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 슬픔과 고통은 여전하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관심은 흩어졌지만 미얀마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아시아 연구자인 정호재 필자가 5월 중순 미얀마에 입국해 1신을 보내왔다.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는 일단 성공’이라는게 칼럼의 요지다. 군사정부는 내년 8월에 총선을 통해 새 정부와 지도자를 뽑는다지만 진정한 새 권력자가 등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 두드러지는 미얀마 군부와 불교의 결착 사례 등을 보면 역설적으로 한국 민주화의 성공 요인도 보인다. 민주화, 경제발전, 사회발전의 마이너스 팩터와 플러스 팩터를 미얀마 사례를 통해 다시 본다. 아직 불안정한 미얀마의 상황을 고려해 인터뷰를 인용한 현지 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편집자 주]

✔지정학적 고립과 군벌 통치의 전통의 산물인 군부 쿠데타✔2년 전 활기는 간데 없고, 빈곤이 잠식해 버린 양곤의 풍경✔차마 성공이라 쓰기엔 너무 가슴 아픈 군부 쿠데타의 안착✔군부와 손잡고 극우 보수의 깃발을 날리는 미얀마 불교계

미얀마의 대표적인 관광지 쉐다공 파고다 입구 모습

말로만 들어보던 숙소 검열

지난 5월 모일, 새벽 0시 30분. 미얀마 양곤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던 필자는 시끌법적한 소리에 설익은 잠을 깨야했다. 누군가가 5층 방문을 차례대로 요란스레 두드려댔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조만간 필자의 방문 앞까지 당도했고, 놀란 마음에 빼곰히 문을 열어보니 비좁은 호텔 복도는 20여명의 총을 든 군인들로 가득차 있었다. 극도의 공손함을 보인 직원은 숙박명부를 펴들고 나를 “외국인”이라며 앞장선 군인에게 소개했다. 그는 내게 여권을 요구했고, 비자기간을 찬찬히 확인하더니 “땡큐”라는 간결한 멘트와 함께 되돌려줬다. 상황이 끝난 것이다.

불과 5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잠기운은 오간데 없었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잠재우는 데 1시간 넘게 필요했다. 좁디좁은 호텔 방 앞에서 총 든 군인 수십 명을 맞이하는 건 꽤나 살벌한 경험이었다. 다음날 호텔 측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반응했다. 혹시 외부에서 양곤으로 잠입한 불순분자들이 머물 수 있기에 불시검문을 나온다는 설명이었다. 필자도 ‘숙박 검열’이 있다는 해외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실제 그것을 당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얀마 내재한 불안요소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해프닝이었다. 

급격하게 궁핍해진 양곤 시내

최근 동남아시아 거의 모든 국가의 국경이 빠르게 열리고 있다. 그 속도가 너무 가팔라서 하루하루 정책을 재확인해야 할 정도다. 그러니까 지난 4월과 비교하면 “격리기간”이 최대 15일에서 0일로 줄었고, 반드시 챙겨야 하는 PCR 테스트 음성결과도 6월이면 사라지는 국가들이 적지 않다. 즉 백신 접종증명서와 여행자 보험만으로 가능한 국가가 대폭 늘어난다는 얘기다. 전세계가 ‘엔데믹’의 흐름에 동참 중이고 미얀마도 그 대열에 어느정도 다가섰다. 필자가 5월 초 입국한 양곤국제공항은 비행기 편수가 크게 줄어들어 휑한 느낌이었고 비자와 방역 관련 방대한 서류를 검사하느라 입국이 크게 지체됐다. 마지막으로  신속 진단키트로 체크하고 30분을 기다리게 한 뒤 입국장 진입을 허가했다.

2년 만에 당도한 미얀마 양곤은 여러 모습에서 크게 달라져 있었다. 우선 지난해 ‘쿠데타’와 ‘델타 변이 대폭발’로 인해 외국인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이밖에도 국제 금융제재를 받아 달러가 부족한 군사정부가 강력한 외환통제책을 쓸 수밖에 없어 양곤 시내가 ‘가난해졌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 2년 전엔 도시가 빠르게 국제화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활기찬’ 느낌이 지배적이었다면, 이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서민들의 고충이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고립된 경제체제는 가난한 사람에게 더 고통스러운 법. 도시 빈민과 서민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길가에 ‘점빵’을 열고 목에 풀칠이라도 하려 하고 발버둥 치고 있었고, 직업을 잃고 거리의 부랑자가 된 이들 역시 눈에 쉽게 띄었다. 게다가 하루 8시간씩 제한된 전력 송출로 인해서 도시 중산층의 불편함 역시도 만만치 않았다. 

