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둘러싼 환경변화는 대선 막바지들어 야당을 중심으로 반 페미니즘적 말과 행동이 서슴없이 제기되고 있는게 가장 크다. 노혜경 필자는 이런 일련의 백래시 현상은 페미니즘이 그만큼 앞으로 전진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고민, 연민, 섭섭함은 보수야당의 그런 도발에 민주당이 나이스하게 반대각을 못 세우고 있는데 있는 것같다. 얄밉기는 매 한가지인 것이다.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는 현재 젊은 여성층, 호남, 친문 등 3대 우호그룹에서 가능한 만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게 중평인데, 그 점에서 필자의 글은 상당수 젊은 여성 유권자들이 선택을 미루고 있는 복잡다단한 심리를 잘 담고 있는 듯하다. 이런 이유로 이 글에는 피렌체의 식탁 칼럼으로서는 드물게 대안이 생략돼 있다. [편집자 주]

✔ 그 흔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도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는데 페미니즘이란 얼마나 먼 길인가

✔전무후무의 표를 위해 퇴보와 분열의 조장하는 우리의 정치 

✔고약한 존재로 취급 받았지만 사회를 나은 쪽으로 발전시켜 온 페미니스트들에게 경의를

✔분열 대신 돕고 보살피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 부디 방해만 말아달라

사진:셔터스톡

결론부터 말한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던 간에 여기서 그냥 뛰자!

기분 나쁜 동시에 기분 나쁘게 만드는 글을 쓰게 생겼다. 기분 나쁘게 만들지 않으면 실패한 글일 것이고 기분이 나쁘면 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페미니즘의 딜레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페미니즘 또는 페미니스트 이야기를 주구장창 할 것이고, 고립과 불통을 두려워하면서도 페미니즘을 계속 설명하고 주장하게 될 것 같다. 내가 아는 한 세상을 더 낫게 변화시켜낼 거의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결론에 할 이야기를 글머리에 쓰는 이유는 심리적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요즘 시대에 페미도 아니면 뭐 해?]라는 매우 도발적인 제목의 책도 쓴 적이 있지만, 나는 페미니즘이 소위 말하는 ‘이기는 싸움’의 즉각적인 도구가 아닌 것은 잘 알고 있다. 반드시 쪽수가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성찰하기를 요구한다. 성찰하지 않고 주장만 하는 페미니즘이 만일 있다면, 그것을 페미니즘이라 부른다 해도 쉽게 격파되고 심지어 위험하지도 않다. 

페미니즘만이랴, 많은 페미 혐오자들이 말하기를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라야 한단다. 이 와중에 깨달음의 역사를 거론하고 싶진 않지만, 이들은 바로 그 “휴먼+이즘”의 휴먼이 남성만을 지정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페미니즘이 발생한 것이라는 실체적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휴머니즘이 모든 인간--남녀노소 불문 성소수자든 연변 조선족이든 장애인이든 전라도 사람이든 불법 이주한 간병인이든 재벌 3세든 북한,중국,일본인이든--을 포괄하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지만, 그 휴머니즘조차도 아직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 민주주의는 또 어떤가. 이름을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민주주의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의 증거라 하겠다. 그러니 페미니즘이 주류인 정치가 가능하겠는가. 

나는 페미니즘을 기본적으로 정치사상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이 글도 나의 정치적 실천을 위한 글이 되어야 마땅하다. 페미니즘은 이긴다고 결론을 내고 싶지만 소망적 사고라는 비아냥을 듣기 딱 좋다. 그러면 뭐 어때. 내가 배우고 깨우친 페미니즘의 방식에 의하면, 페미니즘은 그 무엇보다 일단 나라는 현장에서 시작하는 말하기/글쓰기/일하기이다. 내가 전향하지 않는 한 어떻게 패배라는 걸 하겠는가.(죽음은 끝이 아니다) 오늘 못 이기면 내일 이기면 되지.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페미가 이긴다는 건 휴머니즘이 완성되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며 ‘나’라는 개인이 반짝거리면서 ‘너’라는 개인과 ‘우리’라는 공동체와 연대를 하게 되는 일인데 당연히 이겨야지. 현실이 아무리 험하든지 간에, 힉 로두스 힉 살투스(Hic Rhodus, hic saltus! 여기서 그냥 뛰자) 아니겠는가. 

이렇게 결론을 미리 써버린 글을 나는 1인칭으로 쓴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나는 3인칭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현상을 설명하고 진단하는 것은 페미니스트의 일이라기보단 기자나 학자의 일이고, 페미는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변화시킬까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즉, 내 일이라야 하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적 글쓰기, 좀 매력 있지 않은가?

