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를 이은 북한의 통치자들을 모두를 직접 상대해 본 유일한 통일정책의 책임자. 햇볕 정책의 설계자. 53년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소장으로 예편하고, 외교안보연구원장을 맡았고, 2번이나 통일부장관을 지내고, 국정원장까지 역임한 사람. 동서독 통일의 전략가에 빗대어 '한국의 에곤 바르'로도 불리지만 '피스 메이커'라는 별명을 가장 좋아하는 한국 분단사의 산증인. 그리고 본인이 이산가족으로 동생들을 북에 둔 사람. 임동원 전 장관이 자서전 '다시 평화'를 펴냈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남북교류의 숨은 이야기들, 김정은이 본인에게만 털어놓았다는 핵개발에 대한 속내도 눈길을 끕니다. 임동원 전 장관의 90년 삶에서, 오늘의 한반도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편집자주]

✔ 냉전시대부터 탈냉전의 과정 두루 목격한 역사의 산증인✔ 군인, 외교관을 거쳐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진화한 역사✔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모두 상대한 햇볕정책 설계자✔ 남북합의서, 6.15 공동선언, 7.7 선언, 7.4 공동성명의 숨은 주역

특집 대담 피스메이커 임동원의 회고, <다시, 평화> 바로 보기

민경중(민 소장) : 오늘은 제 곁에 특별한 객원 진행자를 모셨습니다. 전 통일부 장관이자 현재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인 김연철 전 장관님입니다.

김연철 : 오늘 이 자리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님의 <다시 평화> 출간을 기념하는 대담인데요. 굉장히 영광스럽습니다.

민 소장 : 임 장관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임동원 :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습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와 상대하다김연철 : 제가 잠깐 임동원 장관님을 소개해 드릴게요. 임 장관님은 남북관계에서 그야말로 ‘역사’입니다. 한반도를 통틀어서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 김정은 위원장 3대를 상대하신 거의 유일하신 분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남북관계의 역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전과 이후로 구분합니다. ‘햇볕정책’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얘기하면 ‘접촉을 통한 변화’인데 그것을 설계하신 분이 임 장관님입니다. 

과분하지만 대단히 흡족한 별명 ‘피스 메이커’

민 소장 : 임 장관님은 ‘피스 메이커’(peace maker)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신데, 마음에 드시나요?

임동원 : 아주 과분한 명칭이지만 대단히 좋게 생각합니다.

민 소장 : 임 장관님께서는 27대 통일부 장관을 하셨고, 김 장관님께서는 40대 통일부 장관을 하셨어요. 그리고 한반도평화포럼의 명예이사장과 이사장을 각각 맡고 계시니,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두 분의 인연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 정세가 매우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코로나19 사태 이후 여러 가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미-중 갈등, 거기에다가 북한의 핵 위협 등으로 얼어붙은 남북관계까지 정말로 어느 것 하나 어렵지 않은 분야가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현대사의 산증인이신 임 장관님께서 이번에 자서전 <다시 평화>를 출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책은 어떻게 내시게 된 겁니까?

임동원 : 우리 민족이 살아온 지난 한 세기는 실로 격동의 역사였죠. 저는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녔고, 해방과 분단을 맞아서는 북쪽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전쟁 시기에 월남해서 새로운 길을 개척했습니다.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동서 냉전 시기에는 군복을 입고 ‘피스 키퍼’로서 안보 분야에서 일했고, 1980년대에는 외교관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약 30년 전 동서 냉전이 종식되면서 새로운 탈냉전의 시대가 열릴 때 ‘통일 일꾼’으로서 평화 통일의 길에 나서서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는 특전을 갖게 됐어요. 남이 하기 어려웠던 많은 경험을 했는데,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객관적이고 절제된 역사의 기록

김연철 : 말씀하신대로 이 책에는 우리 역사의 흐름과 한 사람의 삶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어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책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임 장관님은 정말 명문장가입니다. 또 연세가 많으신데도 아주 세밀하게 (과거를) 묘사하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 중요한 외교가들의 전기나 자서전, 평전 이런 것들이 많은데, 우리는 너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임 장관님이 예전에 쓰신 <피스 메이커>도 그렇고, 이 책 <다시 평화>도 그렇고, 내용이 굉장히 객관화돼 있습니다. 자서전이지만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정세를 객관화하고 절제된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 이해에 매우 중요한 책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 소장 : 책을 통해 후학들에게, 후세들에게 교훈을 남겨주려고 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임동원 :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으로 책을 썼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도 미치지 못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었죠.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가 1964년인데,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를 달성했다고 축하 분위기가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3만5000달러 수준의 아주 풍요로운 사회를 이루고, 세계 10대 경제강국에 선진국의 지위도 확실히 확보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민족 모두가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죠.

이런 우수성을 우리가 잘 아는데 우리 민족은 아직도 분단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단을 극복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만들고 통일을 이룩해야 하는 과업을 맡고 있어요. 그런데 다행히도 동서 냉전이 끝나면서 우리에게도 기회의 창이 열렸죠. 그래서 당시에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도 냉전을 끝내고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평화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경주했어요. 가다 서다, 전진하다 후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30년의 전 과정에 제가 참여하는 특전을 가졌는데,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서 후학들이 또 후손들이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이 자서전은 제 개인의 삶을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살아온 시대의 역사적 배경, 한반도 정세, 그리고 그때 우리가 당면했던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전개했는가를 부각시키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크게 히트한 <혁명전쟁과 대공전략>

민 소장 : 책 내용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964년에 미국 유학을 가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시찰하고 연구할 기회를 가졌고, 이것이 인생의 상당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임동원 : 제가 1964년에 처음 미국으로 군사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지원을 했는데, 당시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이 게릴라 단계로 들어가 사태가 악화하고 있었죠. 미국이 군사 개입을 하기 전인데, 그린베레라는 특수전 부대를 엄청나게 많이 투입해서 전략촌을 8000개가량 건설하고 주민들을 분리, 통제하는 작전을 하고 있었어요.

