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이 이룩한 위대한 진보의 시간은 이미 끝나

IMF 이후 장년은 노조 통해서 좋은 일자리 지키고,

청년은 비정규직, 알바 등 부스러기 노동으로 밀려

임금, 고용, 노동에 대해 청년과 장년 간 사회적 협약 긴요

 

“내 청춘을 팔아 그들의 마음을 산다.”

어느 날, 다니는 학교 앞에 포스터가 하나 붙었습니다. 청년들의 해외봉사 활동을 장려하려고 기획한 것입니다. 학생들 반응은 대부분 코웃음, 한마디로 물정 모르는 광고 카피입니다. 분명히 ‘아저씨’가 작성했을 겁니다. ‘청춘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쓴 게 틀림없습니다.

“젊어서 고생하면 늙어서도 고생한다.”

학생들 반응입니다. 한국은 이제 ‘인생역전이 불가능한 나라’입니다. 청년들은 ‘희망 난민(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표현)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현재를 팔아 미래를 살 수 있는 ‘희망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고, 지금은 현재의 희생을 대가로 앞날의 기댓값을 말하는 것이 착취의 증거로 확연하게 전락한 ‘희망 고문의 시대’입니다. 한 베스트셀러 책 제목은 청년들의 기분을 정확히 전달합니다. “보람 따윈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

장년층은 ‘꿈이 없다’ ‘진정성이 없다’고 청년층을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건 아주 어렵습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의 말처럼,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편향의 동물’이니까요. 인간의 편향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 ‘지속의 편향’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살아온 그대로 앞날도 이어지리라고 믿는 겁니다. 『미래의 충격』(1970)에서 앨빈 토플러는 이러한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간에 격렬한 단절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이 때문에 학습(정보)이 경험을 압도하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과거의 연속선 위에서 미래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단절과 충격으로‘만’ 출현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대량실업 유발자인 인공지능까지 등장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나날이 이 사실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여러 의미에서, ‘늙은 대한민국’은 ‘젊은 대한민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장년 세대의 성공확증편향 버려야 문제해결 시작

 

장년층 이상 세대는 ‘위대한 진보’의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산업화든, 민주화든 삶이 나날이 좋아지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경제는 갈수록 발전하고, 정치는 갈수록 민주화되었습니다. 진보의 세상에서는 시간을 아끼고 노력을 더하면, ‘삶의 질’은 무조건 높아집니다. 지금 이 순간 착취당하고 희생되더라도 미래가 축복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을의 시간’을 견딜 수 있습니다. ‘인권이 없는 직장’, 즉 ‘갑을 노동의 사회’도 참을 수 있습니다. 선배가 후배의 일상을 사사건건 참견하는 ‘꼰대의 세상’도 견딜 수 있습니다. 언젠간 갑이 되고 꼰대가 될 테니까요. 이것이 장년층 대부분의 인생 감각입니다. 국가, 사회, 기업 등 대한민국의 모든 정책과 담론은 ‘진보의 담론’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좌든, 우든, 민주화 세력이든, 산업화 세력이든 똑같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노동의 구조가 ‘정년제도’와 ‘연공서열제’이고, 종잣돈 마련 수단으로는 ‘적금’과 ‘곗돈’이며, 은퇴 후의 삶에는 ‘퇴직금’과 ‘연금’입니다. ‘부동산’도 있겠네요. 그동안 사기만 하면 올랐으니까요.

장년세대 이상은 대부분 번듯한 직장에 취직만 하면 죽을 때까지 삶의 모든 구조가 정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연봉은 오르고 직급도 서서히 높아져 무일푼으로 시작하더라도 누구나 중산층의 삶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정부의 청년정책도 ‘취업률’ 중심으로, 즉 청년의 취직을 유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나머지 문제는 ‘산업정책’을 통해 해소되리라 기대했습니다. 취직을 시킨 다음에는 개인의 삶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자녀 학자금이 있으니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았고, 직원 상조회가 있으니 질병 등으로 인한 일시적 어려움도 정책의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혹여 기업이 파산하거나 해고되어 일자리를 잃더라도, 개인적 불운이나 능력의 문제로 생각하면 그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축적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면서 절약한 돈을 은행에 맡겨도 더 이상 재산이 늘지 않습니다. 물가 상승률보다 낮은 금리 탓에 은행에 돈을 오래 맡길수록 돈의 실질가치가 줄어듭니다. 예금이나 적금은 금융자본의 ‘보이지 않는 손’에 축적한 재산을 서서히 빼앗기는, 확실히 돈을 잃는 투자가 되었습니다. 재테크에 관심 있는 청년 세대가 주식으로, 또 비트코인으로 몰려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축으로는 축적이 불가능하니까요.

