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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2. 08.15. 00:00

[고한석 칼럼] ‘멀티제국’ 시대의 도래, 한국의 선택 Ⅰ

By | 2022년 7월 7일 | 국제, 미분류, 정치

30년 전,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냉전이 종식되고 인류는 세계대전으로 얼룩졌던 20세기를 넘어 새로운 평화의 시대로 진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우리는 미중간 신냉전과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인류는 왜 평화를 가져오는데 실패했는가? 냉전과 신냉전은 과연 무엇이 다른가, 되돌아 온 것은 무엇이고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유럽에서 신냉전과 멀티제국의 불안정은 결국 전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제 중앙아시아와 인도양, 대만,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에 주목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대한민국의 자강론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중국이 민주국가가 된다면 우리의 대외정책은 달라질 것인가, 한미일 안보동맹이 강화된다면 우리는 경제에 더 많은 국가역량을 투입해야 할 것인가? 고한석 필자의 도발적인 제안에 대해 진지한 논쟁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거대한 담론을 담은 긴 칼럼이라 분석과 대안을 이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 신냉전이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국제 질서 수립
✔ 이념 대립은 옛 말, 앞으로는 지정학적 패권 대치 양상
✔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는 끝나고 독일과 일본은 재무장
✔ 문명권에 기반하지만 근대화된 제국의 싸움터가 될 전망
✔ 바야흐로 미중 대립의 초한지 아닌 열국지의 시대 열린다

사진: 셔터스톡

Ⅰ. 역사의 종말이라 생각했으나 실상은 역사의 귀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1년이 지난 후인 1992년에 미국의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써서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선언했다. 한동안은 이 말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2022년 지금, 그것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의 귀환’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떤 역사가 귀환한 것일까.

신 냉전 Vs 전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질서

‘신 냉전’이라는 용어가 언론 기사 제목들을 장식하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주로 미중 갈등이라는 용어를 주로 쓰면서 가끔씩 이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가리켜 신 냉전이라고 언급하였다. 하지만 올해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신 냉전’은 전지구적 차원의 국제질서가 역사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본격적으로 의미하기 시작했다.

핵무기를 보유한 두 나라가 비록 서로 적대적이지만 직접 군사력을 동원한 전쟁을 치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보자면 현재 상태를 신 냉전으로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면 과거의 냉전과는 다른 점이 많아서 현재 국제정세를 ‘신 냉전’으로 규정할 경우 자칫하면 현재 국제질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잘못된 대응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이념 대립의 구 냉전에서 지정학적 패권 대치로

