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을 보며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청년을 보아야 한다. 청년들의 눈에 페미니즘적 가치, 친중 친북적 태도, 민주노총적 노동 운동은 바로 기득권의 다른 이름들이다. 청년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이런 아재적 기득권에서 벗어난 새로운 버전의 민주당을 보여주어야 한다.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현명하다. 민주당이 상대방의 약점에 안도하며 날개라도 단 듯 착각하다가는 어느새 추락하는 수가 있다. 그리고 민주당은 비슷한 추락을 4.7 보궐 선거때 이미 한 번 겪었다. [편집자 주]

11월 30일자 하헌기 칼럼 '식사를 합시다', 청년과의 한달 대화록 다시 보기

✔민주당은 4.7보궐선거 때 빠졌던 함정에 다시 빠져있다

✔유권자들이 1~2주 만에 윤석열 후보에 관한 판단을 바꾸게 된 현상의 본질

✔'이대남’은 왜 여성가족부 폐지를 기득권 타파의 상징으로 여길까?

✔일부 유권자들이 ‘내 삶을 괴롭히는 기득권 혁파’는 이재명이 아니라 윤석열이 하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사진:셔터스톡

4.7보궐선거의 아픈 기억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오세훈 시장이 당선됐다. 10년 만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오 시장은 지난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패하고 서울시장에서 사퇴한 이후 번번이 정치권 복귀에 실패했다. 2019년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는 황교안 대표에게 패했고, 뒤이어 21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고민정 의원에게 패했다. 사실상 보수진영에서도 지역구에서도 유권자들은 오세훈을 선택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오세훈 시장의 정치적 역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유권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4.7 보궐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다른 선택을 했다. 자유한국당의 전당대회와 21대 총선 이후 오세훈 시장에게 특별한 변화나 쇄신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유권자들이 오세훈 시장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판단을 바꾼 것일까? 그럴만한 특별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따라서 유권자들이 짧은 시간 내에 갑자기 오세훈 시장에 대한 판단을 바꿨다기보다는, 민주당의 종아리를 거세게 때릴 회초리로서 오세훈 시장을 택한 것이라 추정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때 유권자들은 오세훈이 ‘누구인지 알면서’ 지지했다

당시 적잖은 사람들이 민주당의 선거 전략을 비판했다. 당헌개정, 부동산 사태, ‘내로남불’ 논란 등 민주당에 분노하여 회초리를 치려는 유권자에게 오히려 ‘그 회초리의 상태가 어떤지 몰라서 이러느냐?’고 적반하장 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선거전 내내 오세훈 시장에 대한 네거티브 선거운동만 이어졌다. 물론 통할 리가 없었다. 앞서 말한 대로, 유권자들은 민주당이 열심히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오세훈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알 만큼 알고 판단을 얼추 끝낸 상태였다. 그러니 지난 10년 동안 유권자가 그를 정치권에 다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사태를 요약하자면, 민주당은 유권자가 묻는 말에 동문서답했다. 유권자가 민주당에 물었던 질문은 ‘오세훈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판단 근거’가 아니라 ‘민주당 너희가 얼마나 잘못을 한 지 아느냐’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전자에 대해서만 답을 했다. 유권자 입장에선 ‘생태탕’이나 ‘페라가모’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세훈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고, 민주당이 스스로 잘못했는지 알고 있느냐는 게 문제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오세훈의 실체에 대해 알려드리겠다며 열심히 동문서답할수록 유권자들이 묻는 말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는 점만 선명해져 갔다. 그토록 민심을 모르는 정치 세력은 그 무지에 마땅한 심판을 받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맞이한 4.7 보궐선거의 결과는 사람들이 아는 대로다.