이 무렵 북한도 남한에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전개하겠다고 결정하고, 우리가 말하던 무장 간첩들을 내려보내 정보를 수집하고 했어요. 저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어떻게 하면 방지, 예방, 통제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마침 미국 육군 특수학교에 이런 문제를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과가 생겼어요. 그곳에서 민족해방 전쟁을 어떻게 예방하고 대처할지에 대해 이론적으로 전략적으로 연구했습니다. 베트남, 말라야, 필리핀, 중국 등에 대해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육사에 ‘공산주의 비판’이라는 과목이 생겨 제가 교수로 취임하게 됐어요. 

그래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뿐 아니라 어떻게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기느냐, 하는 대공 전략론을 개발해 책을 썼어요. 그 책이 1967년 가을에 나온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인데, 마침 1968년 1월에 ‘1・21 사태’가 벌어집니다. 북한이 특공대를 파견해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려 했던 ‘김신조 사건’이죠. 그리고 그해 가을엔 태백산맥에 엄청나게 많은 특수부대를 투입시켜 게릴라 기지를 확보하려고도 합니다. 제 책이 이런 사태에 대한 대처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어서 히트를 합니다.

민 소장 : 어떻게 보면 당시에 대북 문제에 운명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군요. 미국에 가서 북한에 대한 대응 방책을 연구했는데, 결정적으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니까요.

임동원 :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간첩대책본부, 군대, 경찰, 중앙정보부 그 다음에 각 군 군사학교 등에 불려 다니며 교육하고, 아이디어 제공하고, 대책 강구하고 굉장히 바빴어요.

그런 참에 1967년에 이스라엘의 ‘6일 전쟁’이 터집니다.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 조그마한 나라 이스라엘이 주변의 14개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대승리를 거두죠. 이 전쟁이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나라 지도층에게 큰 충격을 줬어요. 조그마한 나라가 어떻게 주변의 큰 세력을 이길 수 있는지, 이스라엘의 군사제도를 연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는데 제가 선택됩니다. <혁명전쟁과 대공전략> 때문이었죠. 이스라엘을 연구해서 한국의 자주국방 제도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라는 취지였겠죠. 저는 이스라엘에서 인생관이 바뀌었어요.

이스라엘에서 자주국방의 길을 모색하다

민 소장 : 어떻게?

임동원 : 이스라엘은 참 대단한 나라입니다. 한 2000년 전에 망해서 디아스포라로 전 세계에 흩어졌다가 몇 사람 돌아와서 건국을 했는데 주변 아랍 국가들이 허용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걸 이겨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우리 시찰팀의 결론은, 우수한 군사 전략과 국방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추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력이 중요했다는 겁니다. 유대교 신앙에 입각해 ‘하나님이 나와 함상 함께 계신다’ ‘절대로 나는 승리할 수 있다’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우리 가족이 망하고 또 디아스포라가 된다’는 정신력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간부들의 솔선수범이에요. 이스라엘 군에는 ‘돌격 앞으로’라는 구호가 없답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거지요. ‘6일 전쟁’ 전사자 통계를 보면, 장교 초급 장교의 전사자 수가 전체 전사자의 25%를 차지하는데, 전 세계 역사상 이런 사례가 없어요. 대부분 80~90%가 사병들이 죽습니다. 이것이 솔선수범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양보다 질 위주의 원칙이에요. 참 인상적인 게 전투기 한 대에 조종사가 네 명씩 양성돼 있어요. 세계적으로 한 대에 한 명을 양성해서 유지하는 것도 힘든데, 네 명씩이나 갖고 있어요. 전투기가 100대 있다는 것은 400대가 있다는 뜻이 되는 거예요. 한 번 전투기가 출격한 뒤 돌아와서 기름 넣고 탄약 싣고 출격 준비를 하는데 보통 다른 나라들은 1시간 내지 2시간이 걸리는데 이스라엘은 7~9분이었다고 합니다. 앞에 나간 조종사는 쉬고, 새 조종사가 교대를 바로 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하루에 전투기가 평균 7~8번을 뛰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기지 않을 수가 없죠.

민 소장 : 1960년대 중반에 사실 정치군인들은 정치하느라고 바빴잖아요. 그런데 임 장관님은 미국, 이스라엘에서 그런 연구를 하고 전략을 고민하셨네요.

자주국방의 실천 ‘율곡사업’

김연철 : 맞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에 들어와 임 장관님이 합참의 전략기획과장, 육군본부의 전략기획처장 같은 전략가로서의 요직을 거치게 됩니다. 저는 이 책에서 자주국방, 특히 ‘율곡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대미 의존형 군대에서 자주국방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정말 의지와 설득, 그리고 전략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이해시키면서 추진하셨더라구요.

임동원 :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뒤 1970년대 초가 되면 ‘아시아의 방어는 아시아 사람들이 스스로 해야 한다’라며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 미육군 2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이 철수하고, 한국 방위의 대부분을 한국군에게 이양합니다. 그때까지는 미군이 직접 삼팔선에 배치돼 있었는데.

베트남에서 미국의 군사적 승리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태가 되어버린 때예요. 그런데 우리로서는 그냥 주한미군만 붙잡고, 모든 걸 미국에만 의존해 왔던 터라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죠. 이러다간 우리도 베트남처럼 망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들이 돌았습니다.

