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 ‘반도체 전쟁’이 점입가경이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시동을 건 반도체 무역 제재의 바통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어받아 ‘2차 공세’에 나섰다. 이번 공세는 첨단 반도체의 수출 통제를 개별 기업 중심에서 산업 전반으로 넓히는, ‘전면전’에 가까운 양상을 띤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미국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무서울만큼 성과를 내고 있다는 반증이다. 미국의 전략은 성공할 수 있을까?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어떤 활로를 모색할까?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가 미국의 공세 배경과 이에 맞선 중국 반도체 산업의 성취, 그리고 국가 전략을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꽤 길지만, <삼국지>를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이 기술패권 전쟁의 양상을 잘 살피면서 적절한 대응 방안을 찾는 일은 이제 한국경제의 핵심 과제가 됐다. [편집자 주]

✔ 약진하던 중국 반도체 산업, 미국의 새 수출 봉쇄 조치로 어려움 맞나✔ 제재 중에도 중국 정부와 자본 지원으로 기술 도약✔ 미국의 다음 수는 반도체 공정 장비 수출 금지✔ 제재를 계기로 중국은 반도체 장비 산업 자립화 길로 가나

이미지:셔터스톡

중국 SMIC, 10나노 공정 벽을 넘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정권 시절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기술 및 무역 제재의 첫 번째 카드는 반도체 제조 선단 공정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EUV(극자외선) 노광 공정으로 대표되는 10나노 이하급(테크 노드 기준) 초미세 패터닝 공정이 핵심 제재 대상이었다.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한 이후 중국의 파운드리 업체들은 더 이상 네덜란드 기업 ASML이 제조하는 최신 세대의 EUV 리소그래피용 스캐너를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글로벌 선두권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던 중국의 파운드리 1위 업체인 SMIC(중신궈지)는 양산 공정 세대가 14나노에서 멈추게 되었다. 2019년 당시만 해도 SMIC는 AMD, TSMC, 그리고 삼성전자에서 차례로 선단 공정 최적화의 핵심 노하우를 쌓아 온 량멍쑹(梁孟松)을 CTO로 임명하고 수많은 전현직 TSMC 엔지니어들을 영입하여 공정 기술 수준을 28나노에서 14나노로, 다시 10나노까지로도 불과 몇 년 만에 급격히 줄여 나간 전력이 있는 회사다. 

하지만 그 기세는 미국의 기술 제재 조치로 급격하게 식었다. SMIC를 비롯한 중국 파운드리 업체들의 입장에서는 무공을 막 꽃피우려던 순간 마치 혈을 눌려 옴짝달싹 못하게 된 느낌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대중 반도체 기술 제재를 위한 첫 번째 카드로 꺼낸 EUV 리소그래피 장비 수출 제재는 단순히 SMIC의 글로벌 파운드리 산업으로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은 2020년대 들어 팹리스 회사(반도체 칩 설계 전문 회사)가 2000개를 돌파했고, 그 숫자는 지금도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그만큼 다양한 목적에서 활용될 반도체 칩의 중국 국내 수요가 계속 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집중해 오던 반도체 굴기의 기조에 맞춰, 중국은 반도체 칩의 설계뿐만 아니라 제조 역시 국산화율 제고를 서두르던 상황이었고, SMIC는 그 최전선에서 생산 규모와 기술 수준을 동시에 높여 가고 있던 회사였으므로,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회사가 타격을 입은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구조의 연결 고리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히 노리고 타격한 것이 미국이 꺼낸 첫 번째 카드였다. 이 카드는 미국의 의도대로 적중하여 SMIC의 기술 발전은 정체되었고, 중국 팹리스 회사들의 칩 제조, 특히 10나노 이하급 공정을 필요로 하는 칩의 생산에도 덩달아 제동이 걸렸다. 중국의 팹리스 업체들이 SMIC 대신 대만의 TSMC에라도 생산 위탁을 하려던 경로까지 미국의 제재 조치로 인해 점점 좁아졌기 때문이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 기업 SMIC(中芯國際·중신궈지)는 최근 75억달러(약 10조원)를 투자해 톈진에 매달 12인치 웨이퍼 10만개를 생산할 공장을 새로 짓겠다고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SMIC, 미국의 제재 3년 만에 기술로 역습

