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참의원 선거를 이틀 앞둔 7월 8일 아베 신조 총리가 피격, 사망하자 많은 이들이 1914년의 ‘사라예보 총성’을 떠올렸다.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 만큼이나 아베 피격이 지구촌에 미칠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 1차적 파장으로 자민당-공명당 보수 연립정권은 선거에서 여유롭게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포스트 아베’ 시대의 우선 관심사는, 의회에서 평화헌법 개정(개헌) 발의가 안정적으로 가능해진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가 아베의 평생 염원인 개헌에 드라이브를 걸어 동북아에 정치 군사적 갈등을 폭발시킬지 여부다. 그렇지만 일본 전문가인 한승동 전 <피렌체의 식탁> 주간은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개헌보다 경제정책 노선을 둘러싼 지배블록 내부의 대립이 ‘아베 이후’ 일본 정국의 뇌관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아베 경제정책의 적자인 ‘적극 재정파’와 기시다 총리의 ‘건전 재정파’가 경제 기조의 전환을 둘러싸고 충돌해 지배블록 재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편집자 주]

✔ 통일교에 원한 품은 자위대 출신의 용의자 단독범행 추정✔ 아베 사망으로 참의원 선거는 기대 이상으로 개헌파 압승✔ 개헌파 압승이 개헌으로 바로 이어지기는 어려워 보여✔ 아베의 비극적 퇴장과 함께 복고적 재건 노선 막을 내리다✔ 아베의 주장과 달리 아베노믹스는 미완 아닌 명백한 실패

장의차에 실려 집으로 돌아온 아베 전 총리(사진 좌)와 선거 승리가 확정된 뒤 웃음으로 인사하는 기시다 총리(사진 우). (사진: 연합뉴스)

아베 신조 피격 사망, 예상대로 선거는 개헌파 압승

 7월10일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는 예상대로 집권 자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선거 유세 막바지인 8일 나라현 야마토사이다이지 역 앞 유세장에서 일어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충격적인 피격, 사망으로 집권당이 애초 예상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둘 것이라던 예측은 현실이 됐다. 

 3년마다 의석 절반을 교체하는 임기 6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총의석 248석 중 125석을 놓고 벌인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은 125석의 과반수인 63석을 얻어, 선거 전의 111석에서 8석이 더 늘어난 119석(여당 쪽 무소속 1석을 합하면 120석)이 됐다. 공명당은 이번에 1석이 줄어 27석이 됐지만, 자민·공명 연립여당의 참의원 의석수는 146석(무소속 1석 합하면 147석)으로 참의원 전체 의석의 절반을 훌쩍 넘어섰다. 여기에 개헌에 적극적인 야당 일본유신회 21석(이번 선거로 6석이 늘었다)만 합쳐도 167석으로 개헌 발의를 할 수 있는 전체 의석의 3분의 2(166석)를 넘는다. 게다가 또다른 개헌 지지 야당인 국민민주당의 10석(이번에 2석이 줄었다)을 합하면 177석(여당쪽 무소속 1석 합하면 178석)이나 된다.

 비극적으로 퇴장한 아베 전 총리의 정치 신조이자, 그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이래 세습정치 ‘명가’로 손꼽히는 기시·아베 집안의 최고 정치목표이자 집권 명분이었던 헌법개정(개헌)을 하려면 중의원, 참의원 3분의 2 의석 이상의 찬성으로 개헌을 발의하고,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국민투표에서 투표 참가자(유효 투표수)의 과반 찬성을 얻으면 통과, 즉 헌법개정이 완수된다.

 중의원은 이미 지난 2021년 10월 총선에서 개헌파 의원들이 개헌 발의 정족수인 3분의 2를 넘겼다. 당시 자민당은 261석을 얻어 단독으로 총의석(465석)의 과반(233석)을 넘겼고, 여기에 연립 공명당(32석), 그리고 개헌 지지 야당인 일본유신회(41석)와 국민민주당(11석)을 합하면 345석으로 개헌 발의 정족수인 310석을 훨씬 넘어섰다.

개헌파의 승리가 개헌을 보장하지는 않아

 따라서 일본은 이제 개헌을 향해 일사천리로 달려가게 될까?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높지 않아 보인다. 집권 세력이 달려가고자 해도 국민투표라는 허들을 넘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무리하게 시도했다가는 자칫 개헌 자체의 모멘텀을 상실하고 개헌 추진 세력이 일패도지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개헌 추진의 선봉장이자 기둥이었던 아베 전 총리의 퇴장으로 개헌 작업은 상당 부분 추진력을 잃게 될 것이고, 집권 연립여당도 무리하게 개헌을 밀어붙일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다.