그때 제가 육군 대령 예정자인데 합참에 불려갔어요. 가 보니 새로 부임한 합참본부장 이병형 장군이 “자주국방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가야 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독립국가로서의 군대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가, 하는 전략을 세운 뒤 어떻게 장비를 증강하고, 군대를 개편하고, 모습을 달리 하느냐, 하는 것이죠. 그때까지는 뭐 걸어 다니는 보병 사단 위주의 군대이고, 해·공군이 별로 의미가 없고, 미국과의 합동작전 아니면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우리가 독자적으로 전쟁을 해서 승리할 수 있는 군대로 바꿔 나가야 한다’라는 의지가 있더라도 문제는 능력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분과 같이 계획을 세우자 박정희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어요. 왜 그러는지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어요. 이 5개년 계획이 중화학공업 육성을 목표로 하는 거예요. 철강, 기계, 조선, 전자 이런 것 위주로 양성하는 계획인데, 이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려면 수요가 있어야 하는데 방위산업 육성과 연계시켜 초기에 발전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게 박 대통령 생각이에요. 그게 맞아떨어진 거죠.

제가 율곡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율곡 계획으로 제시했죠. 대단히 좋다고 다들 지지해서 시작했는데 예산이 없잖아요. 그런데 1975년에 남부 베트남이 멸망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 충격으로 방위세를 신설해 국방비로 충당하고 투자비로 줍니다. 이게 GNP의 2% 정도예요. 그걸로 본격적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중화학공업 육성과 연계됩니다.

시작할 때는 M1소총을 M16소총으로 바꾸고 탄약을 생산하는 정도였지만 율곡사업을 18년 동안 지속한 결과, 어떤 상태가 됐느냐 하면 전차, 잠수함, 구축함 다 우리가 만들고 전투기도 조립 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했고 더 나아가 국민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 겁니다. 이건 학자들이 누구나 높이 평가하는 일입니다.

최근에 우리 방산품 중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것이 K9 자주포입니다. 이게 미국이나 영국 제품보다 훨씬 우수해 이미 8개 나라에 수출됐더라구요. 그런데 이번에 아홉 번째로 폴란드에서 200대를 수입해 간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K2 전차, FA50 경전투기도 수입하고. 이렇게 된 걸 보면서 저는 정말 행복하고 보람이 있었다, 율곡사업이 이런 결과를 가져 왔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민 소장 : 율곡사업이라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이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세웠고, 지금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K-방산’이 1970년대부터 준비되고 누적된 역사적 산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임동원 : 그렇습니다. 50년이 걸려서 된 것이죠. 1973년에 율곡 계획 채택해서 1974년부터 시작했으니까 50년 가까이 되죠. 

김연철 : 한 국가의 전략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은 중장기 전략이 굉장히 필요한데, 그런 차원에서 보면 율곡사업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정말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추진한 것이고, 시간의 누적되면서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 소장 : 이렇게 1970년대에 쭉 전략을 담당하시다가 1980년에 어떻게 보면 5·16 군사쿠데타 이후 두 번째로 군인들의 세상이 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한 상황에서 갑자기 육군 소장으로 예편을 하고 외교관의 길로 들어가십니다. 왜 좋은 길을 놔두고?

임동원 : 1980년에 신군부, 전두환 정권이 집권하면서 저는 본의 아니게 군으로부터 추방되었어요. 그리고 국내에 있는 것도 안 된다고 해서 아프리카로 가게 됐습니다. 제가 외교관을 지원한 것도 아니고, 꿈도 꿔본 적이 없는데 아프리카의 제일 험지로 가게 됐어요. 나이지리아죠. 거기서 참 어렵게 지냈습니다.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 키니네 먹어가면서. 그러다 눈이. 키니네 많이 먹으면 눈이 나빠지거든요.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일을 하면서 외교를 일선에서 배웠습니다. 그곳에서 4년 있었는데, 그 사이에 대통령 국빈 방문까지 치렀어요.

자유와 평등, 정권교체의 의미를 체험하다

그리고 다음에 간 곳이 오스트레일리아입니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이죠. 그런데 제가 그곳에서 너무나 새로운 세계와 마주친 거예요. 오스트레일리아는 노동조합이 강한 나라입니다. 20세기 100년 동안에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유당, 노동조합이 의회에 진출시킨 의원으로 조직된 노동당이 교대로 정권을 교체하는 거예요. 4년 혹은 8년씩 집권을 하면서. 자유당은 자유나 경쟁을, 노동당은 평등과 복지를 주장하지 않습니까? 자유와 평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유와 평등이 조화가 되어서 세계적인 복지국가가 됐고, 비경쟁의 행복한 사회를 이루고. 우리는 고도 경쟁 사회인데.

너무 다른 세계였어요. 어떻게 저게 가능한가, 그러니까 정권교체를 통해서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루면서 노동당과 자유당이 큰 정책 차이 없이 경쟁하는 단계죠. 우리는 언제, 어떻게 저런 복지 사회가 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민 소장 : 책에서 군을 몹시 섭섭하게 떠났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육사 13기이셨잖아요. 왜 섭섭하게?

임동원 : 저는 군대가 제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었어요. 일도 많이 하고, 진급도 빨랐고. 제가 하던 일을 더 하고 싶었죠. 제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좋았고. 그런데 제 의사와는 다르게 군복을 벗게 됐어요. 그래서 노태우 전 대통령 같은 분은 저의 예편을 상당히 아쉬워했어요. 군에서 제가 개척해 놓은 전략기획 분야를 맡아 더 발전시켜야 하는데, 이런 인재를 군에서 놓치는 건 큰 손해라고 위로를 해주시더라고요.

‘통일과 평화의 길’에 들어서다

민 소장 : 그래서 나중에 노태우 정부 말기에 통일부 차관으로 가시게 되는군요.

임동원 : 노태우 대통령이 저를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발탁해요. 그다음에 외교부 차관이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를 맡기로 돼 있었는데, 대표를 ‘임동원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하라’고 지시를 합니다. 제 인생 코스가 거기서부터 달라져서 통일 분야에서 일하게 된 거예요.

김연철 :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계실 때 지금 서울 서초동의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을 건물을 만드셨잖아요?

임동원 : 제가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임명이 된 것이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한 1988년입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동서냉전이 끝나가고 있던 시기죠. 노 대통령이 저를 불러서 두 가지 임무를 주는 거예요. 

