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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칼럼] 차세대의 거인으로 도약할 것인가, 경제 동물로 전락할 것인가?

By | 2022년 2월 8일 | 미분류, 사람

이제 한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조류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 대중 문화의 경쟁력, 첨단 산업에 대한 자부심은 더 이상 국뽕이라 치부하기에 너무나 크고 실재하는 하나의 힘이다. 해방과 분단, 전쟁, 산업화를 겪으며 온 국민이 쉬지 않고 뛰어 온 결과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은 ‘우리가 이 만큼 해냈다’라는 위안이 아니라, ‘이 만큼 해 내는 동안 무엇을 놓쳤는가’ 라는 질문일 것이다. 통계로 세상을 읽는 남자, 아르스 프락시아 김도훈 대표가 두 번째 칼럼에서 이 문제를 짚어 보았다. [편집자 주]

✔ 지구 곳곳의 문화 지도를 새로이 그리는 한국의 현대 문화

✔ 성장의 동력은 미국을 능가하는 자본주의적 에너지와 일본인도 놀라는 집요함

✔ 경쟁과 발전에 몰입하는 동안 방치된 바람직한 인간상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절실

✔ 이제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할 책임과 능력을 함께 지닌 한국 사회

사진:셔터스톡

 

세계무대에 당당히 섰다는 코스모폴리탄의 환상

우연히 돌아본 한국엔 사랑이 꽃 피었다. 최근 공개된 해외문화홍보원의 <2021년 국가 이미지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의 한국에 대한 국가 이미지는 긍정 평가가 80.5%로 전년도보다 2.4% 상승했다. 24개국 12,500명이 온라인 조사에 응답한 긍정 이미지 요인은 현대 문화 22.9%, 제품·브랜드 13.2%, 경제 수준 10.2%, 문화유산 9.5% 등의 순이었다.

기초통계를 보면([그림 1]), 현대문화, 제품·브랜드, 경제 수준 순으로 긍정률이 도드라지고, 정치 상황, 국민성, 국제적 위상 순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높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일견 ‘80~90년대 경제적으로 발흥하던 시기 일본에 대해 세계인들이 가졌던 기대와 환상이 한국으로 넘어온 듯하다. 작금의 현상은, 일찍이 앨리스 암스덴(Alice Amsden, 1944-2012)이 ‘아시아의 다음 거인’(Asia’s Next Giant)으로 지목했던 한국이 경제적 성공을 거두면서 맞이한 ‘두 번째 일본’의 자연스러운 결실일까? 보다 단순히 묻고 싶다. 과연 그게 다일까?

[그림 1] 자료 제공: 해외문화 홍보원

전 지구상의 신세대에게 기대와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한국 ‘현대 문화’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문화는 어떠한 내용과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 <K를 말한다>의 저자 임명묵은 한류 문화가 새로운 성적 정체성, 팬덤의 조직화, 불평등에 대한 저항과 같은 혁명성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한류가 중국, 터키, 미얀마 등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고, 한류에 반대하는 신성동맹마저 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2021년 10월 21일자 임명묵 칼럼, ‘세계는 왜 K를 두려워 하는가?’ )

아마 세계 곳곳의 현실은 보다 각양 각색이겠지만, 일단 그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진실을 비추는 것 같다.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멋지고 다정한 ‘오빠’(남성)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세련되고 매력적인 여성 역시 그러했다. 서구 남성의 자신감 있는 공격성이 배제된 듯한 화장 한 한국 남자 배우의 사진을 힐끗 보곤 ‘변태스럽다’(kinky)고 비웃던 유럽 여자의 오만한 시선도 변화해갔다.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아버지 세대의 폭력성과 열등감을 벗어 던진 아들들이 서구 남성보다 부드럽고 다정하면서도 똑똑한 매력을 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게 ‘스위트 파워’(Cicchelli and Octobre, 2021)는 서구 세계가 추동해 온 현실주의(realpolitik)에도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 왔다.

