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한국의 유권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 즉 ‘진보’냐, ‘보수’냐였다. 그 중간에 ‘중도’라는 이념 성향의 유권자층이 분류되긴 했지만, 진보와 보수만큼 강한 규정성을 지니진 못했다. 그런데 민주당의 ‘새로고침위원회’가 9월2일 내놓은 보고서 <이기는 민주당 어떻게 가능한가?>는 “전통적인 진보-보수 구도는 깨졌고, 유권자 집단은 다양하게 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2022년 대선을 평가하는 성격을 띠고 지난 7~8월 활동한 위원회는 3000명의 유권자를 설문조사한 뒤 이런 결론을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이나 이념에 따라 일관된 정당 지지는 없었으며, 민주당은 질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해 왔다고 한다. 이 위원회의 간사로 참여했던 <피렌체의 식탁>의 이관후 수석 칼럼니스트가 변화한 유권자들의 지형도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선거 패배 뒤 당의 수습, 안정 위한 민주당의 선거 평가3000 샘플의 웹조사+전문가 간담회+포커스 그룹 인터뷰예상한 대로 다원주의적 경향이 정치지형에 영향 끼쳐위기의 민주당 지지층의 혁신 이끌고 일부 과격주의 포기해야

사진:셔터스톡

‘새로고침위원회’ 보고서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비상대책위원회가 맡은 책무는 3가지였다. 하나는 선거에서 진 당을 수습하고 안정시키는 것, 전당대회를 잘 치러 새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대선과 지선에 대한 평가 작업을 하는 것이다.

첫 번째가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비대위원장이 욕심을 내지 않으면서 무난히 달성되었다. 두 번째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전당대회 룰을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고, 어렵사리 수습되었다. 세 번째는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다. 2012년 대선평가위 보고서는 분당의 씨앗이 됐다.

세 번째 과제를 맡은 것이 ‘새로고침위원회(이하 위원회)’다. 위원회는 일단 대선과 지선에 대한 단기 평가를 하지 않기로 했다. 2012년 대선평가위의 전례가 바람직하지 않았고, 후보자 요인을 포함한 단기 평가는 이미 많은 토론회를 통해 백가쟁명식의 보고서가 20여 개나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비공개 리포트들을 포함하여 이 보고서들을 모두 제공받아 검토했고, 그 중 어느 보고서의 손을 들어주는 식의 평가는 무의미하다고 봤다.

대신, 중장기적인 시점에서 민주당의 노선을 평가하기로 했다. 또한 위원들의 주관적 견해보다는 유권자들의 눈높이에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당이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짜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봤다.

이런 방침 아래 진행된 평가의 결과를 담은 보고서가 9월2일 공개되었다. 소책자지만 200여 페이지에 달한다. 이런 조사도, 결과도 처음이라서 당혹스러운 분들도 있을 것이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일원으로서, 내용을 충분히 설명할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일단 그 전에 보고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자료 해석에 대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과정을 알 필요가 있다.

어떻게 작성했나?

크게 3가지 방법이 사용됐다. 먼저 3000 샘플에 달하는 대규모 웹조사다. 정치조사에서 이 정도 규모의 온라인 조사가 사용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두 번째는 전문가 간담회다. 당내에서는 청년 정치인들, 당 밖으로는 기후, 젠더, 노동, 한반도 평화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비공개로 진행했다. 세 번째는 전국 12개 그룹, 1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포커스 그룹 인터뷰(FGI)다. 

이 글에서 주로 설명하려는 것은 첫 번째 조사의 결과다. 기존의 정치조사들은 주로 본인이 생각하는 이념 성향과 정당 지지 2가지를 물어보고, 응답자의 인구학적 특성과 몇 가지의 정책선호 정도를 묻는다. ARS나 전화면접 조사로 묻기 때문에 질문 개수는 제한적이다. 이렇게 해서 나오는 결과는, 진보에서는 몇 %, 중도나 보수에서는 몇 %가 민주당을 지지하고, 지역별, 소득별, 학력별, 성별 등등의 편향성은 어떻다고 결론내리는 것이다. 