하지만 미국의 제재 조치가 시행된 지 만으로 3년도 지나지 않은 지난 7월, SMIC는 느닷없이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10나노도 아니고 7나노(테크 노드 기준) 핀펫 공정으로 캐나다 소재 회사 미네르바(Miner-Va)가 생산을 위탁한 가상화폐 채굴 전용 SoC(시스템온칩)인 MinerVa 7을 생산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선단 공정 제재 조치로 인해 분명 10나노의 벽을 넘지 못했어야 했던 SMIC가 7나노 공정으로 칩을 생산했다는 것은 얼핏 보기엔 이해가 되지 않는 뉴스일 수도 있다. 특히 7나노 공정 기반 칩 생산은 파운드리 선두 주자인 TSMC나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기존의 4년에서 2년 이내로 좁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일각에서는 미국의 제재 조치가 오히려 중국의 기술 격차를 줄이게 만든 역효과를 낳은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 SMIC는 미국의 EUV 공정 기술 제재가 본격화한 지 불과 1년 만인 2020년에 7나노 공정 기술 개발에 성공했음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당시 SMIC의 7나노 공정 기술 개발 소식에 대해 파운드리 업계는 반신반의했으나, 그로부터 2년 후인 2022년 7월에 본격적인 7나노 공정 기반 파운드리 생산품이 실제로 시장에 공개된 후, 업계는 SMIC의 7나노 공정 기술 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SMIC가 생산한 칩을 리버스 엔지니어링한 초기 기술 분석 결과에 따르면, 해당 제품은 TSMC의 ArFi DUV(EUV 이전 세대 리소그래피 기술인 액침불화아르곤 심자외선 기반 노광 공정)에 기반한 7나노 공정과 거의 똑같은 공정을 거쳐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즉, SMIC가 EUV 스캐너를 활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TSMC가 몇 년 간 노하우를 축적해 온 최신 세대의 DUV 리소그래피 기반 핀펫 기술을 모종의 경로로 확보한 후 그것을 이용하여 10나노 공정의 벽을 뚫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SMIC의 7나노 공정 생산은 양산 수준이 아닌 위험을 감수한 시험 생산(risk production)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첫 고객으로 가상화폐 채굴 칩 회사를 맞이한 것은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크립토 화폐 채굴을 위한 전용 칩의 설계 특성 때문이다. 이러한 류의 칩에서는 메모리가 차지하는 영역보다는 단순 연산 파트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욱여넣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RAM 쪽에 블록 패턴 배정을 줄일 수 있고, 따라서 멀티패터닝 공정을 조금 더 단순화할 수 있다. 마침 SMIC가 TSMC에서 2020년 이전에 대규모로 스카우트한 엔지니어들 역시 블록 패턴 기반 SoC 배열 최적화 전문가들, 그리고 마스크 재활용 노하우가 있는 인력들이 많았다. 즉, 채굴 칩은 SMIC가 DUV 멀티패터닝 기반 공정 기술을 테스트하기에 좋은 시험 무대였던 셈이다.

SMIC가 미국의 기술 제재 이후에도 7나노 공정에 돌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존에 최적화되었던 ArFi DUV 리소그래피 기술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7나노 공정 수준에서는 단순히 DUV 기술만 활용해서는 패터닝 공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 DUV를 한 번 스캔하여 패터닝하는 것(단일 패터닝)만으로는 10나노 공정에서 요구하는 물리적 구조를 만들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SMIC가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TSMC의 DUV 기반 7나노 핀펫 공정 기술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패터닝을 반복한 이른바 ‘멀티패터닝’ 기술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SAQP(self-aligned quadruple patterning) 같은 4중 멀티패터닝 기술에 의한 것이다. SAQP 기술은 이론적으로 단일 패터닝에 비해 길이, 방향, 해상도를 4배로 높일 수 있고(즉, 구조물의 물리적 크기를 1/4로 축소할 수 있음), 따라서 단위 면적당 트랜지스터 집적도는 16배로 향상될 수 있다. 특히 TSMC가 최적화한 SAQP의 경우, 맨드릴(mandrel) 같은 스페이서(spacer)를 이용하기 때문에 기존의 멀티패터닝 기술에 비해 마스크 요구 수량도 20% 정도 줄일 수 있다. 그만큼 공정 시간의 단축이 가능해진다. 

물론 SAQP는 후발 업체 입장에서는 DUV 리소그래피 장비가 있다고 해서 바로 실현할 수 있는 류의 기술은 아니다. 기본적인 DUV 최적화는 물론, 스페이서 소재, 배치, 얼라인 노하우, 트렌치 배치 등의 최적화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러한 노하우의 확보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TSMC의 7나노 SAQP 역시 최소 5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 기술이었다. 필자 역시 예전에 SMIC가 EUV 기술 제재 상황에서 공정 기술 선진화를 위해 DUV로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은 최대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시도해 볼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이는 세밀한 붓을 쓸 수 없는 조건에서 아주 얇은 폭의 선을 그어야 할 경우, 굵은 붓으로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먹물을 살짝 묻히면서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천천히 선을 그리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일임을 이해하면 추론 가능한 예측이다. 