문화연구자 홍석경은 한류가 표상하는 상징이 백인 남성의 지배적 문화 코드로 점철된 서구 사회의 헤게모니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했고, 아미(army)와 같은 전 지구적 팬덤이 결집하여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와 같은 반인종주의 운동을 지원하거나 반트럼프 주의 활동을 조직화했다(홍석경, 2020)’고 기술한다. 필자는 1992년 LA 폭동 때 상점이 불탄 한국인 교포들이 아버지 부시 대통령 앞에서 항의하는 모습을 서구의 엘리트들이 자못 떫은 표정으로 냉랭하게 지켜보던 시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런 면에서 지혜롭고 활기찬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고, 한국의 케이팝이 뉴욕의 타임 스퀘어에서 울려 퍼지는 모습은 발전된 코스모폴리탄의 구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선의 치장을 걷어내고, 더욱 평균적인 한국인들의 내밀한 모습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인간성의 고양을 놓친 사회 담론

지난 수십 년간 한류 콘텐츠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개발도상국 대중의 부에 대한 열망과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마중물의 역할도 했다. 그런 면에서, 수년 전 중국에서 방영한 드라마 <별에서 온 상속자들>은 촌스럽고 생경하기보단 꾸밈없는 아시아적 욕망의 스냅숏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근래의 한국인들은 종종 중국인의 속물근성과 졸부 문화를 ‘촌스럽다’고 비웃지만, 그런 태도는 자기 객관화가 얼마나 힘든 것이고, 가장 닮아 있는 이들이 서로를 얼마나 혐오하기 쉬운 지에 대한 사회인류학적 진실을 드러내는 예로 비친다.

한국인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이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평소 한국 사회에서 달갑게 받아들여질 콘텐츠가 아니라는 것을. 그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은 기표들이 외부 세계의 인정과 작품성의 외피를 썼을 때야 비로소 평론가들과 지식인들에게 상찬의 테이블이 마련된다. 글로벌 양극화의 문제를 한국인들이 심도 깊게 고민하고 예술적으로 담론화 했다면서. 현실은 더 즉자적이다. 양극화와 탐욕, 무한경쟁과 착취의 가학성이 생생하게 삶에 체화된 시공간이 한국이기에, 스크린에 보여지는 세부 묘사는 지속되는 고통의 자연스러운 서술처럼 사실적이다. 한국 영화가 아직 변방에 머물러 있던 시절, 내 영국인 친구가 유독 <올드보이>에 열광하면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서구 세계의 영화는 아무리 그로테스크한 인간성을 구현하려 해도 인간 본성의 어둡고 잔인한 밑바닥을 올드보이 만큼 뼛속 깊이 사실적으로 체현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경이롭다.”

역사학자 피터 터친(Peter Turchin)은 지난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제국으로 성장하는 국가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서로 다른 문명이 충돌하는 경계에 위치한 나라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뎌내면서 결속력을 발휘하는 데 성공한 경우가 그러한데, 이는 국가뿐만 아니라 조직, 개인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분석인 듯하다. 한국의 경우 해방 이후 분단 현실 속에서 군사적 대립과 이데올로기 경쟁, 산업화와 민주화를 겪는 과정 에서 조직과 개인을 관리하고 훈육하는 거버넌스가 치밀해졌다. 개인은 생존과 성공을 위한 무한경쟁의 가치관이 내면화된 가운데, IMF 경제 위기 이후에는 각자도생, 적자생존의 환경 속에서 영혼의 타다 남은 한 방울까지 태우며 비교 대상으로부터 낙오되지 않기 위해 내달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새 한국인들이 만들어내는 제품과 서비스는 철저하다 못해 지독하다는 느낌마저 드는데, 한류 콘텐츠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각도 엇비슷한 것 같다. 2022년 외교부의 보고서 <빅데이터에 기반한 해외 대중의 한국 문화 콘텐츠 선호도 분석>을 보면, 북미 지역은 한국 콘텐츠의 다이내믹함과 치밀한 플롯에 주목하고, 옆 나라 일본은 한국 예술인들의 극한에 가까운 노력과 기술, 센스와 엘레강스를 높이 평가한다([그림 2], [그림3]). 각 문화권의 가치관이 투영된 평가이겠지만, 근래 한국인의 자본주의적 에너지와 욕망(탐욕)은 미국인을 넘어서고, 최대한의 노력을 쥐어 짜내는 집요함은 일본인을 능가하고 있다. 극한의 생존 적응을 통해 형성되어 온 인간 주체의 특성이 국가적 성공을 이해하는 요인은 되겠지만, 질문이 남는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이들도 좋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림2] 아르스 프락시아 제공