위원회는 이와 유사한 조사를 추가로 할 필요는 없다고 봤다. 이런 조사는 단기적으로 선거를 앞에 두고 급한 전략을 세울 때 필요하지만, 중장기적 진단을 내리기에는 부족하다. 당과 부설 연구원에서 여론조사를 담당하는 책임자들의 의견도 동일했다. 결국, 완전히 새로운 조사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다. 제로 베이스에서 유권자 지형을 ‘가치’ 중심으로 분석해보기로 한 것이다.

‘Q방법론’이 제안되었다. 다양한 정책적 가치 지향에 대해 34개의 질문을 던지고 지지와 반대 뿐 아니라 강도를 기입하도록 했다. 이렇게 3000명의 응답자들이 34개 질문지에 답한 결과를 합산하고, 이 중에서 특정 군집이 형성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물론 리스크가 있었다. 군집 형성이 안 될 수도 있었고, 군집은 형성되지만 해석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군집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정치조사로서는 무의미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전문가들과 함께 마라톤 회의를 한 끝에, 리스크를 감수하기로 결정했다.

가설이 들어맞았다

조사 결과, 가설이 들어맞았다. 전통적인 진보-보수 구도는 붕괴돼 있었다. 유권자 지형은 크게 6그룹으로 나뉘었다. 민주당 지지층도 2~3그룹으로, 국민의힘 지지층도 3개 이상의 그룹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이것은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지나면서 탈냉전, 탈물질주의, 다원주의적 경향이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선 6개 그룹의 규모와 특성은 이렇다.(각 그룹의 제목은 특징을 잡아내기 위해 붙인 것이다. 그룹의 성격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친/반 등의 설명 역시 성향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그룹 전체가 개인적으로 그런 성향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룹1: 평등·평화 그룹 (37.7%)

가장 큰 그룹이다. 평등과 평화에 관련된 가치를 강하게 지향한다. 복지, 성평등, 노동, 민족주의, 균형외교 등 전통적인 진보적 가치를 지지한다. 환경과 혁신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룹2: 능력주의 보수 그룹 (21.5%)

능력주의를 선호한다. 부동산 세율을 낮추고,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사면하라는 진술문에 가장 강하게 반응했다. 이념적으로 친자본주의, 친능력주의, 친핵 보유, 친미 성향을 보이는 자유주의적 보수다. 반복지, 반환경, 반노동, 반 소수자 포용 등의 성향을 보인다. 다소 의외로 젠더 이슈에 관심을 보였다.

그룹3: 친환경·신성장 그룹 (18.8%)

공동체주의적 보수다.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되 국가의 역할을 인정한다. 시장주의자이지만 전통산업보다 혁신을 통한 신산업이 필요하다고 보고, 국가가 복지 시스템을 통해 이를 뒷받침해주기를 기대한다. 환경 이슈에서 진보적이지만, 소수자, 젠더 이슈에 대해 보수적이다. 노동운동과 검찰개혁에 대해 강한 반감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무관심층에 가깝다.

그룹4: 반권위 포퓰리즘 그룹 (9.3%) 

여성가족부 폐지를 1순위로 원했다. 다음 순위는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핵무장 등에 공감하면서, 격차 해소와 검찰개혁을 지지한다. 복지 강화도 원했다. 주택 구매를 지원하기 보다 월세를 지원해주기를 원했다. 소수자와 난민에 대해 배타적이다. 전반적으로 기존 권력(정치/시장)이나 국가 시스템을 모두 강하게 불신한다.

그룹5: 민생우선 그룹 (6.4%)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원을 1~2순위로 꼽았다. 동시에 부동산과 기업에 대한 감세에도 반응했다. 소득, 주거, 일자리 등 민생 이슈에 민감하고 혁신적 경제정책, 대기업, 소수자, 환경, 검찰개혁, 핵무장 등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진다. 정치개혁, 외교, 거대 이슈에 매우 냉소적이다.