다만 SMIC가 높은 수율의 멀티패터닝 기술에 기반한 7나노 공정을 양산 수준으로 완성했다고 해도, 원류는 TSMC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기술적 완성도의 자립을 이룬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또한 실제 공정 원가가 얼마나 될지도 추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비용에 상관이 없다면 SMIC가 7나노 공정을 넘어, 5나노 공정까지 가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취득 경로가 어떻게 되었든, 일단 7나노 공정에서 확보한 공정 기술 대부분은 5나노 공정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TSMC 역시 5나노 공정에서 DUV 기반 멀티패터닝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채굴 전용 칩처럼 비교적 간단한 로직 구조의 칩이라면 굳이 고가의 EUV 리소그래피 장비를 쓰지 않아도 된다. 핀펫 공정의 미세화에 노하우가 축적된 TSMC 인력을 활용할 수 있다면 2024년쯤, 늦어도 2025년에는 SMIC가 5나노 공정까지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 공정 장비는 대부분 TSMC의 엔지니어들이 사용하던 스펙과 크게 다르지 않고,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풍부하니, 다양한 최적화 ‘실험’을 통해 이 시간은 더 단축될 수도 있다. 

다만 5나노 이하의 영역에서 DUV 멀티패터닝의 기술 난이도는 더 높아진다. 실제로 TSMC 역시 5나노 공정부터는 본격적으로 EUV를 도입하고 있다. TSMC 기준, 5나노 핀펫 공정의 fin 크기는 대략 18nm이며, 이 크기의 트랜지스터를 만들고 집적하기 위해 마스크는 11장이 소요된다. 이를 SMIC가 DUV 멀티패터닝으로 따라잡으려고 한다면 마스크 개수는 거의 두 배로 늘어나고 수율은 절반으로 감소한다. 전력 소모량도 70~80% 이상으로 증가하고, 생산 비용은 훨씬 더 늘어난다. 

하지만 SMIC가 기술적 난도와 비용을 감내하고서라도 어쨌든 DUV 멀티패터닝 기술을 계속 축적해 놓는다면, 언젠가 EUV 제재가 혹시 풀리게 될 때 SMIC가 TSMC나 삼성과 파운드리 분야 기술에서 격차를 줄이는 일은 생각보다 빨라질 수 있다. 5나노 이하에서는 EUV의 활용 노하우는 물론, 멀티패터닝 과정에서의 노하우, 즉 스페이서 활용과 마스크 개수 줄이기 노하우가 계속 활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와 거대 자본이 사력을 다해 지원하는 SMIC

이러한 연유로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미국의 기술 제재가 풀릴 때까지 어쨌든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긁어모아서라도 버티는 게 필요하다. 특히 적어도 글로벌 1, 2위권 파운드리 업체들이 거의 과점하다시피 한 상황에서는, 이들 기업들과의 공정 기술 로드맵 격차가 지금보다는 더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즉, SMIC는 TSMC나 삼성전자와의 파운드리 분야 기술 격차가 2년 이상으로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그 수단에는 거대한 자본 동원력도 있다. SMIC는 중국 정부의 반도체 굴기 프로그램에서 가장 집중적인 지원을 받는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이기 때문에, 회사가 지원받은 거대한 자금은 설비 확충에 쓰여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SMIC 입장에서 EUV 리소그래피 스캐너 구입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으로 DUV 공정 기술의 고도화, 그리고 그를 이용한 레거시 공정(10나노 이상인 14나노, 28나노 공정 등) 및 7나노 공정 생산 캐파 확장에 투자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즉, ArFi DUV 리소그래피 장비 시장에서 가장 큰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기술 퀄리티의 문제, 양산 수준에서의 원가 문제 역시 지속적인 자본 투자를 통해 공정이 성숙해가면 개선될 여지가 있다. 이를 통해 SMIC는 적어도 DUV를 활용한 선단 공정에서는 점차 수율이 개선되고 원가를 절감하여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을 조금씩이라도 올려 나갈 수 있다. 안정적 내수 시장과 더불어 시장 점유율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확보되면 미국의 제재 속에서도 사업을 영위할 수 있고, 기술 격차도 더 벌어지지 않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의 CEO 피터 베닝크. (사진:연합뉴스)

미국의 두 번째 대응 카드, 반도체 공정 장비 제재

물론 이런 중국의 대응에 미국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제재는 이에 대해 다시 핀포인트 제재 수준으로 심화하는 모양새다. SMIC의 7나노 공정 기술 개발이 2020년에 보도된 이후 그 기술의 원류가 TSMC라는 것, 엔지니어 중 상당수가 TSMC 출신이라는 것이 분석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EUV뿐만 아니라, 이전 세대의 스캐너와 선단 공정 장비 등에 대한 제재를 심화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2022년 7월 미국 상무부는 SMIC를 특정하여, 이 회사가 10나노(테크 노드 기준) 공정 양산에 필요로 하는 필수 장비들의 수출을 불허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는 단순히 SMIC가 활용해온 ArFi DUV 스캐너 수출 통제(사실 이 장비도 ASML이 기술 수준에서 최선두권에 있으며 시장도 과점하고 있다)를 넘어, 선단 공정 전반에 필요한 다양한 장비의 수출을 통제할 것임을 예고하는 일이다. 

