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사는 단지 축구 클럽만은 아니다. 바르사는 정체성이고, 철학이며, 역사다. 바르사는 팀이며, 조합이고, 연대다. 바르사는 ‘클럽 그 이상’이다. 스위스에 사는 김진경 필자가 바르사의 홈 ‘캄프 너우’를 다녀오면서, 바르사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바르사의 탄생에서부터 지역적·정치적 역사성을 갖게 된 배경과 과정, 바르사의 축구 전술과 문화까지 유려하게 풀어냈다. 찬사만 보낸 것은 아니다. 협동조합 체제의 어두운 이면, 정치적 갈등이 빚어낸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균형있게 담아냈다. 바르사에 대한 애정을 담아 그들의 철학이 명예롭게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편집자주]

✔ "카탈루냐는 국가고, 바르셀로나는 그 군대다"✔ 스위스 출신 축구광 캄페르와 11명의 선수가 시초✔ ‘풋볼 클럽 바르셀로나’의 애칭 바르사(Barca)✔ 구단주도 훌리건도 없는 협동조합 체제로 운영✔ 독재와 탄압도 연대로 이겨내는 바르사 정신

클럽 그 이상(Mes que un club)은 바르사의 모토다. 이 모토의 기원은 1968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르사 전 회장 나르시스 데 카레라스의 연설 중 “바르사는 축구 클럽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 깊은 곳의 정신, 우리가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는 색이다”라는 부분에서 비롯됐다. 또 다른 바르사 회장 조안 가스파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우리를 축구 클럽 이상의 무언가로 바꿔놓았다. 바르사는 국가, 언어, 문화에 대한 방위 체제다.” ‘클럽 그 이상’이라는 문구는 바르사 홈 구장 캄프 너우의 관중석에도 칠해져 있다. (사진=김진경)

“카탈루냐는 국가고, 바르셀로나는 그 군대다(Catalonia is a country and Barcelona is its army).” 

이것은 1996~1997년 스페인의 축구 클럽 FC바르셀로나(이하 바르사) 감독을 맡았던 영국인 보비 롭슨의 말이다. 스페인의 한 지방인 카탈루냐가 국가라니, 또 축구팀에 불과한 바르사가 군대 조직이라니, 무슨 뜻일까.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도 바르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토탈 사커’의 철학을 이어받아 뛰어난 개인의 원맨쇼가 아닌 팀원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한 ‘티키타카’를 만들어낸 원조, 구단주가 아닌 협동조합 회원들의 뜻에 따라 운영되는 구단, 거금을 들여 외부 스타를 영입하기보다 자체 교육 시스템을 통해 선수를 어릴 때부터 양성하는 전통, 스페인 라리가(La Liga)에 속한 축구팀이지만 스페인보다는 카탈루냐의 지방 정체성을 앞세우는 집단,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적수. 이것이 바르사다.

티키타카의 원조, 최고의 클럽 바르사

주요 기록은 이렇다. 2022년 현재 라리가 타이틀 26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트로피 5개,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 트로피 3개, FA컵에 해당하는 ‘코파 델 레이(스페인 국왕컵)’ 트로피 31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축구 클럽이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축구팬들이 바르사에 열광하는 데는 기록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다. 지난 7월21일 바르사의 홈 구장인 캄프 너우(Camp Nou, 한국어로 ‘캄 노우’ 또는 ‘캄프 누’라고 표기하기도 하지만, 카탈루냐어 발음은 ‘캄프 너우’에 가깝다)를 방문해 보니 그 열광의 실체가 피부로 느껴졌다.

바르사 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화려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트로피들이다. (사진=김진경)

이방인 감페르, 카탈루냐의 군대를 만들다

바르사는 탄생부터 흥미롭다. 카탈루냐 정체성을 목숨처럼 여기는 이 구단을 창단한 한스 감페르(1877-1930)는 카탈루냐인이 아니다. 그는 스위스 사람이었다. 취리히 북쪽 도시 빈터투어에서 태어난 그는 대단한 스포츠광으로, 취리히의 축구 구단 FC취리히(FCZ)의 창립자이자 초대 주장이기도 했다. 스위스 축구사에서도 중요 인물인지라, 취리히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감페르 슈트라세)가 있을 정도다. 