백래시라니요? 늘 그랬습니다

어쨌거나 지금의 이야기를 하자.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가리켜 언론은 페미니즘 백래시라고 부른다. 백래시란,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이후 한동안 시민사회 주류 담론처럼 여겨지던 페미니즘이 반격을 당하고 있다는 의미다. 페미니즘은 지난 몇 년간 범죄 수준의 공격에 시달려왔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이 득세하는 듯하던 시절에도, 불법 동영상을 유포시켜 돈을 벌던 회사의 사장 양진호는 남성 직원을 향한 갑질과 폭력으로 처벌 받았을지언정 웹하드에 올린 범죄물 때문에 처벌받지는 않았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장학썬(버닝썬, 김학의, 장자연) 사건은 얼마 전 김학의가 무죄 판결을 받으며 정의로운 해결을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N번방으로 통칭되는 잔혹한 성착취영상 제조 유포자들은 일부가 처벌을 받아도 자꾸만 생겨나고, 심지어 초등학생 정도 연령대의 남자아이들마저 여교사를 성희롱을 하기도 한다. 페미라고 낙인이 찍히면 직장에서 쫓겨나는 여성은 있는데, 국보급 양궁선수인 안산을 향해 숏 커트 헤어 때문에 페미라 공격하며 메달 반납하라는 억지 주장하는 남성을 직장에서 쫓아내지는 않는다. 메갈리아의 손가락과 비슷하다고 몰려가서 난리를 치면 기업들이 심지어 국방부까지 줄줄이 싹싹 빌고 나서는 나라다. 남편에 의해, 교제하던 남자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뻔한 여성은 또 얼마나 많은가. 과연 백래시가 거세다고 말할 만한가? 이런 것이 과연 주류가 된 페미니즘에 반격을 하는 안티들의 자세인가? 아니면 여전한 여성잔혹사의 진행인가?

내 기억에 한국사회는 여성을 억압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고 생각하는 나라다. 전근대 가부장제의 위력은 근대 가부장제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여성들은 해방 공간에서도 여성해방을 부르짖었지만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보는 듯하자마자 “양처가 되어야 한다 ” “내조를 잘 해야 한다”는 식의 논조를 언론 지면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 페미니스트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과 대동소이한 비난을 일제시기 신여성들, 심지어 여학생들도 받았으며, 여성해방과 양성평등을 부르짖는 여성들을 향한 폭력이 그친 적은 없었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1977년의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다. 여성 노조지부장을 배척하기 위한 갖은 노력이 소용없게 되자 회사와 손을 잡은 남성 노조원들이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끼얹은 그 사건은 서늘함 없이 기억하기 힘들다. 극히 최근으로 돌아와서 아직도 진행 중인 고속도로 요금소 징수원들의 투쟁을 대하는 정부와 보수수구언론들의 자세를 보면 알듯 세상은 정말 아주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백래시라는 용어를 널리 퍼뜨린 미국의 수잔 팔루디는 말한다. 반격은 여성들이 완전한 평등을 달성했을 때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커졌을 터져 나왔다. 여성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여성들을 멈춰 세우는 선제공격이다.”(백래시 45) 

다만 현재의 현상이 과거의 억압과 다른 점이라면 제도는 발전했고, 제도의 발전을 문화가 못 따라가고 있는 상태에서 혐오와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오랜 가부장제의 억압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여성들의 무기였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도, 백래시라는 용어도 최소한 미디어가 대중을 담론의 장에 등장시킨 이후의 용어다. 즉 문화투쟁적 용어다(물론 문화투쟁은 일정수준 무르익으면 제도적 변화를 수반한다. 현재는 그것이 차별금지법 제정 투쟁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전선은 광범위해지고 트위터 등의 협소한 공간, 일베와 워마드의 대리전쟁이던 것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꼴로 정당들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전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놀랍게 생각해야 할 것은, 백래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페미니스트들의 활약이 끊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백래시라고 부르는 언론의 명명이다. 백래시라는 용어 자체는 매우 상징적인 용어다. 페미니즘을 향한 공격에 백래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래시란 원래 공학 용어로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갈 때 전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뒷공간을 말한다. 너무 꽉 물려 있으면 움직일 수가 없기 떄문에 어느 정도 뒤를 치고 갈 수 있게 톱니바퀴를 설계를 한단다. 페미니즘 백래시란, 유비적으로 풀이하면 페미니즘이 전진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필요한 반격이라는 뜻이 된다. 사회를 사람의 몸으로 비유할 때 페미니즘이라는 치료제가 사회의 병든 곳을 치료하려면 아픈 데가 먼저 드러나야 한다. 언론이 이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이 전진하는 중이라는 뜻이다. 