SMIC 같은 파운드리 업체에서 필요로 하는 장비에는 단순히 리소그래피용 스캐너만 있는 것이 아니다. TSMC의 경우, 7나노 양산 공정을 기준으로 팹 한 라인에 투입된 장비의 개수가 1000대를 상회한다. 대부분 증착, 확산, 에칭, 세정, 포토리소그래피 장비 등이다. 2022년 현재 이러한 장비 시장의 절대 다수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네덜란드가 과점한다. 메모리반도체 팹이냐 파운드리 팹이냐에 따라 점유율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미국 반도체 공정 장비 회사의 시장 점유율은 50%, 일본은 40%, 네덜란드는 5~6% 수준이다. 한국의 경우, 메모리 혹은 비메모리 반도체 팹 상관없이 국산 장비 업체들의 점유율은 5~6% 안팎으로, 여전히 10%의 벽을 넘지 못하는 상황이다. 팹 자체가 특정 회사의 장비 스펙에 맞춰 설계되어 있고, 공정 엔지니어들도 그 회사의 장비에 특화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장비 업체가 진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런 공정 장비 국산화율은 중국의 경우 더 심각한 수준이다. SMIC가 TSMC의 7나노 핀펫 공정을 그대로 차용했다고 가정해 보자. TSMC 7나노 공정 팹 한 개에 들어가는 장비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공정 장비의 절대 다수는 Applied Materials(미국, 세정/ 평판/ 증착/ 열처리/ 측정분석/ 식각/ 이온주입 장비), Lam Research(미국, 식각), HIKE(일본, 확산/ 이온주입), ASML(네덜란드, DUV 리소그래피 스캐너), Canon(일본, DUV 리소그래피 스캐너/ 마스크), JEL(일본, 얼라이너/ 이송장비), TEL(일본, 세정/ 식각/ 증착/ 열처리) 등의 제품으로, 미국, 일본, 네덜란드 세 나라에 대한 장비 수입 의존도가 무려 95%에 달한다. 미국이 주목한 부분도 바로 이런 높은 의존도다. 즉, SMIC의 7나노 공정은 물론 10나노, 14나노 공정 등에 대한 통제는 이제 DUV 리소그래피 장비를 넘어, TSMC가 각 공정의 멀티패터닝에 활용하고 있는 미국, 일본, 네덜란드 장비 회사의 최신 세대 장비 전반에 대한 수출 금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 업체들 뿐만 아니라, 일본과 네덜란드 업체로까지 이러한 미국의 장비 수출 금지 조치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미국에서 개발된 기술이 일정 비율 이상 활용된 장비라면 국적에 상관없이 수출 규제 조치를 소급하여 적용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 때문이다.

이렇듯 중국의 반도체 제조업은 단순히 파운드리뿐만 아니라 메모리반도체 생산 영역에서도 해외 반도체 장비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수입한 해외 반도체 장비 수입액에 견줘 중국은 1.5배 이상의 규모로 장비를 대량 수입했다. 일례로 미국의 반도체 장비 회사 Applied Materials의 한 해 매출은 23조 원(170억 달러, 2020년 기준) 정도인데, 이 중에서 동아시아 4개국인 한국(17.6%), 중국(31.7%), 대만(23.1%), 일본(11.6%)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84%에 달한다. 이는 Applied Materials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 일본,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들도 마찬가지여서, 80~85% 정도의 매출이 동아시아 4개국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비중이 제일 높은 두 나라가 한국과 대만이었으나, 201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이 가장 높은 비중(25~32%)을 차지하는 위치를 굳혀가고 있다. 과도할 정도로 높은 외국산 반도체 장비 의존도는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자국의 국가적 시책 사업으로 내세우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추가적으로 SMIC를 비롯한 중국 반도체 팹을 타깃으로 공정 장비 수출을 금지하겠다는 것은 중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 자체를 통제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이야기다. 현재로서는 SMIC만 특정하기는 했지만, 해당 장비는 DRAM 같은 메모리반도체 팹에도 공통적으로 활용되는 장비인 경우가 대다수다. 이 때문에 메모리반도체 업체를 통해 수입되는 장비의 전용이나 재활용을 막기 위해서라도 결국 SMIC 뿐만 아니라 칭화유니나 YMTC 같은 중국의 대표적인 메모리반도체 업체로까지 공정 장비 수출 금지 조치가 확장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로 보인다.