스위스 축구가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감페르는 1898년 삼촌이 살던 바르셀로나로 주거지를 옮긴 뒤, 1899년 10월에 신문(Los Deportes)에 광고를 낸다. ‘축구 구단을 만들려 하니, 선수로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은 연락하라.’ 광고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은 스위스인 두 명, 영국인 두 명, 독일인 한 명, 카탈루냐 출신 여섯 명이었다. 이렇게 총 11명이 모여 시작된 것이 ‘풋볼 클럽 바르셀로나(Futbol Club Barcelona, FCB)’다. 바르사(Barca)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팀은 처음부터 다문화의 결집체였다.

FCB 공식 누리집에 나와 있는 감페르 소개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는 출신지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팀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클럽을 꿈꿨다. 그는 회원들이 자율적으로 관리하는 민주적 조직을 창조했다. 자신을 환대해 준 나라인 카탈루냐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감페르는 바르사를 카탈루냐 정체성에 대한 헌신으로 가득 채웠고, 이것은 이후 줄곧 바르사를 규정하는 본질이 되었다.” 한스 감페르는 스위스인의 피를 타고 났으되 카탈루냐인의 정신을 지녔던 것 같다. 그는 나중에 이름까지 카탈루냐식으로 조안(Joan)이라 바꾼다.

바르사 박물관에 소개된 창립자 조안 감페르. 바르사를 창립했을 뿐 아니라 선수(초대 주장)로 뛰며 54경기에서 123골을 넣었다. (사진=김진경)

스페인이지만 스페인이 아닌 카탈루냐

민주적이고 열린 조직, 기량 뛰어난 선수들로 앞길이 창창해 보이던 이 클럽은, 스페인 현대사의 광풍을 정면으로 맞는다. 카탈루냐는 공식적으로 스페인의 일부지만,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스페인에 병합되기 전까지 이베리아반도에서 독립 국가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카탈루냐인은 지금도 스스로를 스페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의 언어인 카탈루냐어는 스페인어(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카스티야 지역에서 쓰는 카스티야어)보다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와 가깝다. 

카탈루냐는 금속, 화학, 무역, 식품 가공 등의 산업이 발달해 스페인 경제 생산의 20%를 차지할 만큼 부유한 지역이라는 점도 분리독립 주장의 근거가 된다. 카탈루냐가 번 돈을 다른 스페인 지역에 빼앗긴다는 피해 의식이 있다. 이런 배경을 알게 되면, 바르사 홈구장에서 열리는 경기에서 스페인 국가가 연주될 때 관중들이 야유를 보내는 것도 이해가 된다. 

1925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당시의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는 예외적으로 6개월 구장 폐쇄 명령을 내렸고 바르사 회장이었던 조안 감페르는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바르사를 창립하고 선수로 뛰다가 나중에는 회장직을 맡으며 헌신했던 감페르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힘들어하다 1930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발롱도르(Ballon d'Or)는 그 해 최고의 활약을 보인 축구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바르사 박물관에는 역대 발롱도르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팀들을 순서대로 소개하는 공간이 있는데, 1위인 바르사 옆에 스페인 국기가 아닌 카탈루냐 국기가 그려져 있다. 2위인 레알 마드리드 옆에는 스페인 국기가 그려져 있다. 바르사의 카탈루냐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진=김진경)

독재의 탄압을 연대로 이겨내다

1935년, 새로 바르사 회장으로 선출된 조셉 수뇰은 카탈루냐 출신의 변호사이자 기자였다. 1930년 좌파 신문 <라 람블라>(La Rambla)를 창간하기도 했다. 스페인으로부터 카탈루냐가 분리 독립할 것을 주장하던 그는 스페인 내전 초기인 1936년 8월에 프랑코 군대에 붙잡혀 살해된다. 회장이 정치적 이유로 살해됐다는 소식은 클럽에 큰 충격이었다. 다음 해인 1937년 여름에는 해외 투어 중이던 선수단의 절반 가량이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고 멕시코와 프랑스로 망명 신청을 한다. 프랑코 체제 아래서 바르사 선수로 뛰는 것은 실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1938년 3월 바르셀로나가 이탈리아군의 공습을 받았을 때는 바르사 클럽 사무실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떨어진 건 폭탄만이 아니었다. 바르사의 카탈루냐 정체성을 나타내는 모든 종류의 상징, 즉 카탈루냐 언어와 깃발 등이 사용 금지됐다. 심지어 클럽 이름도 바꿔야 했다. 카탈루냐어로 된 원래 이름(Futbol Club Barcelona, FCB) 대신 스페인어 이름(Club de Futbol Barcelona, CFB)이 사용됐다. 이런 일들을 거치면서 바르사 조합의 회원 수는 3분의 1까지 줄어든다.