우선 지금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냉전이 끝나가고 있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우니, 이 전환기에 우리 외교가 나아가야 할 정책 방향을 연구해서 제시해 달라는 겁니다. 군에서 제가 정책 연구를 했다는 걸 염두에 두신 거죠. 

두 번째로는 우리 외교관들을 국적 있는 외교관으로 양성해 달라는 겁니다. 우리 외교관들이 우리나라 외교관 같지 않다, 이거죠. ‘국적이 있는 외교관’ 이 말이 유명한 단어가 돼서 많이 인용됐습니다. 노 대통령 얘기가 “모든 선진 국가에서 장교하고 외교관은 국산품이다. 자기 나라에서 교육하고 만들어 낸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라는 겁니다. 

당시 외교 안보를 연구하는 연구원의 건물은 한남동에 있었는데, 교실 하나에 사무실 10개 정도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나중에 연구원 건물을 새로 지어야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결재가 났어요. 문제는 땅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마침 양재역 근처에 박정희 대통령이 10년 전에 외교단지를 조성하라고 지시해서 서울시가 마련해 놓은 택지가 있더라구요. 가난한 나라의 대사관을 유치하려는 목적의 땅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나도 수용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못하면 원소유주에게 돌려주게 돼 있었는데 정확히 8개월이 남았어요. 그래서 예산 확보도 안 된 상태에서 외상으로 일을 일단 시작하고 나중에 예산을 받아 건물을 지었습니다.

민 소장 : 임 장관님은 가시는 곳마다 뭔가를 이루어내는 ‘메이커’로서의 역할을 참 잘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성적으로 부지런하고 뭔가를 만들어 내고,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임동원 : 저는 무엇이든 임무를 맡으면 그걸 완벽하게 하려는 좀 좋지 않은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열심히 합니다. 무엇이든지.

김연철 : 저도 늘 이렇게 배웁니다. 임 장관님은 대담을 하거나 강연을 하실 때 굉장히 꼼꼼하게 준비하십니다. 예를 들어 역대 대통령들께서 남북관계에 대해 자문을 받는다고 할 때면 다른 분들은 조금 즉흥적으로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임 장관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준비를 많이 하시고, 정확히 정리를 하시고, 또 주위에 물어보십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게 좋냐, 혹시 덧붙일 말이 없냐, 라며 거의 완벽하게 일을 하시는 분이죠.

민 소장 : 그럼 재미가 없잖습니까.

김연철 : 그런데도 인간적인 풍모가 있으시죠. 그러니까 과거에 군에서 같이 생활했던 분들이 지금도 다 옆에 계십니다. 주위에 따르는 친구, 후배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민 소장 : 그러니까 기자들도 ‘영국 신사’라는 인물평을 하는 것 아닐까요? 

임동원 : 감사합니다.

독일에서 배운 ‘사실상의 통일’

민 소장 : ‘격변의 시대’라고 말씀하셨지만, 1990년대 초반에 남북한 사이에 굉장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기자였던) 저도 남북대화사무국을 매일 출근하듯이 갔죠. 남북 간 고위급 회담이 문을 여느냐 마느냐 하는. 그런데 그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일이죠. 베를린을 직접 방문하시면서 느끼셨던 게 있다면서요?

임동원 : 제가 외교안보연구원에 4년 동안 근무했는데, 개인적으로 집중 연구한 것이 유럽에서의 ‘평화 프로세스’, ‘헬싱키 프로세스’였어요.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군비 감축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하는 것을 연구했지요. 그리고 독일 통일의 과정도 연구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날 갑자기 독일이 통일됐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하신 선물이다’ 같은 말들을 언론에서 많이 했지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오랫동안 심고 물 주고 정성껏 가꿔 온 결과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기에 꽃 피우게 해 주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고 제가 주장했어요. 그 노력이란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이거든요. 동방정책을 통해서 한 발짝 한 발짝 접근해서 동독의 변화를 이끌어가겠다는 것이죠.

교류 협력을 활성화하고 경제 지원을 하는데, 20년 동안 연평균 32억 달러를 지원하고, 이산가족 재결합도 실현하고, 교류 협력이 오고 가고, 나중에는 텔레비전 방송을 서로 볼 수 있는 상황까지 가고, 이러다 보니 동독 사람들의 의식이 점차 변하게 된 것이죠. 그러다가 동독 시민들이 때가 왔을 때 들고 일어난 시민혁명을 통해서 통일로 가요. 

‘흡수통일’이라고 언론에서 많이 보도했는데 흡수통일이 아닙니다. 동독 시민들이 스스로 결단해서 이루어낸 통일입니다. 동독 시민들이 시민혁명을 통해서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통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세 가지 방안을 놓고 국민투표를 해서 통일로 이어지게 된 거지, 억지로 동독을 흡수한 것이 아니에요. 물론 동방정책이 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죠.

한편으로 동방정책이라는 것이 단순히 동독에 대한 정책인가,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소련권에 대한 정책인데, 놀라운 것은 브란트가 집권하자마자 그 이듬해 소련과 관계 정상화부터 하잖아요. 철의 장막을 뚫고 폴란드하고도 관계 정상화를 하고. 왜? '독일이 먼 훗날 통일을 하려면 유럽의 평화 체제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유럽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급선무다', 이것이 동방정책의 목표였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연구해 왔는데, 통일된 독일 현장에서 상당히 많은 걸 느꼈어요. 우리가 어떻게 통일을 이뤄나갈 수 있겠는가, 우리도 갑자기 되지는 않고 점진적 단계적으로 교류 협력을 통해서 ‘de facto unification’, 곧 ‘사실상의 통일’, 그러니까 정치적 통일은 안 됐지만 통일된 것과 비슷하게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는 오고 가고 할 수 있는 사실상의 통일에 이르는 것이 올바른 길이겠다, 하는 신념을 가지게 됐습니다. 