국제적인 경제 제재로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지고 있다

제한 송전이 이뤄진다는 것, 즉 하루 8시간씩 전력이 끊기는 상황은 사시사철 “더운 나라”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끔찍한 일이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못 쓰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조금만 신경을 덜 쓰다간 냉장고 음식이 전부 상할 수도, 밥을 지을 수도 없고, 인터넷이 통하지 않는다는, 즉 ‘문명사회’와의 단절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극복하는 방법도 있긴 했다. 발전기를 갖춘 고급 빌라나 호텔에서 사는 방법이다. 필자는 호텔을 전전했기 때문에 간신히 문명과 단절되지는 않았다.

의외로 신용카드 사용이 가능했다. 호텔 얘기를 하자면 외국인이 대폭 줄고 미얀마 돈(짯)의 가치가 폭락했기에 2년 전보다 50~60% 정도 바겐세일 중이었다. 2성급은 20달러 내외, 3성급은 30달러면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예전에 무척이나 흔했던 에어비앤비나 장기거주자용 모텔은 전부 사라지고 없으므로 이젠 방문자는 무조건 호텔에 묵어야 했다. 하루 20~30달러라는 싼값이라고 해도 한 달을 버티려면 숙박비만 100만 원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 가끔 정전이 되었지만 전기와 인터넷을 편하게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혜택이었다. 

물론 지금은 계엄령에 준하는 상황이라 한때 미얀마 전 국민이 애용한 페이스북과 sns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vpn이라는 ip 우회 서비스를 써야 한다. 일부 무료 서비스도 있다지만, 편리한 정식 버전을 구매하려면 매달 4~5달러는 내야 한다. vpn을 쓸 정도의 미얀마 중산층이 두텁지 않기에 현재 미얀마의 인터넷은 통제가 이뤄지는 셈이다. 깊어진 가난과 빈번한 단전, 길거리에 늘어난 군인들, 그리고 vpn을 써야하는 불편, 높아진 기름값 등을 빼고는 2년 전과 달라진 것은 비교적 적었다. 여러 제약 속에서도 양곤 시내의 경제활동은 나름 활발한 회복세를 보인 것이다.

 아웅산 수찌와 NLD 정부의 힘겨운 집권

장기화된 우크라이나 전쟁 탓인지 한국에서 ‘미얀마 사태’는 빠르게 잊히고 있다. 2021년 초 “양곤의 봄”을 노래하고 용감한 시민들을 칭송하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사실 한국과 미얀마의 심리적 거리는 그리 가까운 건 아니다. 조금만 눈을 감으면 아주 멀고 먼 제 3세계 국제뉴스의 한 토막일 뿐이다. 그 때문에 잠시 지난해(2021년)를 정점으로 벌어진 쿠데타와 이에 대한 시민 불복종운동(CDM), 그리고 이어서 터진 델타 바이러스 창궐로 인한 막대한 사망자, 그리고 2022년으로 조용한 은둔으로 이어진 상황을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2016년 초 아웅산 수찌가 이끄는 NLD 정부가 전 세계인의 축복과 격려 속에 출발한다. 민주주의의 세계사적 승리였다. 미얀마 민주세력은 이미 1990년도 총선에서 압승한 뒤 군사정부를 대체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1962년 집권한 미얀마 군사정부는 당시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2015년 선거까지 무려 15년 넘게 어깃장을 놓아왔다. 2015년 아웅산 수찌가 다시금 선거에 승리하고 실제 집권까지 이를 수 있던 배경엔 달라진 국제 정세(미국과 중국의 G2 체제)가 결정적 기여를 했다. 미얀마 군정의 배후에 있는 중국이나 미국 등 서방체제 모두, 미얀마가 이제라도 세계질서에 편입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인도양의 길목에 선 미얀마는 G2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2007년 무렵을 정점으로 최악을 기록한 미얀마 국내 경제도 개방과 개혁의 원동력이 됐다. 미얀마 군부는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선 적어도 다당제 보통선거 결과를 (한 번쯤은)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노벨평화상 수상(1990년)에 빛나는 아웅산 수찌 여사가 사실상의 국가수반으로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세력의 1차 집권 시기(2016~2020)는 20년 넘게 가택연금을 당한 전력의 아웅산 수찌와 NLD당에는 힘겨운 과제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1) 군부가 독점하고 있는 국방권과 치안권 2) 도로와 전기 등 세계최악의 인프라 3) 100년 넘게 이어온 버마족과 소수민족 간의 치열한 갈등 4) 마지막으로 방글라데시와의 국경 부근 로힝자족 인권 이슈 등이 그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시기 미얀마의 국제화 속도는 가팔라지고 경제 상황 역시 개선되었지만, 동시에 2020년 아웅산 수찌는 버마족(불교 극우세력)의 로힝자족 탄압을 옹호한 대가로 국제사회로부터 배척을 받는 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2021년의 정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5년 임기가 끝난 2020년 11월 총선에서 수찌와 NLD는 전체 유권자의 80%의 지지를 얻는 또 한 번의 압승을 거둔다. 하지만 이듬해 2월 1일 국회 개원을 앞둔 새벽 수도 네피도를 장악한 군부에 의해 사실상 모든 권력을 회수당한다. 수찌를 비롯한 400여 명의 여당 상하원 의원들 거의 모두가 구속당하거나 쫓겨난 것이다. 대다수 미얀마 국민을 이에 참지 못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망명정부(NUG)가 구성이 되었고 군사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상당수 공무원들 마저 출근하지 않는 것으로 저항에 나섰다. 이 와중에 1800여 명의 무고한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 도중 사살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코로나는 악화돼 4월과 9월 사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렇게 쿠데타와 델타-오미크론의 아수라장 속에 2021년이 저물고 2022년이 시작된 지도 벌써 5개월이 흘렀다. 