 

첫 직장에서 하위 70% 편입되면 평생 역전 불가능

 

장년층 세대에게는 평생직장을 보장받는 것, 즉 정규직이 삶의 정상적 상태일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삶의 질을 확실히 보장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쌍용차 사태 등에서 보듯이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정당합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직 계열화가 공고해진 한국사회에서 보통의 노동자가 복직 없이 중산층 이상의 ‘좋은 삶’을 살아갈 가망성은 거의 없습니다. 식당 등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그나마 모아둔 돈을 까먹기 십상이지요.

그러나 1997년 IMF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따라 반복되는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등의 부담을 누가 떠안았느냐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장년층 세대 노동자들이 강하게 단결된 노조를 통해 자신의 생활을 그나마 보호받는 사이에 신규 노동시장은 대부분 파견노동과 비정규직 등으로 채워졌습니다. 이를 떠안은 주체는 어쩔 수 없는 약자인 ‘청년 세대’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 도서관 등 수많은 공공 직장에서 청년층 대부분은 비정규직, 계약직, 무기계약직 등 온갖 이름으로 차별 노동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주요 대기업을 비롯한 민간 기업의 경우엔 말할 것도 없지요. 심지어 무급인턴 같은 경악할 만한 제도도 있습니다. 그사이 ‘평생직장’이라는 환상은 거의 소멸했습니다. 청년들은 더 이상 이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주장합니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 이처럼 직장에 별다른 기대가 없으니까, 정년보장이 아니라 차라리 노동유연화에 대응하는 북유럽 수준의 복지정책을 요구합니다. 요즈음 자주 논의되는 기본소득도 한 방법이죠.)

지난 스무 해 동안 ‘유연한’ 노동구조는 너무나 심화되었기에, 바로잡는 것도 장년세대의 편향을 좇아 관념적으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싫든 좋든 이미 대한민국 현실의 일부가 되었으니까요. 가령, 현 정부에서 공공 도서관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을 집행하자 현장에서 우려가 터져 나왔습니다. 정해진 예산과 정책에 따라 필수인력은 정규직으로, 보조인력은 계약직으로 나름대로 운영해 왔는데, 보조인력을 갑자기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어떻게 될까요. 도서관에 할당된 정규직 인원 자체를 늘려주고 예산도 충분히 주지 않으면, 사서 등 필수인력을 적어도 몇 년간 충분히 선발할 수 없게 됩니다. 저출생에 따른 인구절벽 등으로 서비스 인원이 점차 줄어드는 현실을 고려하면 미래는 어둡습니다. 학교 등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전체 인원을 급격히 늘리는 변동은 국가회계 구조상 ‘초당적 정치적 결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신규로 사회에 진입하는 청년세대 입장에서 보면, 정년이 보장되는 데다 연공서열과 직급호봉으로 운영되는 ‘신의 직장’에 들어갈 확률이 완전히 희박해집니다. ‘취업 절벽’이 닥쳐올 게 빤하니, 교대 학생 등이 반발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대책 없는 혁신성장, 청년에 최악 일자리 가져올 수

 