구 냉전과 현재 (및 향후) 국제질서의 핵심적 차이는 무엇일까? 필자는 크게 3가지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현재의 국제적 갈등구조는 구 냉전 시대와 같은 사회경제적 이념 대립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 냉전 시대의 이념적 대립은 계급적 적대성에 기초한 대립이었다. 이는 그 본성상 한 사회 내에서 두 계급은 서로에게 실존적 위협이었다. 그리고 미소 두 진영의 경제 운영논리는 상대 계급에 대한 ‘절멸’을 목표로 하였고 (이론상으로는) 다른 나라의 같은 계급(즉 체제)에 대해서 실존적 연대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각 진영의 경제 운영원리는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라는 완전히 배타적인 체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들은 자신의 계급 정치와 경제 체제가 내부적으로 또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를 보호해주는 핵심 강대국(즉 미국 또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한 나라에서 이념 갈등으로 내전이 발생하면 다른 민족국가라도, 설사 거리가 먼 나라라도 자신의 이해관계보다는 이념의 동질성과 진영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군사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의 국제정세는 이렇게 한 나라를 사회적으로 가로지르는 공통의 적대적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현재 미국과 서방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프레임을 내세워 글로벌 차원에서 이러한 진영 대결을 재구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프레임이 현재 신 냉전을 구성하는 이념적 대립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차이는 좁혀서 보면 자유로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와 언론/집회/시위/결사의 자유가 허용되는가, 좀더 폭넓게 보면 권력 분립 및 견제와 균형이 되어 있는가 이다. 민주주의나 권위주의(또는 독재)는 상호배타적 정치 형태이기에 대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 세력에 대한 불만의 요인은 될지언정 (소수의 정치인 집단을 제외하면) 실존적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한 사회 내에서 정치 형태의 지지에 따른 대립은 생각보다 그다지 격렬한 양상을 띠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민주주의든 권위주의든 정치형태를 기준으로 하는 이념은 지리적으로 ‘한 나라의 정치체제’를 적용 범위로 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국민들이 다른 지역에 있는 나라의 정치 형태에 대해서 가지는 관심이나 연대의식은 그 강도가 매우 약하다. 계급간 적대를 기반으로 한 구 냉전 체제 때와 비교할 때 특히 그렇다. 이런 차이는 결국 현재 진영에 속한 나라들의 결속력이 과거보다 약하며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기 다른 외교안보적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국제정세는 구 냉전 시대와 같은 이념 대립보다는 패권을 다투는 지정학적 대립이 기본이 되었다. 비록 미국이 수사학적으로는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고 대립구도를 설정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적지 않은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구도가 현실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미국을 위선자로 만들어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으로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러시아 및 중국과 갈등관계 있는 권위주의 국가들을 제외시키면 러시아와 중국에 맞서기에 역부족이다. 그렇기에 미국은 러시아산 석유를 제재하는 데서 오는 부수적 피해를 피하기 위해서 비록 인권 탄압과 암살을 자행하는 전제적 왕권 국가(사우디 아라비아)라 할지라도 화해를 손을 내밀고 있다. 인도 역시 정부가 힌두 민족주의를 더욱 고취하면서 타 종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권위주의 정치로의 후퇴 양상이 뚜렷하나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인도를 쿼드에 가입시켰고 심지어 러시아와의 석유 거래도 눈감아주고 있다.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내에서 정적을 탄압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고 있지만, 미국은 러시아에 맞서 나토를 강화하기 위해서 그에게 많은 양보를 하고 있다. 작년말에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개최한 ‘민주주의 정상회의’의 초청대상국 참가국 중에는 앙골라, 콩고, 이라크, 파키스탄, 필리핀, 브라질 등 권위주의 정부를 가진 국가들도 여럿 포함되어서 비판을 받았다. 냉전 시기에는 ‘반공’이라는 이념이 대립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반공만 내세우면 권위주의 독재정권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더라도 위선적이라는 비판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권위주의 국가와 싸운다고 하면서 또다른 권위주의 국가들과 손을 잡는 것은 2중 기준이자 사실상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경쟁에 미사여구를 덧씌운 위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경제적 격리 vs 경제적 상호의존

현재의 국제질서를 구 냉전 시대와 구별짓는 두번째 차이점은 위의 내용처럼 나라들 간의 이념적 대립선이 명확하지 않은 반면에 경제는 세계화되었기 때문에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매우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구 냉전 시기에는 두 진영의 경제 체제가 배타적이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한 국가들 간에는 경제적 교류가 미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 및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대해서 미국은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망라한 ‘전면적 봉쇄’가 가능했으며 그로 인한 비용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경제적 상호의존이 높아지면서 국가간 갈등에 따른 경제적 비용이 매우 커졌다.

‘Foreign Affairs’ 올해 여름호에 실린 “세계화라는 신화” 제목의 글에 의하면 경제 및 공급망의 ‘세계화’는 과장된 표현이고 대부분 경우는 권역내 부품과 제품, 서비스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경제의 ‘지역화’(regionalization)가 심화되었다고 한다. 한 국가는 경제성장과 함께 힘이 커지면서 가까운 곳에 먼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오히려 지역내 갈등이 촉발되기 쉬워졌는데, 이 때 서로 얽혀있는 경제적 요소들을 무기화하면서 갈등이 더욱 격화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과 일본 간 소부장 파동도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싱크탱크인 유럽 외교협의회(ECFR)의 소장 마크 레오나드(Mark Leonard)는 최근 펴낸 자신의 책에서 이를 가리켜 ‘비 평화의 시대’(The Age of Unpeace)라고 부르면서 어떻게 연결성이 서로를 가깝게 만들면서 오히려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키는지를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의 상호의존성은 또한 갈등의 격화를 제어해주는 역할을 한다. 팬데믹과 미중 갈등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들과 중국 간의 경제적 상호작용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7월2일 닛케이 아시아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3년 동안, 지역내 상품 시장으로서 중국의 중요성은 계속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다. 동아시아·동남아 국가들은 2020년과 2021년 전체 수출의 27%를 중국으로 보냈으며, 이는 전년도의 25%라는 수치보다 더 높아진 것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미국 주도의 영향력 확대를 밀어붙이는데 협력하는 나라들조차 무역 상대국으로서 중국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중국은 현재 팬데믹 이전보다 일본과 뉴질랜드의 전체 무역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는 2018년 수출액의 1/4 미만을 중국으로 보냈으나, 2021년에는 수출액의 거의 3분의 1이 중국으로 갔다. 심지어 중국의 총구 앞에 놓인 대만 조차도 2020년과 2021년에 전체 무역에서 중국 본토가 차지하는 비중이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는 자본 흐름에서도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이 투자자들에게 덜 매력적이 되었다는 서방 언론의 요란한 보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반대다. 중국은 실제로 작년에 사상 최대인 1,810억 달러의 대내 외국인 직접 투자(FDI)를 유치했다. 동시에, 중국은 지난 2년 동안 아시아 지역에서 거의 3,000억 달러의 해외 직접투자를 통해 일본(2,420억 달러)을 제치고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자본투자국이 되었는데, 이는 인도의 270억 달러와 비교하면 10배 이상 많은 투자금액이다.