아웅산 수찌 전 국가 고문과 군부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

어느새 군부체제는 안착

“양곤과 만달레이의 상황은 사실상 종료가 된 거죠. 그래서 해외로 나가 돈 벌고 싶어서 일본어 공부하고 있어요.”(미얀마 20대 여대생) 

“불교계(상가)가 시민세력을 도와주지 않은 측면도 있죠. 미얀마 불교계와 군부의 목적이 거지는 엇비슷해 그런 것 같습니다. 기득권 지키기요.” (카친계 미얀마인 30대, A씨)

“워낙 가난한 나라잖아요. 시민들이 군부와 싸우려고 해도 물적인 토대가 턱없이 부족한거죠. 불복종운동이 1년도 채 못버틴거니까요. 자리를 이탈했던 공무원들도 전부다 복귀했다고 보면 됩니다.” (한국 교민 40대)

“지난 반세기 동안 군부가 구축한 체제 자체가 너무 견고해서 그래요. 아웅산 수찌 정부 5년만으로는 그것을 대체한다는 게 불가능했던 겁니다. 군부가 선거결과를 인정 못 하겠다는데, 그렇다면 그런 거죠. 민주주의가 전부가 아니었던 겁니다.” (중국계 미얀마인 40대) 

정식 ‘비자’를 받아 양곤에 도착한 필자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현재 어떤 상황인가, 정세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라는 대목이었다. 물론 비교적 안전한 수도권에만 머물고, 만나는 이들도 어쩔 수 없이 깊이와 폭에 있어서 한계를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지금도 북부 만달레이 근처에서는 교전이 이뤄지기도 하고, 양곤 내부에서도 일부 경찰서들이 무장세력의 습격을 받는 일이 왕왕 벌어진다. 그럼에도 2022년 5월 양곤에서 만난 거의 모든 거주자는 “군부 정부의 복귀”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같은 현실의 높은 장벽을 앞에 두고, 이미 흩어진 민주세력과 해외에 거점을 둔 망명정부가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지난해 12월에는 끝난 게임이라는 반응이었다. 

