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가인 유발 하라리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입을 열었다. 1차적으로 각 나라들이 국방비를 경쟁적으로 증액할 것을 예측했지만 행간에서는 무장평화(armed peace) 시대의 가능성까지 느껴진다. 이미 국제정치학계에서는 미중 패권경쟁이 가속화되면서 냉전(cold war)의 귀환을 당연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좀더 광범위한 국제평화의 후퇴, ‘불안정한 평화(cold peace)’의 보편화를 점치고 있다. 하라리가 참석한 몇몇 대담을 소재로 유정훈 변호사가 향후 추이를 정리해봤다. [편집자 주]

✔ 우크라이나 사태는 단 한 사람이 만들어 낸 재앙

✔ 공산주의 붕괴는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 현재의 국방비 수준은 역사상 이례적으로 낮은 금액

✔ 전쟁과 평화는 인류의 선택 결과, 지금은 대 선택기

지난 3월 3일에 공개된 TED 대담에 출연하여 이야기하는 유발 하라리.

인류 3부작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쓴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이코노미스트(2월9일자), 가디언(2월28일자)에 칼럼을 기고했다. 3월 3일 TED의 국제 큐레이터인 브루노 지우사니와의 대담에서는 국가간 갈등의 근본적인 양상 변화를 경고한다.

유발 하라리 TED 대담 바로가기 (자막있음)

그는 먼저 2차 세계대전 이후 외국의 침공으로 국경이 바뀌거나 특정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진 사례는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국이 개입한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 전쟁이 모두 그랬다. 이란-이라크 간의 전쟁이나 구 소련의 동유럽 개입 또한 그러했다. 국경이 바뀌거나 국가의 소멸은 없었는데 러시아가 의도하는대로 우크라이나가 드네프르 강을 기준으로 동서분단되거나, 친러시아계 주민의 독립공화국 확정으로 우크라이나 영토가 축소되는 경우, 이는 매우 이례적이라는 것이다. 푸틴의 침공은 현대사의 관행을 깨려는 시도라고 지적한다.하라리는 이번 침공의 영향력이 국지적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국방비에 관한 트렌드를 제시한다. 최근 세계 각국의 국방비는 국가 예산의 6.5% 정도이고, 유럽은 이보다 낮은 3% 수준을 유지해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놀라울 정도로 낮은데, 앞으로 이러한 저비용 기조는 깨질 것으로 전망했다. 당장 독일은 러시아의 침공 이후 국방비 2배 증액을 선언했다.이미 많은 언론은 러시아군의 예상밖 부진이 보도된 이후 각국이 재래식 무기나 방공망의 확충 등에 적극 나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최근 호조를 거두고 있는 한국산 자주포의 수출 확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무장 평화’는 19세기 말부터 1차대전 발발 전까지 대영제국과 독일제국간 군비확장과 불안정한 평화의 공존을 묘사한 개념인데 21세기초 미중 패권 경쟁 관계에도 부합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중동이나 동남아시아같은 곳의 국지적 갈등에서도 관련 국가간에 무기 확충 경쟁과 첨예한 대립의 보편화를 예감케 하고 있다.더 심각한 것은 각국이 한정된 예산에서 국방비를 늘리면 교육, 보건, 기후변화 대응 등에 쓰는 예산을 줄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전세계적 국방비 증액 경쟁과 이의 확산은 민생 예산의 축소와 인류의 삶의 질 하락과 같은 말이다.

TED 유럽의 국제 큐레이터인 브루노 지우사니(왼쪽)과 유발 하라리.