유럽에서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역시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탈 냉전 이후 마찰없는 자유무역의 시대와도 다르고 구 냉전 시대처럼 진영간의 완전한 ‘디커플링’이 가능했던 시대와도 다른, ‘갈등과 교류’가 상시적으로 공존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을 의미한다.

독일은 계속 미뤄왔던 GDP 2%의 국방비 투자를 내후년까지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진:셔터스톡)

팍스 아메리카나의 해는 지고, 독일과 일본은 재무장

현재(라기보다는 향후) 국제질서가 구 냉전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세번째 이유는 최근 Foreign Affairs에서 마크 레오나드가 지적하였듯이 전후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의 종말’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독일과 일본의 군사강국화이다.

미국이 유럽에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라는 군사동맹을 결성하고 아시아에서는 ‘미-일 안전보장 조약’을 체결한 것은 미국이 중심이 되어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공산주의 진영에 맞선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과 독일이 자기 지역 내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기 위한 측면도 강했다. 그 후 77년 동안 경제력 측면에서 세계 3위와 4위에 해당하는 두 국가가 군사적으로는 거의 힘을 갖지 않는 어찌보면 이상한 체제가 계속 유지되어 왔다.

중국과의 역사적 갈등이 심했던 일본은 조금 일찍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중일 3국간 관계로 보자면 중국은 2000년대 경제적으로 부상하면서 영향력이 세지고 있던 반면에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약점이 노출되었고, 그해 당선된 오바마 대통령은 해외분쟁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자제하였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기존의 동맹 체제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 사이 일본은 2012년부터 중국과 갈등관계에 있는 인도와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앞장서서 제시하였다. 당시 미국은 인태 전략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의 무역갈등을 고조시키면서 일본이 제안한 전략 개념을 수용하였다.

2010년대에 중국이 부상하면서 미국의 기본 전략은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였고 이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채택으로 나타났다. 트럼프가 즉흥적으로 이를 추진했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이러한 전략을 체계적 차원에서 계획하고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유럽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미국의 안보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는 “두 개의 전선”(two-theater) 논쟁이 발생하였으며 이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미국의 패권유지전략은 크게 자유주의 파와 현실주의 파로 나뉜다. 자유주의 파는 이념을 중심으로 ‘러시아-중국 동시 주적론’을 내세우고 있고 현실주의 파는 힘을 중심으로 ‘중국 주적론’을 주장하고 있다. 현실주의 파는 과거 냉전 시기에도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공산주의 독재정권인 중국과 화해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게다가 미국의 경제력이 예전같지 않아서 동시에 두 강대국을 상대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기 때문에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너무 깊숙하게 연루되지 말고 적절한 상태에서 러시아와 타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이후 유럽 안보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이 군사력을 강화하여 스스로 방어하도록 하고 미국은 중국에 집중해야 하며 이 역시 일본에 상당한 군사적 역할을 분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독일은 2014년에 나토에 약속했지만 계속 미뤄왔던 GDP 2%의 국방비 투자를 내후년까지 달성하겠다고 선언했고 일본 역시 국방비를 늘리면서 자위대의 해외파병 나아가 정식 군대의 보유를 목표로 기존의 평화헌법에 대한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평화헌법 개헌이 초점으로 떠오르며 자민당을 포함한 개헌 세력이 개헌선인 2/3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은 구제불능이라 하더라도 독일에서도 전쟁에 대한 죄책감은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 및 피해자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수명을 다해가면서 점차 옅어지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조만간 현실화되면 구 냉전 및 탈냉전 시기를 포함한 전후 77년간의 세계질서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러시아와 중국에 맞서는 서방의 단결된 힘이 당분간은 강화될 것이지만 미국-독일, 미국-일본 관계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엘리트들은 겉보기에는 미국에 완전히 부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 속내는 다르다. 전후에 일본은 미국과 계속해서 통상마찰을 빚어왔다. 1960년대 일본과 미국은 섬유 수입 할당량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1972년에 일본이 굴복하고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미일 섬유협정을 체결하였다. 1976년의 컬러TV 분쟁, 1978년의 철강 분쟁, 1986년 일본 통신시장 개방 분쟁, 1986년 반도체 분쟁은 모두 일본의 일방적 패배로 끝났고 미국에 유리한 협정을 맺었다. 오죽했으면 1988년에 일본에서는 작가 겸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 전 일본 운수상이 비분강개한 어조로 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였다. 미국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1985년 엔화의 인위적 환율절상을 위해 플라자 합의를 강제하였고 1989~1994년 기간 동안 소위 ‘수퍼 301조’를 발동하여 일본내 무역장벽을 제거함으로써 일본 경제에 결정타를 가하였다. 그 결과로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간의 경제침체를 겪게 되었으며 일본 정치 엘리트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