2021년 미얀마 시민들이 벌인 ‘불복종운동’은 기념비적인 투쟁이며 아시아 민주화 역사에 반드시 기록될 소중한 ‘자산’인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전세계의 뜨거운 지지와 후원이 있었고, 아세안 내부에서도 시민 1800여 명이 거리에서 총탄에 쓰러진 것에 대해 극도의 충격과 우려를 드러냈다. 당시 참사는, 변화와 혁신을 꿈꾸는 6억 아세안 커뮤니티 전체에 미얀마 군부정권이 심각한 테러를 가한 것과 다름없었다. 미얀마 군부는 2016~2017년에도 소수민족 로힝자를 탄압한 전력이 있는데, 이번엔 아예 민주 선거결과를 부정하고 시민을 총칼로 위협했기에 아세안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쿠데타에“성공”이라는 말을 쓰기 난감하지만, 어찌되었건 2021년 미얀마 군부의 움직임은 사실상 “안착”의 임계점을 지나고 있다. 그 원인과 배경을 국내 정치의 관점에서 요약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때 미얀마 쿠데타는 외부세력의 영향력, 즉 중국이나 미국의 대리전이라는 관점도 잠깐 득세하긴 했다. 그러나 2021년의 쿠데타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부 정치과 역학 구도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할 듯 싶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미얀마에서 국가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다

중재자 없는 팽팽한 정치 환경

아웅산 수찌로 대표되는 민주세력, 그리고 딴쒜 장군(집권: 1992~2011)과 오늘날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으로 대표되는 신군부는 1988년 민주화 시위 이후 30년 넘게 평행선을 그어왔다. 한국을 포함한 서방세계는 주로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아웅산 수찌’의 영향력과 상징성을 높게 평가하곤 하지만, 미얀마 군부의 실력과 힘을 낮게 평가하는 분위기도 팽배해왔다. 반인권적 집단이기 때문에 절대로 협력해서는 안 된다는 시선이다. 실제로 지난 반세기 군부에 강력한 탄압을 받았던 NLD 등 민주 세력에게는 지난 집권기는 멋지게 반전을 꾀할 좋은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지난 5년간 군부와 민주세력 간에는 “개헌”과 “부정부패 척결”을 둘러싼 갈등만 있었지 어떠한 타협도 이뤄지진 못하고 만다.

이 같은 갈등 와중에 두 세력의 갈등을 중재할만한 제3의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 미얀마 정치발전의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는 게 중론이다. 군부는 장기간 국가기관 거의 모두를 독점 소유하다시피 했기에 군부 이외에 대안적인 체제 안정 세력이 없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사법부’ ‘경제재벌’ ‘언론계’ ‘학계’ ‘종교계’ ‘지방 사학 세력’ 등이 일정 정도의 독자적 힘을 갖고 있기에, 이런 준準 기관 출신들이 정계에 진출해 군부를 대체하는 세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얀마 사회는 군부와 민주세력이 양보 없이 싸워왔기에 이를 중재할 세력이 없었다. 아웅산 수찌가 2020년 총선을 전후에 군사정부가 제안한 연정, 혹은 타협안에 대해 단칼에 거절했다는 루머가 지난해 광범위하게 유포가 되기도 했다. 대통령 자리는 군부에 넘기고 의회는 NLD가 지배한다는 이른바 동거정부 안이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수찌는 군부와 절대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군부 부패수사”로 맞불을 놓았고, 군부는 쿠데타로 대응했다는 얘기였다. 이것이 단지 루머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알고 보니 권위주의 극우성향 불교계

최근 가장 관심을 끈 대목은 미얀마의 불교계인 ‘상가’ 집단의 정치적 선택이다(상가sangha는 우리말로는 승가僧伽, 승단僧團으로 번역이 된다). 널리 알려졌듯이 미얀마 종교분포는 불교계(상가)가 전체의 89%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이고, 스님들은 국민에게 절대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아 왔다. 즉, 정치 권력을 제외하고는 불교계가 거의 유일한 시민사회이자 교육과 미디어를 대체하는 사회통합 세력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상가는 민주세력보다는 군부와 더 친연성이 높은 것으로 이번 사태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현실을 단정적으로 규정하기는 무척 조심스럽다. 2007년 미얀마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한 ‘샤프론 혁명’이 대표적으로, 상가는 식민지 시대와 군사정권 시절 내내 민중의 대변자로서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에서도 미얀마 승단을 ‘민주세력’의 후원자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관심이 높은 이 남방불교(테라바다 불교)은 성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권위주의 정부와 밀착한 극우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비단 미얀마만의 문제가 아닌 인근 태국과 캄보디아 역시도 엇비슷한 흐름이다. 1980년대 냉전과 이념이 몰락한 이후 아세안 군사 정부들이 주로 ‘종교’를 적극 후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미얀마 불교계는 2007년 군사정부에 잠시 반기를 들기는 했지만 2013년엔 극우불교 세력 마바타(Ma Ba Tha) 운동을 시작했고, 이후 로힝자족 학살에 극우 불교계가 대거 가담해 전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미얀마 비불교도들은 이같은 현상을 “개혁과 개방 이후 젊은 층이 서구세계에 관심을 두고 더 이상 불교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군부와 함께 ‘보수주의’의 깃발을 함께 들었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불복종운동에서도 불교계의 참여가 유독 저조했던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얀마에서 불교는 국민의 89% 이상이 믿는 중요한 사회 통합의 구심점이다.

