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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지역원’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By | 2018년 10월 17일 | 정책

해외 지식정보를 신속 수입, 무료배포할 필요

지역분석실, ·번역실의 2, 1천명 규모 구성

국가전략과 이정표를 고도화하는 필수기관

학계의 번역청구상보다 판 키우자

 

번역청을 설립하라(박상익 지음, 유유 펴냄, 2018)

문재인 정부 들어, 국민들과의 직접적 소통 방식의 하나로 손꼽히는 청와대 청원에는 유의미하고 흥미로운 주장들이 많다. 그중에 나의 관심을 끈 청원이 하나 있다. 박상익 우석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가 제기한 ‘번역청을 허하라’란 도발적 청원(청와대 ‘국민소통광장’ 홈페이지)이다. 사회적으로 여러모로 유의미한 청원이라 생각했는데, 박 교수의 논지는 이렇다.

‘학계에서 번역에 대한 관심사를 갖지 않는다. 글로벌을 학계에서 외치다 보니, 외국 저널에 얼마나 글을 실었는가가 중요할 뿐, 국내 저널 내지는 외국어 논문·저널의 국내 번역에 대한 관심사는 극히 낮다. 반면 다수의 대중을 위하여 외국어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해 소개하려는 수요는 많지만, 체계적으로 이를 다루는 기관은 없다. ‘문학번역원’, ‘고전번역원’과 같이 국내의 문학이나 고전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외국에 소개하려는 기관만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전세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수요를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은 부족하다. 우리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다양하게 하기 위해서 번역청 내지는 국립번역원의 설립이 절실하다.’

나는 이 논지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외국어 저널을 통한 다방면의 정책 아이디어 발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터라 박 교수 주장이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조금 더 판을 키우면 사회경제적으로도 여러 측면에서 실용성과 파급력이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부종합청사보다 정보종합창구가 필요한 세상

현재도 외교부, 국정원을 필두로 한 정부 부처, 코트라, 무역진흥공사 같은 공기업, 여러 대학의 지역학 연구소들에서 이 기능을 일부 담당하고 있으나 생산이 제한적이고 소비가 폐쇄적이다. 이에 나는 박 교수 주장을 기초로 조금 더 확장된 시각에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제안해보고자 한다. <국립 지역원>이라는 기관을 설립하면 어떨까 한다. 내가 생각하는 국립지역원의 정의는 ‘국내적 수요가 있는 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통번역·분석하는 정부 내지는 준정부기관’이다. 한 축으로는 대륙 권역별 동향을 분석하여 정책자료를 생산하는 지역분석실(정부기관에 필요한 현안 대응자료, 차별성을 둔 전략 또는 정책의 흐름에 대한 분석이 주된 업무이다), 다른 한 축으로는 지역의 동향 자료(저서, 논문, 신문, 저널) 등을 실시간으로 통번역하거나 정부의 정책수요 또는 민간의 비즈니스 수요를 지원하는 통번역실을 둔다.

‘국립 지역원’ 설치의 이점은 이렇다. 우선, 대한민국의 전략과 이정표 설정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1960년대 이후 가파른 고도의 성장을 거쳐왔지만, 우리의 안과 밖을 정교하게 관찰하고 이를 경제사회정책에 반영하려는 노력은 부족했다. 우리의 주된 전략은 ‘수출을 기반으로 한 고도의 경제성장’과 ‘반공주의’를 근간으로 한 국내외 대외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전세계의 다양한 사회적 변화를 섭렵하여 우리의 것으로 변통하려는 노력보다는 필요한 때 개별적으로 부분을 수입할 뿐이었다. 밖으로 반도체를 팔고 한류문화를 수출하는 데는 탁월하였을지는 몰라도, 밖으로부터 전세계의 다양한 사회문화를 우리의 것으로 흡수하는 데에는 미흡했다. 더 크기 위해서는, 더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지식의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밖의 특징적인 것들과 선도적인 것들을 가져와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전략과 이정표의 고도화이다. 그 전제조건은 교류 중인 주요 선진국은 물론 개발도상국의 사회전략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나가는 것이다. 실시간으로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흡수해 나가야 한다. 사회 엘리트 층의 변화는 물론 대중 다수의 저변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큰 전환점을 만들어 내기 어렵다. 대중적인 저변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큰 틀의 변환이 필요하다.