 개헌보다 주목받는 ‘아베 이후’, 더 큰 변화의 시작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 재임 경력(총 8년9개월)에 집권당 최대 파벌의 수장으로, 2000년 9월 총리직 퇴임 뒤에도 일본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아베의 돌발적인 비극적 퇴장 속에 치러진 이번 참의원 선거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가 개헌이었다. 하지만 더 큰 쟁점은 2012년 총선 압승 뒤 그 다음해 집권한 아베 2기 정권에서 시작한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아베노믹스’를 지속할 것인가를 둘러싼 집권 세력 내의 충돌이었을 수도 있다. 즉 아베 쪽의 ‘적극 재정파’와 기시다 후미오 총리 쪽의 ‘재정 재건파’간의 충돌은 아베 퇴장 이후, 당면의 ‘애도 정국’이 끝난 뒤 세력(파벌) 재편과 맞물려 훨씬 더 큰 파열음을 내며 ‘아베 이후’, ‘아베노믹스 이후’를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파벌 재편을 통한 집권 세력 교대라는 전후 자민당 장기집권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 보수우파 지배체제 자체의 재편이라는 더 큰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수도 있다.  

 아베의 비극적 퇴장은 복고적 재건노선의 종언

 아베 신조의 비극적인 퇴장은 2차 대전 뒤 1951년 9월(그때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다)에 체결된 미-일 사이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동맹이 만들어낸 일본 전후(戰後)체제의 종언을 고하는 신호일 수 있다. 이런 주장이 지닌 추상적인 시대구분 이상의 실질적인 의미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는 다시 아베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유년시절 아베 총리(앞줄 오른쪽 셋째)가 기시 노부스케(앞줄 왼쪽 셋째) 전 총리의 무릎에 앉아 있는 사진. 오른쪽 끝이 아버지 아베 신타로. (사진:연합뉴스)

 아베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자 외상을 지냈고 강력한 총리 후보였으나 병사한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다. 역대 장수 총리 중 한 명으로 절정기의 전후 일본을 이끌었던 사토 에이사쿠 총리도 기시(기시 집안에 양자로 갔다)의 친동생으로, 말하자면 아베의 외종조부다. 아베는 일본 전후 정치를 특징짓는 세습정치의 이른바 ‘명가’의 후예로, 일본 전후체제를 상징하는 주요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이 자신의 작품(만주국 총무청 차장을 지냄)이라고 호언했던, 도조 히데키 전시내각의 상공장관이요 군수차관 출신의 A급 전범이었다. 스가모 형무소에 구금됐던 그는 1948년 12월 23일 0시에 도조 등 다른 A급 전범 7명이 처형당한 직후 석방돼 당시 요시다 시게루 정부의 관방장관을 하던 동생 사토 에이사쿠를 찾아갔다. 그 뒤 기시는 동서 냉전이 격화일로를 걷던 시절에 미국이 일본에서 좌파의 집권 가능성을 영구히 제거하기 위해 1955년에 만든 일본 정계의 보수합동(‘55년 체제’) 과정에서 CIA(중앙정보국)의 자금을 받아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민당(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의 총재, 곧 총리(1957~60)가 돼 일본 전후체제의 틀을 만들었다. 그 자민당의 주역들이었던 기시와 사토와 아베 신타로를 거쳐 전후 세대의 첫 총리가 된 아베 신조는 1990년대 초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 일본 정계에 등장해(1991년에 아베 신타로 외상 사망 뒤 그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1993년에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뒤 냉전 붕괴 이후의 변화를 거부하는 우익세력의 중심이 된다) 냉전체제 붕괴와 함께 시작된 일본의 거품경제 붕괴와 ‘잃어버린 30’이라는 냉전 이후 체제에서 꺼져 가던 전후 일본의 번영을 되살리려고 했던 인물이다.

 ‘아베노믹스’와 ‘역사 수정주의’로 대표되는 그의 시도는 그러나 그의 돌연한 비극적 퇴장 전에 이미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그가 택한 ‘영광의 일본’ 부활 방법은 미국의 전면적인 지원 아래 번성했던 냉전기의 일본, 기시의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복고였기에 실패가 예정돼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과거청산을 통한 새로운 출발 방식이 아니라 청산을 거부하고 과거를 덮어 미화함으로써 전쟁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던 그의 무모했던 시도는 무수한 충돌을 야기하면서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의 비극적인 퇴장은 그런 시도의 결말이자 실패를 확인하는 최종선고일지도 모른다.  