윤후보의 자질 미달은 충분히 증명되었으나

최근 대선을 앞두고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정권교체 여론이 상당히 높은 상황임에도 유권자들은 윤석열 후보를 대통령의 자질을 갖춘 이로 인정하지는 못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보수진영 인사인 정규재 주필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선 레이스가 이어지면서 유권자들에게 ‘윤석열 후보의 밑천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경선 기간 손바닥 왕(王)자 등 주술 논란, 1일 多 망언, 그리고 ‘120시간 노동’, ‘아프리카 손발 노동’, ‘취업 앱’ 발언 등에서 드러난 세상 물정에 대한 몰이해와 정책적 비전의 부재, 잡탕밥식 인재영입, 윤핵관 논란,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 김건희 씨의 허위이력 문제에 대한 ‘내로남불’식 태도 등등. 이 모든 논란이 이어지며 유권자들은 윤석열 후보의 자질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보수 지지층들 사이에서도 그런 의식이 퍼져나갔다. 이는 정권교체 열망이 높은 2030세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다수는 심지어 ‘후보교체론’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 하락으로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열거한 문제들은 대통령의 자질로선 치명적인 사안들이 맞다. 이미 최순실 사태를 겪은 국민들에게 대선주자의 주술 논란은 섬찟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김건희 씨 의혹은 ‘공정과 상식’을 외치며 조국 장관 수사와 검찰개혁 저항을 통해 정치적 체급을 불려온 윤석열 후보의 정치 참여 명분 자체를 뒤흔든다. 윤 후보가 처와 장모 등 본인의 가족을 수사하지 않는 이상 조국 전 장관을 향하던 ‘내로남불’이란 비판이 그에게도 해당하게 됐기 때문이다.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듯한 정책적 소양이나 망언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야 국가 비전을 설계할 리더십을 보일 수가 없다.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은 향후 국정운영 상황을 가늠하게 하는 시뮬레이션처럼 비쳤다. 국민의힘이 집권하더라도 여소야대 국면이 펼쳐지기에 법안 하나를 통과시키고자 하더라도 국회에서의 여야 협의가 필수이다. 그런데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을 보면 윤석열 후보가 집권했을 시엔 ‘당청 관계’ 하나 제대로 풀지 못할 것이란 게 너무나 명백했다.

유권자들은 윤석열이 ‘누구인지 알면서’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최근 빠른 속도로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회복되고 있다. 갑자기 유권자들이 윤석열 후보에 대한 판단을 바꿨을까? 윤석열 후보가 순식간에 쇄신을 통해 대통령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을까? 아니면 불과 한두 주 전까지만 알던 윤석열 후보의 자질에 대한 정보를 유권자들이 갑자기 집단 망각이라도 하게 되었을까? 모두 다 비합리적인 설명이다.

최근 일련의 흐름은 4.7 보궐선거 당시와 닮아있다. 특히 김건희 씨의 녹취 파일 공개와 윤석열 선대위의 도사 결합 논란이 제기된 이후 더 그렇다. 윤 후보가 경선 당시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TV토론에 나왔을 무렵만 해도, 거의 모든 유권자가 그 모습에 경악했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최근의 무속 논란에는 민주당 지지층만 주로 반응할 뿐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시큰둥하다. 그것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오세훈 시장의 문제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했듯, 윤석열 후보의 무속 논란도 마찬가지 구조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후보와 김건희 씨에 대한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알리면 유권자들이 판단을 바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역시 4.7 보궐선거 당시 민주당이 생태탕 전술을 펼쳤던 함정에 빠졌던 것과 닮았다. 유권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혐오 정서만으로 윤석열 지지가 설명이 될까?

그렇다면 이번에도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여권이 던져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김건희 씨에 대한 의혹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상당수 유권자는 급격하게 윤석열 후보에 관한 판단을 바꾸기 시작했는가?”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회복되고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평가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선대위가 해체되고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이 봉합된 이후이다. 이를 통해 잡탕밥 영입 인사들을 일거에 쓸어냈고, 내홍도 수습했다. 망언과 실언 대신 후보의 SNS에 올리는 일곱 자 문구가 더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여성가족부 폐지’, ‘주적은 북한’ 같은 짤막한 구호는 그간 윤 후보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망언과 실언 만큼이나 자극적이고 논란을 일으키게 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망언들과 다른 점이라면 여기에 열광하는 층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치집단이라면 이 현상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해야 한다. 이를 그저 ‘갈등을 유발하는 정치’, ‘분열의 정치’, ‘혐오의 정치’ 등으로 규탄하는 건 아무리 잘 봐줘야 비평가들의 영역이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어야 할 정치집단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정치집단은 왜 저런 전술에 유권자들의 마음이 움직였는지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진보진영 일각이 착각하는 대로 이 현상의 원인이 실제로 다수의 청년층이 혐오 정서에 젖었기 때문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 공동체에 미래는 없다. 미래 세대가 이미 분열과 혐오를 내면화했다면 공동체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만에 하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 세력이라면 자기 동네 우물에 침을 뱉을 게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비평가들 역시 그런 고민을 해야 한다.