이처럼 일본이 미국과의 경제적 갈등에서 번번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안보를 절대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과 독일 역시 미국과의 각종 경제적 분쟁에서 자국에 불리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이유는 미국이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통해서 유럽의 안보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서 독일이 재무장하고,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으로 인해서 일본이 해외파병을 공인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들 두 나라가 안보에 있어서 비록 완벽하게 자주권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미국의 짐을 분담하게 된다면 이들은 미국에 대해서 협상의 지렛대를 가지게 된다.

게다가 미국이 대외적으로는 안보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겠지만 실제로 세금과 예산이 수반되는 (국방 정책을 포함한) 각종 정책은 수축지향적이 될 것이며 대외경제 정책에 있어서도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아세안 국가 정상회담을 개최한 후에 이 지역에 대해서 불과 1억5천만 달러의 지원을 약속한 것이나 중국의 일대일로에 맞서기 위해서 작년에 G7 정상회담에서 향후 10년간 40조 달러를 투입하는 ‘더 나은 세계 재건’(B3W: Build Back Better World) 이니셔티브를 발표하였지만 아직 아무런 세부 계획도 없는 상태이다. 바이든이 일본 방문시 발표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역시 미국 시장 개방은 포함이 되어 있지 않아서 참가국들의 반응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처럼 경제와 안보 차원에서 독일과 일본의 역할 증대와 미국 역할의 상대적 축소는 향후에 미국이 유럽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독일과, 아시아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일본과 ‘협의’를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독일이나 일본이 동의하지 못하는 사안을 미국이 강요하기 힘들게 되며 미국으로서는 서방 진영 내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거버넌스 체제가 될 것이다. 미국은 이 새로운 서방 체제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문화권 간 충돌 이론 역시 설득력 잃어

한편 러시아와 중국도 비록 지금은 마치 동맹을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이익에 기반한 조건부적 연대일 뿐 양국의 국민들과 정치 엘리트들은 모두 상대 국가에 대한 역사적 갈등의 기억과 불만감을 가지고 있다. 최근 아쉬운 상황에 놓인 푸틴의 방문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한 시진핑의 태도가 이를 방증한다.

서방 진영과 그 반대 진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변화는 국제질서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을 기조로 하는 냉전 시기로의 복귀도 아니고 그렇다고 파시스트 추축국 진영과 민주주의 연합국 진영으로 나뉘어 갈등하면서 결국 전쟁으로 돌입하게 된 ‘전간기(戰間期:interwar period.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 20년간의 과도기-편집자주)’로의 복귀도 아니다. 현재의 상황은 오히려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은 ‘고대 문명의 귀환’인가?

사무엘 헌팅턴과 같은 정치학자는 일찍이 탈냉전 이후의 시대를 ‘문명의 귀환’으로 규정하고 특히 기독교, 이슬람, 동방 정교회, 힌두교, 유교 등 오래된 종교에 기반한 갈등이 국제 정치를 좌우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후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는 이를 증명해주는 사례로 언급되었고, 중국의 부상, 러시아의 공격성 부활, 인도의 발전, 미국을 철수하게 만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도 이를 지지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 한중일 간의 갈등,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의 갈등처럼 동일한 문화권 내에서의 갈등과 충돌이 빈발하면서 헌팅턴의 문화권간 충돌 이론은 적실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Ⅱ. 어떤 역사가 귀환한다는 말인가?