 

예상 가능한 결과, 김빠진 참의원 선거

 이번 참의원 선거는 어떤 면에선 결과가 뻔히 예측된, 김빠진 선거였다. 여러 여론조사들이 예외없이 자민당 등 연립여당의 압승을 예고했고, 지리멸렬한 야당의 무능과 분열 속에 그런 결과들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이 때문에 이번 주된 관심사는 여당 쪽이 일본헌법 개정(개헌)을 발의할 수 있는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참의원 총의석수는 248석이고 이번에는 그 절반인 125석을 뽑는 선거였다. 개헌 발의가 가능한 3분의 2 의석은 166석인데, 선거 전 의석 분포도 개헌 지지 정당의 의석을 합할 경우 이미 그 3분의 2선을 넘었다. 연립여당인 자민당 의석(여당 쪽 무소속 1석 포함해 112석)과 공명당 의석(28석)만으로 140석인데, 여기에 개헌에 찬성하고 있는 야당인 일본유신회(15석), 국민민주당(12석) 의석까지 합하면 166석이 넘었다.

 원래 여당 승리가 예상되고 있던 상황에서 아베 전 총리 암살사건까지 터지는 바람에 애초 예상보다 더 큰 표차(의석수 차이)로 개헌 지지 정당들이 압승할 것은 명약관화했다.

개헌, 국민투표라는 난관

 개헌을 하자면, 중·참의원에서 모두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개헌을 발의하고, 국민투표를 통과해야 한다. 최근 <요미우리 신문> 등 보수언론 여론조사에서 개헌 찬성이 60%에 이르고 있어 통과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개헌을 주창해 온 보수매체의 여론조사 결과를 그대로 믿을 수 있느냐는 문제와 별개로, 개헌 내용과 관련해서도 사안마다 여론이 달라 사정이 그리 간단치 않다. 예컨대 개헌 시비의 핵심 논점인 헌법 제9조 1항(전쟁 포기), 2항(군대 보유와 교전권 부정)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다르다. 1항에 대해서는 개정 불가가 80% 이상인 반면 2항에 대해서는 찬반이 비슷하게 나뉜다. 개헌을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헌법제정 이래 개정을 한 적이 없는 일본에서 개헌 여론이 점차 높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개헌 찬성 여론이 60%에 달한다 하더라도 제9조 개헌에 국민투표 참여자(유효투표)의 과반이 찬성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자민당은 개헌안에 제9조 1, 2항이 아니라 자위대라는 이름의 군대 아닌 군대를 일본국군이라는 정식 국가군대로 명기하는 안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이런 ‘꼼수’에도 국민투표 과반수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 만일 국민투표 실시까지 간 개헌 논의가 과반을 얻지 못하면 추진세력은 그 힘을 잃게 될 것이고, 그것을 가장 중요한 집권 명분으로 내세워 온 자민당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따라서 중의원이든 참의원이든 3분의 2 의석을 훨씬 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한, 설사 양원 모두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얻더라도 섣불리 국민투표를 결행하기 어렵다.

 게다가, 2항의 군대 보유와 교전권(집단적 자위권)은, 자위대라는 ‘전수방위’ 명목의 군대지만 사실상 국가군대(국방군)가 존재하고 있고, 교전권은 일본의 국가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판단할 경우 발동할 수 있다는 쪽으로 헌법 해석을 변경해 사실상 제3국(동맹국)과 함께 집단적 자위권(교전권)을 발동할 수 있도록 아베가 총리 시절 이미 내각의 각의 결정을 통해 기정사실화해 놓았다. 말하자면 굳이 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9조를 바꾸거나 폐기하지 않아도 군대 보유와 전쟁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일종의 하위법이 상위법을 역규정하는 이런 형식의 결정은 위헌이지만 위헌임을 문제삼는 세력들은 힘이 없다.