민주당과 진보진영은 ‘윤석열식 기득권 타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

나는 젊은 층에 대해 그런 방식으로 절망하고 있지는 않고, 이 현상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상당수 청년이 윤석열의 한 줄 구호가 ‘기득권 타파’에 해당한다고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여성가족부 폐지’란 구호를 생각해보자. 그간 2030 남성들 중 상당수는 페미니즘 조류를 거대한 헤게모니라고 여겨왔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페미니즘이라는 미명하에 문화 콘텐츠를 납득하기 어려운 기준과 잣대로 검열하거나 일개인에 대해 부당한 공격을 퍼붓는 경우가 분명히 있었다. 숙대에서 트랜스젠더를 쫓아낸 사건은 명백한 폭력이며 페미니스트 교수가 함량 미달인 논문을 통해 유튜버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해 반론을 하거나 비판을 하면 진보 담론은 그걸 ‘반 페미니스트’ 혹은 ‘ 여성 혐오자’라고 규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숙대에서 트렌스젠더를 쫓아낸 이들을 ‘혐오 세력’이라고 기술하여 그들이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그러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가렸으며, 페미니스트 교수와 유튜버의 사건에선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상당수의 2030 남성들은 ‘페미니즘’이 기득권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성’이 기득권이라는 게 아니다. ‘페미니즘 조류’가 무소불위의 기득권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들이 사회 일각에 있었다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의 ‘여성가족부 폐지’는 그렇기에 그저 젠더 이슈이기만 한 게 아니라 2030 남성들의 상당수와 2030 여성 일각에게도 부당한 기득권을 해체하겠다는 선언처럼 여겨지는 행위다.

‘주적은 북한’이라거나 ‘멸공’과 같은 발언도 마찬가지다. 이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해서 우리 젊은이들이 평화를 사랑하지 않는 호전광들이라 착각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2018년 남북정상회담 국면에서 2030세대의 국정 지지율은 80%를 넘어섰다. 윤석열 후보 발언의 부적절함과는 별개로, 상당수 젊은 층은 북한이나 중국이 우리에게 가한 부당한 압력과 권리침해에 대해 우리 정부가 할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제 많은 젊은이는 이런 모습을 ‘운동권 인사’들의 속성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미 기득권이 된 운동권이 전문성도 없으면서 부동산 정책을 도덕주의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자기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북한과 중국에는 할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민주당에 대해 ‘원래 그 정도 깜냥밖에 안 되는 정당’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이해의 맥락에선 윤석열의 저 발언도 ‘기득권을 타파하고 정상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에 대한 문제 제기도 마찬가지이다. 청년층은 기득권이 되어버린 대기업 정규직 위주의 노조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다가 우리에게 피해를 준다 생각하고 있으며, 이 코로나 19 시국에서도 부득불 시위를 나오니 같은 운동권 세력인 집권 여당의 비호를 받으며 법 위에 서 있는 존재라고 혐오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를 바로잡겠다는 견해 표명도 일부 청년층에게는 기득권의 타파였다.