‘한국의 에곤 바르’, 임동원

김연철 : 통일 문제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각들이 있는데요. 방금 임 장관님께서 설명해 주셨지만, 독일 통일을 보면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1990년에 통일 조약을 맺어 통일을 이루게 되는데,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을 봐야 한다는 것이죠. ‘통일은 과정이다’라는 독일 통일의 교훈 말이죠. 임 장관님이 ‘햇볕정책의 주역’에서부터 별칭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 ‘한국의 에곤 바르’라는 것도 있어요. 에곤 바르가 누구냐 하면,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브란트 총리 밑에서 일한 전략가예요. 임 장관님이 나중에 실제로 에곤 바르를 만나게 됩니다. 저는 굉장히 역사적인 만남이라고 봤거든요. 전략가와 전략가가 만난.

임동원 : 제가 에곤 바르를 상당히 존경하고, 많이 배우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마침 독일 사민당의 에버트재단에서 독일 통일 10주년이 되는 해에 저를 초청해서 ‘동방정책의 설계자’ 에곤 바르와 ‘햇볕정책의 설계자’ 임동원의 대담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열어줬습니다. 두 시간 넘게 했는데, 저는 상당히 영광이었고, 많은 의견을 교환했죠. 햇볕정책과 동방정책의 유사점은 무엇이며, 한국과 독일은 어떻게 다른지, 한국이 나아갈 길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토론했습니다.

민 소장 : 그렇군요. 1990년에 남북고위급 회담이 열렸는데,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회담은 그때가 처음이었죠? 

임동원 : 그전까진 없었죠. 적십자회담 정도.

노태우 대통령의 대북 정책 전환 ‘7・7 선언’ 

민 소장 : 당시에 모든 회담에 참석을 하셨어요. 1990년대에 직접 현장을 취재했던 입장에서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은데, 우선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회담이 이루어진 데는 남북한 사이에 어떤 사정과 배경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국제적 상황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구요.

임동원 : 맞습니다. 동서 냉전이 끝나면서 한반도에서도 냉전을 끝내야 되겠다, 하는 생각들이 남과 북에 같이 있었죠. 그리고 놀라운 것은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한 뒤 엄청나게 새로운 정책들을 펴나가는 거예요. 그것이 1988년 7월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처음 나타나는데, 우리는 ‘7·7선언’ 혹은 ‘북방정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노태우 대통령이 7·7 선언에서 40년 동안 유지해 온 반공 정책을 버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을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 여태까지 인정하지 않았죠. 북한이라는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실제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북한을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정의합니다.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반공법에 걸릴 만한 얘기죠. 그리고 교류 협력을 시작합니다. 

대북 인식과 관련해선 당시에 동구권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곧 망할 것이라는 ‘북한 붕괴 임박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다. 북한도 변화할 수가 있다’라는 ‘점진적 변화론’의 사고방식에 토대를 두고 새로운 통일정책, 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북한에 대해서 정부 간 고위급 회담을 하자고 제의했지요.

북한은 북한대로 사정이 딱했습니다. 세상이 변하니 어려움에 놓이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남북관계 개선에서 길을 뚫어보자는 생존 전략을 추구하게 된 거예요. 이게 맞아떨어져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 회담이 열리게 된 겁니다.

김연철 : 그런데 사실 남북 회담의 역사로 보면 ‘7·4 남북 공동성명’을 채택할 때 몇 번 왔다 갔다 한 이후로, 분단 이후 최초로 총리급 회담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하게 됩니다. 

중국이 북한에 조언하다

임동원 : 이게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죠. 처음 1990년 9월에 서울에서 제1차 남북고위급 회담이 열린 뒤, 그해 12월까지 세 차례 회담이 개최됩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는 10개월 동안 회담이 정지돼 버려요. 그랬다가 국제 정세가 변화하는 과정을 눈여겨보고 난 다음에 진척이 이뤄져요. 남북이 유엔에 공동 가입했지요. 그러면서 생각들이 달라지고. 

그때 대단했던 것은 9월18일인가에 미국이 전 세계에 배치된 전술핵무기의 철수를 선언하는데, 남한에 배치돼 있던 전술핵무기도 철수하게 됩니다. 북한이 핵 개발 의혹을 받고 있었는데, 미군 핵무기를 철수한다니까 태도를 바꿀 수가 있게 됐죠. 

또 하나는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해서 남방의 개방 지역을 시찰했는데, 이때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유명한 세 가지 조언을 합니다. 첫째는 북한도 중국처럼 개혁·개방 경제를 통해서 발전할 수 있으니 노선을 바꾸는 게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었죠. 그러기 위해선 둘째로 한반도의 평화 안정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야 외자도 도입할 수 있고. 그러니 남북관계 개선을 촉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셋째는 미국이 핵무기 철수 선언을 했으니 이걸 기회로 삼아서 북한이 받고 있는 핵 의혹을 해소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합니다.

실제로 김일성은 북한으로 돌아와서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통해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해요. 그래서 남북고위급 회담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됩니다.

민 소장 : 저도 당시에 덩샤오핑이나 장쩌민의 통역을 맡았던 중국 쪽 외교관을 통해서 뒷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북한 쪽에 상당히 애정을 가지고 ‘이제 더 이상 폐쇄와 고립으로 갈 수는 없다. 중국도 한국과 이 세계적 변화에 호응해서 갈 수밖에 없으니, 과거와 달라지는 상황을 북한이 이해해달라’고 진정성 있게 설득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김일성이 남쪽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된 것 같고요. 

또 제가 1991년에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을 할 때, 유엔에 석 달 동안 취재를 가 있었습니다. 강석주 당시 북한 외교부 부상과 단독 인터뷰도 했지요. 그때 강 부상이 인터뷰에서 “북남 간에 이제는 뭔가 해야 한다”라는 말을 계속하는데, 변화해야 한다는 감정을 굉장히 느꼈거든요. 당시 소련이 붕괴했고, 중국이 남한과 국교 수립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던 점 등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져서 총리급 회담이 이어지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10개월 동안의 공백 끝에 1991년 10월22일 평양에서 열린 4차 회담의 분위기는 어떠셨어요?