 

 

필요하나 안 팔리는 지식·도서에 국가가 나서야

예로, 필자는 지난 9월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일본 모 신문사의 신문을 읽다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그 신문사는 미-중 무역 전쟁을 1면 탑으로 다루면서, 중국의 미국 내 실리콘 밸리 투자 감소 현상을 지적했다. 미국의 중국 때리기(‘bashing’) 현상이 그 원인이고 이러한 현상이 오래갈 것을 전제하면서, 일본의 대미 틈새 투자전략을 분석해 놓았다. 중국의 투자 틈새를 일본이 메워, 뒤처진 일본의 IT기술투자 혁신을 추구하는 전략을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논리였고 일본 지식계층의 큰 틀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세계 각국의 전략들이 실시간으로 번역되어, 대통령의 아침 보고서로 올라가면 어떠할까? SNS와 미디어를 통해 시민들이 관심사를 늘 볼 수 있다면 어떠할까? 다양한 정보가 축적되고, 대중의 사고의 틀이 커지면서, 큰 사회적 변화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학계나 출판산업 전반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학계에 실시간으로 다양한 언어로 된 학술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면, 학문의 저변과 깊이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산업에 대한 모종의 타개책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시장성은 낮지만, 사회에 유익한 책들도 많다. 하지만, 번역은 물론 출간도 잘 안 된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정보격차를 보완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꼭 필요하고 출판가치가 있는 저작물에 대해선 저작자로부터 저작권을 사들여 저렴한 가격에 보급하고 있다. 만일 국립지역원이 설립되어 이런 내용을 번역하고 출간하는 사업을 확대해나간다면, 다수대중의 지식 저변을 넓히고, 출판업계의 현실을 보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전문 통번역 인력이 출판번역물들의 정확성을 높여나갈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문과 계열 학생들에게 희소식이 될 수 있다. 인문계를 살리겠다며 도입한 HK사업에 대해서는 학계 내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들이 많다. 교원의 임용을 전제로 사업을 지원해 왔으나, 대학별로 사업종료 이후 교원채용 약속을 어기는 경우가 상당하고, 교원에 대한 지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학생들에게까지 수혜가 돌아가지 않으니 그렇다.

국립지역원을 설립해 인문·어문·사회계생의 채용계획을 발표한다면, 학생들은 물론 학교들까지도 지금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 가용한 통번역 인력을 기반으로 향후 1,000명 가까운 대학/대학원생들을 뽑는다면, 정체된 문과 계열 학과들에 새로운 분위기를 불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해외 지식, 정보를 한글 콘텐츠화할 때의 이점들

마지막으로 현 정부의 경제성장의 한 축인 혁신성장에도 큰 도움이 된다. 빅데이터나 AI 산업 발전도 기실을 보면, 정보의 축적 정도에 비례한다. 인터넷 번역프로그램들이 불완전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언어의 구조나 쓰임새는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기계가 이를 100% 대체하기가 어렵다. 정보의 축적량이 많다면 이런 오류를 보완하여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 AI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사람에게 투자해야 AI 산업도 결국 잘할 수 있다.

우리 경제의 핵심이자 9988(기업 수 99%, 고용률 88%를 빗대 사용하는 표현)인 중소기업이나 혁신벤처기업이 해외로 진출하거나 투자를 받을 때도 국립지역원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기업들은 해외에 진출하는 모든 상황에서 큰 어려움을 받는다. 국립지역원이 해외의 투자정보를 비롯한 각종 정보를 계속 축적하여 두었다가, 원스톱 서비스를 기업인들에게 제공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박 교수의 지적과 같이,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이후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외치며 서구문물을 대폭 받아들이기 위해 번역국을 설립하였다는 일본의 사례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발견하는 대중교통, 관광안내소 안내표지판의 번역 오류, 영화 장면에서의 번역오류를 발견하며 느끼는 안타까움은 비단 필자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한반도 100년에 활력을 보태기 위해, 동북아의 중심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제 ‘국립지역원’설립을 제안한다.

박지웅/ 경제부총리 정책보좌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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