이런 상황을 그저 ‘분열’과 ‘갈등’을 이용하는 정치라고만 납작하게 규정하고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향해 ‘분열의 정치를 멈추라’며 도덕주의적으로만 비판하면 유권자들은 민주당을 향해 ‘기득권을 수호하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과적으로 청년층의 정서를 전혀 읽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바뀐 시대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쪽이 바로 민주당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혐오’와 ‘분열’을 비난하지 말고, ‘기득권 타파’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니 민주당은 그들이 얼마나 ‘얼치기 운동권’처럼 보이는지, 그리고 그 ‘운동권식 정서’란 것이 지금의 청년들에게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성찰한다고 끝도 아니지만, 일단 성찰을 해야 변화의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이대생들이 시위할 때 민중가요 대신 대중가요를 부르고, 운동권들의 결합을 강하게 거부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운동권 비토 정서’에는 딱히 성별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민주당이 시민들을 향해 던져야 할 질문이 ‘윤석열이 얼마나 나쁜 정치인인지 아는가?’ 혹은 ‘김건희 씨가 얼마나 의혹이 많은 인물인가?’이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 만큼 안다. 그래서 한동안은 지지율에 반영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도 윤석열 후보에게서 이탈했던 지지율이 대체로 민주당으로 오진 않고 안철수 후보에게로 갔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에게 문제가 많다는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상당수 유권자가 다시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윤석열은 우리 시대의 어떤 기득권을 어떻게 혁파하고 어떤 집단이 고통받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그저 혐오와 분열이라고만 규정하는 다른 정치진영은 그렇다면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는 어떤 기득권 집단을 혁파하고 그 위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그 지점에서 경쟁하기를 포기하고 상대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와 ‘소확행’ 공약을 열거하는 것으로 대처가 될까?

중요한 건 이준석 대표가 말하는 세대포위론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민주당이 지금 4.7 보궐선거 때 빠졌던 함정과 동일한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종시 깨닫지 못한다면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도 무난하게 회초리를 얻어 맞으며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다.

상대에 대한 폄하를 멈추고 이재명식 기득권 해체의 비전을 제시하라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논의한 것에 비추어, 큰 틀에서 두 가지 내지 세 가지 제언을 할 수 있다. 첫째, ‘윤석열식 기득권 해체’에 대한 폄하를 멈추라는 것이다. 그들의 선거운동 방식을 ‘혐오’라고 부르거나, 제1야당 대표를 ‘나치’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의 선거 캠페인에 전혀 생채기를 내지 못하고 국민의힘과 지지층의 심리적 결합을 강화시킬 뿐이다. 비근한 사례로 2016년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은 트럼프의 선거운동 방식이 공화국의 가치에 어긋난다고 우아하게 비난했지만 그 선거 결과가 어땠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둘째, ‘소확행’이나 ‘네거티브’ 같은 콘텐츠 전에만 얽매이지 말고 유권자들에게 납득 가능한 국정운영의 큰 비전과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식 기득권 해체’의 내용은 (비평가들의 관점에서는 퇴행적으로나마) 존재하는데 ‘이재명식 기득권 해체’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권자들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우리 안의 기득권을 포함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구조적인 문제는 아직도 산적해 있지 않은가?

셋째, 앞의 문제와 연결되기도 하고 별도이기도 한 것인데, 유권자들이 시효가 지났다 여기거나 식상하고 진부하다 여기는 ‘기득권 해체’ 구도에는 더 이상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토착왜구’ 같은 원색적인 용어로 선거를 ‘한일전’으로 만드는 시도라든가,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투기 세력’이란 이름의 기득권 집단의 탓으로 돌리는 방식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프레임은 일견 ‘이재명식 기득권 해체’의 내용을 구성한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재인 정부의 정치나 정책이 예상과 다른 효과를 낸 이유에 대한 알리바이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남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민주당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제시해야 한다.

이제와 정말로 제시할 게 없다면, 유권자에게 표를 달라고 요구하기는 민망하지 않겠는가. 본인들 생각에 상대방의 수준이 한심하다는 점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말이다. 시험으로 치면 본인은 ‘문제가 요구하는 답안’을 작성하지도 않은 주제에, 그러한 답안을 거칠게라도 작성한 상대편의 답안이 한심하다면서 그에게 점수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면 보는 사람들이 민망하지 않겠는가. 지금 민주당이 그 민망한 길로 나가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다.


글쓴이 하헌기는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 국회에서 일하다 양극화된 정치적 소통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기 위해 연구소를 만들었다. 뉴미디어 운영과 기성 방송 매체 출연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매주 <시사IN>에 칼럼을 쓰고 있으며, 공저로 <추월의 시대>(메디치미디어, 2021)가 있다.