지정학과 제국들의 귀환

스타워즈 시리즈 중에는 ‘제국의 역습’(The Empire Strikes Back)과 ‘제다이의 귀환’(Return of the Jedi)이라는 제목이 있다. 향후의 국제질서에 비슷한 제목을 붙인다면 ‘제국들의 귀환’(Return of Empires)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제국들은 문명권에 기반하지만 근대화된 제국이다. 얼마전에 푸틴은 18세기에 러시아의 근대화를 시작하였고 영토를 확장한 ‘표트르 대제’를 언급하면서 러시아는 현재 누구의 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영토를 되찾는 것’이라고 공개석상에서 말했다.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은 더 이상 공산주의적 이상을 앞세우지 않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활’을 핵심 슬로건으로 삼고 역대 제국이었던 당나라와 청나라를 은연중에 내세우고 있다.

인도의 모디 총리와 집권당 BJP는 최근 18세기 초에 힌두교 국가 ‘마라타 제국’을 창건한 시바지 국왕 동상을 세계 최고인 212m 높이로 만들고 있으며 2023년 완공 예정이다. 시바지 국왕은 이슬람 통치계급의 국가인 무굴 제국과 투쟁하며 힌두교 제국을 건설하고 힌두교식 전통을 재발굴한 인물로, 현대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최근에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지역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14세기부터 1922년까지 동남부 유럽과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을 호령한 이슬람 제국 ‘오스만 투르크’의 영광을 되찾자고 부르짖고 있다.

이들과 비교하여 역사적 배경도 약하고 경제적 군사적 역량도 상대적으로 뒤쳐져있지만 브릭스의 핵심 국가인 브라질과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자기가 속한 대륙에서 지정학적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중남미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은 점차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있다.

러시아, 중국, 인도, 터키 등이 모두 과거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사진은 로마노프 왕실의 머리 둘 달린 황금 독수리 상이다. (사진:셔터스톡)

밀림의 귀환? 미·중대결의 초한지 아닌 열국지의 시대

중국이 급성장하면서 ‘G-2’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2014년에 구매력 기준으로 경제규모(GDP)가 미국을 넘어섰다. 2020년대 후반, 늦어도 2030년대에는 명목 GDP에서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따라 중국이 국방비 투자증대와 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세계 패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예측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중국이 인구가 올해 또는 내년에 정점에 도달하고 생산가능인구는 이미 2015년에 정점을 찍고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며, 고부가가치 산업구조 전환에 적합한 노동력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진국 함정에 빠질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가, 미국 등 서방의 보호무역 공세로 인해서 더 이상 빠른 성장은 어려울 것으로 예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경제성장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유지해온 중국 공산당에게도 정치적 타격을 주어서 사회적 혼란이 올 수도 있다고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패권은 단순히 경제의 규모와 군비 투자만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와 군대의 질적 측면은 물론, 선진적 가치와 문화, 교육 학술 등으로 대변되는 소프트 파워 영향력, 동맹국들, 분쟁에 개입하여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지, 무엇보다도 국제적 공공선을 위해서는 자국 이익의 희생도 감수하는 공적 태도가 있어야 국제적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중국은 최대 경제규모 국가는 될 수 있을지언정 금세기 내에 패권 국가의 지위를 획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문제는 그렇다면 미국이 패권 국가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여부이다. 설사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고 성장속도가 느려져서 미국이 여전히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1위 국가를 유지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패권 국가의 지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진다. 1위 국가와 패권 국가는 다른 것이다. 아무리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1위를 하더라도 2위가 턱밑까지 쫓아와 있으며 3위와 4위 국가도 규모와 힘이 세서 1위 국가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독자 행동을 한다면 더 이상 헤게모니는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향후 국제질서는 근대화된 제국들이 서로 물고 물리는 열강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이자 국제관계 분야의 유명한 컬럼리스트인 로버트 케이건은 이러한 전망을 서술한 자신의 책 제목을 “밀림의 귀환”이라고 붙였다. 동양적 맥락에서 보자면, 미중 대립의 ‘초한지’의 시대가 아니고 춘추오패, 전국칠웅을 배경으로 하는 ‘열국지’의 시대인 것이다.

 


글쓴이 고한석은
서울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에서 IT정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SK China에서 4년 동안 일했으며 삼성네트웍스에서 글로벌사업추진팀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열린우리당 정책연구원 정책기획 연구원과 정세분석국장,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원장 등을 거쳐 서울디지털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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