코로나라는 복병

2022년 현재 미얀마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 델타 변이와 올해 초 오미크론으로 걸릴 사람은 이미 다 걸리고 사실상 집단면역에 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해 델타 변이의 정점이던 7월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지금도 정확한 통계 산출이 불가능할 정도다. 현재 공식적인 통계는 2만여 명으로 나와 있지난 미얀마 거주자들은 적어도 50만 이상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막대한 피해가 쿠데타를 주도한 미얀마 군부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과정을 겪은 현재의 관점에서 분석을 해보면, 오히려 ‘시민불복종 운동’을 주도한 민주세력에게 치명타를 안겼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한창 군부와 맞서 싸우던 시점에 코로나가 창궐해서 시민들은 발이 묶이고, 군부는 도시 간 이동을 전면 금지하고 강력한 공안 통치를 가능케 한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만약 코로나 창궐이 없었다고 해도 시민혁명에 얼마나 긍정적인 기여를 했을지는 누구도 확언하기 어렵지만, 코로나로 인해 저항의 동력이 상실된 것은 어느정도 사실로 느껴졌다.

페이스북, 텔레그램 등 SNS 혁명의 한계

필자가 지난해 연말쯤에 접한 가장 놀라운 얘기는, 양곤과 만달레이 등 대도시에 사는 젊은이들의 강력한 저항 의지와 그 실천이었다. 텔레그램 등 암호화된 메신저로 무장된 이들은 서로서로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며 군사정부 및 군사정부 후원자들에 대한 일종의 ‘사보타지(고의적 파괴행위)’를 이어간다는 얘기였다. 예를들어 A라는 해외기업이 군사정부에 세금을 납부하는 등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면 텔레그램으로 뜻과 행동대원을 모아서 이 기업에 돌을 던지거나 직원들의 퇴직을 유도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2010년 ‘아랍의 봄’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구글과 페이스북 등이 제공한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라는 인터넷을 활용한 신무기였다. 시민 저항세력은 이를 통해서 소통하고 뜻을 모아서 결국 잔혹한 권위주의 독재세력에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게 되었다는, 자유주의로 가득한 낭만적인 민주주의 이행론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손에 쥐어진 휴대전화와 SNS만으로 혁명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낡은 이론이 된 듯싶다. 

아랍의 봄이 전부 원상으로 복귀된 것처럼 2016년 통신 자유화로 순식간에 늘어난 미얀마의 5천만 페이스북 사용자들 역시 잠깐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하긴 했지만, 미얀마 군부가 구글과 페이스북을 차단하자마자 그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미얀마의 많은 젊은이가 페북과 유튜브로 서구의 사상을 접하고 자유주의 개혁 개방에 열광한 것은 분명하지만, 휴대전화와 SNS만으로 총과 칼을 든 군부세력과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다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이 된 것이다.

지정학적 고립 십분 활용한 군부  

미얀마를 표현할 때 흔히 “중국과 인도 문명이 교차하는 땅”이라고 한다. 면적도 크다. 한반도의 3.5배에 이르는 거대한 땅이며 이 땅에 135개의 소수민족, 6천 만 명이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이 땅을 지배하는 주류 버마족(68%)의 위세가 압도적으로 세다는 것이고 이들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큰 샨족(10%)과 꺼잉족(7%) 라카인족(4%) 등이 산속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 버마족에 대항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독립 이후 군사정부가 등장한 배경엔 버마족이 주변 소수민족을 무력으로 지배하며 연방 체제를 통해 하나의 나라 만들기를 추진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같은 무력 중심의 ‘국가 만들기’ 과정을 딱히 견제할만한 외부세력이 없다는 점이다. 중국과 인도는 대표적인 반서방 세력 가운데 하나다. 유엔(UN)과 서방세계가 동유럽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내전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경계선에 있는 미얀마 민족갈등과 인권문제에 목소리를 크게 내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과거 버마가 영국의 식민지배를 오래 받았기 때문에(최대 120년) 여전히 인도와 중국은 미얀마 문제의 출발을 “영국제국”으로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지정학적인 맹점을 활용해 미얀마 군부는 확고하게 군부 중심의 국가체제를 확립해 놓았기 때문에 불과 5년 만의 정권교체로는 미얀마 정치체제가 쉽게 바뀌지 못했다는 얘기다. 특히 수도 네피도와 경제수도 양곤 그리고 북부의 중심인 만달레이를 겹겹이 군대와 경찰로 장악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시민세력이 이들 군부를 자체적인 힘만으로는 전복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표적인 상업 중심지인 차이나타운 모습