이름부터 똑바로 부르자, 페미사이드

이 문제를 좀 더 살펴보자. 살해당하는 여성들의 문제다. 국민의힘의 이준석 대표가 “여자라서 죽었다”라는 말이 페미들의 모함이라고 주장하면서 교제 살인이 아니라 그냥 살인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올려 장혜영 의원과 논쟁이 붙은 적이 있다. 데이터를 살펴보면 교제하던 상대를 죽인 2016년부터 2019년까지의 사건 110건 중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은 108건이다. 어떤 이는 남자가 훨씬 많이 살해당한다고 주장하더라만, 가치 없는 말장난이다. 그 남자들을 살해한 것도 대부분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살해당한 남성의 수보다 그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이에 대한 이준석 대표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는 살인 자체에는 경각심을 지녀야 하지만 특정 집단이 가해자가 많다는 식의 분석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길 수 있어 위험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여성이 남성에게 살해당한다고 페미니스트들이 말하지만 않으면 여성살해는 없다는 말이 된다. 잠재적 가해자론에 대해 남성들이 지닌 반감의 표출이다. 특히 젊을수록 이런 반감은 강하다. “남자는 늑대” “집 밖에 나가면 무조건 남자를 조심하라” “여자가 맞아죽으려고 말대꾸냐” 는 식의 훈계와 협박을 줄곧 듣고 자란 나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반응이다. 늑대보다는 잠재적 가해자가 훨씬 부드럽지 않나?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은 남성이 언제라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여성의 불안을 드러낸 말이지만, 이에 대해 반발하는 남성들을 볼 때 나는 전도된 기시감을 느낀다. 여성들은 단 한 명의 잘못으로도 “여자가” “여자들이” 라는 비난을 당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소율 0.78%인 성범죄 무고죄를 거론하면서 성범죄를 고발하는 여성을 꽃뱀으로 몰아가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소수의 문제를 다수가 연대책임지는 성차별적 연좌제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알고 있는 남성들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용어에서 발생하지 않은 일에의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교제살인이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말이 있다. 바로 ‘페미사이드’다. 여성살해라고 고쳐 부를 수 있는 이 현상을 최근 한겨레21에서 분석하여 정말 이유없이, 굳이 따지자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는 여성들이 있음을 드러냈다. 강남역살인사건을 “여자라서 죽었다”고 외치며 여성들이 집결한 뒤 5년 반이나 지난 뒤에야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살인이 이름을 얻었다.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 등등의 행위 자체의 이름으로 불리던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깊은 원인이 비로소 이름을 얻은 것이다. 물론 여성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용어가 시민권을 획득한 것이 한국사회에서는 최근의 일이다. 페미사이드라는 말은 수틀리면 언제라도 여성을 죽이려 드는 남성들이 존재가 드러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회가 그것을 용인해 왔음도 드러났다는 말이다. “맞을 만하니까 맞았지”라고 가정폭력을 미화하던 시대가 그리 오래지 않다. 살인은 나쁜 것이라는 말이 이준석 대표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는 있다. 여자라서 남자가 죽일 수 있다는 인식, 내 마누라 내가 죽이는데, 내 여자 안되느니 영 죽여버리고 말지, 등등의 왜곡된 인식들이 모이고 모이면 페미사이드라는 이름을 얻는다. 페미사이드뿐이 아니다. “안 돼요 돼요 돼요…. ”라는 모함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말로 간결하게 거부할 수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외부로 밀려나던 여성노동을 성별분업적 성차별이라고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바로 이렇게, 지금껏 이름 붙일 수 없었던 일에 이름을 붙여준다. 이름을 붙일 때마다 엄청난 저항을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이름을 붙인 결과, 과거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일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을 덮고 있던 어두운 장막을 조금씩 걷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알게 된 뒤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언어화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준석을 비롯한 남성들이 공격적이고 혐오적인 발화로만 문제를 제기하고 표를 모으는 이유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다기보다 이미 페미니즘에 의해 그 실체가 드러난 낡은 말만을 지녔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의 다음 단계인 한, 페미니즘은 여성들뿐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안티페미 하느라 몸과 마음을 낭비하지 말고 생각을 바꿔보자. 현대를 살아가는 가장 발전된 사유체계가 페미니즘이다.