이전 세대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일에, 이후 세대의 삶을 동원하는 구조가 여전히 반복되는 중입니다. 문제는 위대한 진보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현재의 청년 세대도 위기를 맞을 때마다 미래의 청년 세대를 호출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청년 세대 중에서 이러한 미래전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공기업을 비롯해서 주요 공공기관의 취업이 실력이 아니라 금수저들 놀음이라는 공공연한 소문이 청탁 비리 등으로 명백한 현실로 폭로된 상황에서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의 직장’ 말고 좋은 중소기업도 많이 있지 않느냐, 일단 직장에 들어가 미래를 꿈꾸어 볼 수도 있지 않느냐, 풍요한 세대를 살아와서인지 요즘 청년들은 너무 도전의식이 없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장년세대도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거죠. 이해합니다. ‘경험의 편향’을 극복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니까요. CPU가 이미 구식이 되어 버린 586세대 중에는 아직 ‘1% 대 99%’라는 청년 시절의 세계관을 지속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 주변에, 특히 선배들 중에 많습니다. 청년 시절에 형성된 세계관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래서 1%의 문제를 해결하면 나머지 99%의 삶의 질은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어느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든, 큰 실수가 없었다면 죽는소리를 해도 생활이 전반적으로 나아진 것이 사실이니,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실은 지난 스무 해 동안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론을 현실에 맞추어야지, 현실을 이론에 맞출 수는 없습니다.

죽도록 열심히 일하고 아무리 아껴 쓰고 저축해도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문턱이 생겼습니다. 사회 곳곳에 넘나들 수 없는 칸막이가 놓였습니다. 1%에 속하는 소수에게 점차 부가 집중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 경로로 증명된 것이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바로 아래쪽에 있는 대기업이나 공기업 직원의 소득을 1차 납품업체 또는 우량 중소기업들 직원의 소득이 도저히 따라잡지 못합니다. 격차가 이미 너무 큰 데다, 경직적 수직계열화 때문에 도저히 역전이 불가능합니다. 전체 근로소득자의 30%에 속하는 여기까지는 중산층 정도의 삶을 누릴 수 있으니까, 그나마 사정이 괜찮습니다. 문제는 임시직, 파견직, 비정규직, 계약직 등으로 이루어진 하위 70%의 소득입니다. 이들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로또에 당첨되는 등의 기적이 일어나거나 일자리를 상위 직장으로 옮기지 않는 한, ‘삶의 질’이 절대로 개선되지 않습니다. ‘노동유연성’의 직접적 피해자들인 청년세대는 대부분 이 구간에 속합니다. 주변에 정규직으로 인생을 시작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줄었는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단 눈을 낮추고 취직’하면, 그대로 삶이 고착화됩니다.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부모 돈을 이용해서 미래를 모색하는 쪽이 낫습니다.

 

 

국문과 사학과 철학과도 없는 대학,

인문학 모르는 대졸자들로 세계시장 선도자될 수 없어

 

이것이 “젊어서 고생하면 늙어서도 고생한다.”는 말의 실감입니다. 아무 직장에서 일을 시작해도, 결국 집을 사고 차도 사면서 사다리를 조금씩 올라 중산층이 될 기회가 생겼던 과거는 사라졌습니다. 주거 문제가 무엇보다 심각하지만,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린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사회생활의 첫 출발점이 다를 경우, 상위소득 구간에 오르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비정규직으로 일을 시작하면 정규직으로 ‘저절로’ 옮겨가는 것은 기적입니다. 현재 공기업 등에서 정규직 전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무기 계약직이 고작입니다. 이들은 4대 보험 등 혜택을 받더라도 연봉은 거의 오르지 않으니까 평생 낮은 임금 구간을 전전할 가망이 높습니다. 청년들은 단순히 ‘취업’만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자리가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차라리 창업을 택할 수 있도록, 그리고 도전에 실패해도 몇 번이고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충분한 사회보장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취업률을 지표로 삼아 대학을 압박하는 일은 청년들 입장에서는 별로 와 닿지 않는 정책입니다. (제가 다니는 대학에는 국문과도, 사학과도, 철학과도 없습니다. 취업률만을 지표로 삼으니 하나둘 다른 학과와 통폐합해서 사라졌습니다. 학과가 없으니 당연히 관련 교양과목의 개설도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은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어도 정식 학교 과정에서는 다양하게 배울 길이 막혔습니다. ‘빠른 추적자’에서 ‘시장 선도자’로 올라서려면 ‘인문과 기술의 만남’이 중요한 시대라고 입으로 백날 이야기해도 소용없습니다. 인문적 지혜를 갖춘 청년들을 배출할 현실적 수단이 없으니까요.)

