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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훈 칼럼] 여성을 돕는 남성 배우자(supportive spouse) 열전

By | 2022년 5월 17일 | 국제, 미분류, 사람, 여성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사절단의 대표로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의 남편 더글러스 엠호프가 방한하며 세컨드 젠틀맨이라는 낯선 표현이 우리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엠호프는 아내의 부통령 취임으로 캘리포니아에서 바쁜 변호사 일을 접고 워싱턴의 로스쿨로 자리를 옮겼다. 비록 전세계 수많은 여성들이 겪는 경력 단절은 아니지만, 여전히 남성이 아내 직장에 따라 자신의 커리어와 거주지를 조정한다는 것은 뉴스가 되는 세상이다. 20세기 영국에는 이미 여왕이 될 공주와 결혼하며 해군 커리어를 포기한 필립 공과 마가렛 대처 총리의 남편 데니스 대처가 있었고, 독일에는 메르켈 총리의 남편 요하임 자우어가 그림자같은 퍼스트 젠틀맨의 역할을 맡았다. 자유민주주의의 맹주를 자처하는 미국으로선 느린 변화라 하겠다. 유정훈 필자가 보내온 엠호프 이전과 이후의 여성을 돕는 남성 배우자(supportive spouse) 이야기. [편집자 주]  

✔캘리포니아 변호사에서 로스쿨 교수로 이직한 세컨드 젠틀맨
‘결코 여성의 성공이 남성의 실패나 배제를 뜻하지는 않아’
✔시대의 젠더 규범과 다른 길을 걸어간 선구자 마틴 긴즈버그
가족 위한 모든 요리까지 도맡은 외조는 희생이 아니라 사랑
✔레지던트 시절 아내가 일하는 법정의 단골 방청객 패트릭 잭슨
경력 단절은 없지만 ‘여성을 돕는 남성 배우자 클럽’의 유망주

2014년 캘리포니아 법무장관 시절의 카말라 해리스와 더글러스 엠호프. 영화제 참석 사진 (사진:셔터스톡)

최초의 세컨드 젠틀맨 더글러스 엠호프, 부통령 아내따라 이직

이 글 자체가 ‘성차별적’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시작하자. 여성 배우자의 사회적 활동과 성취에 조력하는 남성 배우자에 관한 이야기지만, 여성이 같은 선택과 행동을 했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5월 10일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미국 사절단의 대표는 ‘세컨드 젠틀맨’* 즉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의 남편 더글러스 엠호프였다. 그는 1990년 로스쿨을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에서 엔터테인먼트 전문 변호사로 30년 가까이 활동했다. 두 사람은 2013년 지인의 소개로 만나 2014년 8월에 결혼했다(해리스는 초혼, 엠호프는 자녀 2명이 있는 재혼). 아내 해리스가 부통령에 당선되자, 그의 소속 로펌은 이해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엠호프가 회사를 완전히 떠난다고 발표했다. 워싱턴 DC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 그는 조지타운 로스쿨에 교수로 합류했다.

* 대통령의 배우자나 가족에게 퍼스트 붙이는 것처럼 부통령의 배우자에게는 세컨드라는 수식어를 쓴다. 현재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 바이든은 남편 바이든이 부통령이던 시절에는 세컨드 레이디 불렸다.

2021년 1월 21일 취임식에서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이 취임선서를 할 때 성경을 받쳐 든 세컨드 젠틀맨 더글러스 엠호프

한국에서는 공직자도 아닌 세컨드 젠틀맨이 미국을 대표한 것이 ‘격’에 맞는지가 주로 논란이 되었지만, 워싱턴포스트는 매우 다른 각도에서 엠호프의 방한에 따라 한국에서 성평등 이슈가 주목받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 읽기) 엠호프는 최초의 여성 부통령의 배우자 즉 첫 번째 세컨드 젠틀맨으로서, 여성을 돕는 남성 배우자(supportive spouse)의 역할을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바로 읽기)에서 일을 쉬는 것에 대한 좌절감을 묻는 질문에 “부인을 포함해 모든 여성이 자신의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올려주는 것은 남자다운(manly) 일이기도 합니다.”라고 답변했다. ‘남자다운(manly)’이라는 단어는 물론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이지만, 그의 행보나 전체 인터뷰를 보면 그 부분은 시대의 흐름에 쫓아오지 못하는 남성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엠호프는 워싱턴포스트 및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양성 평등은 모두를 위한 것이고 여성의 성공이 남성의 실패나 배제를 뜻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생전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와 마틴 긴즈버그

아내를 돕고 지지하는 것은 희생 아닌 가족, 마틴 긴즈버그

엠호프의 행보는 자연스럽게 1993년부터 2020년 타계할 때까지 연방대법관을 지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남편 마틴 긴즈버그(1932-2010)를 떠올리게 한다. 루스와 마틴은 코넬대학교에서 만나 1954년 결혼했는데, 루스는 데이트 상대 중 여성인 자기가 뇌를 가지고 있다고 알아본 유일한 남성이 바로 남편 마틴이었다고 회고했다.

물론 그들 역시 시대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루스와 마틴은 1년 차이로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는데, 하버드 로스쿨에 여성이 입학한지 불과 6년, 500여명의 재학생 중 여성은 단 9명인 시절이었다.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On the Basis of Sex)>에 나오는 것처럼 루스는 젊은 시절 암 투병을 한 마틴의 간병을 도맡으며 육아와 학업까지 병행했다. 루스 덕분에 마틴은 로스쿨을 무사히 마치고 뉴욕 로펌에 자리를 잡았지만, 루스는 마틴을 따라 뉴욕으로 가야 했고 이 때문에 입학을 했던 하버드가 아닌 콜럼비아에서 로스쿨을 마쳤다. 마틴은 조세 전문 변호사로 경력을 쌓아 나갔지만, 루스는 직장을 구하기조차 어려웠다.