그룹6: 배타적 개혁우선 그룹 (6.3%)

검찰개혁을 강력히 지지하면서, 부동산 세율 인하를 원한다. 혁신성장을 지지하고, 이재용 사면도 원했다. 주택 구매 지원을 원하고, 기본소득에 반대한다. 환경 이슈에 무관심하고, 노동 문제를 노사 자율에 맡기길 원한다. 소수자와 난민에 대해 배타적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각 그룹의 가치 지향을 알았지만,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할 것이다. 좀 앞뒤가 안 맞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위원회에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이들이 누구인지 찾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자료를 모두 공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해를 돕기 위한 최소한의 설명을 해보려 한다.  (이하의 설명에서 인구학적 특성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평등·평화 그룹에서는 30~50대 여성이 많이 보인다. 남성에서는 50대가 주도하고 있다. 남성 20~30대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서울, 경기, 호남이 많다. 소득은 평균보다 적은 편이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이다. 이들은 한반도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지지한다.

가장 큰 그룹이지만,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약점도 있다. 전통적 진보 가치에는 강한 애착을 보이지만, 중도보수적 가치에는 강한 반감도 갖는다. 동시에 환경, 젠더, 소수자 문제 같은 새로운 진보 이슈에도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일자리와 환경 이슈가 충돌하면 일자리가 우선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집 센 진보다.

능력주의 보수 그룹에서는 60대 이상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50대, 그리고 20대 여성이 보인다. 서울과 영남, 고학력자·경영사무관리직이 많다. 스스로를 보수로 생각한다. 가족 형태에서 ‘기혼/유자녀’로 분류되는 정상 가족이 많이 보인다. 국민의힘 핵심 지지층이다. 

강한 친기업 성향만큼이나 국가, 복지, 노동 등에 대해 반감도 크다. 자유방임주의적 경쟁을 극단적으로 선호한다. 환경 이슈에도 둔감한 개발주의적 성장주의자다. 흥미롭게도 성평등, 임금 격차 해소 이슈에 진보적 성향이 있다. 왜일까?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별이나 나이, 근속연수에 따른 전근대적, 온정주의적 시스템에 반대하는 것이다. 고학력 20대 보수 여성이 이 그룹에 있다.

이상의 두 그룹은 정책 선호, 가치 선호에서 거의 겹치지 않는다. 각자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도 강하다. 그래서 확장성은 떨어진다.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지만, 이 그룹에 집착하는 한 선거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문제는 나머지 그룹이다.

친환경·신성장 그룹은 연령대가 불확실하지만 40~50대 여성, 50대 이상 남성이 조금 많이 보인다. 서울이 많고, 상대적으로 고소득이며, 자영업자와 서비스업 노동자가 많다. 친기업, 친복지이지만, 노동에 대한 반감이 크다. 젠더, 소수자 이슈에 대해서도 둔감하다.

이들은 서울이나 영남의 중산층 이상이다. 경제는 시장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국가가 복지를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공동체적·온정주의적 경향이 있다. 전통산업보다 새로운 혁신산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환경보호에도 열심이다. 온건 보수·따뜻한 보수다. 빨간 머리띠를 두른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당 지지에서 당파성은 적다.

반권위 포퓰리즘 그룹에서는 20~30대 남성, 지방, 저소득이 눈에 띈다. 월세 지원과 기본소득복지를 원하지만, 그것을 압도할 정도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너무나 원했다. 개인적으로는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제조업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심히 사는데도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하청기업에서 작업복을 입고, 혹은 편의점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동안, 뉴스에서는 정장을 입은 고학력 여성들이 권리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세상을 알려줄 어른이 많지 않다. 세상에 대한 정보는 주로 인터넷과 또래 집단을 통해 얻을 것이다. 기존 정당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무당층이 많다(45%).

민생우선 그룹에서는 지방 비정규직 여성이 많이 보였다. 소득이 낮았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자영업자 지원, 월세 지원, 기본소득을 원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낮고 무당층도 많았다(42%). 정치가 원래 싫은 게 아니라, 삶이 생존의 경계선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셈이다. 그런데 싫은 것도 사실이다. 검찰개혁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다. 정치인들이라고 나와서 우리 같은 서민들의 삶으로는 안 싸우면서, 정치 의제에만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밥그릇 싸움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이 민생우선 그룹은 반권위 포퓰리즘 그룹과 성별과 가치 지향은 많이 다른데, 삶에서 원하는 것은 거의 같았다. 왜일까? 이 두 그룹은 국가정책에서 소외된 집단이다. 보이지 않는 국민들이다. 이들이 지방에 주로 많다는 것도 잘 보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다. 이들은 소득이 있다는 이유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고, 그래서 기본소득 같은 현금 복지를 원하는 것이다. 한쪽에서 부동산 세율 인하와 주택 구입 지원 이야기를 하지만, 먼 나라 이야기다. 이들에게는 당장 월세 지원이 필요하다. 국가정책에서 소외되어 있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은 다르다. 한쪽은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어 한다. 한쪽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다. 보이는 결과는 다르지만, 이유는 같다.