저인망식 제재의 불확실한 실효성

그렇지만 미국이 3년 전에 꺼냈던 첫 번째 카드, 즉, EUV 스캐너의 금수 조치와는 달리, 중국 반도체 팹을 타깃으로 하는 공정 장비의 금수 조치는 오히려 미국의 의도와는 반대로 향방이 정해질,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EUV 스캐너의 경우, ASML이 30년 이상 연구개발에 매진하여 2010년대 이후 지금까지 줄곧 세계 유일의 장비 공급 업체로 자리매김한 핵심 장비다. 현재로서는 경쟁 회사도 없고 당분간 다른 기술로 대체 불가능하다. 심지어 현재로서는 그 기술 격차조차 정확히 산정하기 어려운 장비이다. 그런데 다른 공정 장비는 그 정도의 격차가 나지 않으며, 대체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여전히 외국산 공정 장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 역시 2010년대 들어 조금씩 장비 국산화율이 올라가고 있다. 세메스나 주성엔지니어링, 원익, S&S Tech 같은 한국 회사들의 장비가 조금씩 삼성이나 하이닉스에 채용되기 시작하면서 장비 국산화율이 올라가고 있으며, 특히 3년 전 일본의 대한국 반도체 수출 규제 이후 정부가 중점적으로 시행하는, 이른바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사업이 확장되면서 더 많은 기업들이 장비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이런 정부 지원 사업은 중국에서는 더 큰 규모로, 더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기술 격차가 크다고 중국 스스로 자평하는 리소그래피 노광기 역시 중국 업체인 CETC-EE(중덴커전자장비그룹)이나 SMEE(상하이마이크로전자장비그룹) 등이 장비 국산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CETC-EE 같은 회사의 경우 광학 장비와 광원에 대해 자체 개발을 서두르고 있는 동시에, 중고 ASML이나 캐논의 노광 장비를 2017년부터 120대 이상 개조하여 재활용하는 기술을 축적하고 있다. 이렇게 개조한 노광 장비는 해당 장비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SMIC나 YMTC 같은 중국 반도체 팹에 납품되고 있다. 구형 모델 공정 장비의 경우 세대가 바뀌면 제조사의 유지보수 지원이 점점 축소되기 때문에 개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그동안 상식이었다. 그런데 CETC-EE가 자사의 장비도 아닌 외국의 노광 장비를 재활용 혹은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중국 자체적으로 노광 장비를 비롯한 해외 반도체 장비 회사의 공정 장비 개조를 위한 부품 수급과 기술 지원 생태계가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CETC-EE는 전공정에 필요한 노광기 개조나 개발 뿐만 아니라 후공정 장비(웨이퍼 절단기 및 패키징 장비) 생산과 개조에도 열을 올리고 있으며, 일본의 반도체 장비 회사 출신의 중국인 엔지니어와 TMSC 출신 대만 엔지니어를 수시로 채용하여 기술 격차를 좁혀 나가고 있다.

NAURA Tech(베이팡화창과기집단) 같은 회사의 경우, 미국의 Applied Materials과 흡사한데, 장비 생산 범위가 에칭부터 열처리까지 대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주요 고객은 역시 YMTC와 SMIC로서 여전히 장비 점유율은 1~2%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의한 장비 금수 조치가 본격화하면 이런 회사의 장비 매출액은 급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에칭과 증착 장비 기업 AMEC(중웨이반도체설비), CVD와 ALD 증착 장비 업체인 PioTech(퉈징과기) 등 이미 중국에는 반도체 장비 기업이 2020년 기준으로도 250곳 이상에 달한다. 현실적으로 중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기술력과 점유율은 여전히 글로벌 선두권 업체에 비할 수준은 아니나, 정작 미국이 그러한 글로벌 선두권 업체들의 대중 장비 수출을 금지하면 중국의 장비 업체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기술 개발과 수익 양면에서 장기적으로는 반사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       

여전히 대부분의 장비 회사가 생산하는 장비의 수준은 선진 업체들에 비해 수 세대 정도의 기술 격차가 나고 있다. 각 장비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의 국산화율 역시 10%를 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업체들은 시장에서의 도태를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면에는 정부의 산업 장악력이 있다. 그리고 중국 정부의 장악력이 다른 나라들과는 구분되는 흥미로운 부분을 형성한다. 