루스가 오랜 인고의 시간을 거쳐 여성인권 분야에서 선도적인 변호사로 업적을 쌓아 가며 마틴은 역할을 바꾸었다. 1980년 루스가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되자, 마틴은 아내를 따라가기 위해 워싱턴DC에 있는 조지타운 로스쿨로 자리를 옮겼다. 뉴욕 소재 콜럼비아 로스쿨에서 1979년 종신재직권(tenure)을 받은 직후였다.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오고 자녀들의 회고를 통해서도 밝혀졌는데, 집에서 요리에는 소질이 없는 루스 대신 주방을 맡은 것도 마틴이었다.

외적 행보만이 아니다. 마틴은 조세 분야에서 인정받는 법률가였지만, 루스가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부부가 같은 업계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비교 대상이 되는데, 마틴은 자주 루스는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 편집위원을 했지만 자기는 못했다고 얘기했다.** 인터뷰에서 “루스는 나에게 요리에 관한 조언을 하지 않고, 나는 루스에게 법에 관한 조언을 하지 않는다.”고 한 적도 있다. 미국 스타일의 농담이지만, 나는 같은 분야에 일하는 배우자가 상대방의 능력과 업적을 이보다 멋지게 인정한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는지 묻는 질문에 마틴은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잘라 말했다.

** 미국 로스쿨의 리뷰(Law Review) 편집위원은  우수한 로스쿨 학생임을 나타내는 대표적 징표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하버드 로스쿨에서 흑인 최초로 편집장을 맡으며 처음 세상의 주목을 받았고, 연방대법관 대부분은 로스쿨에 재학 당시 리뷰 편집장 혹은 위원을 지냈다.

최초의 흑인 여성 연방대법관의 백인 의사 남편 패트릭 잭슨

최근 최초의 흑인 여성 연방대법관으로 인준된 케탄지 브라운 잭슨의 남편 패트릭 잭슨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엠호프나 마틴처럼 대외적인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아내의 근무지를 따라 DC의 병원으로 옮겼고, 함께 두 딸을 키우며 여성을 돕는 남성 배우자(supportive spouse)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잭슨 부부는 흑인-백인 커플인데, 패트릭은 2021년에는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한 버지니아 법을 위헌으로 선언한 연방대법원의 Loving v. Virginia 판결*** 기념일에 그 의미를 새기는 글을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올려 아내를 응원하기도 했다.

2022년 4월 연방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 케탄지 브라운 잭슨 부부

*** 미국 연방대법원의 1967 Loving v. Virginia 판결은, 백인 남편 리처드 러빙과 유색인종 아내 밀드레드 러빙이 기소된 사건에서 인종 간의 결혼을 처벌하는 버지니아 법을 위헌으로 선언했다. 사람의 스토리는 2016 영화 <러빙(Loving)>으로 만들어졌다.

하버드 경제학과 교수 클라우디아 골딘은 성별 소득 격차를 분석한 책 <커리어 그리고 가정: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기나긴 여정>에서 변호사 업계를 별도로 다루었다. 성평등에 관해 진전이 있기는 하지만 변호사 업계는 여전히 성별 소득 격차가 큰 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짐작과 달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취직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것 같은 차별이나 로펌에서 여성 변호사를 파트너로 승진시키지 않으려는 편견은 주된 원인이 아니라고 한다.

변호사는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 언제든지 고객의 요구에 응대할 수 있어야 소득이 높아지는 업종이다. 집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일에 대비하고 아이를 돌볼 시간을 내기 위해 여성이 예측 가능성이 높고 시간 유연성이 큰 일자리를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선택하고, 여성과 남성 변호사의 커리어 차이와 소득 격차는 여기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성이 유연한 일을 선택하는 이유는 당연히 젠더 규범이다. 제도적 차별을 없애는 것도 중요하고, 노동과 돌봄의 구조를 성별 격차를 없애는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결국 누군가는 현실의 삶에서 젠더 규범과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이 글은 자신의 시대의 젠더 규범과는 약간 다른 길을 걸어갔던 사람(마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전의 젠더 규범이 적용될 수 없는 자리에 오른 사람(엠호프)의 얘기다.

물론 이들은 탁월한 능력과 배경을 바탕으로 미국의 최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이고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다. 마틴과 엠호프 모두 변호사 경력은 접었을지 몰라도 로스쿨 교수로 갔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경단남’이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젠더 규범에서 벗어나는 선택은 그런 위치에 올라가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최초의 세컨드 젠틀맨이지만 결코 마지막이고 싶지 않다”

백악관 웹사이트 중 세컨드 젠틀맨을 소개하는 부분에는 “나는 세컨드 젠틀맨 역할을 맡은 최초의 남성이지만 단언컨대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좋은 선례를 남기고 다음 세대 남성들이 여성을 돕는 남성 배우자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발언이 명시되어 있다.

엠호프의 발언은 앞으로 남성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보여 준다. 한국 사회에서 많은 남성들은 아직도 여성이 자기보다 앞서가는 것은 고사하고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낯설어 하거나 힘들게 여기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이제 남성이 여성의 뒤에 서는 것, 여성이 남성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을 보조하는 것이 별일이 아니어야 한다. 엠호프 혹은 마틴 같은 삶 또한 예외가 아니어야 한다. 지금은 그날그날의 날씨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기후 자체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 유정훈은
변호사(한국 및 미국 뉴욕 주). 2011년 버락 오바마에 맞설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시점에 미국 연수를 하며 미국 정치·선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페이스북에서 꾸준히 미국 정치와 법에 관한 ‘덕질’을 계속하고 있다. 메디치미디어가 출간한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각종 언론매체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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