배타적 개혁 그룹에서는 서울의 4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 많이 보인다. 이들은 모든 그룹 중에서 가장 정치에 관심이 많다. 스스로를 가장 진보적이라고 여기지만, 정의당에 대해 가장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 본인이 ‘찐진보’인 셈이다. 검찰개혁과 더불어 정치적 진보 가치(노동, 지방분권)에 호응하지만, 혁신산업 육성과 이재용 사면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동산 세율을 낮춰줘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43개 진술문 중에 3번째로 강한 지지를 보냈다.

이 결과는 뭘 설명하나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42%를 얻었고, 40% 전후의 지지율은 임기 마지막까지 깨지지 않았다. 견고했지만, 확장성은 떨어졌다. 검찰개혁이 유권자층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는 순간, 민주당은 2개 그룹에 갇혔다.

반면 한국의 보수는 분열되어 있다. 요컨대, 문제는 ‘탄핵의 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잠재된 분열 지형이 정치적 사건을 통해 가시화된 것에 불과했다. 보수를 형성하고 있는 유권자층은 이미 다양한 성향의 연합군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잠재적) 보수는 사실 연합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 지향하는 가치가 매우 다르다. 능력주의, 공동체주의, 포퓰리스트 그룹들은 가치 지향에서 겹치는 것이 거의 없다. 지금 여권의 갈등은 단순히 정치인들만의 싸움은 아니다.

그러나 놀라운 장점이 있다. 잠재적 보수지지 층은 능력주의, 공동체주의, 포퓰리스트 그룹이 4:4:2 정도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서로 다른 이유로 보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연합하면, 그 규모는 민주당 지지층을 압도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연합해야 할 이유가 바로 민주당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 그룹은 민주당의 모든 면이 싫다. 공동체주의 보수가 좋아할만한 일을 민주당은 별로 하지 않았다. 포퓰리스트 그룹과 민생 우선 그룹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들을 민주당이 앞장서서 했다. 보수당을 지지할 이유도 여러 가지지만, 민주당을 찍지 않을 이유도 여러 가지인 셈이다. 게다가 민주당은 스스로 이길 수 없는 구도로 점점 빠져들어 갔다. 가치 지향이 서로 다른 이들이 반민주당으로 결집해 있는 한, 민주당은 40% 초반대의 벽을 넘을 수 없다.

중도 논쟁, 의미 없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어느 정당도 평등·평화 그룹과 능력주의 보수 그룹의 지지를 동시에 받을 수는 없다. 그걸 추구한다면 바보 같은 짓이 된다. 그 중간에 어정쩡하게 선다면, 두 그룹으로부터 모두 버려질 것이다. 허공에 뜨는 셈이다. 내용 없는 중도 논쟁은 무가치하다.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그런 중도는 없다.’ 왼쪽으로 더 가야 한다느니, 오른쪽으로 더 가야 한다느니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소득에 따른 일관성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념도 마찬가지다. 일정한 경향성은 보이지만, 소득과 이념만으로 모든 이슈에 대한 지지, 정당에 대한 지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인구학적 특성과 이념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전통적 진보-보수는 없다.’ 

민주당,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럼 민주당은 뭘 해야 하나? 민주당이 평등·평화 그룹에 안주하면서, 배타적 개혁 그룹 정도에 만족한다면, 필패다. 민주당은 확장이 필요하다. 민주당은 전통적 지지층인 평등·평화 그룹에 아부하고, 배타적 개혁 그룹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이들을 설득해서 지지층의 혁신을 이끌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전통적 진보 가치 뿐 아니라 환경, 혁신성장 같은 새로운 진보적 가치를 받아들일 것을 설득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정치개혁 이슈에 대한 과격주의를 포기해야 한다.