바르사를 바르사답게 만든 건 이런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1951년 바르셀로나에서 있었던 트램 파업 때, 경기가 끝난 뒤 바르사 관중이 모두 집으로 걸어서 돌아간 일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트램 파업을 지지하는 뜻으로 한 행동이었다. 나의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려면 타인의 권리와 자유도 함께 지켜야 한다는, 바르사 팬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연대의 전통이다. 

바르사의 모토 ‘클럽 그 이상(Mes que un club)’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연대 의식이다. 일개 축구 클럽이지만 축구장 밖에서도 더 많은 사람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의지다. 지난 5월 ‘유럽 다양성의 달’을 맞아 바르사는 성소수자와 스포츠의 관계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 현재 스포츠계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예민한 이슈다. 성별을 전환한 사람이 프로 운동선수로 뛸 때의 규정은 나라마다, 종목마다 제각각이고 혼란스럽다. 타고난 기량이 중요하다 보니 성 관련 이슈에 더 보수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바르사는 뜨거운 감자에 먼저 손을 댔다. ‘포용적이고 성차별 없는 커뮤니케이션 가이드’를 제작해서 바르사 재단의 모든 구성원이 공유했다. 뿐만 아니다. 바르사의 유소년 아카데미인 ‘라 마시아’(La Masia)에서는 이민, 연대 등의 이슈를 수업 중에 다룬다.

바르사의 레전드 중 하나로 꼽히는 펩 과르디올라. (사진:연합뉴스)

조안 라포르타, 요한 크루이프, 펩 과르디올라

제38대 바르사 회장을 역임한 뒤, 현재 다시 41대 회장을 맡고 있는 조안 라포르타(Joan Laporta)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1962년생으로 변호사이며 카탈루냐 주의회 의원, 카탈루냐 독립주의자다. 1937년 살해됐던 조셉 수뇰 전 회장과 여러모로 겹친다. 라포르타가 바르사 회장으로 한 일 중 ‘신의 한 수’라고 평가받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당시 펩 과르디올라를 감독으로 선임한 것이다. 과르디올라는 지도자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검증받을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라포르타는 과르디올라가 바르사에서 선수로 절정기를 보낼 당시 감독이 요한 크루이프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요한 크루이프가 누군가. 1988~1996년 바르사 감독으로 있으면서 ‘토탈 사커’를 도입해 티키타카를 창안해 낸 인물이자, 라 마시아의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만든 지도자, 그리고 바르사에 최초의 유러피언컵을 안긴 감독이다. 

그가 남긴 어록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우연은 논리적이다(Coincidence is logical)”이다. “30m 밖에서 골대를 향해 공을 차면 아마도 득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한 경기에서 스무 번 이상 그걸 하면, 스무 개의 공 중 하나가 골대로 들어갈 확률은 올라간다”고 그는 말했다. 크루이프 덕분에 축구는 운에 기대는 드라마가 아닌, 연습과 확률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인 스포츠로 거듭났다. 네덜란드 출신인 그는 자신이 바르사에 전수하는 게 ‘네덜란드식 축구’라고 늘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아들을 낳자 카탈루냐식 이름 ‘조르디(Jordi)’를 붙였고, 지도자 경력을 카탈루냐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마무리했다. 

스위스인이었던 바르사 창립자 조안 감페르처럼, 그도 네덜란드인의 피를 타고 났으되 카탈루냐인의 정신을 지녔던 것 같다. 크루이프가 팀의 멘탈리티를 바꾸는 과정을 선수로서 고스란히 체험했던 과르디올라는, 감독이 된 후 티키타카를 한 단계 더 진화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라포르타의 판단이 맞았던 것이다. 