이러한 현실을 염두에 둘 때, 정부에서 혁신성장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혁신을 주도할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을 발굴하고 지원하며 청년 창업 등을 부추겨서 새로운 경제 현실을 창출하지 않으면 앞날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상호출자를 통해서 국가 기간산업을 과점한 것은 물론이고 세습의 영역을 합법적/불법적으로 확보하려고 내부자 거래를 통한 일감 몰아주기를 서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과점, 김밥집에 이르는 서민적 삶의 전 영역에 진출해 푼돈까지 싹쓸이하는 재벌체제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에는 혹여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위대한 진보의 시대’가 끝난 현재의 상황에서는 인재와 자원을 독점함으로써 새로운 도전을 가로막고 불평등, 불공정한 구조를 심화하는 동시에 한 기업의 위기가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지는 파행을 공공연하게 저지르고 있으니까요. 전 세계적으로 정보화로 인한 ‘파괴적 혁신’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봉건적’ 기업 집단의 최적화는 국가 전체의 미래를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보입니다.

 

청년이 참여 가능한 지식노동부터 국가가 제값 지급해야

 

따라서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으로 자본과 인재가 들어설 수 있도록 하는 각종 정책을 구사함으로써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도록 산업 혁신의 긴장도를 높이는 것은 중요한 정책적 전환입니다. 문제는 제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의 스마트화, 즉 자동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혁신성장 정책은 자칫하면 대규모 일자리의 소멸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지능을 기계지능이 대신하고 인간노동을 기계노동이 대체하는 노동 증발의 가속화를 가져옵니다. 혁신성장을 추진하면서 단기적으로(어쩌면 장기적으로도) 실업률을 낮추려는 것은 모순입니다. ‘인간 없는 노동’이 급진화하면서 조직적 공장 노동이나 단순 사무 노동 같은 대량의 일자리들은 확실히 사라집니다. 종래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자리들도 꾸준히 생겨나지만, 현재까지 볼 때는 주로 소수의 고급 인력이 프로젝트 단위로 일시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고도화된 창조 노동(로펌 같은 법률 서비스 산업이나 연예 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을 떠올리면 좋습니다)이거나 자동화할 만한 가치가 없는 ‘부스러기 노동’이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노동들로는 현재 시민사회의 근간인 대규모 중산층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대규모 평균노동이 소규모 창조노동들로 바뀌니까요.

현재의 청년들이 미래가 불안한 기업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미래가 확실한 ‘공시생’이 되려고 하거나, 장래희망 1위가 연예인 또는 유튜브 크리에이터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현재와 같이 혁신성장에서 실업문제를 함께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정보의 법칙에 따라 다가올 미래의 구조가 정해져 있으니까요. 혁신성장은 그 자체로 일자리를 파괴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추진되어선 안 되고, 반드시 독일의 노동 4.0 정책과 같이 “노동 없는 사회를 생각하지 않는다” “완전고용 상태로 좋은 노동을 제공한다.” 같은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특히, 현재 빠르게 늘어나는 창조적 크리에이터(서비스사업자)의 기초 생활을 보장하는 정책으로 (최저임금과 마찬가지로) 자문, 상담, 기고, 공연, 강연 등에 대한 최저 서비스요금을 해마다 설정하는 등 정당한 노동권을 확보해 주는 한편, 질병이나 미수주 등 일시적 실업 상태에 대한 사회 보장을 설계해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년간 국가기관 등에 자문, 강연, 기고 등을 다녀본 결과, 해마다 최저 임금은 올라가지만, 기본 서비스 요금의 기준표가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서비스 산업의 최저 단가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특히, 혁신성장에 따른 실업의 부담을 처음부터 떠안을 청년세대와 사회 협약은 필수적입니다.