만일 아베 전 총리의 암살이라는 비극이 집권 세력에게 그 마지노선을 돌파하게 해 주는 마력을 발휘한다면, 히키코모리 암살자 야마가미 데쓰야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우연히, 기가 막히도록 절묘하게 연출해낸 역사적 인물이 될 수도 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긴 극적인 드라마의 끝이 비극이 될지 희극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사건이 일어날 개연성까지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유지하기도 버리기도 난처한 아베노믹스, 출구없는 일본

 향후 일본 정국이 개헌으로 가든 가지 않든, 일본의 장래는 낙관적이지 못하다. 아베노믹스를 계속 유지하든 폐기하든 일본이 지금 직면해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정답을 찾기가 매우 여려운 상태다. 기시다 총리 쪽의 ‘재정 재건파’가 지적하듯이 1990년대 초 거품경제가 무너진 뒤의 이른바 “잃어버린 30년” 동안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낮아 성장률이 1%도 되지 않거나 마이너스일 경우가 많았다. 같은 기간에 샐러리맨들의 임금은 늘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줄었으며, 대졸자 초임과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GDP가 한국·대만에도 뒤졌고, 그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보고서들은 지적하고 있다.

 최근의 국제적인 인플레 고공행진 속에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일본 엔화가치 급락이 과거와는 달리 일본 기업들의 수출 증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수입물가 폭등 속에 서민들의 일상을 더 힘들게 만드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으나 뾰족한 타개책이 없다. 2013년부터 시작된 아베노믹스가 초기에 거둔 수출 증대와 주가 상승, 고용 증대 등의 효과는 엄청난 돈을 푼 대가로 유지되는 높은 주가 대신 1천조 엔이 넘는 천문학적인 국가부채(GDP의 260%에 가까운 누적 재정적자)와 마이너스 금리로 남았다. 코로나 팬데믹도 그 부정적 유산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 등 서방 선진국들이 코로나 팬데믹을 버티기 위해 푼 천문학적인 돈(양적 완화)을 다시 거두어 들이는 금리인상 조치(출구전략)를 일제히 취하고 있으나 일본은 여전히 아베노믹스를 고집하고 있다. 엄청난 국가부채 속에 일본은 금리를 올리기도 어렵고 아베노믹스를 그냥 밀고 가기도 어려운, 출구가 보이지 않는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임기가 내년 4월8일로 예정돼 있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등 ‘아베노믹스’의 주역들은 기축통화국의 경우 무제한 돈을 찍어 풀어 놓아도 인플레나 파산의 위험이 없다는 '현대화폐이론'(MMT)의 신봉자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 급락을 거듭하고 있는 엔화 가치가 말해주듯 엔화는 달러와는 달리 기축통화 또는 안전자산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미완’이 아니라 ‘실패’한 아베노믹스?

 아베 전 총리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 뒤 아베노믹스를 두고 ‘미완’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미완이 아니라 실패일 수 있다. 그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한 대안 찾기는 더 험난해질지도 모른다. 아베의 퇴장은 비극적이었지만, 대안을 위한 새로운 길찾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

 집권 자민당이 적극재정파와 재정재건파로 갈라져 물밑에서 힘겨루기를 해 온 것은, 아베라는 적극재정파의 강력한 영향력이 현존할 때나 가능한 대결의 모양새일 수 있다. 아베가 사라진 뒤 그 모양새가 일거에 무너지고 대결은 표면화하면서 요란한 파열음을 낼지도 모른다. 기득권에 안주해 온 일본의 집권세력은 변화를 완강하게 거부해 왔으나, 이제 피할 수 없게 된 대안 찾기에서 파열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아베와 같은 듯 다른 기시다, 아베와는 다른 대외 정책 기대

 아베의 퇴장은 일본 내에서 ‘외교의 아베’라는 칭송을 들었던 아베 주도의 일본 대외정책 구상과 리더십이 일정 부분 동력을 잃게 될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이나 QUAD(쿼드. 미국 일본 호주 인도 4국 안보협의체), IPEF(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등 주로 중국 견제와 봉쇄를 겨냥한 미-일 동맹의 글로벌 전략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아베를 대체할 인물을 당분간 일본에서 찾긴 어려울 것이다. 미국 주도 아래 유지될 그 기본 틀을 기시다 정부도 따라가겠지만, ‘대만 문제’를 매개로 한 아베의 집요한 대중국 경계, ‘북한 문제’를 매개로 한 한국 압박은 아베 이후 그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아베에 비해 온건파인 기시다가 참의원 선거전에서 취한 자세를 두고 이번 선거가 집권당 대 야당 간의 싸움이 아니라 ‘아베 대 기시다’의 싸움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아베의 비극적 퇴장이 집권 세력의 더 큰 압승에 기여함으로써 아베 애도 정국의 효과는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집권 여당의 압승은 결과적으로 기사다 정권에게 힘을 안겨 주게 될 것이다. 게다가 아베가 퇴장함으로써 기시다의 독자 행보를 막았던 장애물이 사라진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 기시다도 아베가 상징하는 일본 보수우파 지배세력의 기존 틀을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지만, 1993년에 세습의원으로 중의원에 처음 당선돼 함께 정계에 입문한 두 사람은 취향이나 시각이 상당히 다르다. 그 차이만큼 기시다는 다른 접근을 할 수도 있다. 아베 이후 일본의 국내 경제정책이나 한국, 중국에 대한 정책을 비롯한 대외정책 접근법이 아베 시대와는 상당히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기시다 등 자민당 집권 세력이 ‘아베 이후’에도 개헌을 무리하게 밀어붙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기시다 총리는 개헌에 대해 원칙론적인 추진 입장을 밝히면서도 사회보장제도 수정과 자신이 제시한 ‘레이와판 소득 배증’ 공약 이행에 주력할 가능성이 크다. 전후 일본 고도성장기를 상징한 이케다 하야토 총리의 ‘소득 배증’을 본딴 레이와판 소득 배증의 성패를 예측할 순 없지만, 그것이 ‘아베노믹스’와는 결을 달리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 정부 초조할 이유 없어, 대일 접근 속도 늦춰야