지체된 발전

이제 현안을 이야기할 차례다. 이준석과 윤석열이 안티페미 전술을 가지고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한 마디로 민주당의 잘못이다. 4.7 보궐선거의 득표율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민주당의 남성들이 보여준 착각 또는 착시가 일차적 원인이다. 민주당은 원래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던 소위 ‘이대남’의 지지가 아주 약간(그 전 선거에 비해 7%정도) 줄어든 것에 질겁을 하고 놀랐다. 서울시장 선거의 패배를 불러온 것은 사실 20대와 40대 여성들의(무려 20%) 이탈이다. 하지만 왜 민주당 사람들의 눈에는 이 데이터가 보이지 않았을까. ‘이대남’은 뜻하지 않게 블루 오션이 되어버렸다. 

그다지 실체가 없지만 이대남이 있다 치고, 대부분의 언론은 이대남들이 민주당을 페미니스트 정당이라 생각한다는 데이터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 데이터는 착각에 기반한 것이다. 반페미니즘적 주장을 하는 SNS상의 담론을 보아도 이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과 다른 언어다. 이들은 페미니즘을 여성우월주의라고 본다고 한다. 또는 남성혐오 사상이라고 본다고도 한다. 물론 둘다 오류다. 성장과정에서 늘 여성들에게 밀리기만 한 경험에 따른 생각이라고들 해석하지만, 취업을 하고 몇 달만 직장생활을 해보아도 사라지게 되어 있는 생각이다. 이대남의 불만과 불안의 본질이 여성과 페미니즘 그 자체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 불평등과 기회부족에서 오는 것이라는 이재명 후보의 진단은 일정 부분 옳다. 다만 이는 젠더갈등이라기 보다는 여성과 페미를 공격하여 이대남의 불안을 잠시 달래려는 회피전략이다. 아주 좋게 말해도 이대남을 이대녀 때리기에 몰입시켜 정치권의 정치적 무능을 덮으려는 보수정치권의 책략이다. 일단 페미 때리기에 공동전선을 펴는 한 현재의 불안상황을 만들어낸 공동책임자인 국민의힘의 과거는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위 이대남들이 주장하듯 민주당이 페미 정당인가. 문재인 정부가 페미니스트들의 편인가. ‘이대녀’가 있다 치고 이 여성들이 모두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스트라면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나도 단문형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페미라니 페미를 뭘로 보고.” “이대녀가 모두 페미라니 아마 백만개의 페미니즘인가보다.” 이는 전적으로 민주당의 안이함이 빚은 참극이다. 시대를 앞서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진보적 사상과 의제들에 대한 감수성과 지식은 길러야 했다. 관성대로 세상과 유권자를 바라본 결과다. 이런 태도가 지속된다면 끔찍할 것 같다.

여성가족부 해체라는 헛소동

이 와중에 일어난, 아마도 윤석열과 이준석에게는 단지 표를 모으려는 당근 던지기 장난에 가까울 것이지만 “여성가족부 해체”라는 내용 없는 약속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윤석열이 정말로 대통령이 된다면 여성가족부를 이름을 바꾸고 업무재배치를 할 수는 있을지언정 “해체”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여성가족부야말로 사회의 기초단위를 가족으로 삼은 근대적 가부장제의 마지막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정상 가족을 넘어서는 어떤 가족도 포괄하지 못하는 보수적 가족개념을 넘어서고자 여성가족부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번번이 국회 문턱에서 좌절했다. 국민의힘은 방해하고 민주당은 돕지 않는다. 과거적 가족이미지를 변화시킬 의지가 없는 정당이 여성가족부를 해체하다니 가능한 이야기인가. 나는 물론 발전적으로 가족개념을 확장하고 1인 가구와 생활동반자, 가정 바깥의 청소년와 아동 등을 보살피는 부처와 성평등부와 성폭력근절부 등으로 발전적 해체를 하면 좋겠다는 꿈은 꾼다. 