중국 반도체 장비 회사들은 각자 사업 영역은 다르지만 창업은 대부분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가 투자를 주도하고, 기술은 그 지역 명문 이공계 중심대학이나 국가연구소가 집단으로 파트너십을 이뤄 합자회사 형태로 설립한다. 예를 들어 CETC-EE의 경우 중국의 국가연구소 세 곳이 기반이 되어 만들어졌고, SMEE는 상하이시 국유자산관리위원회가 그 설립 주체다. 다른 장비 업체들 역시 지방정부 혹은 정부 산하 공기관이나 대학이 연합하여 설립한 케이스가 흔하다. 중국 메모리반도체 업체의 대표격인 칭화유니의 설립 주체가 중국을 대표하는 이공계 특화 대학인 칭화대학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AMEC는 자체적으로 장비를 생산하는 회사이기도 하지만, 각 반도체 장비 회사에 전략적으로 투자를 해 지분율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관리하고 있기도 한데, 그 이면에는 중앙정부의 지배구조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의 노선은 중앙정부가 정한 정부 주도의 기술 격차 단축 정책에 따른다. 즉, 장비 회사의 생태계와 생산 캐파, 주요 고객들과의 접점과 기술 수요, 인력 양성 및 선행 기술 IP 관리와 경영 등의 모든 면에서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정부 주도의 지도는 시장 상황에 따라 업체가 반응하는 것이 아닌, 업체의 계획에 따라 시장이 따라가는 현상을 만든다. 중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까닭은 중앙정부가 과교흥국, 기술굴기, 반도체 자립화 등의 기치를 경제계획의 주요 노선으로 일단 결정하고 나면 그것을 뒤집기 어려운 권위적 분위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대중 제재가 본격화한 이후에는 애국주의까지 가세하여 반도체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국산화율을 제고하는 것이 지상목표처럼 되어가고 있다.