 

국회와 정부기관 통해 청년에게 의사결정권 나눠줄 때

 

그런데 현재 장년 세대 이상은 이러한 각종 사회 협약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현재 국회의원 당선자 중 30대는 9명(3%)에 지나지 않습니다. 숫자도 적을 뿐 아니라 초선 의원이 대부분이므로 발언권도 아주 약합니다. 장관이나 차관 중엔 청년이 한 명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정부정책을 결정하는 주요 위원회에 청년의 참여 비율도 아주 낮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성세대와 다른 미래를 모색해야 하는 청년들 입장이 정책에 반영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앞으로 고령사회에 접어들면, 숫자가 적은 청년들로서는 아주 불리해집니다. 무엇보다 청년실업대책 등 각종 청년정책을 50대 이후 장년층 이상이 주도하는 구조부터 손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보듯, 많은 경우, 이들의 정책은 청년들의 현실적 고민을 반영하기보다는 자신의 옛 경험에 근거를 두고 여전히 청년을 미래의 희생양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청년들이 스스로 자신들과 관련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대통령 직속의 ‘청년정책위원회’ 같은 것을 두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연금 개혁 등 청년들의 삶에 영향을 줄 만한 정책을 시행할 때마다 청년들과 사회협약을 거치도록 의무화해야 합니다. 이를 정치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실질적 구조를 만들기 위해, 한 해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35세 이하의 청년들에게 일정 비율(최소 20% 이상)로 공천을 주는 ‘청년 할당제’를 도입했으면 합니다. 특히, 비례대표의 경우, 3인 중 1인을 반드시 청년으로 하는 파격적 정책 전환이 필요합니다. 장년과 청년이 함께 잘 사는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는 이제 낡은 삶의 감각으로는 어렵습니다. 청년들의 현실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확고한 정책 전환의 의지 없이 청년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으로는 세대 전쟁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장은수/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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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청춘의 가격

 

피렌체의 식탁 독자들에게 청년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책을 몇 권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승윤 외의 『한국의 불안정 노동』은 저숙련, 비정규직 위주로 확장되는 서비스 부문의 노동 수요를 주로 여성, 노인, 청년 등 노동시장 취약계층이 떠맡으면서, ‘부스러기 노동’으로 인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한의 『중간착취자의 나라』(미지북스)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도입된 비정규직 등 간접노동의 현실을 고발하고, 왜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하는지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연구원의 『청춘의 가격』(사계절)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가난해진 청년들의 삶을 소개하고, 그들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주희의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사이행성)는 대학진학률 70% 시대에 학자금 대출 때문에 연애도, 취업도, 꿈도 유예된 삶을 살아야 하는 청년들의 참혹한 현실을 다루면서 공부하는 데 빚을 지지 않을 권리를 주장합니다. 조문영 외의 『헬조선, 인 앤 아웃』(눌민)은 소득이 불평등하고, 근로조건이 열악하며, 삶의 여유가 없고, “아재들의 꼰대질”로 가득하고, 스펙을 아무리 쌓아도 취업이 되지 않고, 태어난 신분으로 미래가 결정되고, 아무도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고, 생존 경쟁의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한민국을 떠나서, 요컨대 “한국이 싫어서” 글로벌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려는 청년들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입니다. 후루이치 요시노리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민음사)은 사회 변화의 희생양이 된 청년들이 장년세대 등이 말하는 열정노동의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즉 출세를 거부한 채 차라리 사소한 행복에 몰두하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반면교사로 삼을 만합니다. 미야 도쿠미츠의 『열정 절벽』(와이즈베리)는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충고에 숨겨진 사회적 허위를 고발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빚을 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상위 30% 이상의 자녀들뿐입니다. 나머지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 처음부터 빚을 질 수밖에 없으므로 실패 확률도 높고 오히려 가난해질 뿐입니다. 부모의 돈 말고, 실패에 대한 별다른 구제책이 없는 한국 현실에서는 무섭기도 합니다. 혁신성장을 부르짖어도, 청년들이 창업에 나서는 대신 ‘공시생’에 매달리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조금이나마 청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