능력주의 보수 그룹과는 가치 경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당은 분명히 전통적 지지층을 가졌다. 이 그룹은 한 세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가 만들어낸 지지층이다. 그건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능력주의 보수 그룹은 배타적으로 국민의힘을 지지한다. 이런 가치 경쟁은 필요한 경쟁이다.

친환경·신성장 그룹은 현재의 정치 지형에서는 보수에 가깝지만, 민주당이 실현해야 할 가치들을 내포하고 있다. 민주당이 기후 위기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혁신성장의 동력을 찾고, 복지를 더 효율적이고 포괄적으로 혁신하며, 정치 이슈에만 매몰되지 않는다면, 이 그룹의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

반권위 포퓰리스트 그룹과 민생 우선 그룹에 대해서는 뼈저린 정치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 두 그룹이 현재와 같은 가치 지향이나 정치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그들의 현재 정체성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이들은 정치와 정책으로부터 효능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현재의 삶도 너무나 어렵다. 그런데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는다. 뉴스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국민들’이다. 정치는 다른 이슈들로만 싸운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두 그룹은 민주당의 정치와 정책이 실패했다는 증거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 가장 보호해야 할 국민들이 바로 이들인데, 이 국민들이 국가로부터 가장 소외되어 있고, 민주당에 실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들을 표로 보기 전에, 수권 정당으로서 부끄러움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서 이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도 큰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이 두 그룹이 커지면, 이들은 민주당보다는 보수 정당의 강한 지지층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가령, 반권위 포퓰리스트 그룹이 더 커져서 15% 수준에 이른다면, 이들을 지지 기반으로 독자적 정당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가 유럽에서 보고 있는 그 정당들이다. 그런 정당이 생긴다면, 책임은 그 정당의 기회주의적 리더들이 아니라, 민주당에 있다.

무의미한 논쟁에서 생산적인 논쟁으로

200페이지의 보고서를 이 글에서 다 요약할 수는 없다. 다 밝힐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식견있는 독자라면, 행간에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자의 해석이 다 맞다고 할 수는 없다. 팩트가 같아도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더욱 창조적인 일이다. 앞으로 풍부한 논쟁이 필요하다.

이 보고서가 기여하는 바는, 적어도 한국 정치와 민주당이 더 이상 안개 속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논쟁들을 멈춰야 한다. 진보냐 중도냐, 개혁이냐 민생이냐 같은 하나마나 한 말들을 그만두어야 한다. 대신, 생산적이고 구체적인 논쟁을 시작해야 한다. 개혁이면 어떤 개혁, 민생이면 어떤 민생이냐를 분명하게 해 한다.

여기서 설명한 내용은 전체 보고서에서 일부에 불과하다. 보고서에는 유권자 지형 이외에, 각 정당들의 이미지에 대한 상세한 조사 결과가 담겨 있다. 아마도 민주당에게 충격적인 결과는 ‘경청하는 정당’, ‘도덕적인 정당’에서 각각 20%, 15%의 지지를 받으며 국민의힘과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정치 신인에게 열려 있는 정당’에서는 16.7%로 국민의힘과 동률을 이뤘다는 점 등일 것이다.

100명 이상이 참여한 FGI 결과물은 500페이지가 넘는다. 여기에는 민주당이 왜 민주화를 더 이상 자기들의 전유물로 삼을 수 없는지, 민주당이 추진한 복지는 왜 실패했는지 등에 대한 국민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당내 청년 정치인들은 민주당이 청년을 이용하기만 하고 실질적인 세대교체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했고, 전문가들은 민주당이 책임정당으로서 꼭 필요한 선택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정책과 정치에서 모두 ‘무능한 정당’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여전히 국회 제1당이다. 제1야당이기도 하다. 국정의 절반의 책임은 민주당에게 있다. 새로운 지도부가 탄생한 만큼, 보고서에 담긴 국민들의 목소리, 당내외의 조언을 귀담아 듣고 진일보해야 한다.


글쓴이 이관후는피렌체의식탁 수석칼럼리스트다.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국회에서 6년간 일했다.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서강대, 경희대 등에서 강의했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경남연구원을 거쳐,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썼고, 펴낸 책으로 <한국민주주의, 100년의 혁명>, <시민의 조건, 민주주의를 읽는 시간>, 번역서로 <정치를 옹호함>이 있다. 정치와 정치학을 잇는 일에 주로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