남북 기본합의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임동원 : 그때는 이미 북한이 남북 회담을 성사시키려는 결심이 굳어 있었어요. 그래서 쉽게 진행됐죠. 4차 회담 직전에 접촉을 통해서 남과 북에서 각각 3명의 대표가 나오는 6인 협상 회의를 열고 거기서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합의했지요. 그래서 4차 회담 전에 6인 회의가 네 차례 열렸어요.

저도 멤버로 참여했는데, 그때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하자는 원칙에 동의하고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한 개의 문서로 할 것인가 두 개의 문서를 할 것인가, 이런 토의를 했지요. 그러다가 4차 회담에서 하나의 문서로 하고, 이름은 ‘남북 기본합의서’, 정식으론 ‘남북 화해와 불가침과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합의서는 4장으로 편성하고, 구체적인 것은 부속 합의서 3개로 만들자는 데도 합의를 이뤘죠. 그 안에 들어갈 내용에 대해서도 초보적인 협상을 했는데, 거기서 무슨 합의를 볼 수는 없었고, 그 다음 5차 회의에 와서,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합의를 보게 되는 겁니다. 

민 소장 : 당시에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이 지금까지도 그 정신 자체는 쭉 이어져 왔는데요. 

김연철 : 남북 기본합의서가 1991년 12월에 체결되고, 1992년 2월에 발효되는데, 올해가 꼭 30년이 되는 해예요. 그런데 여전히 남북 기본합의서는 남북 관계를 규정하고, 또 교류 협력과 불가침, 화해 분야에 있어서의 거의 모든 쟁점들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남북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거냐, 민족 관계로 봐야 된다는 의견도 있고, 차라리 그냥 국가 간 관계로 보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요즘 양국체제론 같은 논의들도 있습니다만.

그런데 남북 기본합의서를 정확하게 보게 되면, 이런 논쟁들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거기에 담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남북 기본합의서에서는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남북관계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떻게 그런 합의를 하시게 됐는지도 궁금합니다.

남북 기본합의서, 30년간 기본장전 역할을 하다

임동원 : 많이 논쟁을 했죠. 남북이 유엔에 공동 가입하게 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데, 그때까지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유엔에 공동 가입하게 됨으로써 남과 북은 국제사회와 함께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국가 관계가 어찌 되어야 하는가, 이것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남과 북은 국제적으로는 주권 국가이지만, 남북 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로 보지 않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합의를 보고, 그 특수관계의 내용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을 담은 것이 남북 기본합의서입니다.

모두 25개 조항으로 돼 있는데, 저는 그것을 6개 조항으로 요약해서 설명합니다. 첫째, 남북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통해서 서로 원수가 되었지만 이제 화해하자. 둘째, 여러 방면에서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자. 이건 우리가 제의했어요. 북한은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시장경제 체제를, 우리는 북한의 현존하는 체제를 그대로 인정하자. 이래야 서로 공존하고 대화할 수 있는 거죠. 셋째, 여러 방면에 걸쳐서 교류 협력을 해나가자. 넷째, 전쟁하지 말자. 불가침이죠. 다섯째, 불가침을 보장하기 위해서 군비 감축을 해나가자. 군비 통제, 군사적 신뢰 구축, 군비 감축을 하자. 여섯째, 정전 체제를 남북 사이의 평화 체제로 전환시켜 나가자. 이렇게 여섯 가지인데 남북관계의 핵심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죠. 

탈냉전 시대에 남북 기본합의서는 새로운 남북관계를 규정하는 기본장전입니다. 지금까지도 여기에 토대를 두고 남북관계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죠. 남북 기본합의서가 그 후에 남북정상 회담을 통해서 ‘6·15 남북 공동선언’, 또 ‘10·4 선언’, 2018년에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선언’, 또 그 앞의 ‘판문점 선언’ 이런 것들로 발전하는데, 연속선상의 합의들이지요. 그 시발점이 바로 ‘남북 기본합의서’고요. 뒤에 언급을 안 한다고 없어진 게 아니고, 그것이 토대가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민 소장 : 어쨌든 9차 회담까지 결국 진행하다가 남쪽에서 ‘조선노동당 간첩 사건’, 또 북측의 ‘팀스피릿훈련 중단’ 요구, 이런 걸로 결국은 남북관계가 파탄이 나고 아쉽게도 마무리가 안 되면서 암흑기가 오지 않습니까? 아쉽습니다. 그런데 일단 공직에서 물러나셨다가 아태평화재단 김대중 이사장을 운명적으로 만나시게 됩니다. 이게 사실 햇볕정책으로 가는 굉장히 중요한 운명적 만남인데요. 삼고초려를 해서 모시려고 했는데 잘 응하지 않으시다가 결국에는 응하신 이유가 뭔가요?

빨갱이인 줄 알았던 김대중과의 첫 만남

임동원 : 세 번씩이나 계속 몇 달에 걸쳐서 요구하는데, 나중에는 그 비서실장이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선생을 만나고 싶어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당신은 건방진 거 아니요!”라는 거예요. 이 말에 자극을 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별로 좋아하는 분은 아닌데, 한 번 만나는 보자, 이랬지요. 그렇게 돼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만날 때는 김대중 선생하고 같이 일하겠다는 게 아니라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몰랐고, 전혀 몰랐어요. 관심이 없었어요. 정부에서 선전하는 대로 거짓말쟁이, 빨갱이,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거든요. 

