다. 10대는 0.68%, 50대 이상은 8.22%였다. 물론 샘플 수도 적고, 한계도 많은 데이터라서 추세만 참고할 뿐이지만, 모집단으로서의 20대가 줄면 연극을 비롯해서 많은 문화 산업의 존립 기반 자체가 어려워진다. 

26만 명의 출생아가 노동시장에 진입할 즈음이면 노동시장 전체에 거대한 교란이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지금 출생 추이가 바뀌지 않으므로, 지금의 흐름대로 간다면 15년 후에는 출생아 수가 10만 명 이하로 내려앉게 된다. AI 전면화 등의 자동화, 그리고 부분적이지만 이민 정책도 어느 정도 적극화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력 부족의 상황을 완전히 뒤집기는 어렵다. 정착 이민은 결혼과 수반되는 경우가 많은데, 20년 후에는 청년 숫자 자체가 구조적으로 적다. 고용이 줄어드는 추이보다 노동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빠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흔히 경제에서 인구 문제를 다룰 때는 생산가능인구 등 생산력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소비 정확히는 연령별 소비 구조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영유아 시장은 이미 위기이고, 10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장도 심각한 위기 국면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중장기적으로는 20~30대의 소비에 기반한 시장들도 버티기가 어려워진다. 이걸 우리가 모르는가? 알지만 풀 수가 없는 문제다. 

4.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2002년에 발간한 출산 인식 보고서는 여운이 길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44.06%, 남성은 31%다. 아이를 낳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모두 결혼을 하거나, 출산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출산율이 당분간 드라마틱하게 올라가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 수치를 보는 순간 많은 사람이 직감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1인당 GDP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우리는 전 세계 어떤 나라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가고 있는 중이다. 왜 30%가 넘는 남성이, 40%가 넘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대답하는가? 경제적 문제인가 아니면 문화적 문제인가? 박사 과정에서 인구에 대해 배우면서, 저개발 국가와 개발 국가의 출산율 추이 차이에 대해 배우면서, 소득과 출산율에 상당한 연관 관계가 있다고 들었다. 국제적으로도 그렇고, 한 국가 내에서도 그렇다고 배웠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GRDP(Gross Regional Domestic Product)가 높은 쪽으로 분류되는 세종시의 출산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경제학에서는 출산의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고, 그냥 주어진 외생변수로 간주한다. 보통 한 세대의 기준인 30년 단위로 생각하는 데에도 익숙하지 않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사실 잘 모른다. 너무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젠더 갈등까지 복잡하게 끼어들어왔다. 이 젠더 갈등은 10대 중후반, 중학교 단계까지 내려와 있는 상황이다. 주택 가격에서 출산과 여성 고용 문제까지, 풀려고 하면 당장 잡히는 경제적 문제가 족히 10개는 넘을 것이다. 그 어느 하나도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개념화한다면, 결국은 ‘한국 문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이론적으로는 손쉬울 것 같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의 한국 문명이 ‘경제적 풍요와 저출생’이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말 할 수 있다. 문명과 경제, 어려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의 문명이 이렇게 생겼다고 하는 게 조금은 더 솔직한 진단 아닐까? 

1971년생을 즈음한 사람들의 문명은 100만 명이 넘는 가장 많은 출생자들답게 역대로 경쟁이 가장 높은 시대를 지났다. 사람은 넘쳐났고, 우리가 만든 문명은 “사람이 제일 싸다”는 시대를 열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경쟁과 최다 인구로 인한 경쟁이 잘 맞았다. 죽어라고 경쟁하고, 탈락자는 “알아서 하셈”, 그렇게 하면서 몇십 년을 한국 사회는 죽어라고 달려왔다. 

그 후로 40년이 흘렀고, 지금은 26만 명이 태어난다. 역대 최소 출산이다. 우리가 40년 동안 만든 문명의 결과다. 그리고 최소한 10년 이상, 매년 최소 출생을 갱신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사람이 귀하다. 한 명 한 명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하고,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겨우 시스템이 현상 유지라도 할 것이다. 10년만 더 지나면 꼭 한국인 노동자가 필요한 공직이나 내수 서비스 분야에서는 사람이 없어서 경쟁이 아니라 ‘유치’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에서 문명의 충돌이 발생한다. 1971년 위로는 경쟁이 당연하고, 경쟁이 아름답다고 배워온 사람들이다. 그 문명의 클라이맥스가 윤석열 정부에서 갑자기 급부상한 ‘서오남’(서울대, 50대, 남성)이다. 1971년생을 정점으로, 극상에 달했던 경쟁 논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은 사람들 아닌가? 지금의 50대 초반, 한국 자본주의가 이들의 손에서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캐릭터로 얘기하면 모든 경쟁을 다 뚫고 장관 자리에 간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아닐까 싶다. 그를 국회 답변에서 본 많은 사람들이 ‘오만’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역대로 가장 강했던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간 사람의 ‘자신감’일 수도 있다. 6·25 이후 경쟁자들이 많이 사라진 상태에서 일찍이 30대부터 지도자가 되었던 박정희나 3김 시대와는 전혀 다른 경쟁의 조건을 1971년생들이 만나게 되었다. 그 문명적 전환에서 정점에 달한 게 한동훈과 그의 동료들일 수도 있다. 일종의 팀플레이로 권력을 쟁취해나갔던 86세대와 이들은 시대적 조건이 좀 다르다. 