▶브루노 지우사니:이번 전쟁으로 전 세계가 고통 받을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라리:예산문제의 충격파 때문이다. 최근 수십년은 평화의 시대였다. 재정지출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럽연합(EU)의 회원국가 평균 국방비는 예산의 3%이고 전 세계를 기준으로 하면 6% 수준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보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독일이 국방예산 2배 증액을 결정했다. 현실에 비추어 보면 합리적 결정이지만, 독일, 폴란드가 국방비를 늘리면 다른 나라도 따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보건, 교육,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예산이 탱크와 미사일에 쓰이고, 호주 또는 브라질 국민도 이번 전쟁으로 인한 파장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전 세계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단 한 사람이 만들어 낸 재앙

하라리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시각과 달리, 전쟁의 감소는 기적도 아니고 인류의 본성이 변했기 때문도 아니며 인류가 더 나은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정글의 법칙이 국제관계를 장기간 지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불가피한 본성이 아니라 인류가 과거에 그런 선택을 했었다는 의미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라리:인류가 나쁜 결정을 하고 평화를 유지했던 장치를 파괴하면 전쟁의 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나 또는 스티븐 핑커 같은 학자가 평화의 시대를 얘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안일한 태도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 쪽 책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언제나 정글의 시대였다고 하면 평화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인가? 푸틴 같은 리더가 책임을 져야 할 일도 없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그를 비판할 이유도 없다는 것인가? 전쟁이 자연법칙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전쟁을 줄일 수 있다고 하면 그에 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자연재해가 아니다. 사람이, 그것도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낸 인재(人災)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피의 역사, 동유럽 쟁탈전

그렇다면 국제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계 각국의 지식인들이 입을 열게 만들었는데 유발 하라리와 언론인 앤 애플바움(Anne Applebaum), 예일대 역사학과 티머시 스나이더(Timothy Snyder) 교수의 대담은 평화를 위한 전세계적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크라이나의 억만장자 빅토르 핀추크가 설립한 빅토르 핀추크 재단 주최 대담에서 애플바움은 강대국이 아닌 나라를 체스판의 말쯤으로 여기는 국제정치적 이해는 잘못된 견해라고 강력 반대한다. 그는 관련 국가의 대응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단순히 전쟁을 없애거나 막는게 인류의 목적이 아니며 독재에 맞서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고 얘기한다.

빅토르 핀추크 재단이 주최한 3월 2일 대담에는 예일대 교수 티모시 스나이더, 유발 하라리, 우크라이나 의원 이고르 체르네프가 참여하고 미국의 언론인 앤 애플바움이 진행을 맡았다.

빅토르 핀추크 재단 주최 3인 대담 바로가기

스나이더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유럽 국가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하며, 냉전 승리와 공산주의 붕괴는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않고, 자유는 리스크를 감당하며 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이지 국제기구 같은 장치의 당연한 결과물은 아니라고 주장한다.애플바움은 <워싱턴포스트>, <애틀랜틱> 등의 매체에서 동유럽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어왔고, 스나이더는 최근 한국에도 소개된 저서 <피에 젖은 땅>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동유럽의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한 히틀러와 스탈린의 식민지 쟁탈전이라는 관점에서 2차 세계대전을 설명했다. 한마디로 침공에 대한 서방국가의 적극적 대응을 주장하며, 직접 개입을 꺼리는 이들 국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국민적 저항이 힘의 시나리오를 주저앉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당초 예상과 다른 시나리오로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군은 현재로서 지지부진하다. 주된 이유는 서방국가의 제재 또는 개입이 아니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국민의 결단과 행동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를 포함해 대담에 참여한 세 사람은 우크라이나 국민이 제정 러시아, 구 소련의 독재를 겪은 이후 민주주의를 선택했고 2004년 및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내부혁명을 거치며 국민의식을 형성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애플바움은 이를 단일민족 기반의 민족주의가 아닌 ‘시민적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라고 표현한다.사태의 장기화는 우크라이나 나라 자체에도 전과 다른 해석을 낳고 있다. 이 나라가 가진 고유함, 오랜 독자적 역사, 강력한 국민의식이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또한 자국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나라의 독립마저 부정하는 초강대국에 맞서 우크라이나가 승리하길 바라는 많은 세계 시민들로부터 성원을 받는 원인이다. 과연 하라리와 같은 평화론자들과 세계시민의 결합이 독재자의 권력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될지 결과가 주목된다.


글쓴이 유정훈은변호사(한국 및 미국 뉴욕 주). 2011년 버락 오바마에 맞설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시점에 미국 연수를 하며 미국 정치·선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페이스북에서 꾸준히 미국 정치와 법에 관한 ‘덕질’을 계속하고 있다. 메디치미디어가 출간한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각종 언론매체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