사진:셔터스톡

중국, 반도체 장비 산업 자급화 노리나

이렇게 일사불란해 보이는 중국의 반도체 산업, 그리고 장비 산업이지만, 결국 시장경제 상황에서는 경제학의 논리에 반하는 산업이 경쟁력을 오래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기술혁신에 의해 경제가 성장해 온 80여 년 동안의 산업 발전 역사를 되짚어 보면, 국가 주도의 기술 추동, 특히 제조업 분야의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가기 위한 기술 추동 정책은 어느 수준 이후부터는 그 유효성을 상실한다. 자본주의 아래서의 기술 혁신은 시장의 수요 대응, 그로부터의 수익 확보, 수익 일부의 선행 기술 재투입, 선행 기술에서의 다음 기술 혁신이라는 사이클을 따른다. 이 과정에서 시장의 수요는 다양한 내외적 요인에 의해 기술 혁신 측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장단기 변동성을 가지며, 이는 사실 시장 경제 시스템의 고유한 특성이기도 하다. 시장의 반응을 정부에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 오히려 기술 혁신을 늦추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실 한때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수위를 고수하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몰락하게 된 원인의 한켠에는 이러한 일본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개입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산업 형성 초기에는 정부가 일정 기간 마중물 역할을 하며 연구개발을 지원하고, 보조금이나 세제 혜택을 주면서 뒤쳐진 기술을 따라잡고, 보호무역 정책을 통해 국내 기업이 체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는 체력을 갖춘 국내 업체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도약하려면 글로벌 시장 경제 논리를 따라야 한다. 정부가 여전히 과하게 개입하려 할 경우 기술 혁신의 타이밍과 효과가 저하되고, 의사 결정의 혼돈이 가중되며, 그 결과로 회사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 역시 글로벌 경쟁력 확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진 업체들과의 기술 격차가 가시권 이내로 좁혀지는 즈음인 만큼, 조금씩 정부의 관여가 줄어들어야 할 타이밍이다. 나아가 각 회사들의 기술 혁신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과도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 전반에 걸쳐 행사하려는 영향력은 오히려 더욱 강해지고 있는 추세다.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려는 중국의 반도체 장비 회사 역시 정부 주도의 기술 추종 방식에 과하게 지배될 경우 글로벌 경쟁력을 잃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물론 중국의 상황은 단순히 글로벌 수준에서의 시장 경쟁력을 논하는 관점에서만 바라보기에는 그 성격이 지금까지의 후발 주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 차이점은 중국 입장에서는 반도체 산업 각 분야에서의 글로벌 경쟁력이 당장의 지상목표가 아니라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동안 반도체 산업 후발 업체들은 철저하게 GVC로의 편입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철저하게 분업화된 세계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어 높은 점유율의 벽으로 가로막고 있는 선행 업체들과 경쟁해야 하는 후발 회사들 처지에서 일이었다. 그렇지만 중국은 상황이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중국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이 재편하려는 글로벌 반도체 밸류체인(GVC)에서 분리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세계 시장을 상대하기 전에, 당장 중국 내부의 시장부터 살려야 하고, 이제 막 꽃을 피워가려는 산업과 기술의 맹아를 죽이지 않는 것이 현재로서는 더 중요한 일인 것이다. 특히 GVC 재편 이면에는 GVC로부터의 중국 분리, 적어도 중국의 반도체 산업 기술 격차를 지금보다 더 확대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자리잡고 있다. 이로 인해 설계 자산부터 장비까지, 메모리부터 파운드리까지, 전공정에서 후공정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술 제재 아래에 놓일 경우, 중국으로선 문자 그대로 자력갱생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특히 시진핑의 국가 주석 연임이 눈앞으로 다가온 2022년 하반기 현시점에서, 고개를 숙이고 미국 주도의 GVC 재편에 순순히 따른다는 옵션은 애초에 중국의 선택지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정치외교적, 기술안보적 상황 속에서 중국의 반도체 GVC 분리 흐름은 중국으로 하여금 글로벌 시장이 아닌 내수 시장에 집중하여 산업을 보호하고 기술 추격의 동인을 보존하고 기술 혁신의 원동력을 키워가려는 계획에 더욱 집중하도록 등을 떠미는 촉매가 될 수 있다. 살아 남는 것 자체가 목표인 상황이라면 비용이나 수익률, 글로벌 경쟁력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술 수준이 Applied Materials나 TEL, LAM에 비할 바가 못 되더라도 ‘꿩 대신 닭’으로서 CETC-EE, NAURA, AMEC 등의 중국산 공정 장비가 대량으로 투입될 수밖에 없다. 거대한 자체 시장을 바탕으로 규모의 경제와 기술의 축적을 통해 초기의 낮은 품질은 개선되고 수율과 수익률 역시 개선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움직임은 앞서 언급한 대로 중국 반도체 장비 회사 대부분의 설립 배경을 고려했을 때 절대적으로 정부의 정책과 일치된 방향으로 정해지게 될 것이며, 여기에 애국주의가 더해져 폐관봉쇄를 각오하는 수준으로까지 갈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까지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흘러가는 결말을 미국이 원하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EUV 리소그래피 장비 제재 조치와는 달리, 다양한 공정 장비 제재 조치는 일단 장비 가짓수가 너무 많고, 같은 장비라고 해도 세대 별로 차이가 있고, 특정 공정에만 1 : 1로 작용하는 장비가 많은 것도 아니며, 대체 불가능한 장비인 경우도 거의 없기 때문에 실제로 EUV 리소그래피 장비 제재만큼의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이런 조치는 중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기술 개발 동인을 자극하고 기술 혁신을 부추길 수도 있다. 나아가 미국의 반도체 장비 업체들 입장에서는 30% 이상의 매출이 줄어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급감하게 될 매출을 커버할 수 있는 시장은 그나마 한국, 대만, 일본 정도이나, 이 세 나라 역시 중국이라는 시장을 상실하게 되면 그런 장비를 대량으로 추가로 필요로 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한국, 대만, 일본 모두 중국과의 반도체 무역을 통해 얻는 이익이 크고, 특히 한국과 대만은 대중 반도체 수출 의존도가 50%를 상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대중 반도체 공정 장비 금수 조치는 미국 입장에서 자국과 동맹국 업체들에게는 큰 손해를, 외적으로는 중국이라는 경쟁자의 산업 경쟁력과 자생을 위한 체력을 오히려 키워주는 악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하이닉스 ‘블루칩 프로젝트’의 교훈

하이닉스는 현재 삼성전자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회사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이 회사는 IMF 이후 한때 부도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고, 2010년 초기에도 숱한 자금 위기를 넘으며 회생의 기로에 놓였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위기 속에서도 하이닉스가 다시 흑자로 전환하고, 지금은 글로벌 수준의 반도체 회사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이닉스가 축적해온 공정 기술 자구책 노하우가 자리 잡고 있다. 2001년에 시작한 ‘블루칩 프로젝트’는 프로젝트 이름과는 달리, 장비 구입 비용을 아끼기 위해 구형 장비를 개조하고 신제품 생산에 맞게 손질하여 양산 로드맵을 이어간다는 계획이었다. 단순히 구형 장비를 재활용하는 것을 넘어, 개조라고 부를 정도로 하이닉스 공정 장비 엔지니어들의 노력은 상상 이상이었는데, 비유하자면 출퇴근용으로만 쓰던 평범한 자동차를 껍데기만 남긴 채 구동계와 엔진을 모두 뜯어고쳐(새로 구입한 것이 아님) F1급 경주용 자동차로 개조한 수준이었다. 기술적인 면만 놓고 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는데, 그래서 당시 업계 사람 대부분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하이닉스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실제로 이를 통해 2001년 당시 거의 1조 원에 달하는 생산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런 노하우는 이후에도 2004년 300mm 웨이퍼 생산을 위해 공장을 신설하는 것이 아닌 기존 구형 공장을 리모델링한다는 목표를 가진 ‘M10 프로젝트’에도 적용되었고, 결국 하이닉스는 이번에도 프로젝트의 성공을 통해 약 8000억 원에 달하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2012년 SK그룹에 인수된 이후에도, 하이닉스의 공정 장비 비용 절감 및 기술 로드맵 유지 노하우는 계속 축적되었는데, 3D 낸드 플래시 분야에서도 기존의 공정을 재활용하는 노하우는 꾸준히 적용되었고, 이는 비용 절감뿐만 아니라 공정 시간 단축 및 수율 개선이라는 결과물로도 나타났다. 