한동훈이 주도하는 이민청 논의는 그런 면에서는 한동훈답다. 경쟁을 낮출 새로운 문명적 전환 같은 것은 익숙하지 않고, 신생아를 대처할 값싼 노동력 수급 대책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대응 아닌가? 일본의 아베 정부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다. 

지금 20대들에게 정서적으로 가장 잘 맞는 ‘공정’이라는 단어의 유행은 일시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는 동안의 운영에 관한 얘기인데, 경쟁의 질서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10년에서 20년이 지나면 공정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청년 노동과 청년 소비자가 부족한 시대가 온다. 아마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많은 회사들은 그 시대에는 ‘공정’이라는 단어보다는 ‘우정과 환대’ 같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할 것 같다. 

이렇게 문명이라는 단어로 보면, 경쟁을 기치로 내걸고 죽어라고 앞으로 달려온 한국 문명의 클라이맥스는 지금이다. 지난 40년간의 경쟁과 노력이 일본과 프랑스를 최소한 1인당 GDP에서 추월할 정도의 성과를 내기는 하였지만, 우리의 문명은 더 이상 ‘경제주체의 재생산’을 유지하지 못한다. 책과 연극과 같은 문화적 본원 상품이 붕괴하게 될 것이고, 10대들을 위한 시장은 ‘도메스틱’ 마켓에서 더 이상 버텨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게 문명의 핵심에 해당하는 분야들이 고사하게 되고, 남은 길은 ‘세계의 공장’, 그렇게 글로벌 마켓에 호소하는 일부만 남은 기이한 경제로 전환하게 될 것이다. 

사진: 셔터스톡

‘아름다운 가게’에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로 이 문명적 변화에 대한 얘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여러 개의 카시트 등 제법 고가 물건들을 기증하려고 했는데, 아름다운 가게에서는 더 이상 유아용품은 안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제 태어나는 아이들도 별로 없는데, 그런 물건들은 안 그래도 좁은 가게에 자리만 차지한다는 뜻인 것 같다. 물론 장사라고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가뜩이나 적게 태어나는 아이들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기증받은 물건들을 중고로 싸게 사는 일을 하기는 어렵게 되고, 더 비싸게 새 물건을 사야 할 것이다. 시장 크기가 작아지면 한 명 한 명이 지불하는 비용은 더 커진다. 지금의 신생아들은 경쟁이 너무 적은 대신, 시장 크기가 협소해져서 이제 시장이 잘 유지되기 어려운 새로운 시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당연히 육아 비용은 늘어난다. 

경쟁을 너무 사랑하던 1971년생 이전의 사람들은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면 학교 문을 닫으면 되고, 교사가 남으면 덜 뽑으면 되고, 남는 사람들은 경쟁해서 자신의 실력대로 당당하게 새로운 자리를 찾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게 우리가 만들어낸 문명의 모습이다. 학교 문을 닫은 지역은 죽어가고 있고, 그게 저출생의 또 다른 얼굴인 지방 소멸이다. 이것도 역시 문명사적 위기다. 

해법이 있을까? 경제학적으로 ‘문명 전환’ 같은 얘기는 사실 하나 마나 한 소리다. 그래도 한국 경제가 지금 클라이맥스에 왔을 때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년 더 지나서 1인당 GDP가 실제로 줄어드는 일이 벌어지면 각자도생의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아직 우리가 돈이 있을 때, 돈으로 풀 수 있는 문제라도 푸는 게 낫다. 한동훈식 이민청은 “우리는 이 문제를 풀 생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경쟁을 높이는 게 아니라 경쟁을 완화시키고, 한 명 한 명을 귀하게 여기는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순간이다. 지금 한국 문명은 ‘경쟁압’이 너무 높다. 

이제 곧 한동훈을 축으로 하는 1970년대 초반 출생자들이 한국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한동훈 세대’ 정도 될 것이다. 이들이 자신들이 태어났을 때의 100만 명 시대가 아니라 현실의 26만 명 시대에 대한 인식을 하는 것이 문명적 전환점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유신 세대는 아마 살아온 대로 살 것이고, 1980년대 학번들인 86세대도 그냥 그렇게 살 것이다. 새로 권력에 도달하는 한동훈 세대가 한국 문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게 남은 전환의 가능성 아닐까? 이건 진보/보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우리가 만들어낸 문명에 관한 이야기다. 훗날 역사책에 한국의 클라이맥스는 2022년이었다고 기록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글쓴이 우석훈은
경제학자사회학자이자 교수, 두 아이의 아빠. 성격은 못됐고 말은 까칠하다. 늘 명랑하고 싶어 하지만 그마저도 잘 안 된다. 욕심과 의무감 대신 재미와 즐거움 그리고 보람으로 살아가는 경제를 기다린다. 저서로 <88만원 세대>, <나와 너의 사회과학>, <모피아>, <사회적 경제는 좌우를 넘는다> <슬기로운 좌파생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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