[그림3] 아르스 프락시아 제공

이대로 차세대 경제 동물로 등극할 것인가

내부의 결속과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바람직한 인간상은 무엇이고, 그 구현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한국 정치와 공론의 장에서 오래도록 방기되어 왔다. 필자는 90년대의 학부 시절 영화 <타이타닉>을 봤는데, 배의 승무원들이 승객을 살리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희생과 헌신을 하는 장면을 두고 운동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선배들이 ‘미 제국주의의 서구 미화’라고 폄하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실화는,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구명정에 탈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승객을 구조하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바이올리니스트 윌리스 하틀리는 배의 침몰 10분 전까지 바이올린을 연주하다 나중에 바이올린과 함께 시신이 발견되었다. 백만장자이자 철강업자인 벤저민 구겐하임은 현지처인 가수와 하녀를 구명정에 태운 후 자신을 따르겠다는 비서와 함께 브랜디와 시가를 즐기며 ‘신사답게 죽겠다’는 자기 말을 지켰다. 부동산 업자이자 최고의 부자 중 하나였던 존 제이콥은 자신의 자리를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고, 메이시 백화점 소유주인 스트라우스 부부는 하녀를 구명정에 태운 후 부부가 함께 조용히 최후를 맞이했다. 인류학자 브루노 라투어(Bruno Latour)는 서구인이 역사 속에서 온전히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We Have Never Been Modern)고 지적하는데, 한때 서구 사회가 함양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중세의 기사도, 부르주아지의 자기 규율과 고상함에 대한 의지, 시민사회의 견제와 기독교적 공동체주의가 복합적으로 선순환 관계를 이뤘을 때 발현되었던 사회적 표상(social representation)에 가까워 보인다.

그간 한국인들은 기득권을 비판하고, 부를 축적하거나 상대방을 타도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몇 번의 정권 교체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와 인간상은 보다 팍팍해졌다. 한창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7·80년대의 일본인들이 서구인들로부터 종종 ‘경제 동물’(economic animal)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지만, 작금의 욕심 많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한국인이 조만간 세계인들에게 어떤 명칭으로 불리게 될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이 수출한 한류 콘텐츠들의 인물들은 ‘멋지고 달달한 오빠’가 아니면 ‘처절한 좀비’, 현실과 지옥의 어느 중간선에서 고통받는 실제 사람들의 모습인 경우가 많다. 예술과 엔터테인먼트는 진실을 판타지로 포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이다.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정의하고, 구조적인 도전에 맞서면서 대안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은 한결 더 지난하다.

사진: 셔터스톡

한국인에겐 인간성 회복의 보편화를 위해 노력할 책임과 역량이 있다

이제 한국인은 겉으로 치장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슬픈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 피해자 심리상담을 해 본 사회봉사자들은 말한다. 피해자성을 강조하고 속류화된 정체성 정치에 함몰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다면적인 현실은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것들을 오롯이 타자에게 반복해서 전가하는 가해자가 되기 쉬움을 드러낸다. 그래서 사회 구성원들의 강자와 약자에 대한 전형적인 태도, 강자와 약자가 퍼블릭 마인드(public mind)를 함양한 채 공생할 수 있도록 짜인 견제와 조정의 시스템은 그 사회와 문명의 수준을 가늠하는 좋은 바로미터가 된다.

제국주의 시절에 세워진 빗나간 우생학과 적자생존의 독트린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강고하다. 지난 수년간, 그 우생학과 적자생존의 시스템은 ‘공정’이라는 미사여구로 윤색되었다. 그러나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능력주의’의 전형적인 태도와 믿음 체계에는 한계가 명백하다. 더구나 편협하게 닫힌 시스템 내에서의 순응과 경쟁게임에 최적화된 주체들이 어떠한 정치·사회적 위험을 초래하는지에 대해서는 문제의 정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장 무지한 오만이 심판을 받지 않고, 외국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조장이 분열을 통해 정치적 이득을 얻는다면 그런 국가와 사회가 치달을 행보는 명백하다.

근현대사 속에서 한국이 겪은 피해와 트라우마는 인간이라는 종이 얼마나 약한 동시에 잔인할 수 있는지를 일깨운다. 우리 모두 그러할 수 있음을 알았으니, 특정 국가와 국민을 비난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오늘날의 한국인은 우리가 겪은 고통과 슬픔이 향후의 역사에서 반복되지 않고, 글로벌 차원에서 확산되지 않도록 노력할 책임과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 과업을 여러 방면에서 실천하는 이들이 새로운 정치 사회적 주체가 되고, 대안적인 정체성과 시대정신의 지평을 열도록 응원하고 견제하는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향후의 국가적 어젠다가 되기를 소망한다. 철학을 갖춘 정치적 리더십과 고매한 사회사상가의 출현을 보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할까. ‘어떻게든 우린 다시 사랑해야 하니까’.


글쓴이 김도훈은
사회학을 공부한 학자이자 데이터 전문가이다. 데이터를 분석하지만 그는 숫자와 도표 안에서 시민을 읽는다. 데이터 분석 자체를 사람을 이해하는 실용적인 예술이라는 생각에 회사 이름도 라틴어로 이를 뜻하는 ‘아르스 프락시아’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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