하이닉스가 20여 년 전부터 장비 재활용 노하우를 축적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체적인 경영적 판단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반도체 환경이 좋지 않았고, 자금 수급 환경은 더욱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비용을 최대한 절감할 수밖에 없었던 외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내적 동인이든, 외적 요인이든, 하이닉스는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구형 장비를 재활용하는 기술 개발에 매달렸고, 이를 통해 공정 기술의 혁신과 비용 절감을 이뤄냈다. 이후에는 협력사들에게까지 노하우가 전파되어 생태계 전반에서도 공정 기술 자립의 기반이 마련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SK하이닉스는 향후 5년에 걸쳐 M15X 공장 건설과 생산 설비 구축에 총 15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중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20여 년 전 하이닉스가 놓여 있었던 환경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현재로선 기술 자립화는 요원하고,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는 것은 어렵고,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동기는 강하게 부여되어 있다. 내적으로도 정부 차원에서 자립화, 애국을 외치는 분위기 같은 동기가 있겠지만,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외적 요인이 엄혹한 현실로 다가오면 생존은 본능이 된다. 즉,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살아남는 것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중국 반도체 업체들 역시 하이닉스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장비 개보수의 기술 노하우와 인력의 양성, 비용 절감의 비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축적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하이닉스와는 달리 충분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정부의 강력한 보호와 지원까지 더해진다면 그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결국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있다면 마치 항생제를 이겨내면서 세대를 거듭하여 내성이 강해진 슈퍼 박테리아처럼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미국의 중국 반도체 산업 제재가 초기에는 핀포인트 제재에서 머물고 있었으나, 이제는 점차 산업 전방위로, 전 세대로, 전 영역으로 확장되는 추세다. 그렇지만 핀포인트 제재가 오히려 촌철살인의 효과를 낸 것에 반해, 광범위한 제재의 효과는 숨통을 끊기는커녕 에너지만 공급하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과연 이런 미국의 기술 제재 전략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고사시키는 제초제가 될지, 오히려 내성을 강화시켜 슈퍼 박테리아로 키울지 여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그렇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다. 압박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면 결국 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 의존도가 50%를 넘는 한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죽지 않고 버텨 체력과 체급이 높아지게 되면 상황은 어려워진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와 상관없이, 중국의 집중적인 반도체 산업 투자는 한국과 오버랩되는 분야에서의 중국 자립화 수준을 높여, 결국 중국 내 한국산 반도체 점유율을 감소시키고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축소시키고 있었는데, 미국의 제재로 인해 그 경향이 가속되면 한국이 제대로 된 전략을 준비할 시간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국이 Chip4 동맹을 고민하기 전에 더 중요하게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은 미국의 기술 제재로 인한 중국 반도체 산업의 대응 전략 변화다. 제재 하나하나에 따라 어떤 분야에서의 움직임이 추동되는지를 제대로 모니터링하며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기술 제재는 이제 하나씩 현실이 될 것이고 공정 장비를 넘어, 소자나 칩 그 자체, 설계 자산 등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제재는 결국 중국은 물론, 중국과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큰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국이 최근에 꺼내든 세 번째 카드는 바로 급속한 기세로 성장하고 있던 중국의 AI 반도체 굴기를 제어하기 위한 AI 가속 전용칩, 즉 GPU 수출 통제다. 과연 이 카드는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


글쓴이 권석준은서울대 공대 화학생물공학부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마치고 MIT 화학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 책임연구원을 지냈고 차세대 반도체 소재 및 광(光) 컴퓨터, 양자 컴퓨터 등의 차세대 IT소자 원천 기술 등을 연구 중이다. 현재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지금까지 60여 편의 논문을 해외 저명 학술지에 게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