이준석과 이대남들이 여성가족부를 페미니즘의 수호자처럼 여기는 것은 이름에 여성이 들어가 있어서말고는 별 근거가 없다. 여성가족부는 예산도 국가 전체 예산의 0.24 % 정도밖에 안되는데 해야 하는 일은 태산처럼 많은 전형적 머슴 부처다. 저출생 고령화 사회로 이미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여성가족부가 맡고 있는 역할은, 돌봄이 필요한 모든 부문을 여성이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낡은 사고방식의 연장일 뿐, 무슨 페미니즘 하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일곱자 헛소동을 통해 표를 얻어갔다고 하는 기사를 보면 제대로 된 분석인가 소망적 사고인가 헷갈릴 때가 있다. 만일 사실이라면, 국가공동체야 망하든 말든 일단 빈대벼룩 다 타게 초가집에 불을 지르자는 심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백래시는, 다른 말로 하면 혐오와 차별을 통해 정치적 이득을 얻어가겠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을 한사코 남성혐오라 주장하는 것도 실제로 혐오에 상처를 입어서라기보다는 남성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사고에서 오는 것이다. 여성들은 개인 남성을 혐오할 수 있고 나도 특정 누군가는 정말 혐오스럽다. 하지만 말로 싫다고 하는 수준을 넘어 생명과 생존을 위협하고 집에 찾아가고 조리돌림을 하고 성폭력에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의 반대라서다. 그러나 남성들은 어떨까. 이미 유구한 성차별적 문화(여성혐오 문화)에 푹 젖어 성장한 남성이 그것을 지적하고 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페미니즘을 거부한다는 것은 혐오에 발을 들이밀겠다는 것이다. 여성혐오, 여성차별, 나아가 소수자 차별, 이주민 차별 등 사회를 분열시키는 데서 이익을 얻는 일에 경각심이 없어진다. 그 끔찍한 사례를 우리는 최근 윤석열 후보의 선제타격론, 멸콩 이벤트, 중국 때리기, 외국인들의 의료보험 논란 등에서 본다. 정치가 이토록 노골적으로 공동체를 퇴보하고 분열시키며 표를 달라고 한 적이 있을까. 유권자가 세세한 실체를 잘 모른다는 것을 십분 활용한 악행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을 페미니스트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해치우다니. 백두산에 핵폭탄 던지는 것보다 고약하다.

진짜 결론

내가 시사저널에 [시시한 페미니즘]을 연재하던 무렵, 댓글이 거의 안 달렸다. 안심도 되면서 동시에 걱정스럽던 모순적 감정이 극에 달하는 중에, 담당기자가 “네이버 댓글을 안 보시는군요.”라고 알려주었다. 들어가서 보니 거기는 신세계였다.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은 남성들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필자인 줄을 몰랐다. 몇일 동안 댓글을 샅샅이 훑어본 끝에 내린 결론은 “그냥 페미인 것이 기분 나쁜 것”이고 나머지는 기분 나쁨을 말하기 위해 동원된 그때그때의 사례들이라는 것이었다.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한다면, 페미니즘 또는 내가 쓰는 글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기분 나쁜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니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페미니스트(줄여서 페미)라는 이름을 나는 존경의 염을 담지 않고서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페미니스트들을 알게 된 20대 이후로 페미란 각오와 행동을 통해 차별과 싸우는 사람이었다. 물론 나도 쓸데없는 분별은 했다. 페미니즘 이론에 밝은 사람과 페미는 다르다라든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와 계급투쟁하는 페미니스트가 어떻게 같으냐라든가. 그런 것은 여성들끼리 모여서 수다를 떨 때의 이야기이고, 나는 현실사회에 균열을 가져오고 문제를 드러내며 궁극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좋아했다. 청계피복노조를 만든 여성들부터 똥물 뒤집어써가며 노조 만든 동일방직 여성들, 유신독재의 종말을 가져온 YH 여성들, 가부장제의 대표적 유습인 호주제를 폐지하는 데 앞장선 여성들, 미투에 나선 여성들 등, 이렇게 열거하다간 밤을 샐지도 모를 그 긴 여권운동, 여성해방운동, 반성폭력운동, 성할당제 운동 등등의 역사는 인류를 조금이라도 낫게 만든 행동의 역사다. 그 모든 순간에 그 일을 하는 여성들은 시끄러운 암탉이나 골치 아픈 갈등유발자, 그보다 더 고약한 어떤 존재들로 취급을 당했지만, 그래도 사회를 살만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들이지 페미를 욕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는 일개 페미니스트로서 존경받고 싶다거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없다. 부디 방해만 하지 말라. 약자와 소수자를 돕는 사상이 페미니즘이라고 누군가가 내게 말했을 때 “어우 그것만은 아니죠”라고 대꾸를 하기는 했지만, 페미니즘이 아니면 어떤 사유가 서로 돕고 보살피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사진:셔터스톡


글쓴이 노혜경은부산에서 나고 자라 부산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다. 1991년 시인으로 등단했다. 2003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2004~2005년 국정홍보 비서관으로 일했고, 2005~2006년 노사모 대표로 활동했다. 2018년에서 2020년 사이 시사저널에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을 150회 연재한 경력 덕에 편집자들 사이에서 '페미니즘 필자'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인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