요한 크루이프와 그의 드림팀. 바르사 역사에서 1988~1996년은 ‘드림팀의 시대’라 불린다. 크루이프 체제 아래서 바르사는 1992년 최초의 유러피안컵을 들어올린다. (사진=바르사 웹사이트)

폭력적인 열성팬들을 과감하게 몰아내다

라포르타의 또 다른 주요 업적은 ‘보이쇼스 노이스(boixos nois, ‘미친 소년들’이라는 뜻)’라 불리던 바르사의 폭력적인 팬들을 막아낸 것이다. 영국의 훌리건처럼,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도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팬들이 있다. 라포르타는 2003년 이들이 가진 연간 입장권을 무효화하고 경기장 출입을 금지시켰다. 바르사의 열성 팬인 이들을 내치는 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라포르타의 집 담장은 보이쇼스 노이스들이 남긴 살해 협박 메시지로 뒤덮였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극단으로 치달아 폭력을 불사하는 수준의 팬심은 구단에 독이 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폭력적인 팬들의 축구장 입장을 금지시킨 건 유럽 축구 클럽 중 바르사가 처음이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도 네오 나치에 가까운 팬들이었던 울트라 수르(Ultra Sur)를 입장 금지함으로써 바르사의 행보를 뒤따랐다.

소시오와 꿀레스가 지키는 구단은 억만장자도 두렵지 않다

구단주도, 훌리건도 없는 이 클럽의 정책을 좌우하는 것은 소시오(socio)들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바르사는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된다. 조합의 회원인 소시오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캄프 너우에서 소시오 가입 양식만 작성하면 된다. 온라인 신청도 가능하다. 0세부터 가입할 수 있고, 성인 회비는 연간 195유로(약 26만원)이다. 이런 소시오들이 2022년 6월30일 기준으로 14만 3086명인데, 이 중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카탈루냐 거주자가 약 13만명이다. 이들은 투표로 클럽의 회장을 선출하고, 예산이나 중요한 정책 변화가 있을 때는 소시오 총투표를 통해 결정을 내린다. 외국의 억만장자가 돈을 싸들고 와서 구단을 사는 일은 바르사에서는 있을 수 없다. 

바르사의 향방을 좌우하는 핵심 멤버 소시오 외에도, 캄프 너우를 들썩이게 하는 일반 팬들, ‘꿀레스(culers)’가 있다. 카탈루냐어로 ‘꿀(cul)’은 엉덩이라는 뜻이다. 옛 바르사 구장 바깥에서 관람석을 올려다 보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관람객들의 엉덩이만 줄줄이 보여서 붙은 이름이다. 꿀레스 회비는 소시오보다는 적다. 연간 50유로(약 7만원)다. 꿀레스 역시 카탈루냐 정체성을 목숨처럼 여긴다. 스페인 국가가 나오면 야유를 보내고, 바르사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옮겨 간 ‘배신자’ 루이스 피구가 캄프 너우에서 코너킥을 찰 때 돼지 머리를 던진 것도 이들이다.

엉덩이만 보인다고 꿀레스(Culers)라는 이름이 붙은 바르사 팬들. (사진=바르사 웹사이트)

협동조합 체제의 이면, 막대한 면세와 불투명한 구단 운영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고, 이들이 구단의 주요 정책을 결정짓는 방식은 외부에서 보기에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이는 또한 카탈루냐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또 바르사의 핵심 성공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스페인 축구 클럽들의 운영 방식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1990년이다. 스포츠 구단들의 재정 관리 능력을 향상시키고 투명성을 개선하기 위해 ‘스포츠 공개 유한 법인(Sociedad Anonima Deportiva, S.A.D.)’이 도입됐다. 당시 여기에서 제외된 구단이 넷 있다. 바르사,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틱 빌바오, 오사수나다. 스페인 정부는 ‘역사적 이유’라고 했지만, 당시 이 구단들의 재정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됐다.

문제는 공개 유한법인으로 전환하지 않고 계속 비영리기구(협동조합) 방식의 운영을 하면서, 이들이 다른 구단에 비해 어마어마한 세금 혜택을 받아왔다는 점이다. 2010년대부터 위 네 구단도 공개 유한법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는 있지만, 이들이 협동조합으로 누리는 혜택을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최근에는 바르사가 엄청난 빚(13억5000만유로, 약 1조8000억원)을 지고 있는 와중에 바이에른 뮌헨에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를 데려오기 위해 5000만유로(약 673억원)를 쓴 점 때문에 거센 비난을 받았다. 공개 유한법인이라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라는 것이다.