그렇게 만났는데 제가 확 무너져 버렸어요. 첫 만남에서 두 시간 대화했는데, 확고한 통일 철학을 가지고 있는 이런 사람이 정치인 중에 없단 말이에요. 원대한 비전이 있고, 논리 정연한 사고가 있고. 아주 논리 정연해요. 김정일은 왔다 갔다 하면서 얘기하는 스타일인데, 김대중 선생은 아주 삼단논법식으로 논리정연하게 사고하는 것에 제가 큰 감명을 받았어요. 더군다나 민족 문제, 남북관계, 북핵 문제 등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아주 예리한 분석과 판단, 그 다음에 명쾌한 해결방책을 제시하시는 데 놀랐어요. 제가 이 방면을 계속 연구하고 종사해 온 사람인데, 저리 가라예요. 전 충격을 받았어요. 

민 소장 : 충격까지요.

임동원 : 아, 이런 분이 계셨는가,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그분이 결정적으로 제 마음을 움직인 게 뭔가 하면, “남북 기본합의서야말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평화 통일에 접근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을 제시했다. 훌륭한 합의서다. 그리고 당신이 그 기본합의서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니 높이 평가한다”고 하셨죠. 그리고 “이것이 실천에 옮겨져야 된다, 그래서 남북 화해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야 되겠는데, 우리 힘을 합쳐서 같이 노력하자”고 설득하신 겁니다. 거기에 제가 안 하겠다고 할 수 있나요? 

민 소장 : 상대가 그렇게 정확하게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을, 마치 내 속마음을 읽듯이 끄집어내고, 인정하고, 존중해 줬네요. 그것이 바로 김대중 이사장과의 첫 만남이군요. 

임동원 : 그래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알겠습니다”, 이렇게 돼버렸어요.

민 소장 : 푹 빠지셨군요. 그 이후에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으로 통일부 장관이 되시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추진 시기에 결국 남북대화를 주도하셨어요. 1991년에 추진했던 것과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것의 차이점은 어떤 겁니까?

햇볕정책은 ‘미국과 함께’가 달랐다

임동원 : 다른 점이 분명히 있죠. 하나는 남북 기본합의서 때는 남과 북이 단독으로 추진한 거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미국과 정책 공조를 통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한 거예요. 앞에서 독일의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한반도 문제는 민족 문제인 동시에 미국이 깊이 개입돼 있는 국제 문제예요. 그런데 남북이 아무리 좋은 기본합의서를 만들어 놓았지만 팀스피릿훈련을 하면서 박살을 내버리면 끝이예요.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변화하지 않는 한 남북관계도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미국을 설득해서 같이 가야 된다는 것이죠.

마침 빌 클린턴 행정부가 ‘인게이지먼트’(engagement) 정책, 포용 정책을 추진해요.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북한과 대화하고 협상한 정부예요. 그전까지는 상대를 안 해줬으니까.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제네바 기본합의’를 채택해서 핵 문제를 해결했잖아요. 중단시켰어요. 그리고 미북 관계를 개선해 나갔잖아요. 이렇게 8년을 해서, 미북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서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에 가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됐었는데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가 당선돼서 클린턴이 하던 건 다 틀렸다고 뒤집어 버리니까, 또 우리 운명이 이렇게 되었죠.

김연철 : ‘6·15 공동선언’은 사실 굉장히 짧습니다. 다섯 개 항으로 돼 있고요. 저는 이 공동선언을 어떻게 평가하냐 하면, 그 이전에는 ‘합의의 시대’였다면 그때부터는 ‘실천의 시대’로 전환한다, 이렇게 봅니다. ‘6·15 공동선언’ 5개 항을 합의하는 과정도 소개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6·15 공동선언’은 합의에서 실천으로의 변화

임동원 : ‘6·15 공동선언’에서, 남북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 문제에 대해서 남북의 정상이 공통 인식에 도달했다는 거예요. 북한은 연방제 국가부터 수립해 가지고 당장에 통일을 해서 남북관계를 개선 발전시키자는 게 공식 입장이었는데, 우리는 통일은 즉각 가능하지 않고 그건 긴 과정, 지난한 과정이라고 본 것이죠. 그래서 남북연합 단계를 통해서 두 정부 간 협력 기구인 남북연합을 형성해서 남북관계를 계속 발전시키면서 평화를 만들어서 이룩하는 과정이다, 라고 설명하는데, 김정일이 납득이 돼 동의를 합니다. 이렇게 통일 문제에 대한 공통 인식이 성립하게 되면서, 그럼 남북관계에 이러저러한 일을 합시다, 이렇게 된 것이죠.

남북 기본합의서 그 자체는 합의에 불과하죠. 남북 기본합의서에서는 화해와 교류 협력을 해나가자, 라고 말로만 합의했는데, 합의 중에 실천에 옮긴 최초의 합의서가 ‘6·15 공동선언’입니다. 실천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화해 협력 시대를 열었지요.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6·15 공동선언’은 미국과 북한의 공동 코뮤니케를 낳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북한이 관계 정상화의 과정을 밟기로 합의하게 되고, 추진하게 되는 거죠. 

민 소장 : ‘6·15 정상회담’은 당시에 참 파격적이었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맞이하는 장면은 정말 몇 번을 돌려봐도 가슴에서 올라오는 벅찬 감동이 있어요. 당시 특사로 가시고 회담의 모든 과정들을 현장에서 지켜보셨는데,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은 어떤 뒷얘기나 정말 유언으로라도 남기고 싶은 에피소드는 없습니까?

임동원 : 자서전에 몇 개 간단히 적어 놓은 건 있습니다. 

민 소장 : 가장 인상적인 대목 하나 소개해 주시죠.

김정일이 속내를 털어놓다, ‘핵은 사실 필요하지 않아요’

임동원 : 김정일은요, 북한의 최고 정책 목표가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어요.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지 않는 한 북한이 살기가 어렵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이 응해 주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하고 아주 가깝고 미국하고 가까우니 이 문제를 좀 도와주시오’라고 호소하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런 대목들이 저는 상당히 인상적이에요.