 따라서 이제까지 다소 조급함까지 보여 온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접근 자세는 아베 이후에 좀 더 신중하게, 좀 더 천천히 속도를 줄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당분간 시간을 벌수록 한국에게 유리한 국면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초조해야 할 쪽은 한국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사정이 좋지 않은 일본일 수 있다. 강제동원(징용공)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일본은 한국 정부에 해법을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먼저 해법을 제시해야 할 쪽은 일본이다. 이 문제를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피해자) 문제 등의 과거사 문제나 그런 것들과 얽힌 첨단소재부품 수출규제 문제,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 문제, 대중국 정책, 대북한 정책 모두 한국 정부가 초조해 하며 서두를 이유가 없다. 그럴수록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 조바심을 누르고 느긋하게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 된 1914년 6월 29일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살해 사건을 다룬 데일리 메일 신문 1면. (사진:셔터스톡)

 

100년 만의 데자뷔, ‘사라예보의 총성’?

선거 이틀전에 발생한 아베 전 총리 피격사건은 그 자체가 큰 충격이었지만, 사람들은 범인이 어떤 존재인지,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가 누구인지, 그 배후에 어떤 정치세력이 도사리고 있는지에 따라 사건의 파장은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크게 출렁이며 격동의 정세 변화를 야기할 수있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야기한 ‘사라예보의 총성’까지 들먹이며 불길한 예언을 뱉어낸 호사가들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중 패권 경쟁까지 진행 중인 글로벌 안보와 코로나 팬데믹이 겹친 경제 상황이 지극히 유동적인데다 대만, 북한, 중·러 접근, 삐걱거리는 한-일 관계 등으로 동아시아 정세 또한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 그런 상상력을 부추겼다.

 히키코모리 암살자, 배후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상황은 아직 종료된 것이 아니고 진행 중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팩트와 정황으로 보건대, 암살은 41살 남성 ‘히키코모리’(자폐적 외톨이)의 독자적인 범행으로 보인다. 통일교(정식명칭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와의 연관성이 보도되면서 한때 일본 안팎에 긴장감이 고조됐으나, 정치적 목적을 가진 통일교 추종자의 계획적인 범행이 아니라 통일교 때문에 집안이 망가진 데에 원한을 품은 피해자의 앙갚음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나면서 우려됐던 사건의 확장 가능성은 급속히 떨어졌다. 적어도 지금까지 상황으로 보건대, ‘사라예보의 총성’이 될 만한 사건연쇄의 연결고리들이 없다.

 그가 복수의 대상을 최종적으로 아베 전 총리로 지목하고 실행한 경위가 아직 명백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아베가 통일교와 가깝다고 그가 판단한 것 외에)에서 단정적으로 얘기하긴 어려우나, 그 뒤에 정치세력의 조직적인 개입이 배경으로 깔려 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럼에도 전례들로 볼 때, 재일동포와 ‘조선’(남북한)에 대한 일본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과 핍박의 강도가 더 심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완전히 지우기는 어렵다.


글쓴이 한승동은1986년 잡지 <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8년 <한겨레> 창간 멤버로 합류했다. 1998년부터 3년간 도쿄특파원을 지냈고, 이후 국제부장, 문화부 선임기자, 논설위원 등을 거쳤다. 동아시아와 민족(통일) 문제는 물론, 환경·생태·과학 분야 등 다른 세상사에도 두루 관심이 많다. 전체를 아우르는 이른바 통섭적 안목을 갖추려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