예고 없는 호황, 되돌아온 과거

2019년 말 미얀마 한국 교민의 숫자는 3천 명을 넘어서 4천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와 쿠데타로 인해 그 숫자는 1천 명 이하로 가파르게 떨어졌다. 최근 대한항공의 운행재개가 결정되는 등 미얀마로 복귀하는 교민들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다. 당연히 그동안 미얀마 경제가 불경기니 한인들의 삶도 피폐했을 그것으로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이 미얀마에서 하는 최대 산업은 봉제와 의류제조업이 절대적이다. 그런데 이 분야에서 이른바 ‘대박’이 터졌다는 것이다. 

“다행히 서방에서 미얀마의 봉제업에는 게재를 가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한국계 봉제업은 날개를 단 셈이 되었습니다. 대형 업체들도 속속 신규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미얀마 교민지 ‘실과 바늘’ 편집장 A씨)

미얀마에서의 봉제업이 호황을 입은 배경엔 환율효과 및 중국계 봉제 업체가 반중 감정 고조로 서둘러 철수한 덕도 있지만, 그보다는 국내 경제위기로 임노동 비가 대폭 줄어든 원인이 크다. 심지어 군부정권이 민주 정부 아래 막 싹트기 시작한 노조를 탄압한 덕에 임금인상 가능성도 사라졌다. 현재 미얀마 노동자 월 150달러(20만 원) 수준으로 전세계 최저수준으로, 심지어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 수도 넘쳐나 당분간 봉제 의류 산업을 위해 미얀마를 찾는 한국 기업체의 수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미얀마 정치체제의 현재와 미래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지금도 미얀마의 수많은 민주인사와 소수민족 지도자들은 미얀마 군부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전세계를 향해 지지를 호소하고 자금을 모으는 등 투쟁의 열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미 1988년과 2007년의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체념은 젊은 세대보다는 훨씬 더 빠른 것도 현실이다. 군사정부 역시 이미 반세기 넘게 해왔던 일이 대다수 국민을 통제하고 소수민족을 적절하게 압박하는 데 익숙하고 능숙하다. 알기 힘든 미얀마(버마)라는 정치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군인이 중심이 되어 주면 약소민족을 정복했던 과거 미얀마 왕조의 성격이 현대 국가로 이어졌다는 논리다.

미얀마 정치 관련 대표 저작물인 <미얀마의 국가체제 State in Myanmar>를 썼던 미국의 학자 로버트 R.테일러는 이미 2000년대 초에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물론 외부의 조건이 크게 변했음에도) 21세기 미얀마의 국가체제의 본질과 속성은 식민지 시기 이전인 전제 왕정 시대의 그것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결론이 가장 그럼직하다.” 한국에서 미얀마어를 전공하고 미얀마에 15년 넘게 거주하며 양곤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B씨 역시도 “안타깝지만, 현재 절대 강자인 미얀마 군사정부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한 듯 보이고, 그것이 결국 익숙한 과거의 (정복왕정)체제로 돌아가는 근본 이유”라고 분석한다. 

지난 10년간 한국 정부와 사회는 미얀마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양적인 질적인 발전을 후원해왔다. 국제 사회 역시도 미얀마의 민주화에 관심은 높지만, 막상 그 생각이 실천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현실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또다른 답을 구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필자 정호재는아시아 연구자.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기자로 일했다. 번역서로는 <탁신-아시아에서의 정치 비즈니스>, <수상이 된 외과의사-마하티르 자서전>이 있으며, <아시아 시대는 케이팝처럼 온다>, <다시, K-를 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