김대중 대통령하고 김정일 위원장하고 또 서로 호흡이 맞은 게, 김정일 위원장이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지만 그게 진짜가 아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계속 있는 것에 동의한다. 단, 주한미군이 북한을 공격하려고 하는 그런 성격의 군대가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동북아의 평화를 유지하는 이런 성격으로 변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한미군은 계속 있어 줘야 된다” 이랬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이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라고 했다는 것은 좀 특이한 얘기처럼 들리는데, 실제 김정일이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리고 제가 특사로 갔을 때 핵 문제 개발과 관련한 솔직한 얘기를 해줬어요. 자서전에도 적었지만, 김정일은 “북한은 미국을 믿을 수가 없다. 신뢰할 수 없다. 정권 교체하면 또 바뀌고 하니까, 어떻게 그걸 믿느냐”는 거예요. 이렇게 미국이 가장 두려운 존재다, 항공모함 전력을 포함해서, 믿을 수 없고 두려운 존재라는 거지요. ‘북한은 미국과 관계 정상화하지 않으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그래서 관계 정상화를 위해서 무척 노력하는데 미국이 이야기를 안 들어준다. 그리고 미국은 핵으로 우리를 위협하는데, 우리는 미국과의 협상력을 강화하고 억제력을 유지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핵 개발을 안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이거 필요 없는 거다”, 이런 이야기를 김정일이 저한테 들려줬고, 제가 그건 이번에 자서전에 썼지요. 

김연철 : 이 책에 보면 임 장관님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협상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협상의 이면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고 재밌는 얘기들이 있어서 독자들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고요. 임 장관님은 또 본인이 이산가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동생들을 만난 얘기도 아주 상세하게 담겨 있습니다. 좀 눈물이 나더라고요. 

민 소장 : 문재인 정부를 지나서 이제 윤석열 정부로 와 있습니다만. 남북관계 자체에 늘 어떤 고비와 또 즐거운 시간들이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들을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리고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 정착을 위해서 지금 과제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문재인 정부는 전쟁의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임동원 : 제가 자서전 마지막 장에서, 2017년의 위기와 2018년의 전환의 기회,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적었습니다. 제가 30년 동안 남북관계에 종사하면서 느낀 것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핵심 과제가 4가지라는 겁니다. 이것은 김대중 정부 때 공식적으로 발표도 하고 그랬던 것이지만, 우선 남북관계가 적대관계에서 화해 협력 관계로 바뀌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는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가 해소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이 해소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이 적대를 해소하기 위해 비핵화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네 번째로 군사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켜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데, 이건 근처에도 아직 못 갔지요.

그런데 2017년에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다가오지 않습니까. 북한이 15년 동안 핵 개발에 열중해 가지고 여섯 번 핵실험을 하고 성능이 좋은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고. 그 다음에는 핵폭탄을 실어나를 수 있는 중거리 탄도미사일 시험을 해서 성공하고, 그리고 2017년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미 본토를 겨냥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에 성공하고, 그 후에 두 번 더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을 하고 난 다음에 북한은 ‘핵무력을 완성했다. 이제 미국은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해오지 못한다’, 이렇게 선언하지 않습니까.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에 여러 번 격분해서, 나중에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붕괴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하고, 전쟁 불사 선언을 하죠. 우리는 전쟁이 일어날까 봐 엄청나게 걱정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첫 해인데, 이 전쟁 위기를 우리가 2018년에 기회로 전환하잖아요. 그건 문재인 대통령의 큰 업적이죠. 남북 정상회담도 몇 번을 하고, 그리고 유사 이래 처음으로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싱가포르에서 합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싱가포르에서의 미북 정상 합의입니다. 앞서 말한 한반도 핵심 과제 중에서 세 가지가 거기에 들어있는 거예요. 첫 번째로 70년 동안 지속된 미국과 북한 간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한다. 두 번째로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군사 평화체제로 전환하도록 노력한다. 세 번째로 북한은 비핵화를 실현한다. 그러면 하나가 빠졌는데 그건 남북의 관계 개선인데, 이렇게 네 가지 문제가 서로 상호 연관성이 있고 상호 의존관계에 있는데, 이건 포괄적으로, 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시도해야 할 새로운 접근 방법은 이미 남북 간에, 미북 간에, 또 국제 간에 합의한 4자 평화회담을 개최하는 것입니다. 4자 평화회담 개최에는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장기간이 되더라도 어떻든 4자 평화회담 과정을 통해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피스 메이킹 프로세스’, 이제 다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개해야 합니다. ‘다시 평화’를 강조해야 합니다. 

왜 ‘다시 평화’인가

민 소장 : ‘다시 평화!’. 그 마지막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임 장관님의 여정을 통해서,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맥락, 외교·안보·통일의 중요한 지점을 살폈습니다. 정말 소중했습니다.

김연철 : <다시 평화>는 임 장관님이 어린 시절부터 남북관계의 현장까지, 그 일생을 정리하신 책인데, 우리 젊은 세대들이 임 장관님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임 장관님은 군인에서 시작해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서서히 진화하신 거고, 또 노태우 정부에서 남북 회담 대표이자 남북 기본합의서를 만드는 주역이었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보수 정부입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서 6·15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하신 건데,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6·15 공동선언으로 계승 발전하는 부분들을 쭉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남북관계를 둘러싸고 국내 정치적으로 참 분열이 심각합니다. 여전히 남북관계를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도 있고요. 그렇지만 임 장관님의 삶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보수 정부와 진보 정부가 모두 남북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어떤 공감대, 또 합의의 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임동원 :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 소장 : 헌법 전문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 또 66조 3항에 보면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통일은 어떤 대통령의 이념이나 개인적 사상이 아니고 반드시 우리가 이뤄내야 할 필연적인 의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요. 임동원, 김연철 두 분 장관님을 모시고 대담을 나누면서 결국 평화는 필연이고 당위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