과도한 정체성의 강조가 창단 정신을 해치다

불투명한 재정 관리 외에 다른 문제도 있다. 구단 운영에 정치를 너무 깊이 개입시킨다는 점이다. 과르디올라 감독이나 제라르 피케 선수 등 카탈루냐 출신들이 공개적으로 카탈루냐 독립 지지 의견을 표출한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현 회장 라포르타 체제 아래서 새 선수 영입이나 연봉 계약을 맺을 때, 카탈루냐인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고 라 마시아 출신을 더 우대한다는 비판이 내부에서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스페인과 카탈루냐의 갈등이 심화되는 정치적 양극화가 바르사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2017년 카탈루냐가 중앙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 투표를 강행한 뒤 분리주의자 정치인들이 수감되는 등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외적 갈등이 심해지면, 자기 집단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과 우월감이 커지면서 필연적으로 외부를 향한 혐오를 낳는다. 바르사 선수들인 앙투안 그리즈만와 우스만 뎀벨레가 2019년 여름 일본 투어 중 호텔 직원의 얼굴을 흉내내며 비웃었던 영상이 2021년 뒤늦게 공개돼 선수들과 구단이 사과한 일이 있었다. 문화적 다양성에 유달리 민감하던 바르사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 과연 우연일까?

어디까지가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고 어디부터가 폐쇄적 순혈주의인지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바르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현재 상황은 아쉽다. 지금껏 바르사를 바르사답게 만들었던 건 한 마디로 ‘카탈루냐 정체성을 지키되 다른 문화에도 열려 있는 태도’였다. 창립자 조안 감페르(스위스인), 바르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요한 크루이프(네덜란드인), 그리고 바르사를 떠났지만 바르사의 역사 중 가장 빛나는 자리를 장식하는 선수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인), 이들은 모두 외국인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 다문화 정책의 포인트다. 이것은 1974년 만들어진 ‘바르사의 노래(Cant del Barca)’에도 담겨 있는 정신이다. 노래 가사를 보자. “우리가 어디서 왔건, 하나의 깃발이 우리를 형제로 묶어주지. 아무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우리는 보여줬어.”

기득권에 대항하는 자유의 수호자, 바르사의 정신을 잊지 않기를

스포츠 심리학자인 데미안 휴는 저서 <바르셀로나 방식: 성과 높은 문화를 창조하는 법(The Barcelona Way: How to create a high-performance culture>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에 바르사가 맞설 때, 그것은 국가(state) 대 민족(nation), 프랑코 장군의 파시스트들 대 자유의 수호자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의 승자들 대 패자들의 싸움이다.” 

데미안 휴는 이 책에서 전 바르사 공격수였던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의 말도 전한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사가 만날 때, 그것은 기득권에 대항하는 반란이 된다.” 정체성을 지키고 억압에 맞설 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자유와 권리를 함께 수호할 때, 정당한 명분으로 무장한 축구 클럽은 클럽 그 이상(Mes que un club)이 된다. 하지만 투명성과 포용성을 잃고 순혈주의로 흐를 때, 이들의 경기는 제 살 파먹는 싸움에 불과하다. 

흔히 스포츠를 전쟁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하지만 엘 클라시코(El Clasico, 바르사와 레알 마드리드 간의 경기를 일컫는 말)에서 축구는 전쟁의 축소판이 아니다. 끝나지 않은 내전 그 자체다. 다시 이 글 첫머리에 인용한 보비 롭슨의 말로 돌아가 보자. “카탈루냐는 국가고 바르셀로나는 그것의 군대다.” 100년이 넘은 바르사의 역사를 함축하는 놀라운 한 문장이다.


글쓴이 김진경은연세대학교에서 국문학과 중문학을 전공하고 [중앙일보]에서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남자를 만나 스위스 취리히로 거주지를 옮긴 뒤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중앙일보], [시사인], [피렌체의 식탁] 등 여러 매체에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일하는 여성, 다문화 가족 등을 주제로 한 시리즈인터뷰 기사를 스위스 현지 매체에 연재했다. 현재 취리히대학교에서 인터넷 플랫폼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공부 중이다. 최근 저서로 메디치미디어에서 발간한 <오래된 유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